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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대사의 기적이 일어난 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적 전환점, 1945년 이래 유럽을 지배한 냉전의 종말을 알리는 대사건---------
해설: (동영상) 1989년 11월 9일, 밤늦게 동독의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뛰쳐나옵니다. 동독 주민들은 도끼와 망치를 이용해 28년간 동독과 서독을 가른 베를린 장벽을 부수기 시작한다.
동독인: 이렇게 부셔지는 군요, 별 다를 것 없이~
해설: (동영상) 자유를 갈망하는 동독사람들에게 장벽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벽을 넘었고 결국 장벽은 무너졌다. 그날 밤 베를린을 넘어 독일 전역은 환호와 희망으로 가득찼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서독의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며 국경을 넘은 동독 주민들을 환영했다. 둑이 터진 것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은 국경 수비대 조차 막지 못했다. 28년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마주한 동서독 주민들, 독일의 분단과 20세기 냉전 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날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71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그날, 그 기록에 대한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이 장면을 너무 오랜만에 다시 보는데 왜 가슴이 설레죠. 그렇지 않나요?
이시원/배우: 감격스러워요, 같이 기쁘고 설레구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그냥 부러웠어요. 우리도 저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최원정: 영상 속 저 사람들이 같이 기차놀이 하고 그러는 걸 봐서는 저날에 독일에서 맥주가 제일 많이 팔렸을 것 같애요. 다니엘은 기억이 나요?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저는 기억이 다는 안 나죠. 저는 그때 만4살이었으니까, 저는 기억나는게 뭐냐면 그 당시에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엄마가 저한테 초코푸딩을 만들어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맛있게 초코 푸딩을 먹고 있는데 엄마가 거실에서 막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뭐지 했는데, 뒤는게 알게 된 건 그날이었죠. 11월 9일이었는데 제 죽마고우 친구가 있는데 자기는 정확하게 기억 난데요. 부모님들이 티브이를 보다가 엄청 크게 막 기뻐하셨는데 그래서 엄마 엄마 이거 무슨 영화야~ 부모님들은 시몬아~ 이건 영화가 아니라 지금 실제로 베를린에서 일어난 일이다 라고 해 가지고 정말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진 그런 날이죠.
이시원: 근데 영상 보니까 떠오르는 게 우리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속 반복해서 보았는데 그때의 환희죠. 저 영상이 독일 사람들에게는 그런 영상이 아닐까.
송충기/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안타깝게도 저는 유학 가기 전이니까 제 때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고 나서 유학을 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최태성: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정말 세계사적인 역사적 사건이자 장면이죠. 그렇기 때문에 축조와 붕괴에 관련된 기록들이 굉장히 소상하게 기록, 2011년에 세계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가 되었던 겁니다.
이시원: 그게 등재가 될려면 일기나 문서처럼 있어야 되잖아요?
최태성: 베를린 장벽의 축조와 붕괴에 관련된 사진 영상 문서 이러한 15개의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가 되었는데 (이시원씨를 향하여) 세계 기록유산을 영어로 뭐라고 하지요?
이시원: Memory of the World
최태성: 그래요, 그러니까 기억이란 말이에요. 난중일기라든지 무예도보통지 같은 경우는 그 당시엔 사진과 영상이 없었잖아요. 이제는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런 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기억이 되는 요소가 되죠.
최원정: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네요.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최태성; 그럼요, 영상도 기록이 되는 겁니다.
허준/방송인: (베를린 장벽) 영상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게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잖아요; 집에서 망치를 가지고 와서 막 벽을 깨는 사람들은 열망이 있었다는 거죠.
최태성: 저도 준비돼 있습니다.
허준: 우리는 지뢰 탐지기 같은 거 가지고 가야 돼요.
최태성: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국경을 넘는 행위부터 출발하잖아요. 그런데 국경을 넘는다는 의미가 이게 독특합니다.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진 배경이 뭐냐면 동독 사람들이 국경을 넘게 되면서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진 거에요. 반대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유는 똑같이 동독 사람들이 국경을 넘으면서 이게 무너진 거예요.
이시원: 같은 이유인데 다른 결과가 나온 거네요?
최태성: 그렇죠, 그렇죠, 우리 지난 번에 2차 세계대전 한 번 했잖아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독일이 분단이 됩니다.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지만 독일은 동서로 분단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서쪽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이렇게 연합국이 관할을 하고 동쪽은 소련 공산권, 서쪽은 자본주의 진영, 동쪽은 사회주의 진영으로 분단이 되잖아요. 이때 동독사람들이 대거 서독으로 넘어오면서 이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니엘: 맞아요, 베를린 장벽이 61년에 생겼거든요. 왜냐면 전에는 동독에 있는 고급 인력들이 인재들이 서쪽으로 많이 갔단 말에요. 자유세계에서 본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최태성; 돈도 많이 벌고~
다니엘: 그렇죠, 돈도 많이 벌고 그래서 우리한테 항상 유명한 게 장벽을 만들기 전에 3개월 전까지만 해도 동독정부에서 전혀 장벽을 지을 생각이 없다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얘기를 했는데 사실은 몰래 이미 계획했던 거죠. 저의 오르간 선생님이 61년생이거든요. 그래서 본인이 원래 동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임신을 했을 때 동독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잠깐 출장 때문에 서쪽으로 간 거예요. 근데 거기서 장벽이 생길 거라는 소문을 듣고 와이프한테 지금 있는 짐 싸가지고 그냥 빨리 넘어와라. 그래서 하루 전에 넘어왔다고 하더라구요.
