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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로의 여행
― 김민정, 누가, 앉아 있다, 고요아침, 2017. ― 제만자, 강을 보는 일, 동학사, 2017. ― 천성수, 똥, 한글문화사, 2017. ― 조한일, 지느러미 남자, 고요아침, 2017.
이송희(시조시인)
1. 진동과 파장을 건너 닿은 꿈의 문장들 ― 김민정, 누가, 앉아 있다, 고요아침, 2017.
1985년 ≪시조문학≫으로 데뷔하여 나 여기에 눈을 뜨네, 지상의 꿈, 사랑하고 싶던 날 외 여러 권의 시집과 평설집, 수필집 등을 펴내며 폭넓은 활동을 선보였던 김민정 시인. 그녀의 이번 시집 누가, 앉아 있다는 시조시단에서 보기 드문 수석壽石 시조집으로 그 의미를 더한다. 몇 해 전부터 돌과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던 김 시인은 이번 시집이 강과 바다에서 헤맨 날들의 기록임을 고백한다. 월간 ≪수석문화≫와 ≪나래시조≫에 수석시를 연재했던 지난 3년간의 시간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에 실린 수석壽石들은 거의 문양석이며, 몇 개만 형상석이라 한다. 60여 편의 시를 선별하여 영어번역을 곁들이고, 수석壽石 사진을 함께 담고 있다. 그녀의 이번 시집에는 이렇게 다채로운 풍경과 함께 “깨어지고 엎어지고 상처에 얹힌” 날들을 견뎌가며 “진동과/ 파장을 건너” 닿고 싶은 꿈의 문장들이 펼쳐진다. “손발을 쉬지 않고 바쁘게 달려왔을” 고단한 생을 잠시 내려놓고 “뭐라고/ 말문을 뗄 듯/ 머뭇대고 있는 사람”(「누가, 앉아 있다」), 바로 시인이 여기 있다.
겨운 삶 등에 지고 모래밭을 타박이며 얼마나 느린 발길로 너는 걸어 왔을까 시간은 모래바람 속 온 길이 다 묻힌다
너를 통해 흘러왔을 나의 강을 바라보며 뜨거운 고도 향해 휘파람을 불어가며 혹처럼 굽은 생애가 신기루로 흐른다
오랜 어둠을 깨며 멀어지는 밤 같은 한 생애 푸른 비단을 펼쳐놓은 저 달빛 속눈썹 짙게 젖어든 외로운 등이 휜다 ― 「낙타」 전문
시적 화자는 지금 뜨거운 모래밭을 힘겹게 걷고 있다. 오랜 어둠과 동행하며 느리고 더디기만 한 삶에 외로운 등이 휜다. 모래밭으로 이루어진 사막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다. 풀 한 포기 찾기 힘든 황무지다. 화자는 낙타의 굽은 혹을 보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생각한다. 지나온 삶이 모래 바람에 다 묻히던, 덧없는 삶을 혼자서 잘 지내왔다. 모래의 덧없음을 깨달아 가는 것일까? 모래로 쌓은 성城은 오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그 모래밭을 낙타는 굽은 허리를 하고 걸어 온 것이다. 외롭고 덧없는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모래 속에 묻힌다.
하늘의 벅찬 숨결 그대로 땅이 받아
홀로된 꽃대궁도 꽃씨를 받아 둔다
순간은 모두 꽃이다 내 남루도 그렇다 ― 「꽃, 그 순간」 전문
꽃 안에는 암술과 수술이 있다. 꽃은 벌과 나비를 통해 또 다른 꽃과 새 생명의 잉태를 준비한다. 즉 꽃은 씨앗을 낳고, 그 씨앗에는 우주가 담겨 있다. 우주가 담겨 있다는 것은 이 꽃 안에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이 만났다는 것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며 만물이 생성하는 생식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꽃은 번식행위의 가장 주요한 기관이다. 화자는 이 소중한 생명 탄생의 순간이 모두 꽃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남루한 시간들을 하나 하나 껴안는다.
