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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년 7월 26일 일요일 가은산 (可隱山)
기차여행 : 고인돌 님과 사니조은 님
산행 코스 : 제천 역에서 택시로 옥순대교로 이동 – 옥순봉 전망대 – 새바위 – 벼락맞은 바위 – 둥지봉 – 가은산 정상 – 상천리 하산 후 저녁 – 버스로 제천역으로 이동 – 열차로 청량리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253746
거리 7.9 km
소요 시간 6h 50m 17s
이동 시간 3h 35m 35s
휴식 시간 3h 14m 42s
평균 속도 2.2 km/h
최고점 585 m
총 획득고도 264 m
난이도 보통
금요무박으로 설악산에 가려고 안내 산악회에 예약을 하였으나 설악산에 비가 많이 내린 탓에 또 입산통제라 한다. 결국 산행계획은 취소되었고 나는 하루 종일 집안에서 한가하게 소일했다. 금방 비가 올 듯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으나 차츰 구름이 걷히고 환상적인 날씨를 펼쳐 보인다. 일기 예보에 다사 한 번 속아서 하루를 하릴없이 소일하였다.
윤이는 배드민턴회의 장사장님이 옥수수를 판매하는데 같이 가서 현장에서 까 오자고 한다. 옥수수를 사면 껍질이 대부분이니 그것을 쓰레기로 처리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트럭에 싣고 온 옥수수를 자루 째 판매만 하지 껍질을 다시 수거하는 일은 하지 않기에 두 자루를 사 들고 집에 와서 처리했다.
토요일 잠시 자전거 외출
집에서 눈에 보이는 걸 먹기만 하니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고 자꾸 근육에 통증도 느껴진다. 오후 4시경 자전거를 끌고 한강에 나갔다. 여전히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어서 언제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듯한 분위기다. 나름대로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것도 괜챦겠다는 생각이지만 괜시리 흠뻑 젖는 것은 부담스럽다.
잠실나루 잔디밭에는 나드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코로나로 인해 행동거지가 제한된 삶에 피로감이 누적된 사람들이 잠시라도 이렇게 트인 공간에 나와 긴장을 해소해보려는 것 같다. 자전거길에도 사람들 왕래가 많아 조심조심 지나간다.
공기가 맑아 북한산 도봉산이 가까이 보인다. 남산 타워도 선명하다. 이런 날에는 산정에 올라가 끝없이 펼쳐지는 조망을 만끽하면 좋을텐데 설악산 탐방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한남대교 남단에서 자전거를 돌렸다. 하늘에 구름이 더욱 짙어서 마치 하루가 저물어가는 분위기다.
잠실나루에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니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찍기에 분주하다. 아직 노을 빛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지만 카메라에 긴 렌즈를 장착한 사진사들도 여러 명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니 뭔가 특별한 광경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마 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양은 지평선 너머로 떨어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아쉬움에 뭔가를 마냥 기다리는 모습이다. 무엇을 기다릴까? 요즘에는 사람들의 빈 가슴을 채워줄 작은 이벤트라도 있으면 좋을 그런 나날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읽은 건지 갑자기 구름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한다. 지평선 너머에서 쏘아 올린 햇빛이 낮은 구름에 비쳐져 한강물마저 벌겋게 물들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온 강물과 주변을 빨갛게 물들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에 부응하는 듯 점점 더 타오른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타오르던 노을 빛이 마지막 한 줌 아쉬움을 남기고 사그라 든다. 처음 불이 붙을 때처럼 꺼질 때도 순식간이다. 햇빛이 올라오던 곳에 먹구름이 낀 탓이다. 사바이 어둑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흩어진다. 나도 아직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잔 여명을 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가은산 가는 길
토요일 오후에 일요일 산행 약속을 잡았다. 설악산이 통제되었지만 일기예보에서 뿌리는 비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청량리 역에서 7시 38분에 출발하는 제천행 열차를 탔다. 금수산 옆에 있는 가은산(可隱山)에 가기로 했다. 2016년 내가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하던 때 처음으로 고등학교 친구들과 갔다온 산이 금수산인데 그 때는 친구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따라 갔던지라 그 곳이 제천인지 어딘지 알지 못하였었다. 충북 충주가 고향인 고인돌 형님은 그 지역의 산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소백산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을 참 많이도 다녀오신 듯 하다.