허준: 생명이 생긴 건 동독, 출생은 서독~
홍충기: 탈출을 하고 그러니까 완전히 폐쇄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가령 이산가족 상봉이라든지 인도주의적 목적에 의한 것은 여행허가서를 받아가지고 건너갈 수 있었어요. 물론 동독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서독으로 가니까 주로 연금생활자라든지 노년층에 허가서가 나와서 젊은 사람들로서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무단탈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최태성: 지금 보시면 (동독인들의 이주현황도표) 알겠지만 1949년부터 1961년까지 동독인들의 이주현황을 보시면 알겠지만 무려 270만 명이 넘어갑니다. 어마 어마 하죠. 당시 동독의 인구가 1700~1800여만 명인데 270만 명이 넘어갔다는 얘기는 매년 무려 20만 명씩 넘어 갔다는 얘기죠. 어마어마하게 넘어간 거잖아요. 왜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넘어 갔을까?
허준: 우리도 분단국가잖아요. 탈북민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 이유를 살펴보면 1위가 경제 생활고 그런 걸 따지면 아마도 동독인들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으로 많이 넘어오지 않았을까
송충기: 동독과 서독은 서로 다른 체제잖아요. 그러니까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간다는 것인데 거기에서 제일 중요한 게 먹고 사는 문제예요. 경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최원정: 그렇다면 당시에 동독의 경제는 어땠는지 잠시 알아볼까요?
----------------이광용/아나운서: 아~ 여러분, 그날배송이 왔습니다. (과일 바구니 두 개 배달) 주문하셨죠? 주문하신 거 맞죠? 주문하셨다고 연락 받고 왔는데~
허준: 고물상 느낌인데
이시원: 지구본도 있고
최태성: 지구본도 있고 라디오도 있고
이광용: 여러분 주목해 주세요 경제 상식을 알기 쉽게 쏙~ 쏙~ 전해 드리는 우리 권순우 기자와 함께 동서독 경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권순우/삼프로 TV취재팀:; 오늘 동서독 경제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려 찾아온 삼프로 TV의 권순우 기자입니다. 장바구니에 든 거 지금 손대지 마시고 유심히 보시면서 있다가 가지고 얘기를 나눌 거니까 여러분 혹시 바나나를 가지고 동서남북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애기 들어 보신적 있으세요?
이광용: 권순우 기자, 역사저널 그날 처음 오자마자 반하나~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권순우: 오늘은 독일 얘기잖아요. 예전에 베를린 장벽이 있을 때 바나나를 베를린 장벽 위에다 올려 놨을 때 누가 베어 먹는다 그러면 그쪽이 동쪽이다 라는 동독 농담이 있습니다. 이런 농담이 왜 나왔냐 하면 동서독의 어떤 경제적 상황을 풍자한 농담이에요. 사실 동서독이 나누어진 이후에 서방 같은 경우는 이른바 미국의 마셜 플랜 이라고 해서 (마셜 플랜(Marshall Plan)-제2차 세계대전 전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유럽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계획, 당시 국무장관 조지 마셜의 이름에서 유래) 여기를 공산주의 라인으로부터 지켜야 된다. 그래서 서독에 엄청나게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많이 들어본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전후경제의 호황을 누렸어요.
이광용: 그렇죠,
권순우: 그런데 반대로 동독은 어땠느냐면 승전국이었던 소련이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동독의 공업 설비를 공장이 있으면 설비를 그냥 막 뜯어갔고 철로가 있으면 선로를 뜯어가고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다 가져갔기 때문에 동독 주민의 생활수준은 굉장히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거죠.
최태성: 뼈대를 그냥 다 뜯어가는 거예요.
이광용: 가뜩이나 전후인데 그렇게 소련한테 뜯겼으면 동독 쪽은 먹고 살기가 힘들었겠네요.
권순우: 여러 모로 안 좋았던 거죠. 없는 것도 없는 건데 앞으로 꾸려갈 때 어떻게 꾸려갈 건가를 봤을 때 동독 같은 경우는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되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민간기업을 국유화하고 모든 걸 국가가 통제를 할려고 했었고 심지어 임금 시간 가격까지도 정부가 다 결정을 했기 때문에 굉장히 큰 비율이 발생했던 거예요.
이광용: 우리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우잖아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 계획경제의 문제점,
권순우: 그래서 비율성을 조종하는 동독식의 독일 유머라는 게 있는데~
이광용: 독일이 상당히 재미있는 나라인데 (다니엘을 향하여) 인정 못합니까?
다니엘: 인정 못합니다.
이시원: 다니엘이 SNS에다 독일 유머라고 올렸는데~ 어디서 웃어야 해?
이광용: (권순우 기자에게) 그 독일 유머 한 번 들어나 봅시다.
권순우: 실업자가 30명이 있고 라디오 공장의 일자리는 10개만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거예요. A조 B조 C조로 나눠서 A조는 라디오를 조립합니다. B조는 완성된 라디오를 분해합니다. C조는 분해된 라디오를 다시 조립합니다. 그러면 정부는 우리는 안전고용을 달성했습니다. 실업자가 없는 파라다이스 정부입니다 라고 주장을 하는 거죠.