부처님이 묻지 않아도 가섭은 알았다는 듯
다소곳이 모은 손과 수굿하게 숙인 고개
말없이 생각은 만 리, 마른 가슴 꽃이 피네 ― 「말문을 닫다 - 이심전심」 전문
궁극의 진리는 언어로 온전하게 전달하기 어렵다. 선종禪宗에서 언급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처럼 그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말없이 생각은 만 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구 반대편까지 간다는 이야기다. 어떤 한 사람이 큰 깨우침을 얻으면 인류가 그 혜택을 받는다. 예수나 석가가 있으므로 우리는 불현듯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듯이 말이다. 세상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상호의존적이다. 한 사람이 큰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똑같은 깨달음으로서 영향을 미친다. 말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말문은 닫혔지만 마음은 항상 열려 통하고 있다는 이심전심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화자는 “아는 게/ 많아질수록/ 고개 들지 않노라고”(「쉼표」) 말한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도 많아지는 법이니 더 겸손해야 한다는 암시다. “잘근잘근 밟히며 온. 삶의 질긴 근육들이// 물들다/ 물들다 못해/ 지친 날을 쏟는”(「십일월 생각」) 순간을 온전히 견디며 낮게 걸어 온 화자가 여기 있다. “한 때는 물이 흘렀을/ 건천을 지나가며// 내 생도 지고 가는/ 목마른 낙타 등에// 사막을 가로질러온” 화자, 그는 “비로 치는 햇살/ 온 몸으로 견뎌내며// 시간을 되감아간다”(「타클라마칸 사막」), 여전히 “젖은 길이 봉긋하다”(「안개에 젖어」). “아랫녘은 푹푹 빠져/ 발목이 잠겨도” “단단한 울음의 뼈가// 문양으로 드러”(「모래울음을 찾아」)나는 순간을 위해 화자는 참고 견딘다.
2. 깨달음을 위한 성찰의 여정 ― 제만자, 강을 보는 일, 동학사, 2017.
1989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한 제만자 시인은 그동안 펴낸 행간을 지우면서, 화제리, 그 풀잎, 붉어진 뜰을 쓸다 등의 시집과 성파문학상 수상으로 확고하게 입지를 구축한 중견이다. “머문 듯 흘러가는 강물 따라 그냥 보내야 할 것들”을 덥석 잡아 묶었다는 이번 시집은 그야말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순간들과 손잡고 호흡한 시간들이 펼쳐진다. “뒤척이며 지낸 날들 굳게 입 다물고// 다시 뜨거운 볕 아래 맑게 피는 꽃”을 보며 “세상의 시름도 잠시// 피었다가// 지는 거”「쑥부쟁이」)라는 깨달음으로 겨운 삶을 다독이는 생의 방식이 그녀 시심을 관통한다, 살다보면, “내 품을 빠져나간 걸치지 못한 날들”(「꽃범의 꼬리」)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녀는 “봄볕에 햇살 굴려 길을 닦는 부처처럼// 절 마당 어귀에 나와 덩그란 몸을 사르”(「꽃의 점등식」)며 세상과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시선으로 재생과 부활의 삶을 꿈꾼다.
기다리는 버스가 오나 검색버튼을 누르다 막 지나간 차 한 대에 여운을 담지 않는 건 내 굼뜬 세상의 바퀴로 갈 곳이 있기 때문
이 시간 비킬 수 없는 나른한 햇볕과 몸 비비적대다 그만 우선멈춤이 긴 날 누군가 보내준 마음도 돌아서 오고 있다 ― 「기점起點」 전문
기점起點은 무언가가 일어나는 장소이며 시작점이다. 버스 도착 알람 어플은 지나간 버스 정보는 뜨지 않고 다가올 버스 정보만 안내한다. 그러나 어차피 때가 되면 정류장을 지나쳤던 버스는 다시 돌아온다. 지나간 것은 더 오래 기다려야 온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우리네 삶의 방식도 이와 같아서 비킬 수가 없다. 제때 버스를 못 타면 오래 기다려야 하고 목적지에 제 시간에 갈 수는 없겠지만 화자는 “막 지나간 차 한 대에 여운을 담지 않는”다. “내 굼뜬 세상의 바퀴로 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나른한 햇볕”의 여운 속에서 “우선멈춤이 긴 날”은 시간에 쫒기다 놓아 버린 자신과 손잡는 시간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가끔 “먼 곳으로 여행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우선멈춤’의 경험을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먼 곳으로 여행을 한다 사막의 끝이거나 정상에 오르는 일이 서로 더 갈망키 위해 손 흔든 약속이듯
우리의 여정이 필요 없이 먼 것도 결국 사는 동안은 낯선 어느 길에서 발 씻고 나무의자 하나 쓸쓸히 맞는 거라서 ― 「여행」 전문
여행의 끝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의미 있는 것인지를 깨닫기 위한 일탈과 같은 것이다. 인생도 여행, 낯선 곳을 보는 것도 여행이다. 여행을 가지 않으면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다. 서로를 갈망하는 것은 현재 자기 자신을 깨닫기 위한 성찰의 여정이다. 원래 우리의 모습은 완전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 완전하고 완벽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깨닫기 위해서 ‘부재하고 결핍된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것이 곧 인생이다. “발 씻고 나무의자 하나 쓸쓸히 맞는 거라서”에서 발을 씻는다는 것은 더 이상 걷지 않고 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계속 걸어가야 하는 동안에는 발을 씻지 못한다. 그래서 휴식, 우선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걸어왔던 낯선 길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가야할 길을 헤아리는 소중한 시간을 만날 수 있다.
