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시절 / 허숙희
스마트폰 알림 소리인 가수 윤항기의 ‘나는 행복합니다’ 노래가 들린다. 열어보니 ‘분당 제자 김○○’이란 이름이 떴다. 첫 부임지인 분당초등학교에서 처음 담임했던 5학년 2반 아이다. 자주 전화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안부를 묻고 코로나로 한동안 만나지 못하던 친구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다음 모임에는 선생님을 모시기로 했다고 참석할 수 있는 날짜를 묻고 장소는 나중에 알려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달력에 만나기로 한 날에 빨간펜으로 동그랗게 표시해 두었다.
열아홉 살이었던 1975년 2월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3월 교단에 섰다. 매일 언니와 학교에 가고 싶다고 졸라 아버지께서 생일을 적당히 고쳐서 만 다섯 살에 입학시켰다고 한다. 당시에 그 정도는 가능한 일이었나 보다. 그래서 남보다 일찍 어린 나이에 교사가 되었다. 도중에 휴직도 없이 근무하여 정년으로 퇴직할 때 다른 사람보다 경력이 많았다. 근무 기간이 길어 퇴직 후 매월 25일이면 연금이 나와 아버지 덕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초임지에서는 나이가 어려 막내라는 이유로 어려움이 많았다.
첫 학교는 그해 1월 1일 자로 경기도 광주군에서 성남시로 막 편입된 작은 농촌 마을에 있었다. 지금은 성남시 분당구에서 규모가 꽤 크지만 그때는 전형적인 농촌지역 12학급 작은 학교였다. 발령받는 날 교장 선생님께서 교육청까지 나오셔서 맞아 주셨다. 또 버스에서 내리니 기다리고 계시던 선생님들이 모두 뛰어나와 반갑게 환영 해 주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이미 담임 배정이 다 끝났고 2, 4, 5학년에 한 학급씩만 남겨 두었다. 함께 발령받은 신임교사는 나를 포함하여 세 명이었다. 같은 대학 동기였으나 모두 나보다 두 살이나 위라 내가 막내였다. 희망하는 학년을 물어보셨다. 세 명 모두 2학년 담임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듣고 있던 교장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5학년 담임은 셋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내가 해야 한다고 했다. 담임 배정의 기준이 키라고 하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인사 기록 카드에 생년월일까지 확인했는지 나이도 제일 어려서 적임자라고 덧붙였다. 내가 좀 난처한 표정을 지었더니 앞에 있던 나이 지긋해 보이는 선생님이 가만히 있으라고 눈을 찡끗했다.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이후 그곳에서 근무하는 3년 내내 고학년만 담임하였고 힘든 일 대부분은 막내라는 이유로 내가 맡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때마다 나이를 들먹이며 이해하기 힘든 기준을 내놓았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바로 문교 법전이었다. 토론이나 협의는 그 학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의 결정에 누구 하나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요즘의 학교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발령받은 첫날 교무실에 있는 지난해 현황판을 무심코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교장 선생님 눈에 띄었는지 허 선생님이라면 잘 해낼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우며 내게 시켰다. 학기 초에 학교에서 가장 신경 쓰는 일은 교육청 대회의실에 1년 내내 걸어 놓아야 하는 학교 현황판을 만드는 일이었다. 학교의 얼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담이 커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런 일을 신규 교사인 내가 해야 한다니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다행히 같은 대학 선배 선생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
규모가 작은 학교에 행정실이 따로 없던 그 시절에는 학교 경리업무인 도급경비와 육성회 일도 교사들이 했다. 매달 각종 경리 관련 장부를 정리해 교육청에 가지고 가서 검사받아야 하는 부담이 있어서 선생님들이 피하려고 했다. 그 일도 내 몫이 되었다. 여상을 졸업한 덕에 별로 힘들지 않았다. 교육청 업무 담당자는 경력 없는 교사가 어려운 일을 깔끔하게 잘한다고 갈 때마다 칭찬해 주었다. 그 공이 인정되었는지 발령 첫해 12월에 유공 교원 교육장 표창도 받았다. 하지만 암행 감사 기간이면 잘못한 것이 없어도 공연히 가슴 졸이며 걱정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 규모별로 참여 교사 수를 배당하여 모든 학교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1인 1현장 연구 발표대회’와 ‘수업 실기 대회’는 입선을 가려 승진 가산점을 주었지만 힘들고 어렵다고 선생님들 대부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막내인 내 몫이었다.