이광용; 이거 군대 다녀온 사람은 뭔지 다 알아요. 작업을 시켜야 되는 데 일이 없어요. 그래서 땅을 파라고 해요. 그리고 땅을 메우라고 해 다시 파~ 다시 메워~
권순우: 정부가 주도를 할려면 정부가 주도를 잘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 동독 정부 같은 경우에는 화학이라든지 정밀기계 이른바 중공업 이라고 불리는 품목들, 국제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분야에 우선순위를 두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생활해야 되는 소비재라든지 공산품 같은 경우는 생산성이 굉장히 떨어지게 된 겁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인 1950년대를 보면 동독의 생산성은 서독보다 25%가 낮았고 그리고 국민들이 느끼는 생활수준은 무려 40%나 낮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광용: 절반 정도 밖에 안되었던 거네요.
이시원; 그러니까 솔직히 동독 사람들은 당연히 나 이렇게는 못살겠어, 나도 서독 가야겠어 이럴 것 같애요.
허준: 가만 보니 젊은이한테 미래는 없다 그러면 도망갈 생각하는 거죠.
이광용: 조금 전에 저와 권순우 기자가 여러분에게 배송해 드린 물건~ 지금부터 확인해 보세요.
허준: 독일서 커피 안마시나~
최태성; 이건 뭐야
이시원: 스타킹 세계지도 바나나 분유?
다니엘: (지도책을 들고) 이건 독일에 뤼건섬 있거든요. 유명한 섬, 지도
최원정: 확실히 먹는 건 죄다 큰별샘 앞에 갔다 놓은 거 봐요.
허준: 초코렛은 안 뺏겼지
이시원: 이 물건들이 뭐에요?
이광용: 그걸 권순우 기자가 설명해 드릴겁니다
이광용: (최태성씨가 바나나를 먹음) 뭐하는 거에요, 지금?
권순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 서베를린의 한 백화점에서 동독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샀는지에 대해서 쇼핑 리스트를 공개 했어요. (1989.11.9. 국경개방 조치 이후 동독인들의 쇼핑 리스트: 1위 신문 2위 수입과일(파인애플 바나나 등) 3위 고급과자 4위 카세트 라디오 5위 커피 6위 캔맥주 캔 음료 7위 복권 8위 팬티 스타킹 9위 어린이용 그림책 10위 지구본 세계지도), 당시에 서독에서 동독 사람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1인당 3만 6천원씩 현금을 지급했습니다. 만약에 나에게 꿈에 그리던 서독에 갔을 때 돈을 준다. 그럼 어떤 물건을 사셨을 것 같으세요?
이시원; 저는 1위 신문이 너무 공감이 가는게 세상 돌아가는 게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할 것 같애요.
이광용; 그런 게 아니라 (권순우 기자를 향하여) 왜 샀을까요?
권순우: 신문에는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내가 서독에 갈 수 있게 된 그날 나온 신문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이광용; 당연히 신문이 필요했던 거지요. 역사적인 날이니까.
권순우: 그날이니까 큰 별샘! 평소에 바나나 드시기가 쉽지 않으신가요?
최태성; 지금요?
이광용: 1989년은 대한민국도 파인애플과 바나나를 먹기가 쉽지 않았어요.
허준: 바나나가 송이로 있다는 사실을 안 게 1988년이네요. 하나씩 있는 줄 알았어요.
최태성: 동독 사람들이 마트에 가서 바나나를 이렇게
이시원;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맛이야!
권순우: 그리고 6위를 살펴보면은~ 캔 음료수 관련된 얘기가 나오는데요. 맥주는 독일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동독은 내부적으로 소비재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동독에 캔이 없어요. 맥주는 자기도 먹어 봤는데 캔에 들어있는 맥주는 못 먹어본거예요. 그래서 서독으로 가자마자 캔 맥주부터 먹는 그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최원정; 좀 의외이지 않아요. 저는 동독 사람들은 좀 더 생활 필수품을 사서 나를 줄 알았는데 비누 세탁 쌀 이런 걸로 알았는데 동독이 엄청 못 살지는 않았나 보죠?
권순우: 그럼 우리 한 번 차트를 살펴 보실까요? 지금 보시는 차트가 동독과 서독의 1인당 소득추이를 나타내는 차트예요. 이 그래프를 보시면은 분단 싲점부터 통일까지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동독이 서독 보다는 못 산다고 하더라도 당시에 남한하고 비교를 하더라도 훨씬 잘 살았습니다.
이광용: 상대적으로 잘 살았는데 왜 동독 사람들이 장벽을 넘어서 탈출을 시도했던 거예요?
권순우: 이게 사람들이 불만을 갖는 이유는 배가 고프기 보다 배가 아플 때가 더 클 수가 있어요.
이광용: 와~ 표현이~
이시원: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았네요.
권순우: 동독 정부에서는 과연 우리가 동구권에서 폴란드 헝가리 그런 나라보다 훨씬 더 잘 살지 않냐 라고 얘기를 하겠지만 동독 국민들은 오히려 동구권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같이 살았던 서독을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그럼 옆에서 빤히 서독이 잘 살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동구권에서 제일 잘 살아 이거는 동독 사람들한테 위로가 되지 못했던 거죠.
이광용: 사촌이 장벽 넘어 자투리 땅을 샀네, 배가 얼마나 아프겠어요. 동독인의 입장에서
이시원: 잘 살고 못 살고는 상대적인 것 같애요.
다니엘: 우리 독일하면 자동차잖아요. 그런데 정말 동독은 그 당시 생산성이 얼마나 열악했냐면은 그 당시 지금도 독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트라반트 라는 차가 있어요. 이게 동독의 국민차예요. 이게 완전히 럭셔리한 고급차가 아니라 표현하기는 그런데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었고 2기통 오토바이 엔진이 들어가 있어가지고 멀리 못 가는 차예요. 그런데 그거 한 대를 살려면 무려 14년 정도 기다려야 된데요.