길 위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아 나선다 세상에 닳고 닳은 숨 막히는 일상 끌고 그 뜰 안 넌지시 넘듯 발을 살짝 들인다
누가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된 곳에서는 부는 바람 재우고 물소리 맑게 흘러 매화꽃 틔운 영혼이 마음 안에 부푼다
내미는 빈손에 새로 피는 인연이다 뜻 없이 깊은 한숨 달래주는 종소리다 가다가 잃어버린 길 다시 찾아 나선다 ― 「텅 빈 충만에 기대」 전문
텅 빈 것은 꽉 찬 것과 같고, 꽉 찬 것은 텅 빈 것과 같다. 이것은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道와 같은 개념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을 만든다. 이것은 무한無限이 없으면 유한有限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런 상호의존성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한다. 타인他人이 있으니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은 항상 낯이 설 수밖에 없다. ‘나’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선다. 좀 더 깊게 들어가면, 타인을 통해 보는 것은 언제나 바로 ‘나’ 자신이다. 왜냐하면 ‘나’라는 의식으로부터 이 우주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 이야기하는 빛의 성질과도 같다.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기도 하다. 바꿔 이야기하면, 우주는 텅 빈 것이자 동시에 꽉 찬 것이다. “길 위에서 잃어버린 길”은 놓쳐 버린 인연일까? “세상에 닳고 닳은 숨 막히는 일상 끌고”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인연들을 다시 찾아 나서는 것일까? “내미는 빈손에 새로 피는 인연”을 만나기 위해 화자는 “가다가 잃어버린 길 다시 찾아 나선다”.
그 해 여름 내내 한의원을 들락거렸다 밖으로 향이 새는 굽 낮은 이층집에서 계집이 문 넘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채다
사람 역시 오래면 쓰던 무릎도 녹슨다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대침이 가로놓인 뭔가가 빠져나간 듯 마음 오솔한 날이었다
한때 전망 좋은 방 한 칸 갖고 싶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방 하나씩 늘리는 거 고장 난 힘줄의 뒷골목에 또 램프를 켜는 저녁… ― 「공간」 전문
나이를 먹는 것은 공간이 늘어난다는 것일까?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세월이 쌓이다 보니 공간은 늘어난다. 자기 안에 공간이 넓어지면서 녹이 슬고 몸도 고장이 난다. “밖으로 향이 세는 굽 낮은 이층집”은 화자의 녹슨 몸과 닮았다. “뭔가가 빠져나간 듯 마음 오솔한 날”은 공간이 넓어지면서 만난 날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방 하나씩 늘리는 거”라는 진술은 세월이 쌓이면서 가족들 다 빠져나간 텅 빈 방 안에 낡은 몸 하나 덩그러니 놓인 노년의 생을 보여준다. 그러나 화자는 “고장 난 힘줄의 뒷골목에 또 램프를” 켠다. 되돌려 보는 추억의 뒷덜미를 한하게 비춘다. “꽃밭에 출구가 없어” “이미 정해진 길에 또 한 발 늦었지만”(「가을과 외나무다리」) 화자는 느리게 가는 법을 안다. “가는 길 가물거릴 때// 말을”(「그리움-메꽃」) 걸어 주는 ‘나’라는 친구와 함께 “설레는 칸칸마다 곤한 발 끄는 소리”를 들으며 “추억의 한밤을 새러 귀로에”(「구포역, 노을」) 서보기도 한다. “한 시절 밀려들던 회색빛 긴 겨울”(「문 밖에서 듣는 경」)이 문 밖에 성큼 다가와 있다.