토요일에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다녀왔다면서 시인에 대해 한참 얘기했다. 정지용의 시 중에서 ‘향수’라는 시는 노래로도 널리 알려진 시이기에 나도 알고 있지만 이번에 정지용 시인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옥천 보통학교를 나오고 서울에 있는 휘문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부터 1929년까지 6년간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에서 교수 및 문과 과장으로 지냈다. 이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신문에 사설 등을 쓰기도 했다. 휘문 고등 보통학교때부터 홍사용, 박종화 등과 문학 잡지 등을 만들면서 문학활동을 하였으며 1950년까지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1950년 그는 자진 월북인지 납북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북으로 넘어갔으며 1953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의 시는 남한과 북한에서 유통이 금지되어 1988년 해금될 때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고인돌 형님은 정지용 시인의 휘문 고등보통학교 시절 홍 사용 시인과의 교류에 관심을 갖고 소설의 소재로 삼아 답사 차원에서 옥천에 다녀온 것이라 한다.
청량리에서 두 시간 걸려 9시 38분 제천역에 도착했다. 내가 대구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올 때 몇 번 지나가기는 했지만 직접 제천 땅을 밟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충청북도의 최북단이면서 강원도 영월과 원주 사이에 위치한 도시다.
역을 빠져나가자 마자 줄지어 늘어선 택시를 타고 청풍호를 지나고 정반사라고 하는 절 그리고 얼음골을 지난다. “여기에도 얼음골이 있네요? 정말 여름에도 얼음이 있나요?” 나는 밀양에 있는 얼음골을 떠올리며 물었다. “지금까지는 남아 있어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다 녹아서 없어질 거에요.” 참 신기한 일이다. “그게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그 너덜겅이라고 있쟎아? 돌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너덜겅 돌 틈으로 눈이 쌓이고 얼기를 반복하는거야. 그러면 그 깊은 곳에 한기가 남아 있어 한 여름까지 얼음이 남아 있는 거지.” 고인돌 형님이 그 원리를 설명해준다. “한 여름에도 얼음골 앞에서는 추워서 잠을 못자요.” 택시 기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해준다. 여름에는 가족들과 이 곳에 와서 야영도 하는데 너무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한다.
옥순대교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우리가 가는 곳이 옥순대교라고 한다. 꼭 여자 이름 같다. “옛날에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강 한복판에 작은 바위섬이 있었어요.” 고인돌 형님은 택시 기사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다. “그 바위를 평등석(平等石)이라고 부르는데 배를 타고 건너가서 물고기를 잡아 천렵을 했지요.” 알고 보니 고인돌 형님 본인의 얘기다. 고인돌 형님의 첫 부임지가 이 곳이라 한다. 그 당시 제천의 경찰서장이나 면장 그리고 술도가니(양조장) 사장들과 어울려 이 평등석에 올라 소풍을 즐겼다고 한다. 이 곳에는 광산이 많아 다이너마이트를 경찰서에 보관하는데 그 중 몇 개를 꺼내 와 강물에 터뜨리면 물고기들이 허연 배를 드러내고 떠오른다. 그걸 잡아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끓여 술안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옛날의 추억거리다.
“옛날 강이 얼면 자전거를 타고 강가쪽으로 한참을 올라 갔었어요.” 충주댐이 생기기 이전의 얘기다. 지금은 겨울철에도 그리 춥지 않지만 옛날에는 겨울에 눈도 많이 내리고 기온도 많이 내려가 강물이 두텁게 얼었다고 한다. 지금은 강도 깊은데다 날이 춥지 않아 강물이 얼어도 살짝 얼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강 위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갈 수는 없다며 연세 지긋하신 택시 기사님도 한 순간 옛날 추억에 잠긴다.
옥순(玉筍)대교까지 한참을 달렸다. 4~5십 분 달렸나 보다. 택시 요금이 거의 4만원이나 나왔다. 커다란 주차장 한 켠에 옥순봉 쉼터라는 작은 건물이 있고 주차장 가에는 여러가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넓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그냥 평범한 아치형 다리다. 그러나 다리 위로 올라가 강 가운데 쪽으로 걸어가면서 바라본 풍경은 입을 쩍 벌리게 한다.