이시원: 좋지도 않은데 14년이나 기다려야 한다구요.
다니엘; 14년이나 기다려야 되는데 그 당시에 이미 서독에서 폭스 바겐 등 우수한 성능의 자동차가 생기고 그럴 때 였으니까
최원정; 독일하면 자동차인데 웬일이야
이시원; 서독은 이렇게 좋은 차를 타는데 바로 비교가 되니까 더 불만이 많이 쌓였을 것 같애요.
이광용: 그래서 동독이 베를린 시에 장벽을 세웠습니다. 그러면 장벽 건설은 동독 입장에서는 성공적이었을까요? 모두가 아는 대로 서독과의 생활 격차, 경제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장벽을 넘는 탈출시도는 계속 이어집니다.
최원정: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까 북한이 폐쇄적으로 되는 이유가 바로 동독의 사례에서 배운 거예요. 자꾸 남한이랑 비교가 되면 체제가 무너질 수 있으니까 자꾸 가두어두는 이건 역사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정책이네요. 그런데 요즘에는 북한에서도 남한문화가 워낙 퍼져 있어서 아~ 남한 잘 사는구나 인지하고 자꾸 넘어오잖아요.
이시원: 북한에서 몰래 남한 드라마를 많이 본대요. 그래서 항상 환상을 품고 넘어온다고 그러더라구요.
최태성; 북한에서도 BTS 좋아하는 아미 펜클럽이 있다는 소문도
송충기: 그런데 경제적인 문제가 크기도 했지만 사실 나중에 통일이 가까워질수록 정치적인 자유랄지 아니면 사상적 자유 같은 것도 큰 요인이 돼죠. 그래서 하나의 통계가 있긴 한데요 (도표: 동독탈출 및 이주의 동기), 동독에서 탈출한 사람들에 대한 설문조사인데요. 정치적 동기 그러니까 정치적 압박 그리고 개인적 부자유 이런 것들이 탈출의 중요한 동기로 나와 있습니다.
<동독탈출 및 이주의 동기>
~1961년: 정치적 동기(56%), 경제적 동기(23%), 개인적 동기(15%)
1980년대: 사상의 자유결핍(71%), 정치적 압력(66%), 생필품부족(46%), 친척관계(36%)
1989.12~1990.01: 정치적 조건(93%), 개인적 부자유(86%), 낮은 생활수준(88%), 친척관계(59%)
다니엘: 동독에서 사실 우리가 요즘 어떤 대학교 골라서 갈 때는 여러가지 조건이 중요하지만 그 당시는 학생들이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면 훨씬 더 나라 충성도가 올라간다고 하니까 공식적으로 이 제도 좋은 대학교 갈 수 있는 제도로 되어 있었거든요. (상급학교 진학을 좌우한 사회주의 단체 가입여부)
이시원: 동독에서 정부에 충성해라 그래야만 네가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강압을 한 거네요.
송충기; 가령 우리가 역사저널 그날이 정부의 검열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떠실 것 같애요?
최원정; 예전 같으면 대공분실에 끌려갈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좋은 시절 만나서 다행입니다.
허준; 우린 이미 자유라는 것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자유롭게 살아왔잖아요. 동독인도 그래왔을 거 아네요. 근데 그걸 못하게 하면 지울 수가 없는 거잖아요. 못견딜 것 같애요.
송충기: 그런데 동독에서는 사상적 자유 이런 게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미디어나 언론이나 검열도 심했고요.
다니엘; 도청이 되게 심했잖아요. 체제의 적이라고 의심이 되었을 때 완전도청 장치를 집에서도 다 설치해 놓고 감시를 한 게 엄청 많았죠.
송충기: 일반적으로 보면 우리가 나치라든지 소련이라든지 이런데 체제들이 억압하는 체제잖아요. 근데 동독이 이런 나치나 소련보다 훨씬 더 악압적인 거죠.
최원정; 당시 동독 사람들로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 상황 모습인 거죠.
송충기: 원래 보통 역사를 보면 장벽 만리장성이라든가 로마의 성곽을 보면은 외부로부터 외국침략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잖아요. 근데 베를린 장벽은 전혀 그런 게 아닌 거죠. 오히려 자국민들이 밖으로 나갈까봐 외부로부터 격리시키고 이동의 자유를 막고 굉장히 특이한 장벽인 거죠.
이시원; 근데 이렇게 꽉 꽉 누르면 누를수록 내부 압력은 높아지잖아요. 어딘가 칙 튀지 않을까요?
최원정; 우리 만리장성에서 보았다시피 내부에서 결국 붕괴가 일어났던 거잖아요. 결국 동독 정부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경제적으로 억압을 하면 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며 장벽을 넘었습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장벽이 더 견고해 집니다.
------------이광용; 여러분, 베를린 장벽이 궁금하십니까. 일단 베를린 장벽 지도를 통해서 볼까요. 우리 휴전선과 비슷합니다 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베를린 어디 있습니까?
최태성; 동독 가운데에
이광용: (독일 베를린 지도) 이게 베를린입니다.
허준;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가 북과 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평양을 반을 갈라서 거기에 대한민국 사람이 살고 있는 거예요.
이광용; 동평양, 서평양, 서평양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고
다니엘; 그러네요.
이광용;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은 이 베를린 안에 동과 서를 가로 지르는 도심쪽 장벽이 일단 있구요. 그리고 서베를린의 서쪽, 동쪽과의 접경지역을 둘러 쌓는 반원 모양의 장벽입니다.
최원정: 싹 에둘러서 만든거야.