3. 길 위에서 그리는 낯선 자화상 ― 천성수, 똥, 한글문화사, 2017.
2005년 ≪부산시조≫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시집 바다로 가는 길에서 부르던 노래 이후 두 번째 시집을 엮는 천성수 시인은 모름지기 좋은 작품은 사람들 가슴 속에 울림이 있어야 한다고 하며 자전적 시론을 통해 말문을 연다. “온몸으로 느끼는데 왜 이리 힘이 들까” 생각하면서도 “아무리 풀려 해도 마디마디 막히는 길// 버리고 돌아앉으면 웃어줄까”(「길 없는 시조」) 싶어 늘 곁에 둔 시조 편편이 정겹다. 그는 “그럭저럭 살다보며 목련이 지는 거다// 젖니로 돋아났다 저렇게 떨어지면// 며느리 볼록한 뱃속 봉오리로 돋는 거다”(「피고 지고」)라고 하며 피고 지는 자연 사물의 현상을 노래한다. 또한 ‘봄’을 “마을마다 수군대는 눈부신 소문”, “물무늬로 번져가는 화사한 웃음”으로 비유하며 “내안의 파란 씨앗들 기지개를 켜고 있다”(「봄」)고 묘사하는 수수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앞 다투어 풀어헤친 발정 난 봄바람이
가지 끝을 핥아 대며 사정을 했나 보다
톡톡톡 깨어난 알들 웃음소리 하얗다 ― 「매화 홀레붙다」 전문 꽃은 식물의 생식기다. 특히 봄은 만물이 깨어나는 계절이어서 에로티시즘과 연관이 된다. 가을이 타나토스의 계절이라면 봄은 생의 기쁨, 사랑의 결실, 탄생을 표상한다. 벌이 꽃에 달라붙어 당을 뽑으면서 암술과 수술을 이어주는 계절이 봄이다. 식물들의 짝짓기의 계절이다. 씨앗이 싹이 틀 때 솟구쳐 나오는 강렬한 떨림이 있다. 봄은 상향하는 계절로 들뜨고 긴장하는 계절이며, 가을은 하향하는 계절이다.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으로 생각하면 된다. 「일어서는 봄」에서도 시인은 “햇살이 배를 깔고 알몸으로 누운 정원/ 아가씨들 몸매 보소 솔기가 터지겠다/ 총각들 아랫도리가 시나브로 불끈불끈”이라는 표현으로 충만한 생명력을 표현한다.
내 안에 가라앉던 서늘한 시간들이 오늘은 산자락에 억새로 피어있다 가을이 문밖에 서서 소주잔을 채우는데
그리움도 나이 들면 눈물로 맺히는가 걸어온 길 돌아보며 낙엽만 수북하다 어디쯤 와 있는 걸까 풀벌레만 우는데 ― 「가을밤에」 전문
가을밤이 되면 낙엽도 지고 청량한 바람도 불어온다. 원래 가을이란 계절은 지난날의 영광을 되새기는 추억의 계절이다. 수확을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봄과 여름에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면 가을이 되어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가을은 반성과 수확의 계절인데, 낙엽만 수북하다고 했으니 지난 계절에 대한 회한만 가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실 없는 삶을 살아 온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가을밤처럼 깊다.