“저기 저게 옥순봉이야.” 강 오른편으로 솟아오른 돌 기둥으로 이루어진 작은 봉우리를 가리키며 고인돌 형님은 마치 관광 안내원처럼 설명을 이어간다. “왼편이 가은산이고 저기 돌로 된 봉우리가 둥지봉. 그 뒤쪽으로 보이는게 말목산이야. 저 오른편 옥순봉 뒤에 튀어나온 봉우리가 구담봉이고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이 제비봉이야.” 다리 위에서 우리가 오늘 가야할 봉우리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진다.
모두 야트막한 산 봉우리다. 우리가 평소 다니던 소백산이나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비하면 작은 야산에 불과한 것들이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숱하게 많은 게 산이다 보니 이렇게 낮은 산에 다니는 것은 굳이 등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강원도 영월에서 시작해 단양을 거쳐 충주호로 흘러 들고 다시 양평을 지나 두물머리에서 북한강을 만나 서울을 통과하여 서해로 나가는 남한강이 산줄기를 휘돌아 흐르는 곳이기에 단양에서는 단양8경에 넣고 제천에서는 제천10경에 포함시킬 만큼 빼어난 절경이다.
나무계단을 올라 조금 오르니 작은 정자가 나온다. 옥순봉을 바라보는 전망대다. 옥순봉은 원래 현재 제천군인 청풍군에 속했다.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해 올 때 강가에 까마득히 직벽으로 솟은 흰 바위와 푸른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에 매료되어 그 모습이 마치 옥으로 된 죽순과 같다 하여 옥순봉(玉荀峯)이라 부르고 청풍군수에게 이를 단양에 넘기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청풍군수는 이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퇴계와 사랑에 빠진 16살 어린 기녀 두향(杜香)은 퇴계에게 옥순봉을 달라고 하니 이황은 옥순봉 아래 바위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문구를 새겨놓았다. 여기가 단양의 시작이라는 뜻이니 이 글귀를 본 청풍 군수가 누가 이 글을 써 놓았느냐 물으매 퇴계가 썼다 하니 달리 시비를 묻지 않았다 한다. 이로 말미암아 옥순봉은 단양에도 속하고 제천에도 속하는 명승지가 되었다는 얘기다. 퇴계가 이 문구를 새길 때만 해도 옥순봉 아래에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충주호가 들어서면서 수위가 높아져 길도 잠기고 단구동문이라는 글귀도 잠겼다 한다.
새바위를 거쳐 둥지봉으로
산으로 오르는 초입부터 꼬리진달래가 널려있다. 꼬리진달래는 충주와 단양 일대에서만 자라는 것 같다. 지난 번 소백산 천동계곡 초입에 식재한 나무를 보았으나 소백산의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영월 동강의 산 자락에서도 보았으나 그 이북에서는 보지 못했다. 지금 한창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이미 져버려 열매가 맺힌 것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벌써 내년에 필 꽃봉오리도 맺고 있다. 지금 활짝 피어 있는 이 꽃들은 이미 작년 여름에 생성된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린 때문인지 등산로가 마치 시내처럼 물이 흐른다. 길 가 숲에는 갖가지 버섯이 자라난다. 버섯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 독버섯을 먹을 수 있기에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친다. 어떤 것은 제법 싱싱하면서 색깔도 곱지 않아 식용버섯일 수도 있겠으나 그냥 모른 척한다.
등산로에는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출입금지 표시가 걸려있다. 이 곳은 월악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데 조금이라도 위험한 등로는 공원에서 관리할 수 없으니 가지 말라는 의미인 것 같다. 우리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금줄을 넘는다.
고인돌 형님은 작은 갈림길에서 우리에게 조망처에 다녀오고 싶으면 갔다 오라 한다. 그리 멀지 않으니 배낭을 나무에 걸어 두고 작은 봉우리에 올라가니 옥순봉과 옥순대교 그리고 둥지봉과 말목산 제비봉 등 주변 산과 강이 잘 보인다.
이 산은 어딜 가나 조망이 터져서 남한강 강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강에는 승객을 가득 실은 유람선이 장회나루에서 출발하여 구담봉과 옥순봉을 지나 옥순대교까지 왕복 운행하면서 안내방송을 통해 명승에 대해 설명하는 소리가 우리가 있는 곳까지 잘 들린다. 우리는 바위모양이 새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새바위를 거쳐 강 어귀까지 내려가 옥순봉을 보고 다시 둥지봉으로 오른다.