이광용; 도심 장벽은 40킬로미터 이구요. 서쪽 접경지역은 155 킬로미터, 그리고 장벽의 높이는 3.6미터입니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서베를린이 동독 안에 섬처럼 되어 있는 구조죠. 여러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질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동영상) 베를린 장벽이 축조되던 당시 모습입니다. 먼저 철조망을 들러요. 그리고 시멘트 벽돌을 하나 쌓아나갑니다. 경계 없이 잘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장벽이 생겨 버립니다.
이시원: 황당하겠다.
이광용;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심경이, 화면 속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망연자실~ 눈물까지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베를린 장벽의 축조는 전 세계적인 화제였습니다. 대한 뉴스에서 보도가 되는데요.
----------박종세/아나운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말살하려는 소련의 만행이 자행되고 있는 이곳 베를린의 ~ (창문을 다 막아 버린 건물들)~
이시원; 창문을 다 막아 버렸어요.
허준: 저 건물 창문에서 남자가 뛰어내렸습니다.
박종세: 위험천만한 장벽을 넘기 위해 아찔한 선택을 하는 노인 이 노인의 용감성에는 공산 보초병 조차도 감히 총을 쏘지 못했으며~ 동독의 한 젊은 남녀가 결혼식을 올리는 데도 서부 베를린에 있는 신부의 어머니는 경계선이 봉쇄되어 참석할 수가 없어서~ 신부의 장래의 행복과~ (하룻밤 사이 생겨난 장벽의 비극)
이시원: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애요.
최태성: 아구야
최원정: 안타까워라 정말 전 세계 국민들이~ 우리는 저 안타까운 걸 알잖아요.
최태성; 저런 일이 있었구나
이시원; 저렇게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세워졌을 때 미국이나 서독의 반응은 어땠어요?
송충기: 서독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분노에 차서 항의도 많이 했죠. 근데 미국은 약간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어요. 왜냐면 미국으로서는 큰 분란만 없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근데 사실 일이 또 그렇게 되지는 않아요. 한 4개월 후에 베를린 장벽 앞에 체크포인트 찰리 라고 있거든요. (체크포인트 찰리-동서 베를린 장벽 사이에 있던 가장 유명한 검문소), 동서 베를린을 오고 가는 검문소인데 여기에서 미국하고 소련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져 가지고 (1961년 10월 27~28일) 양 부대에서 탱크가 나와서 한 200미터를 놓고 18시간 동안 대치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바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어요.
최태성; 한 발만 쏘면 전쟁이 시작이니까
송충기: 그래서 베를린 장벽이 냉전의 상징처럼 됐어요. 다행히 케네디 하고 흐루시쵸프 서기장하고 비밀협상을 해서 잘 마무리가 되긴 됐죠. 아찔한 순간이었죠.
다니엘: 정말 쿠바위기 만큼 위험했던 순간이었죠.
최원정; 체크포인트 찰리 라는게 우리나라의 JSA와 같은 곳이잖아요. 거기서 양쪽 진영이 대립하고 긴장하고 그거 생각하면 되는 거죠. 항상 마주 보고 있고
이광용: 여러분, 베를린 장벽이 벽하나 있는 것 같죠?
이시원: 벽 하나가 아니다?
이광용: 그게 아니에요.
허준; 시멘트 쌓을 때 보면 벽 하나 같던데?
이시원: 솔직히 그거 되게 허술해 보이던데~
허준: 잘 보면 넘어갈 것 같기도~
이광용: 여러분, 제가 밤을 세워 이 모형을 준비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준비한 건 아니고요, 일단 1961년 8월 13일 이런 모양의 철조망 속에서 아까 화면 속에서 보셨죠. 철조망을 쫙 둘렀어요. 그리고 이틀 후 처음으로 벽체가 세워집니다. 1962년에는 이 시멘트 장벽 뒤에 배후 장벽까지 설치됩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국경지대가 조성이 되는 거죠. 1965년에는 이 장벽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시멘트 장벽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바꾸고요.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1975년에는 콘크리트 구조물까지도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L자 모형으로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이시원: 정말 네 차례에 걸쳐서 베를린 장벽을 공고하게 한 거네요.
이광용: 이 장벽과 장벽 사이에 다양한 시설물이 설치됩니다. 일단 무인감지 철조망이 설치되는데 그냥 철조망이었을까요?
허준: 전기 철조망~
이광용: 전기가 흐르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 운좋게 철조망을 넘는다 해도 이런 것들이 있죠. 넘어가기 힘든 구조물 (바닥에 설치된 장애물) 이거 뿐이었겠습니까. 삼엄한 감시탑이 있었을 거구요. 그리고 감시하는 군인들 계속 상주하면서 주둔해 있었을 거구요. 감시견(모형) 잘 보이세요? 여기서 보기엔 작고 귀엽게 생겼잖아요? 엄청나게 큰 무시무시한 세퍼드 이 군견이 약500 마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시원: 정말 아무도 못 지나가겠어요.
이광용: 산 너머 산인데 이뿐만이 아니에요. 장벽을 넘으려는 자기 있으면 사살해도 좋다라는 명령까지 내려진 상황이었어요.
다니엘: 그래서 그 구역을 독일어로 사망의 구역 (죽음의 지대) 라고 불렀어요.
최원정: 우리나라 민간인 통제구역 민통선 보다 더 살벌했네요.
허준: 저걸 딱 보면 대규모 교도소 같애요.
이광용; 딱 그런 느낌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탈출을 시도하는데요.
