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말씀/마태복음 21:1-46
요절/마태복음 21:43, 찬송가/132장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다룹니다. 예수님에게는 이제 한 인간으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절박하십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여러 비유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열매’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했습니다. 산상수훈을 전한 후에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하십니다.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열매는 무엇일까요? 또 열매 맺는 백성이 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예수님은 나귀를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그것도 나귀가 필요하면 렌트를 해야 하는데, 그냥 가서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인 왕임을 드러내십니다. 무엇보다 당시 순례자들은 예루살렘까지는 말이나 나귀를 타고 와서는 예루살렘에 오면 내려서 걸어갔다고 합니다. 시온성인 예루살렘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이것 또한 자신이 바로 왕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럼 제대로 폼이 나게 백마를 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십니다.
4절에 이는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9:9절에는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왕도 나귀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귀는 말에 비해 작고 볼품이 없어서 왕다운 폼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십니다. 이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시며 우리를 섬겨주시는 겸손의 왕이십니다. 한편 그동안 예수님은 자신을 감추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선지자의 예언대로 오는 왕이요,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고 선포하십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와서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위에 타시자 무리의 대다수는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앞뒤에서 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의 의미입니다. 이 외침에는 예수님께서 다윗과 같은 능력의 왕이 되어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운데 왕으로, 무엇을 하실까요?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온 순례객들로 성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평소 예루살렘의 인구는 10-12만 정도입니다. 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큰 명절에는 120-150만명 정도까지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건해야 할 성전이 온갖 것을 파는 시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내 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13절을 읽겠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성전은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죄인이 새롭게 출발하는 곳입니다. 그 어디보다 경건하고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처럼 돈 욕심을 채우는 장소로 타락하였습니다. 즉 가장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이 오히려 자기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의 주머니를 강탈하는 소굴이 되었습니다. 종교의 타락입니다. 사람들의 신앙심과 종교를 이용해서 몇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성전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부족하고 약점이 있고 허물이 있는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 곳, 그것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을 이상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 어린 아이들의 소리에 화를 내며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 고 반문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찬미대로 자신이 구원의 왕, 메시아임을 분명히 밝히며 정면충돌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운데 무엇을 하십니까?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멀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보였습니다. 우리 나라 남도인 목포에만 가도 무화과가 사계절 잘 자랍니다. 더군다나 중동에서는 무화과 나무를 가로수로 심습니다. 아주 크게 자라고 큰 나무가 됩니다. 무화과는 특징이 있는데 아주 생명력이 강합니다. 거꾸로 심어도 싹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무화과는 잎이 나오면서 열매가 같이 나옵니다. 이런 무화과가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아직 익지 않았지만 덜 익은 무화과라도 달려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도 이를 잘 아시기 때문에 뭔가 기대를 하면서 열매를 찾았지만, 잎사귀 뿐 열매를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무화과 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다.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배가 고프니 성질이 나신 것일까요? 여기에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지금의 성전, 또 지금의 유대교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화려한 성전에서 온갖 형식으로 화려하게 폼을 잡고 있습니다. 정말 뭔가 있어도 잔뜩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열매는 없습니다. 주께 드려야 할 열매,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열매가 이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런 성전, 그런 성전에서 드리는 종교행위는 열매가 없으므로 저주를 받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곧 끝난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형식도 중요하고 폼도 필요합니다. 형식이 없는 기독교,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정한 형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에도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식과 폼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릇만 잔뜩 준비하고 정작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없으면 사실상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독교, 우리의 신앙도 어떤 형식과 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겨져야 할 열매입니다. 한마디로 뭔가 좀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형식과 폼만 화려하고 열매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신 것처럼, 우리 눈에는 먼저 형식과 폼이 확 들어옵니다. 더 많고 화려한 것이 있으면 더욱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게 다가 아닌데, 자칫하다보면 그런 것에 만족하다가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럼 작다고 다 옳은가 그것은 또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이를 들었을까요? 20절에, 제자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경고를 알아들었으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두려워 떨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들을 돌아보고 회개하던가? 하다못해 타락한 성전에 대해 안타까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나무가 말라버린 것에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21,2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무화과나무에게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바싹 말라버리게 할 수 있다는 어떤 믿음의 능력, 기도의 능력으로 이 말씀을 많이 생각합니다. 