둥지봉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큰 빙딩만큼 큰 바위가 마치 도끼로 친 것처럼 두 개로 나뉘어 갈라진 ‘벼락맞은 바위’를 지난다. 이 바위는 강둑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아마도 강쪽으로 땅이 밀리면서 기울어지고 뒤쪽 바위는 견고하게 버티면서 ‘쩍!’ 갈라진 것인지 아니면 이름 그대로 벼락을 맞아서 갈라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하나의 바위가 순간적으로 갈라진 것은 맞는 것 같다.
둥지봉은 하나의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다. 대부분 바위가 드러나 있고 중간중간 흙이 쌓인 곳에는 소나무 등 풀 나무가 자라 작은 숲을 이룬다. 비가 내린 탓에 경사가 급한 곳은 바위가 미끄러워 나무 뿌리를 잡고 오르는데도 자꾸 미끄러진다. 두 군데는 로프 없이 오르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 그래도 이미 산을 타는데 이력이 붙은 산꾼들이라 무사히 바위에 올라 멋진 조망을 감상한다.
마주 보이는 구담봉은 한자로 거북이 구(龜)자와 연못 담(潭)자를 쓴다. 상당히 날카로운 바위봉우리가 마치 낙타의 등처럼 솟아 있는데 그 유래를 알기 전에는 어찌 저런 산 봉우리에 연못이 있을 수 있나 하고 의아해했다. 알고 보니 이 봉우리 아래 강어귀에는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바위가 있어서 이 봉우리를 구봉(龜峰)이라 불렀으나 이후 봉우리 아래에 물이 있어 연못 潭자를 넣어 구담봉이라 불렀다 한다.
남한강의 경치를 바라보며 바위를 오르고 온 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지쳐갈 즈음 마침내 둥지봉 정상에 이른다. 정상에는 오석을 깍아 만든 정상석이 서 있다. 이 둥지봉은 가은산을 주봉으로 하는 바위 봉우리인데 그 유래를 보면 이 산 아래에 어미새와 아기새 바위가 있어 이 새들을 품고 있는 봉우리라서 둥지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가은산(可隱山)
둥지봉에서 가은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전형적인 흙산이다. 둥지봉 위에는 옛날 삼국시대때 쌓았다는 가은산성(可隱山城)의 자취가 남아있다. 돌로 쌓은 산성은 그리 높지 않고 지나면서 본 그 규모도 크지 않다. 유추해보건데 이 산성은 둥지봉 정상에 있었을 감시초소를 방어하는 성벽이었을 것이다. 어짜피 강쪽으로는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는데다 노출되어 쉽게 적을 퇴치할 수 있으나 가은산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접근이 쉽기 때문에 이렇게 별도의 성벽을 쌓은 듯하다.
오늘 오르는 산이 낮기 때문에 쉽다고 판단하여 물을 조금만 넣어왔는데 햇볕이 없이 구름 낀 날씨인데도 습도가 높고 기온이 올라간 탓인지 흘리는 땀의 양이 상당히 많다. 얼마 안되는 물도 아껴 마셔야 할 판이다. 둥지봉에서 잠시 내려선 안부에서 다시 가은산으로 오른다. 경사가 급한 곳에 짧은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말목산을 바라보는 오른쪽에 탁 트인 조망처가 여러군데 나온다.