--------------박종세/아나운서; 자유를 찾는 탈출은 계속되고 있으며 공산독재 정권에 의해서 저질러진 (1961년부터) 오늘날의 이러한 사실은 세계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1989년까지) 자유를 찾아 공산진영을 탈출해 나오는 사람들은 (4만명 추산) 날로 계속되고 있고 이 철조망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용감한 행동은 역사상 인간의 자유를 위한 그 어떠한 투쟁과도 비길 바가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자 최소 136명).
이광용; (동독 군인이 경계서다 탈출) 자~ 이 사진이 중요한데요. 이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 중에 기록유산으로 등재돼 기억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을 소개해 드릴텐데요. 1961년 8월 15일 동독의 국경경찰이었던 콘라드 슈만은 자신이 지키던 철조망을 뛰어넘어 서베를린에 진입했습니다. 당시의 사진입니다. 동독군경 최초의 탈출시도였습니다. 또 1962년 8월 17일 피터 페히터 라는 청년이 친구와 함께 베를린 장벽으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벽돌공이었던 페히터는 장벽 보수공사를 하는 틈을 노려서 서베를린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합니다. 함께 갔던 친구는 마지막 펜스를 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페히터는 골반에 총을 맞게 돼죠. 더 이상 제대로 가지 못하고 중간 지대로 떨어진 페히터, 동독과 서독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철조망 아래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다니엘; 그래서 지금 베르나우어 거리에 가시면 페히터 추모비가 있는데 거기에 뭐라고 써있냐면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 라고 써있습니다.
최태성;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이시원; 탈북민들 얘기 들어보면 진짜 목숨 걸고 오고 같이 오던 가족들이 죽는 경우도 있는데 진짜 평생 트라우마가 남는데요.
이광용; 죽음을 무릎 쓰고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었던 동독 사람들, 그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이시원: 보니까 점점 장벽이 넘기 어려워졌잖아요. 그 만큼 동독 사람들은 탈출이 어려워졌겠네요.
최태성; 그렇죠, 그러면 탈출은 일단 해야 되겠고 베를린 장벽은 저렇게 견고해 진단 말예요. 넘기가 함든단 말예요. 그러면 어떤 방법을 쓰겠습니까?
허준: 저희 예전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등재가 될 수 있는 진주성의 비거 있지 않습니까. 이 당시에는 비행기가 이미 나오던 때였잖아요. 높은 건물에서 비거 같은 것을 타고 행글라이더를 타고 휭 날아가면 돼죠.
이시원: 좋은 방법이다.
다니엘; 실제로 열기구 타고 탈출한 사림이 있었어요.
송충기: 회사 동료였던 두 사람이 열기구를 만들어 탈출했는데 열기구를 만들려면 천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까 한꺼번에 많이 사면 그것도 의심스럽잖아요. 그러니까 조금씩 조금씩 사가지고 열기구를 만들어 사용했죠.
이시원: 육로가 안되니까 허공을 이용해서 탈출~
최태성; 벽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방법
송충기: 방법은 굉장히 다양했어요.
최원정; 자일을 걸어가지고 서독 건물 속으로 슉~ (송충기를 향하여) 그런 경우도 있었어요?
송충기: 네, 실제로 동독 쪽의 높은 빌딩에서 서독 낮은 쪽으로 자일을 만들어가지고 양쪽에서 미리 합의했죠.
최원정; 비거나 자일은 툭 던져 본건데 실제로 일어난 일이네요.
이시원;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 탈출한 거네요.
허준: 독일이 올림픽에서 굉장히 강국들이었거든요. 동독이나 서독이 장대높이뛰기
최원정; 장대높이뛰기도 있었어요.
송충기: 예를 들자면 자동차 있잖아요. 동서독 왔다 갔다 하니까 자동차의 엔진 부분을 변형을 해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겠끔 만들어요. 트렁크를 개조해서 탈출한 경우도 있고, 외국인으로 변장하거나 성별을 속이는 것도 많았고 동서독 간에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은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거든요. 선로를 따라서 탈출하는 경우도 있었고 방법이 다양했죠.
이시원: 전철 오면 딱 옆에 붙어서 지나가기까지 기다리고
최원정: 다 목숨 건 방법들이잖아요. 조금만 더 상상해 봅시다.
최태성: 잠시 우리가 하늘을 봤는데 비거도 있고 장대 높이뛰기도 해서 갔는데 또 다른 상상은?
허준; 쇼생크 탈출?
최태성; 정답! 바로 땅굴파기입니다.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어요.
최원정; 드라마 사랑의 불시작에서 북한의 현빈이 남한의 손헤진을 만나려 땅굴로 왔다는 거 아닙니까?
최태성; 베를린 장벽에 땅굴이 몇 개가 있는지?
이시원: 몰라요.
최태성; 발견된 것만 약 70개입니다.
이시원: 한번 파 놓으면 쭉~쭉~ 가겠네요.
최태성; 1964년도에 발견된 땅굴은 깊이가 12미터고 길이가 145미터였어요. 여기서 탈출에 성공한 거예요.
허준; 그래서 독일 친구들이 한국에 오면 그렇게 땅굴을 보러가는 거에요. 땅굴 보러 엄청 가요.
다니엘; 한국과 독일은 비슷한 역사니까
최태성; 우리 땅굴은 다르잖아요. 우리는 지금 북한 군인들이 침략을 하기 위해서 땅굴을 팠다면 동서독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 민간인들이 판 땅굴로 차이가 있는 거죠.
