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씨를 먹으며 / 이미옥
‘촤르르.’
채반에 담긴 호박씨를 휘젓자 까슬하게 마른 씨앗들이 차분한 소리를 낸다. 며칠 전 어머님이 밑반찬 몇 가지와 멜론만 한 단호박도 가져오셨다. 모든 식재료를 보면 음식을 떠올리는 작은아이의 성화에 호박죽을 해 먹기로 했다.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엄마나 시어머니처럼 손맛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른 음식은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호박죽은 재료가 모든 걸 다하는 데다 간은 먹는 사람이 맞추니 부담이 없다.
겉껍질이 단단하게 마른 호박은 쉽게 잘리지 않았다. 그나마 평평하고 약간 무를 것 같은 꼭지 부분에 칼끝을 대고 아래로 힘을 주며 조금씩 칼집을 냈다. 칼집이 만나는 데서 칼을 살짝 비틀어 힘을 주자 호박이 쩍 갈라졌다. “와아!” 아이와 나는 탄성을 질렀다. 뿌연 초록색 호박 속은 석양을 모조리 삼킨 듯한 주황빛으로 가득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속을 숟가락으로 파내 대접에 담았다. 손질한 호박을 불에 올리고 대접을 바라보니 버리기 좀 아까웠다.
어렸을 때 씨앗이 담긴 자잘한 채반들이 햇빛이 잘 드는 마당에 놓여 있었다. 농사가 많은 주인집 종자 씨앗이었다. 채반을 흔들면 자갈 소리가 나는 동부콩, 고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깨, 햇빛을 받아 석류석처럼 빛나는 팥까지. 심심한 아이는 씨앗 위에 그림을 그리고, 만지작거리면 나는 다양한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그 안에는 아이의 촉감과 청각에는 못 미치지만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배가 볼록한 씨앗이 있다. 누가 볼까 두리번거리다 씨 한 개를 꼭 쥔다. 콩닥거리는 마음이 진정되면 씨앗 귀퉁이를 이로 부러뜨리고 그 틈으로 손톱을 밀어 넣어 껍질을 벗겨 낸다. 갸름한 올리브색 씨를 입안에 넣고 씹을 때의 ‘아, 그 고소함이란….’
내 움직임을 연신 쫓고 있는 딸아이에게 그 맛을 전해 주고 싶었다. 씨에 붙어 있는 속살을 털어 내고 물로 여러 번 헹궜다. 상아빛 씨앗을 채반에 건져 물기를 뺐다. 그 사이 호박이 익었는지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푹 익은 호박을 국자로 으깨고 한소끔 더 끓였다. 삶은 팥과 찹쌀가루를 넣고 천천히 저었다. 뜨거운 열에 여기저기 호박죽이 튀기 시작했다. 서둘러 소금 간을 하고 불을 줄였다. 아이와 마주 앉아 기분 좋게 달달한 맛을 즐겼다.
며칠 동안 그 아이처럼 호박씨가 잘 마르는지 휘저었다. 소리가 날 때마다 옆에서 딸아이가 다 됐는지 물었다. 그리고 오늘, 채반에 부딪힌 씨앗이 ‘촤르르’ 소리를 낸다. 단호박 씨앗은 골이 굵직굵직한 노란 호박 씨와 달리 배가 납작하다. 겉껍질을 벗기자 겨우 손톱 두께 정도의 얇은 속살이 나온다. 어느새 왔는지 딸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입에 넣으니 콩류 특유의 비린 맛이 먼저 와 닿는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마른 씨앗은 태양과 바람을 적절히 만나지 못해서인지 그리움이 밴 아쉬운 맛이 났다. 딸아이가 실망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에어프라이기에 넣고 돌렸다. 겉이 노랗게 익은 씨앗은 제법 고소했다. 아이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알맹이를 빼내 좋아라 입에 넣는다.
이런 수고 없이 마트에 가면 알맹이만 든 호박씨 한 봉지를 쉽게 살 수 있다. 호박씨가 들어간 요리를 안 해서인지, 깨진 데 없이 온전한 씨앗으로 가득 찬 봉지가 낯설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사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작은 손에 비밀 하나 쥐고 콩닥거리는 가슴을 들킬까 두리번거리던 아이에게 미안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