특히 수양회를 앞두고, 중요한 시험이나 문제가 있을 때, 더욱더 절실하게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둡니다. 21-22절 말씀만 떼어서 생각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나이브한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수천 년 이어온 성전, 유대교라는 종교를 심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말씀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믿음이란 이런 능력이 있다. 그러니 기도하라는 정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성전은 이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끼치며 수천 년을 이어왔습니다. 그런 성전은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요, 산과 같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그야말로 소수입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정도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시장 바닥이 되어버린 성전을 좀 뒤엎었다고 성전이 깨끗하게 될까요? 전혀 달라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국 이들은 마른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닥칠 심판이요,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이제 이들은 끝장이 났습니다. 지금은 산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망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들의 강함에 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갖고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종교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산과 같을지라도 바다에 던져지는 새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지금 타락한 성전의 종말을 예고하면서 제자들에게 새 시대, 새로운 역사를 이끌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예수님의 비전을 마음에 품고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기상이변으로 지구촌 곳곳이 난리입니다. 지구의 온도가 2도가 올라간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북극의 얼음이 2미터나 녹았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은 최장기 열대야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지구가 더워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탄소절감 운동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까요? 당장 에어콘 끄고, 자동차도 타고 다니지 말고...물론 이런 운동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기상이변으로 난리가 난 지구가 앞으로 좋아질 희망은 없습니다. 또 그렇다고 이 가운데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종말의 때,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상이변으로 난리가 난, 지구는 앞으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애쓴다면 지구가 더워지는 시간을 조금 늦출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새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구원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구원받은 자들이 장차 들어가 살게 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따라서 새 시대가 올 것을 꿈꾸셨던 예수님과 같은 비전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화과가 마르는 것처럼 세상에 절망이 올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가운데 새 시대를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럼 누가 주께서 이루실 새 시대의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요? 23-27절은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따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오히려 이런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28절을 보면,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에게 “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가겠나이다.”하며 시원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들의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막상 포도원에 가서 일하려 하니 날도 너무 덥고 시원한 에어콘 바람 아래에서 게임이나 하며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대답만 잘하고는 포도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 둘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한참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싫소이다.”하며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이 말에 아버지는 속이 상합니다. 그런데 둘째가 대답을 그렇게 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그러자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둘째 아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대답을 듣고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대답은 잘했는데, 왜 예수님의 평가는 이렇게 심각할까요? 이 비유가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와서 따지는 이들은 바로 첫째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큰 아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작은 아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가리킵니다. 첫째 아들의 문제는 대답만 잘하고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은 화려한데, 삶이 없습니다. 잎만 무성한데,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그야말로 립 서비스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립서비스로 가는 곳이 아니라 삶이 있어야 합니다. 즉 회개가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화려한 신앙고백, 립 서비스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 둘째아들은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아버지를 실망시켰습니다. 그러나 첫째에게 없고 둘째에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수양회 말씀에서 부자 청년에게는 없지만 탕자에게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뉘우침을 삶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즉 회개가 삶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4자 성어가 있습니다.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해 아무리 단박에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깨달음을 계속해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다면, 회개의 열매를 맺고자 계속해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둘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들의 대표라고 할 정도로 인생의 출발이 안 좋았습니다. 세리는 처음에는 재물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습니다. 또한 창기들은 정욕과 죄의 소욕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세례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섰습니다. 이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자칫하면 립서비스로 끝날 수 있습니다. 뉘우침이나 회개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변화 없이 그냥 일정한 고백, 일정한 형식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겉모습은 신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당연히 구원받을 신자라고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고백만이 아니라, 고백에 따른 삶의 변화입니다. 