최원정; 근데 약간 지금 서독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탈출민들이 많아 지는게, 교수님, 사회적으로나 외교문제로 불거질 수 있는데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애요.
송충기: 그렇지만 법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거든요. 우리는 헌법이라고 보지만 서독에서는 기본법이라고 부르거든요. (서독기본법에 동독지역 주민도 서독국적 소지), 서독기본법에 따르면 동독 주민들도 서독국적을 소지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서독 정부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동독에 사는 사람도 서독시민으로 여기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탈출민들이 있었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고 여러가지 보조금이나 정착금을 주어서 이들이 서독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만들었죠.
다니엘: 우리가 한민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잘 받아들여지고
허준: 꺼려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서독은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있잖아요. 우리는 자유주의 진영이고 그리고 우리는 분명 사회주의 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줄려면 들어오는 동독인들을 얼마든지 받아들어야 우리는 그래도 강해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이시원: 또 홍보 효과도 있을 것 같애요. 목숨 걸고 왔는데 그만큼 우리나라 체제가 좋은 거야.
최태성; 어쨌든 이런 체제경쟁 속에서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민들의 러시는 계속되고 있고 그 과정 속에서 베를린 장벽은 더욱 더 견고해 지고 있고 이게 답이 없는 그런 상황이잖아요. 분단이라고 하는 상황이,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등장하면서 동서독 분단에 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바로 저 사람(빌리 브란트 사진),
다니엘; 빌리 브란트 입니다.
최원정; 저 분이 빌리 브란트인 거에요?
다니엘; 네, 빌리 브란트는 여러 모로 유명하죠. 일단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서 무릎꿇고 (1970년 폴란드-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유대인들에게 반성하신 걸로도 굉장히 유명하신 분인데 사민당 소속으로 총리였고요 (빌리 브란트(1969~1974)-사회민주당 소속 서독의 4대 총리),
최원정; 방금 말씀하신 바르샤바 무릎 꿇기, 이 사건이 너무나 유명하잖아요. 유대인 희생자들 앞에서 정말~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나치 정권에게서 엄청 짓밟혔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집단인데 그 사건 하나로 폴란드 국민들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았다고 얘기 들었어요. 전에 제대로 된 사과를 못 받은 우리 입장에서는 참 부러운 일이에요.
최태성: 일본 수상이 우리나라 독립 유공자 묘역에서 무릎 꿇은 장면이나 마찬가지죠.
다니엘: 빌리 브란트의 정책이 뭐냐면 그러니까 접근을 통한 변화, 이런 걸 추구하셨는데 그래서 소련과의 기본조약도 주도하셨고 폴란드와 국교수립 이런 것도 빌리 브란트에 의해서 생긴 거고 동쪽과 잘 지내기 위해서 그런 노력들을 (동독과의 화해정책 추구) 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도 받으신 인물입니다.
최태성: 빌리 브란트가 1969년 총리 취임 연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연설을 하죠.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을 고려할 수 없으나 동독의 존재를 독일 내의 제2의 국가로 인정하여 동등자격의 기초 위에서 동독 정부와 만날 용의가 있다. 이게 그 유명한 동방정책 이라는 겁니다. 이제 동독을 국가로 인정 협상 해보자 라고 시작했던 굉장히 큰 변화를 시작한 것이죠.
최원정; 말이 동방정책이지 동서화해정책이네요.
최태성; 그렇죠, 그렇죠.
송충기: 빌리 브란트는 서베를린 시장을 지냈거든요. 그래서 장벽이 세워질 때 그 장면을 똑바로 목격한 사람이죠. (동영상-빌리 브란트 1957년~1966년 서베를린 시장 역임, 갑자기 세워진 베를린 장벽을 보는 빌리 브란트), 근데 빌리 브란트는 동독이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가지고 무너뜨리는 것은 환상이라고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완전히 반대로 동독을 오히려 경제적으로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동서교역의 교류가 시작이 된 것이죠. 그 물꼬를 빌리 브란트가 튼 거죠. 심지어는 서독에서 동독 티브이 프로그램 시청이 가능했죠.
최원정; 그러니까 두 체제간의 동질성을 회복시키는데 노력했네요.
송충기: 그렇죠,
이시원: 그리고 물꼬를 트면 처음엔 물줄기가 졸~졸~졸~ 나오더라도 한 번에 와장창 무너지면서 쏟아질 수 있잖아요. 그런 걸 기대한 거 같애요.
송충기: 실제로 베를린 장벽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작은 노력들이 차근 차근 쌓여서 큰 변화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시원: 이거 보니까 옛날 우화 생각나네요. 옷을 벗길 때 바람이 세게 불면 옷을 껴입잖아요. 그런데 햇빛을 내리쬐면 오히려 옷을 벗잖아요. 그런 느낌일까요.
최원정; 근데 이게 단지 동독과 서독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국제사회의 변화가 있어야 가능한데요. 당시는 어땠어요?
송충기: 1970년대부터 동서독간에 훈풍이 불잖아요. (고르바쵸프 사진 등장), 변화를 가져 온 사람이 바로 이 고르바쵸프죠. 본래 냉전시대 때는 소련이 완전히 빗장을 걸어 잠궜잖아요. 이런 식으로 소련이 계속 가다가는 망할 수 밖에 없다 라고 판단을 해서 본격적인 개혁 (페레스트로이카) 개방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거죠.
최태성; 독일의 분단이라고 하는 배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잖아요. 그런데 소련의 고르바쵸프 서기장, 파트너인 사람이 바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동영상-1987년 6월 12일,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연설하는 레이건 대통령),
레이건/美대통령: 고르바쵸프 서기장,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고르바쵸프 서기장, 이 문을 여시오, 이 장벽을 허무시오.
