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樂園-Paradise) 체험(體驗) 일주일, 하와이 (8) - 사탕수수(파인애플) 농장
하와이여행을 먼저 한 사람이 반드시 파인애플 농장(Plantation)으로 가서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을 꼭 맛보고 와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거기를
찾아 갔습니다.
(Dole Plantation 은 1900년부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와이의 농장(Plantation)은 그냥 농장만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하와이 현대사(現代史)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는 관광용 농장의 파인애플만 남아 있습니다.)
정치권력의 흥망사가 있고, 경제사의 변천이 있고, 또한 대대로 살아온
고국에서 만리타향의 이곳으로 오로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왔던 수많은
(한 세기에 걸쳐 337,00명이 유입) 농장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도 있습니다.
(설탕 산업으로 일어서서 경제력을 잡은 미국인들이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립니다.)
나도 1979년 사탕수수 밭과 파인애플 밭을 자동차로 지나가면서 당연히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이민자였던 초기의 농장노동자들을 떠올렸습니다.
(1979년에 자동차로 지나가며 찍은 사탕수수(파인애플?) 농장. 상념에 젖었습니다.)
1778년 James Cook 선장의 상륙이후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인 독감,
천연두, 홍역으로 토착민 인구가 반으로 줄어들고, 또 부족전쟁으로 하와이
인구가 30만 명의 1/6인 5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한 편, 1835년부터 시작된 사탕수수 농장은 1840년대에 도입된 증기선으로
수송수단이 확보된 데다, 서부의 골드러시로 설탕의 수요가 급증하고, 1861년
본토의 남북전쟁으로 남부 설탕이 북부로 가지 못하게 되자, 가격이 여섯 배로
솟는 Sugar Shock(Oil Shock?)가 옵니다.
하와이 설탕사업이 완전히 날개를 달고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아시아로부터 아래와 같이 계약노동자를 들여옵니다.
1852- 1887년 중국 5만 명(2만 명 귀국) 잔류 3만 명
1868- 1924년 일본 20만 명(11만명 귀국) 잔류 9만 명
1903- 1910년 한국 7천3백 명 (1천2백 명 귀국) 잔류 6천100 명
1906- 1930년 필립핀 11만 명(4만 명 귀국) 잔류 7만 명
(사탕수수 밭 노동자들의 그림)
1841년 미국 동부 골수 청교도 가정의 Daniel Dole이 선교사로 하와이에 옵니다.
1893년 그의 둘째 아들 Sanford Dole이 하와이 공화국 대통령이 되고
1899년 미국 식민지 하와이의 초대 총독이 된 그때, 그의 5촌 조카인
James Dole 이 하와이로 건너와 Dole Food Company를 세웁니다.
하와이 왕가와 유착한 미국계 사업가와 초기 ‘선교사 가족’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의 'Big 5'는 설탕산업의 90%를 점유하고 금융, 창고, 해운, 무역을
독점하여 하와이의 모든 수요와 공급경제를 완전히 장악하여 하와이를
그들의 경제적인 식민지로 만듭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의 왕국 'Dole' 상표.)
결국 이들은 1893년, 미국과 병합을 목표로 ‘하와이 왕국’을 쿠데타로
전복하고 ‘하와이 공화국’을 세웁니다. 미국과 병합하면 모든 수출입
물품의 관세가 없어지기 때문이죠.
(이제는 상표만 남고 생산은 모두 임금이 싼 후진국에서 공급되는 열대 과일들)
‘하와이 왕국’의 몰락과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1893-1898)이,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조선왕국‘의 몰락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1895-1910)이 그 모양은 비슷합니다.
(관광 농장을 한 바퀴 도는 꼬마 열차)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한 주(State)로 승격되면서 이 재벌독점은 해체되고
1970년에 아시아, 중남미와 남미의 저렴한 노동력에 의한 농산물 공급으로
하와이 설탕 산업은 문을 닫습니다.
(관광 산업이 된 사탕수수 플란테이션의 미로 정원. 유료 입장입니다.)
지금은 모두 그 땅 위에 호텔 짓고 관광사업으로 변신했다고 합니다.
첫댓글 좋아하는 Dole 파인애플 공장소개와 하와이의 사탕농장과 하와이 현대사 공부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