덕분에 일찍부터 승진 가산점을 얻게 되었다. 운동회 날 경기장을 장식하는 용진 문과 개선문 제작도 당연히 막내였던 내 몫이었다. 연구지정학교 수업 공개, 장학 지도가 이루어지는 날 모델수업 모두 피해 갈 수 없었다. 학교 교육계획서나 가정통신문 등 중요한 인쇄물을 철필로 쓰는 일도 내가 해야했다. 탄천에 미루나무 심기, 학교 논에 모내기와 추수, 학교 실습지 버섯 재배하기, 숙직실 이불 빨래며 숙직 교사가 저녁 반찬으로 먹을 김장도 고학년 담임이었기에 실과 시간을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 담가야 했다. 수업 이외에 주어진 잡무 부담은 늘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일은 많았지만 다정한 동료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계셔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처녀 선생님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가끔 퇴근 후에 근처 모란장에 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피로를 풀기도 했다. 또 보너스가 처음 생기던 해에는 처음 받은 보너스 전액을 모아 ‘정우 장학회’란 이름으로 학교에 기부하여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망설이는 졸업생에게 해마다 중학교 입학금(그 당시는 중학교가 의무 교육이 아니었다)을 주기도 하였다. 가끔 학부모님들께서 장에 다녀오면서 도넛과 사이다를 사다 주기도 했고 교실로 감자와 고구마를 쪄서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의 푸근함이 느껴진다.
힘이 들고 경험은 없었으나 가르치는 열정은 하늘을 찔렀다. 지금과 같이 보충수업 수당도 없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열정 하나로 가르쳤다. 바쁜데도 학습이 부족한 아이들을 남겨 놓고 더 가르쳤다. 일명 나머지 공부다. 일요일에 근무하는 날이면 마을별로 아이들을 불러서 부족한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방과 후에는 상고에서 익힌 주산을 지도해 주었고 대학에서 배구부였던 나는 운동장에서 배구 실력을 뽐내며 아이들과 뒤엉켜 자주 어울렸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 생라면을 나눠 먹으며 놀거나 방학 중에는 수원 집에 데리고 가 맛있는 것을 사 주고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추운 겨울에 에너지 절약으로 조개탄을 때지 못하는 날이면 차가운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이 측은해서 숙직실 연탄불에 물을 데워 주곤 하였다.
그 시대는 한 줄 세우기 교육이었다. 학생 중심이 아닌 교사 중심 수업으로 주입식으로 가르치고 객관식으로 평가하고 개인의 소질이나 성향은 고려되지 않았다. 특히 해마다 12월에 실시하는 ‘도 학력고사’를 치르고 나면 점수를 반별로 비교하였고 시 전체 학교 순위까지 발표되었다. 심지어는 감독 교사도 학교별로 바꾸어 가며 평가가 이루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또 남을 배려하고 나누고 협력하는 인성 교육보다 1등이 대접받고 남을 앞서는 경쟁교육으로 일관하였다. 창의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달달 외워 머릿속에 주입하는 교육이었다. 학급별 비교는 성적뿐이 아니었다. 매달 학급 저축도 학생 개별로 저축액을 통계 내어 막대 그래프로 그리고 육성회비 납부 실적도 반별로 비교하였다. 학교에서 정한 학급 시험 점수 목표에 미치지 못할 때는 운동장을 토끼 뜀뛰기로 돌게 하는 단체 벌을 주기도 했다. 심지어 육성회비를 여러 달 내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언제까지 가지고 올 수 있는지 다짐받았고 때로는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가정방문을 다녀온 후 두 시간 가까이나 걸리는 먼 길을 걸어서 학교에 온 아이를 집으로 보내는 일은 할 수 없다고 윗분에게 말했다가 다른 학교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너무 많이 했다. 그런데도 초임지에서 만난 순진무구했던 아이들과는 그곳을 떠나 50년이 지난 지금도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다.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가 크게 표시된 6월 15일이다. 첫 부임지의 첫 제자 5학년 2반 분당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다.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 거울 앞에서 꽃단장하느라 바빴다. 풋풋했던 열아홉 살 때의 모습은 사라지고 깊게 주름지고 늙어 버렸지만 마음은 50년 전 분당초등학교 그때 그 시절로 가고 있었다. 스마트폰 알림 소리인 윤항기의 ‘나는 행복합니다’ 노래가 들린다. 받아보니 분당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약속 장소로 함께 가려고 집 앞에 와 있다는 전화였다. 창을 열고 내려다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 두 명이 있었다. 율동에 살던 정○○, 며칠 전에 ○○시의 부시장이 되었다고 기쁜 소식을 알려 온 수내동이 집이었던 김○○였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밀고 집을 나섰다. (이후 이야기는 2부로 이어 써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