혹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특징은 말로는 다 정답을 다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답을 알고 성경적으로도 답을 아는데,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왜 일까요? 정답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 정답대로 사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과 행함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백에 따른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은 내 편에서 못된 성질도 죽여야 하고, 안일과 게으름도 부인해야 하고,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실제적인 삶속에서 주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이를 또 다른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33절을 보면,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갈아 엎고 거름을 잔뜩 주고 포도나무 묘목을 심었습니다. 주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산울타리를 두르고 심지어 즙 짜는 틀도 만들고 망대까지 지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이것은 당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이 심은 포도나무가 자라서 이제는 열매를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주인은 완벽한 포도원을 만들어 주고 갔기 때문에 종들이 가져올 열매를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전혀 주인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장 주인은 농부들을 고발해야 했지만 그래도 주인은 농부들을 믿고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들에게도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주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인이 농부들에게 기대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존대는 존중입니다. 주인의 아들에 대한 존중은 곧 주인에 대한 존중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자신이 베푼 은혜를 알고 자신을 주인으로 존중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서로 말했습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여기에 이들이 왜 이런 상식밖의 짓을 했는가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포도원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이었습니다. 그 욕심으로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을, 그리고 보낸 종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들, 그리고 악한 농부들은 바로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아들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 유대교라는 종교시스템 속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제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새로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비유의 창끝이 바로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빙고’하시는 대신에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4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당시는 돌을 쌓아 집을 건축했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한 돌을 집어 들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던져 버렸습니다. 돌 편에서 보면 쓸모가 없다고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버림받은 돌이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돌로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놓는 기준돌입니다. 그래서 그 돌을 기준으로 방향이 결정되고 그 돌 위로 다른 돌들을 쌓여지면서 집을 짓게 됩니다. 버림받은 돌이 이런 머릿돌이 된다는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버림받은 돌은 버림받게 되실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환영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한 것은 포도원 비유에서 나온 농부들과 같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빗나간 욕망이요, 은혜를 원수로 갚은 헛된 욕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하나님의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기초석이 되시고 기준석이 되십니다. 구원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그럼 누가 포도원을 이어 받을까요? 4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자가 누구입니까?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형식만 요란하고 열매가 없는 자들입니다. 또 두 아들의 비유에서 나온 대로, 첫째 아들과 같이 말만 잘하고 전혀 삶이 없는 자들입니다. 또 포도원의 비유에서의 농부들과 같이 자기 욕심만 앞서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깁니다. 빼앗긴다는 것은 당연히 자신들 것으로 여겼는데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들이 아니라, 열매 맺는 백성이 받는다고 하십니다. 어떤 열매이겠습니까? 이제까지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잎만 무성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이 원하시는 그 열매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열매는 다른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의 비유에서 나온 둘째아들처럼 잘못된 출발을 했을지라도 뉘우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로 살았을지라도 돌이키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눅15장의 둘째아들처럼 비록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폼이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진심과 회개에 따른 삶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즉 립서비스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인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20:12절에 보면 마지막 날 심판할 때에, 두 개의 책이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또 다른 책이 있는데 그것은 행위를 기록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말만 하지 않고 고백한 믿음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기록한 책입니다. 즉 믿음의 증거가 있는가를 기록한 책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래 그럼 어떤 삶을 살았는가 보자? 아니 고백만 하고, 네 마음대로 살았네? 고백과 삶이 안 맞네? 그렇다면 너는 미안하지만 안돼! 이런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무서운 것입니다. 심각한 것입니다. 화려한 고백은 있었는데, 삶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A와 B가 짝이 맞아야 하는데, 안 맞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이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말만하지 않고 고백한 믿음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하나님은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잎사귀가 필요한 것처럼 형식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백에 따른 우리의 삶입니다. 잘못되었으면 뉘우치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구원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지게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습니다. 자격 없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포도원을 관리하는 은혜로운 직분도 얻습니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으셨지만 결국 구원의 모퉁이돌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알고 고백만이 아니라, 또 폼이나 형식만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키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믿음의 삶을 통해 주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