말목산도 여러 개의 암봉으로 이뤄져 있는데 산줄기의 모양이 말의 목처럼 생겨서 말목산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지만 이 산의 유래에 관한 조금은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80년대에 충주댐이 건설되기 예전에는 단양의 아랫나루(下津)는 남한강을 통해 서울에서 올라온 소금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올라오고 서울에 공급하는 나무 등 임산물을 내보내는 중요한 항구였다. 이 하진 마을 안동 장씨 문중에 장군감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이 때 용소(龍沼)에는 이 아기가 장군이 되었을 때 타고 다닐 용마(龍馬)도 탄생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혹여 나중에 역모를 일으켜 나라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아래 조정에서 사람을 내려 보내 이 아기를 가마솥에 넣고 무거운 맷돌로 솥을 누른 후 불을 때어 죽였다. 또한 용마의 목에는 긴 줄을 매어 용소 옆의 큰 소나무에 매달아 죽였는데 말의 목을 매달아 죽인 산이라 하여 말목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말목산과 가은산 사이 강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온 곳에 작은 절이 보인다. 천진선원이라고 하는데 고인돌 형님은 그 곳에서 예전에 보관했던 쌀이 탄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아마도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고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 절은 지금도 배를 타지 않고는 접근이 어렵다. 이 가은산이나 말목산을 통해서 접근해야 하지만 산세가 험하고 만일 가은산성처럼 감시초소를 마련하고 약간의 군사만 배치해도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 만한 위치다. 이 곳에 군량미를 보관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배를 이용해 강 하구쪽으로 보급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절은 승군이 머물면서 무기를 제조 보관하던 기능을 갖추고 있었으니 이 천진선원도 어쩌면 그런 역할을 맡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말목산 너머에 더 높은 능선길은 제비봉이다. 이 산의 이름 유래에 관해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옛날 큰 홍수가 내려 온 천하가 물에 잠겼을 때 이 산의 꼭대기에 제비 한 마리만 내려 앉을 만큼 남았었다고 한다. 다른 유래로는 장회나루에서 배를 타고 구담봉쪽으로 내려가면서 뒤돌아보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 능선과 산의 정상부의 모습이 마치 제비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제비봉은 달리 연비산(燕飛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고도를 높이면서 말목산 연비산(제비봉) 너머로 흰 구름에 덮인 소백산 등줄기가 조금 보인다. 가은산 정상 200 미터 전에 이름없는 봉우리 삼거리를 만난다. 누군가 이정목 위에 562 미터 무명봉이라 적어 놓았다. 가은산이 575미터이니 10 미터가 낮아서 정상 자리를 빼앗겼으니 내가 이름을 붙인다면 “아쉬봉”이나 “아까봉”이라고 부르겠다. 고인돌 형님은 이미 여러 번 가은산 정상을 가보았기에 애써 또 가보고 싶지 않은지 우리더러 배낭을 두고 다녀오라 한다.
가은산 575 미터. 곡선으로 잘 다듬어진 큰 돌을 눕혀 놓고 한글로 산 이름을 깊이 파서 새겨놓은 정상석이 멋있다. 주변에는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가 둘러쳐져 있어 조망은 없다. 가은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가면 금수산(錦繡山 1016 m)으로 갈 수 있다. 2016년 겨울 새 해 첫 산행으로 다녀왔던 산이다. 이번에는 가은산에서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상천 휴게소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가은산(可隱山)은 한자로 가히 숨을 만한 산이라는 뜻이다. 숨는다는 것은 전쟁을 피해서 몸을 감추고 산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 곳은 남한강쪽으로는 가파른 암릉이고 뒤쪽으로는 금수산 산줄기가 막고 있으니 밖으로 쉽게 노출되지 않을 성싶은 곳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산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또 다른 버전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옛날 얘기다. 옛날 아직 이 땅이 생겨나기도 전에 마고할미가 이 땅 위를 주유하다가 그만 실수로 가락지를 잃어버렸다. 마고할미는 땅을 이리 저리 파헤치며 반지를 찾다가 아흔 아홉 개 골짜기를 파헤치고 나서야 비로소 가락지를 찾을 수 있었다. 이에 마고할미는 ‘골짜기가 하나만 더 생겨났더라면 이 곳이 나라의 왕도(王都)가 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 되었다’며 유유히 떠나갔다. 이에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떠나가버린 산이라는 뜻으로 ‘간산’ 또는 ‘가는산’이라 불렀는데 일제시대 전국 토지 일제정리때 순수 우리나라 말을 이해 못하는 일본인들이 한자로 옮기면서 가은산이라고 적는 바람에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상천리에서 산행을 마치다.