1. 지하철 출입문에 누가 나를 보고 있다 어머니 같았다가 아버지 같았다가 멈춘 뒤 문이 열리니 내가 거기 서 있었다
2. 눈 뜨고 지나온 길 눈 감고 바라보면 내 안에 낯선 이가 표정 없이 앉아 있다 꽃비가 내리는 저녁 세상 끝을 내다보며 ― 「낯선 자화상」 전문
엄마, 아빠가 내 안에 있다. 세상 끝을 바라보는 것은 황혼이거나 곧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뜻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를 낳게 한 아버지 어머니도 보이고 꽃이 지는 것도 보인다. 인생의 덧없음도 보인다. 자화상은 자기를 그리는 행위다. 낯선 자화상에 대한 인식은 “깊은 밤 비가 오면 내가 나를 떠나간다/ 떠나간 나를 찾아 빗속을 걸어가면/ 키 작은 나를 만난다/ 낙엽 툭툭 털어버린”(「자화상 찾기」) 이라는 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인생사는 다 페르소나다. 역할극에서처럼 엄마, 아빠, 선생, 시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역할을 벗고 자기 자신을 만난다. 진짜 자기 자신을 찾기 전까지는 여행이 끝나지 않는다. 진짜 자기 자신이 ‘조건 없는 사랑’이어서 그 모든 사람이 내 자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면 더 이상의 윤회·환생이라는 환상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각성이 온전하지 못하기에 결핍과 부재의 꿈은 계속 반복된다. 역할극에 길들여져 나 자신의 모습이 낯선 이유는 여기에 있다. “펄럭이던 시간들을 다독일 수 있어선지// 풀벌레 우는 밤은 어둠조차 맑고” 고와 보인다. “눈 감고 가라앉으면 환해지는 세상 끝”(「沈潛」)에 화자가 서 있다. “돌아 갈 수 없는 길 물끄러미 쳐다”(「12월 31일」)보며, 낯선 자신을 마주하는 중이다. “말 없이 허공을 향해 꿋꿋하게 선 채로”(「바지랑대」).
4. 초점을 잃은 시선에 담긴 세상 ― 조한일, 지느러미 남자, 고요아침, 2017.
2011년 ≪시조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조한일 시인의 지느러미 남자는 “여태 왔던 길을 거울삼아” 두 번째, 세 번째 여정을 위한 지속적인 존재 찾기의 더딘 행보를 담고 있다. 물맛도 모르면서 물만 찾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은 시조창작을 향한 깊은 성찰이 아니었을까? “깜빡 졸다 무심결에/ 무너뜨린 도미노처럼// 지워진. 시 한 편을/ 겨우 일으켜 세”우며, “거꾸로 쏜 화살은/ 나를 향해 오는 거”(「백스페이스」)라는 겸손한 인식으로 3장 행간을 오고 갔을 그의 걸음이 여기 멈춘다. “안경에 익숙해진 형상들이 굴절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 간극이 벌어지”는 이곳에 화자는 서 있다. “어차피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보는 세상”(「오래된 안경집을 열며」)이 아닌가라는 인식이 그의 시를 일으켜 세운다.
누명 쓴 물이 파업을 결정했다
흐르는 대로 살다가 역류하지 않은 이 그 누구랴? 한잔이라도 안 마시고 하루가 간 적 있었던가? 7할을 빼고 나면 육신은 흔들리지도 않고 뜨겁지 않으면 쌀도 밥이 될 수 없는데, 그 물이 단단히 부아가 치밀었다 날물로 볼까 거들먹거리지 않은 날 하루라도 있었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유영을 멈춘 날도 없었고, 삼십여 년 전 에스에프SF소설 첫 문장이 ‘아구아’, ‘아구아’란 것을 잊은 적도 없었는데, 그 물에 큰불이 붙은 모양이다. 빡빡 매직블록으로 문지르는 데면 대, 그 사방에 낀 물때는 물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혐의 뒤집어쓴 채 막무가내로 폐기 위기에 몰린 물, 그 물은 말이다 말하자면…
끝내는 큰 배마저도 뒤집어 버린다지 ― 「아구아」 전문
노자의 도덕경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나온다. 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도道를 따르는 삶이라는 것이다. 물은 네 가지 미덕이 있다. 물은 항상 아래로 흐르니 겸손하다. 물은 양보지심이 있어 앞에 큰 돌이 있으면 비켜 돌아간다. 물은 높낮이 없이 수평지심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물은 자기를 더럽힘으로써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 이 중에서 마지막 물의 미덕이 이 시에서 나오는 물의 이야기다. 곧 물은 사람들이 더럽힌 것이지, 물이 더러운 것이 결코 아니다. 오명汚名을 쓴 물은 파업을 결정한다. 물때가 생기는 것은 물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의 잘못이다. 때로는 큰 배마저도 뒤집어 버린다는 것은 평소 얌전하지만 화가 나면 폭풍우로 모든 것을 집어 삼킬 수 있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화자는 물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물 밖에 없다는 인식의 새로움을 보게 한다.
