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자매가 없는 외동딸에게 처음맞는 부의 환갑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요즘 세상에 환갑까지 못사는 사람이 어딨어? 그게 뭐 그리 대수야? 라고 말하곤 했던 20대 초반과는 다르게 주변 친구들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는 부모의 환갑을 축하하는 잔치는 꽤나 성대하였다. 오만원권이 줄줄 이어져 나오는 케잌과 ‘인생은 60부터’라는 찬란한 문구 아래에 환하게 웃고 있는 환갑을 맞이한 이의 사진이 들어간 생일 현수막, 거실에 걸린 커다란 숫자 60 풍선, 돈 뿌리는 머신건 장난감. 친구가 아는 어떤 애는 명품백과 금돼지 한돈을 부모에게 선물했다는 ‘카더라성’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의 부모는 그걸 찍어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해두었다고. 뭐야, 60살까지 사는 거 그리 대단한 일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축하는 역시 돈지랄 뿐인가. 하는 냉소적인 생각들.
물론 우리집의 역사와 그네들의 집안 역사는 다르므로 잔치도 다르게 열려야 이치에 맞는 것이겠으나 사회적 인간인 내가 부모’님’의 환갑이란 이벤트를 어떻게 치뤄야 할지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부담만큼 합리적이고 ‘성공적인’ 준비를 하기 위해 마치 직장에서 쓰듯 아빠의 환갑잔치라는 제목의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아빠는 원죄가 있으므로 그의 환갑은 지난 삶에 대한 평가와 남은 인생을 계획하는 자리가 되어야 마땅한지도 몰랐다. 그치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엄마의 정상가족에 대한 염원을 깨부술수는 없으니까.
환갑잔치 =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돈지랄. 이라고 읽으며 sns상의 정상가족들을 한 껏 비웃던 지난 날의 나와 달리, 번듯한 레스토랑에서 먹는 가족 외식, 그 흔한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 조차 없는 우리 가족의 빈곤한 역사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다짐한 것은, 아빠가 나와 엄마에게 한 짓을 잊지 않으면서 제한적인 축하를 하는 것. 축하하면 축하하는 거지, 제한적 축하는 또 뭐람. 쪼잔하게. 제한적 축하가 더 수고스럽겠다, 시발. 마음 속에서 그런 소리들이 들렸으나, 28년을 예측 불가능하고 권위적이고 가끔 징그럽게 귀여운 아빠와 살면서 나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돈. 천박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부장으로부터 내가 가질 수 있었던 힘 말이다. 오히려 더 편리한지도 몰랐다. 환갑잔치가 돈지랄이라면 그 덕분에 아빠에게 더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케잌을 사되 내가 먹고싶은 케잌을 사고 (한달 전에 예약하는 정성 들어간 거 절대 안됨), 오만원권이 막 나오거나 돈이 뿌려지는 이벤트는 절대 하지 않으며(나의 가치관과 맞지않는데다가 그가 너무 좋아할 수 있음), 부수적인 현수막과 풍선 따위 절대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아빠의 환갑날. 나는 직장에서 부의 환갑이라며 휴가를 받았다. 환갑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큰 잔치라 좋은 점도 있네, 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에 예약해 둔 근방 제일 유명한 한식 레스토랑에 갔다. 케잌은 전날 예약하여 테이크 아웃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유명한 케잌집의 프레지에 딸기 생크림 케잌. 초는 숫자 60이 너무 ‘거창’하여 6만 샀다. 아빠는 코스요리가 나오는 족족 사진을 찍었다. 15가지가 넘는 코스 요리, 피곤할 법도 한데 예쁜 각도로 찍기 위해 정성껏 접시를 돌려가며 사진을 찍는다. (이런 게 ‘귀여운’ 아빠의 모습이라면 다들 이해가 가실런지.) 아니 코스요리 처음 먹어본 사람처럼 촌스럽게 왜 그러냐고 인상을 써봐도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다. “어휴…!”하면서 아빠의 핸드폰을 거칠게 뺏어들고 내가 더 정갈한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찍어야 예쁘지!!” 생색을 내며 다시 핸드폰을 돌려준다. 남기는 음식이 없이 소스 한 점까지 쓱쓱 설거지하듯 먹는 엄마와 아빠. 마지막 요리가 나오고 나는 녹을까봐 맡겨둔 케잌을 요청했다. “야, 케잌은 너가 가져와야지.”라고 또.. 또 촌스럽게.. “아니 원래 맡아주시고, 가져다 주시는 겨..”라고 하자 그런 게 어딨냐고 하면서도 긴가민가한 눈치다. 잘난 척하더니! 와봤어야 알지! 하며 나는 또 큰소리를 친다. 내친김에 “어휴, 그 돈 날린 거 엄마랑 나랑 이런 데 좀 데리고 왔으면 좀 좋아.”라고 살짝 눈치를 보면서 중얼중얼거려도 본다. “이자식이 버르장머리 없게!”라고 하면서도 입모양은 웃고 있다. 케이크를 상 가운데다 놓고 준비해둔 꼬깔모자를 아빠에게 씌워주었다. “우리 철이 이제 여섯짤~” 하고 숫자초 6을 케이크에 꽂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성냥이 위험하다면서 또 어찌나 성화이신지. 아빠 그거 알아? 나 담뱃불 성냥으로 붙여 라고 마음 속으로 말하며 단번에 불을 붙이는데 성공을 하는 나. 이 모든 게 그냥 시트콤 같다.
