요한계시록 2:8-10 말씀에 충성한 하이클래스가 되자.
1. 문제제기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 이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충성일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충성이라고 생각하는가? 특히 교회에서의 충성은 무엇일까? 교회에서 열심히 식당과 주차장에서 봉사하고, 화장실 청소와 차량 봉사?직분자 세미나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것이 충성이고, 임명장을 수여할 때도 충성이 인용된다. 교회를 위해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목회자들은 강조한다. 그러면 성도들은 죽을 기세로 충성을 각오한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과연 이런 충성이 본문의 말씀과 일치된 충성일까?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충성은 무엇일까?
2. 해결, 복음제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내부적으로 율법을 들이대면서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유대인들로 인해 무거운 물건 밑에서 눌려 부서지는 것 같은 환란을 겪어야 했고, 외부적으로는 로마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마 정부로부터 경제적 제재를 받아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로마정부의 지시를 받아 고통을 주는 자들이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다. 사탄의 회당이었던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서머나 교회를 비방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따라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안팎으로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10).
이와 비슷한 경험을 저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함께 모여 끊임없이 불평하고 거부하고 협조하지 않아서 너무 괴로웠다.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뭐하고 있지? 나는 목회자가 맞나? 목회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나 말고 유능한 다른 목회자가 와야 되는 거 아닐까?’ 외부적으로는 기도와 음악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담배를 피면서 들어와 악보대를 뒤집고, 이것도 모자라 신고를 하여 경찰들이 새벽에 기도하고 있을 때 들이닥치고, 주변 상가와 상가 주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불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코로나와 연관하여 내부와 외부 고발자들로 인해 공무원들과 경찰들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이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불편한지 모른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짧은 기간]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는 주님의 통보였다. 사탄의 회당인 유대인[마귀] 교회의 누구를 옥에 던지겠는가?교회의 핵심인물인 목회자와 믿음이 좋은 리더들 아니겠는가! 든든한 버팀목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남은 성도들의 마음은 어떻게 되겠는가?교회가 급격하게 흔들릴 것이다. 불안을 넘어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마귀[유대인]가 원하는 그림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될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는가?“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
교회가 환난과 궁핍에 시달리고 핵심 인물들이 잡혀가는 마당에, 왜 예수님은 교회를 보호해주기는커녕 갑자기 충성을 요구하셨을까? 교회에서 죽도록 봉사하라는 뜻인가? 전혀 흐름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뜻이 무엇인가? 환난과 궁핍[배고픔]이 와도 끝까지 말씀에 서 있어라. 죽을 각오로 말씀에 충성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부요한 자”(9)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외부적으로 경제적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 부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부자라고 말씀하셨을까? 앞으로 부자가 될 것이라는 소리인가? 아니다. 비록 가난[궁핍]하지만 마음만큼은 말씀으로 가득 찬 부자라는 것이다. 그런 부자답게 환난과 가난 속에서도 두려워 말고 말씀에 충성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환란과 궁핍을 당하면 그것에 집중하고 깊이 생각한다. 그러면 기분이 나빠진다. 기분이 나빠지면 그 감정의 노예가 되어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갑자기 현실이 암담해지고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나는 이대로 끝인가? 나는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하나?’ 그래서 부정적인 말이 쏟아지고, 분노, 미움, 원망, 불평이 난무해진다. 불행한 사망의 삶이 시작된다. 성경에서도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히 12:11)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셨다. 징계[고난]로 인해 생산되는 어마어마한 영적 부가가치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후에 그[징계]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 말씀에 충성하여 고난을 연단으로 바꿔라. 이것이 선한 싸움(딤후 4:7)이다. 그리하면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의와 평강과 같은 “생명의 관”, “의의 면류관”(딤후 4:7)을 받게 될 것이다. 생명은 무엇일까?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와 같은 성령과 그 열매이다. 면류관은 무엇인가? 승리자만이 받는 상이다. 따라서 생명의 관은 생명이라는 상을 말한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 믿음으로 시련을 견디다보니 인내가 생산되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었더니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생명의 상[면류관]이 주어진다(약 1:3,4).
생명의 관을 쓴 사람은 사탄[원수; 혐오자]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들지도 않고, 감정의 노예가 되지도 않는다. 말씀대로 충성하여 그 말씀대로 참아내면 슬퍼져야 하는데[분노가 하늘을 찔러야 하는데/“왜 나만 이래야 해”하며 억울해야 하는데], 신기하게도 기쁨/자신감/사랑이 생긴다. 왜?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흘러나와서. 주님이 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있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더 말씀대로 풀어보려고 한다. 말씀에 충성한 영적 부자들만이 할[느낄] 수 있는 하이클래스이다. 죽어서 천국에 가서만 받는 상이 아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의 삶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이다. 이런 생명의 면류관을 쓴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없어서 불행한 사망의 삶을 매번 반복하고 있지 않는가! 미움, 시기, 질투, 이별, 분노, 염려….
**1935년 ‘주기철’ 목사가 평양신학교에서 ‘일사각오’라는 설교 중 -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1940년 주기철 목사의 ‘고난의 명상’이라는 마지막 설교 중 -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과 영광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실 때 뭐라고 하시는가?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 그만큼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말씀에 충성하라는 것이다.
3. 결론 - 말씀에 충성한 하이클래스가 되자.
지금 보이는 현실[애굽 군대]을 보고 이스라엘처럼 두려워하며 원망하려는가? 애굽[감정]으로 돌아가겠다며 내버려두라고 아우성을 치겠는가? 말씀에 불충하는 태도이다. 결핍[사망; 분노/원망/불평]을 에너지로 쓸 수밖에 없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여러분을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고 싶은가?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시리니 여러분은 약속하신 말씀에 충성하고 기도하면서 가만히 있길 바란다. 여러분이 오늘 본 애굽 사람[분노, 미움]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충성은 교회 봉사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봉사를 한다면(벧전 4:11) 이 봉사는 말씀에 충성한 것이니 충성이다. 말씀에 충성하여 본인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물론이거니와 가정, 교회, 직장에 여러분의 충성이 흘러가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예수님은 ‘네가 죽도록 (말씀에) 충성하라. 영적 부자가 되라. 하이클래스가 되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말씀하셨다. 153노트, 얼라이브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