칼바람이 버려진 널 그렇게 흔들어놓아 길가에 낙엽처럼 뒹굴고 있더라도 다 알아, 휘어지지 않는 한 방을 기다리는 날
뒤통수 맞고 사는 게 너뿐이라 생각 마라 뼈마디 휘어가며 붙드는 소용돌이에도 가슴엔 별수 없는 잔정들이 헛도는 거란 말이야 ― 「나사못을 줍다」 전문
나사못은 뒤통수가 조여지며 휘어지면서 들어간다. 마치 소용돌이치면서 어딘가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화자는 나사못을 박는 것을 뼈마디 휘어가며 바로 박히지 않고 헛도는 우리의 삶에 비유했다. 여기에 남은 잔정은 미련이다. 결국 낙엽은 떨어져 나가고 나사못도 떨어져 나갔다. 못은 박혀야 자기 사명을 다 하는 것인데 버려진 나사못이라 말 그대로 제 역할을 못하고 버려진 존재다. 어딘가에 애착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직장 혹은 생의 현장으로부터 버려진 존재가 되고 만 아득한 현실을 화자는 보고 있다. 당신에게 들어가는 문 수천 번 여닫혀도
높이가 맞지 않는 두 어깨를 이어 온
나비가 바르작대며 허공에 붙어있다
한쪽도 놓지 못하는 시곗바늘 궤적처럼
당신 손잡고 건널 돌다리 곱다시 놓고 싶다
풀리면 다시 조이는 끝없는 합장 같은 ― 「경첩」 전문
문에 달라붙어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경첩이다. 이 시는 경첩을 나비로 은유하는 상상을 펼쳐 보인다. “당신에게 들어가는 문 수 천 번 여닫혀도” “높이가 맞지 않는/ 두 어깨를 이어 온” “나비가/ 바르작대며/ 허공에 붙어있다”. “당신 손잡고 건널 돌다리/ 곱다시 놓고”, “풀리면/ 다시 조이는/ 끝없는 합장 같은” 마음이 여기에 있다. ‘합장’은 손바닥을 마주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새로운 인연을 만났을 때,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인사하는 모습과 기도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인연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당신에게 들어가는 문이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고 가깝게 해주는 역할을 경첩이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조율해 주는 소중한 도구로서의 존재를 그린 것이 아닐까?
엑스자로 온종일 발등을 짓누르는 건
구속일까 보호일까 경계가 모호하다
풀어진 운동화 끈을 당겨보는 겨울 새벽
이만한 줄이라도 내게는 있었는지
뒤꿈치 닳아질 때쯤 만지작대는 끄나풀
천장엔 거미 한 마리 줄을 잡고 살아간다 ― 「거미인간」 전문
보호하기 위해서는 구속해야 하고 구속이 되면 보호가 된다. 그러나 실상 경계가 모호해 지는 것은 아니다. “이만한 줄이라도 내게는 있었는지”라고 자문하는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나를 구속하고 보호해 줬던 존재가 있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거미줄은 덫이다. 거미는 자기 집이 곧 생존 도구다. 집 자체가 사냥 도구다. 엑스자로 묶인 신발 끈은 거미줄처럼 자신을 구속하는 덫이자 자신을 먹여 살리는 생존의 사냥 도구다. 덫에 걸린 하루가 또 하나의 덫에 걸린다. 이처럼 조한일 시인은 발랄해 보이는 상상력과 은유 뒤에 씁쓸한 삶의 이야기를 알레고리화한다. “생각 없이 쏟아낸 말 이 악물고 삼켰어야/ 되는대로 나오는 말 잇몸으로 막았어야/ 오늘도 치간 칫솔은 언어들을 체질한다”(「치간 칫솔」)에서도 시인은 말의 공격성과 조심성에 대한 알레고리를 표현한다. “시간당/ 5백만원,/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황제를 부려먹은/ 교도 행정. 괘씸죄// 편의점. 알바 시급 7천 원/ 내 알 바 아니다”(「황제노역」)에서도 황제노역과 갑의 일방적인 횡포를 비판한다. “벽장 속 못 뺀 구멍/ 겨울바람 휑”한 자리, “단 한 번 망치질에/ 주저앉은/ 내 자존심// 게워 낸/ 녹슨 울음으로/ 오목가슴 덧”(「못을 빼다」)대며 오늘도 시인은 춥고 어둔 곳을 바라본다. ▨
이송희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10년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활성화지원금과 2013년 아르코창작기금 받음,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과 오늘의시조시인상, 무등시조문학상 등 받음,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평론집 눈물로 읽는 사서함,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등이 있음. 현재 전남대 국문과 외래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