밥을 다 먹은 뒤 아빠에게 40만원을 용돈으로 보냈다. 60세니까 60이 맞는데 20은 아빠랑 이제껏 살아준 엄마한테 줄게라고 했다. 아무 말이 없다. 맞는 말이니까 뭐~
40만원도 엄밀히 말해 용돈은 아니다. 아빠가 내가 피같이 번 돈을 술로, 낚시로, 아빠의 유흥비로 쓰게 둘 수는 없었다. 원래는 국민연금으로 넣어줄려고 했는데 가족이 대신 넣을 수도 없고 절차가 복잡해서 아빠의 연체된 보험금으로 쓰라고 명목을 정해주었다. 순순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나는 신나게 아빠의 귀여운 포즈 (우리 철이 여섯짤~ 축하해요~ 하며 한 껏 흥을 돋운 뒤)를 찍고 아빠가 찍은 여러 음식 사진들을 저장한 뒤 나의 인스타그램에도 업로드를 했다.
‘우리 철이 오늘로 여섯짤. 철이 키우느라 등골이 휘겄다. 오래오래 건강하자.’
몇 분 뒤, 친구들과 지인들로 부터 댓글이 달렸다.
‘쏘 큩,, 생신축하드린다고 전해주세요.’ , ‘생신축하드려요.’ , ‘사랑이 넘치네’ 등등..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라는 댓글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답글을 달았다.
‘이럴 때만 친한 척, 사랑 넘치는 가족인 척~~~ 알조?’
아빠의 환갑잔치. 정상가족 효녀 코스프레. 너무 그럴듯 해서 나도 껌뻑 속을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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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비용 5차시때 이 글을 쓰려고 했는데, 급체를 해가지고 하루종일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아빠의 환갑을 준비하며 진실되고 투명한 글을 쓰려고 하니 속에서 부터 꼬여버린 것 같아요. 글 쓰는 거 왜이리 어렵조..? 하하..
오늘까지 완성못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라고 나를 보채며 얕은 깊이이지만 써보았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주시는 피드백 정말 소중히 보고 있습니다.
성실한 학인은 아니지만 저도 종종 댓글을 남기려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그래도 충분히 마음을 전달하셨네요. 코스프레라고만 하기엔 너무 마음이 많이 들어갔어요 ㅎㅎ
부모님들도 거창한 걸 바라는게 아니라 신경을 써주는것만으로도 백억 받는 기분이라고 하더라구요.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요.
저는 코스프레 조차도 안했어요; 사실 앞부분에 쓰신 부분이 너무 공감되는데 그런 철학?의 실현은 절대 아니었구요. 어찌어찌하다보니
그냥 넘겼고, 끝내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리네요. 암튼 적당히 마음 표현과 전달에 성공하셨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어요 ㅎ
푸하하하하 사실 마음이 너무 들어갔다는 걸 보여주고싶었어요. 아빠를 너무 미워하면서도 아빠를 사랑하고 그래서 인정받고싶고 아직도 아빠가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거든요. 약간 위악의 글이긴 하지만 승리의 글쓰기를 해보고싶엇어요ㅋㅋㅋ내가 상황을, 나의 마음을 통제하는 그런 글쓰기.그치만 어떤 넘치는 마음들때문에 결국 어쩔 수 없이 들키고야 마는 것들에 대해서요. 피드백 감사해요:)
저희 집이랑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아 맞장구치며 읽었습니다 ㅎㅎ 저희 아빠는 60살 넘어서 저한테 첨으로 인형을 주더라고요. 인형뽑기 한 걸 잔뜩 모아놨다고 제가 가면 챙겨가라고 ㅎㅎ 정말 여섯 짤 애기처럼 철딱서니가 없는데 환갑 잔치라니... 남들 앞에서 좋은 가정인 척 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굳이 분란과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또 예전보단 상황이 나으니까 그럭저럭 맞춰가는 마음이 잘 드러나서 정말 공감이 많이 됐어요. 솔직하고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고쌤 글 읽으면서 정말 많이 공감합니다. 읽어주시고 피드백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이면 저희 아버지도 환갑이시라 '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며 읽었습니다ㅎㅎ 특히 초반에 친구, 지인들의 화려한 환갑잔치를 보며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거 같아요. 저는 사실 그렇게 해주고 싶기도 한데 여력이 되지 않아 못할 거 같거든요..그럼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살피며 좋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신 상아님의 수고가 역력해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외동이라 더 부담이 되셨을텐데 무사히 지나간 추억인 거 같아요.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 하는 거 보고 비판하고 비웃었으면서 결국 엇비슷하게 할 건 다 하게
되었던 아빠의 환갑잔치였습니다. 슬기님의 부모님 환갑잔치 준비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내년에 좋은 글감이 되길…!
마지막에 SNS에 업로드 한 후 상아님이 답글을 단 것까지 너무 현실적이었어요! 저도 아빠 환갑때 이런 저런 행사를 꼭 준비해야하나? 하면서 아빠가 우리 가족에게 잘못했던 일들이 주루룩 생각나더라고요. 항상 이렇게 사이가 좋은 게 아닌데 또 행사가 있는 날은 웃으며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건강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다가 또 밉다가 짠하다가.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마음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면에서 상아님의 감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더 공감하며 읽었네요. 저는 4남매라서 가족 행사가 있으면 책임도 나눠지니까 너무 편했어요. 그런데 상아님은 혼자서 너무 고생하셨겠네요. 토닥토닥.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정말 아빠의 환갑잔치 준비하면서 다양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글로 다 쓰지 고민이 많았던…! 공감하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한적’이라기엔 정말 마음이 많이 들어갔네요. 시트콤같은 분위기가 상아가 잔치를 준비하는 동안 느낀 복잡한 마음과 잘 어울렸어요. 7차시에 ‘그래도 아빤데’ 라고 쓰셨던 부분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게 이 글 덕분이었던 것 같네요. 어머니께서 갖고 계신 “정상가족에 대한 염원”이 아버지가 지난 삶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정상가족의 틀을 깨야만 하는 걸까요? 글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