이제는 물통에 마실 물이 한 방울 남았다. 고인돌 형님은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으니 힘든 구간은 없다고 하는데 우리가 가는 길에는 두 세 군데 낮은 봉우리가 발길을 막는다. 그 작은 봉우리에는 나무로 멋지게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에서는 멀리 월악산에서 이어지는 대미산과 백두대간 마루금이 하얀 구름에 젖어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더운 기운에 잠꼬대처럼 시원한 비라도 쏱아지면 좋겠다는 사니조은 님의 넉두리가 통한 것인지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차츰 비바람이 몰려오더니 급기야 우리 머리위에도 가는 빗방울이 떨어진다. 집에서 챙겨온 판초우의를 꺼내 입을까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남은 구간이 고작 1 km 정도 남았다는 것을 알고 그냥 발걸음만 조금 재게 걷는다.
목이 타는 사니조은 님은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런 길은 찾지 못했다. 우측 계곡은 상천리 계곡이다. 계곡 깊숙한 곳까지 집들이 들어차 있다. 그 상천리 마을 뒷쪽은 금수산인데 가는 비에 촉촉히 젖은 모습이 마치 알프스 산을 보는 느낌이다.
발 아래 까마득히 수채화 같은 마을 집들이 보이는데 그 마을로 내려서는 산길은 나무계단이다. 나무계단이 없다면 거의 직벽에 가까운 암릉을 아마도 로프에 의지하여 걸어야 할 판인데 월악산 국립공원에서 탐방객들의 안전한 산행을 위해 설치한 나무계단 덕분에 아주 짧은 시간에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상천리 식당 주인의 옛 추억
마을로 들어서는 평지 산자락에는 사과 과수원이 있는데 벌써 한여름의 햇볕에 굵어진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마술처럼 저 나무들은 물과 거름과 햇볕을 섞어서 예쁘고 맛있는 사과를 만들어낸다. 어떤 원리로 과일이 열리고 익어가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기하기만 하다.
상천리 마을에 5시 10에 도착했다. 제천으로 가는 마을버스는 6시 20분에 있다고 한다. 가랑비는 내리는 둥 마는 둥 오락가락 하는데 축축하게 젖은 몸을 추스르고 마을 식당으로 찾아갔다. 청국장을 시켜 놓고 냉장고에서 꺼내 주는 물을 원없이 마신다. 물이 귀한 것은 여름날 산행을 하면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집 아들이 직접 가꾼다는 복숭아 과수원에서 따온 복숭아 두 개를 맛보라며 내 놓는다. 어느 집보다도 이 복숭아가 제일 맛이 좋은 거라는 과장광고에 귀 기울이며 먹어보지만 내가 평소에 먹던 복숭아 맛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으니 다음에 황도가 나올 때 혹시 기회가 되면 사 먹겠다 말하고 양해를 구한다.
이 곳에서 청년시절 교사 생활을 했다는 고인돌 형님과 70이 조금 넘어 보이는 식당 주인 아주머니의 옛날 얘기가 시간의 태엽을 70년대까지 되감아 올린다. 1972년 홍수를 회상한다. 아침에 옥순대교까지 우리를 태워준 택시 기사님도 1972년 대홍수를 얘기했는데 이 아주머니도 그 홍수 얘기를 꺼낸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그 당시의 비 피해가 트라우마로 남아 그 긴 세월이 흘렀어도 잊을 수 없는 아련한 공통의 추억이 되어 버렸나 보다. 자료를 찾아보니 1972년 집중호우로 인해 강원도 영월, 충북 단양과 제천에 극심한 침수피해가 발생했으며 그 여파가 여주를 거쳐 서울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6시 2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제천으로 오면서 기차와 버스 시간을 체크하던 고인돌 형님은 8시에 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하고 사니조은 님과 나는 8시 59분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기로 했다. 한 시간이나 여유가 생긴 우리는 제천 역 앞에 있는 전통시장에 들렀으나 거의 모든 가게들이 이미 문을 닫은 상태라 역 앞에 있는 허름한 육개장 집에 들어가 육개장을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마셨다. 8시 15분에 출발하는 열차표가 매진되어 한 시간이나 여유가 생긴 덕분에 맛있는 소주를 마시게 된 것이 오히려 즐거운 일인 양 사니조은 님은 무척 좋아한다.
이 열차는 전에 풍기에서 8시 15분에 출발했던 그 열차라서 청량리역에 11시에 도착했다. 곧바로 이어지는 1호선 전철을 타고 왕십리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집에 오니 11시 40분이다.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윤이와 미리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정리하고 새벽에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