최태성: 이게 얼마나 극적이야
최원정: 정말 짧지만 강렬하다.
이시원; 저거 보고 독일 사람들은 정말 베를린 장벽 곧 무너지겠구나 그랬을 것 같애요.
허준: 그런데 약간 그런 게 있잖아요. 무서워? 아니 괜찮아 열어! 자신감이 와~
최태성; 그러다가 1989년 9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국경을 완전 개방을 해요. 이미 예전에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배웠잖아요. 이게 동서냉전 속에서 저렇게 분단이 된다 말예요. 그러다가 89년에 다시 국경을 완전개방 합니다. 오스트리아는 서방진영이고 헝가리는 사회주의 진영이에요. 그러면 동독 사람들이 사회주의 국가 여행 가능해 그러면 헝가리로 와 헝가리에서는 오스트리아 갈 수 있어 오스트리아에서 서독가면 돼. 이게 동독에서 서독 우회 루트가 생긴 거예요. 길이 열린 거예요.
TV방송: 자유와 빵을 찾아 나선 많은 동독인들이 체코 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를 통해서 서독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동구권 국가내 서독대사관으로 뛰어가는 동독인들),
최원정; 어디건 가겠어요 거기 주재하고 있는
해설; 동독을 탈출하는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전 1989년 9~10둴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탈주 통로가 된 체코, 헝가리의 서독 대사관, 두달간 이렇게 탈주한 사람만 3만명, 탈주민들을 위한 임시 천막까지 동원됐습니다.
이시원: 저걸 보니까 탈북민들이 한국 대사관으로 막 뛰어가는 게 떠오르네요.
최원정; 저 모습을 보니까 필사적이잖아요.
최태성; 저 모습을 보면 베를린 장벽은 있지만 이미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렇게 탈출을 어마어마하게 서독으로 들어오니까 동독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한 두명 일 때만 막았지 저렇게 수없이 넘어가는 걸 어떻게 다 막습니까.
다니엘: 동독 주민 수천 명이 열차 타고 동독을 지나서 서독으로 가는데 동독 주민들이 그 열차를 보기 위해서 엄청 많이들 나왔다고 그러더라구요.
최원정: 자유화를 원하는 물결 속에서 베를린 장벽의 종말을 알리는 결정적인 실수가 발생했다고
해설; (동영상)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공산당의 신임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이 진행된다. 자유로운 여행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이어가던 동독 사람들의 불만을 잠 재우기 위해 여행요건 완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여기서 샤보브스키는 예상치 못한 발언을 하고 만다.
기자: (자유로운 국경개방은) 언제부터 유효한 겁니까?
샤보브스키: 네?
기자: 지금 당장 부터요? 언제부터?
샤보브스키: 그런데 여러분, 저도 그러한 발표가 오늘 좀 전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실 그 발표문을 갖고 계시지요. 다시 말씀 드리자면 그건 제가 알기론 즉시 유효합니다. 바로요.
해설; 샤보브스키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서독 방송: 올해 11월 9일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해설: 동독 주민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은 전세계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됐고 그날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역사가 바뀌게 된다.
일동: (감탄) 야!
이시원: 저렇게 실수로 자유화가 됐다니 코미디라고 봐야 되요 어떻게 봐야 되요?
송충기: 샤보브스키가 실수를 한 건 맞죠. 왜냐면 그날 당정회의에서 이걸 결정을 했거든요 근데 대변인은 그날 참석을 못했어요. 그래서 이야기만 대충 듣고 기자회견에 나왔어요. 엉겁결에 당장이라도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해버린 거죠. 실제로는 여권이나 비자 서류 등 절차적인 서류를 갖추어야 가능하도록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나가면서 국경을 넘을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한 거죠.
이시원: 동독 사람들은 야호~ 했을 것 같애요. 마음대로 건널 수 있는 거잖아 이러면서~
최태성: 동베를린 사람들이 보다가 Right now? Immediately? 지금 당장이라고? 오다 보니 검문소도 군인들도 이 사실을 전달 못 받은 거에요. 맨 처음에 총구를 겨누면서 장벽을 지키던 군인들도 뭡니까? 왜와? 서로 당황한 상황 속에서~
이시원: 참 뉴스 못봤어?
최태성: 그렇죠, 지금 뉴스 보라구. 너무 많이 몰려드니까 결국은 인파에 문을 열면서 역사적 사건이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니엘: 피 한 방울도 안 흘리고~
최원정: 샤보브스키의 저 발언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실수 라고 역사를 바꾸어 놨으니까 그런데 만약 저런 말 실수가 없었더라면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수님?
송충기: 쇼보브스키가 말 실수 안 했더라면 장벽이 저런 식으로 드라마틱하게 무너지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냥 무용지물은 되었을 것 같애요. 원래 동독 정부는 사실 어떤 정책이었냐면은 시간을 벌려고 했죠. 그래서 여행자유화 같은 절차들을 만들어서 차근차근히 이렇게 되면서 그 당시에 새로 바뀐 정부가 금방 무너져 내린 거죠.
다니엘; 제가 볼 때도 시간 문제였고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부터 여러가지 변화들이 있었잖아요. 빌리 브란트의 역할도 컸고 고르바쵸프가 들어오면서 어떤 변화들이 있었고 이 말 실수는 마지막 그냥 폭죽에다 라이터만 살짝 갔다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동영상-무너진 베를린 장벽 위에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있음-동서간의 훈풍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말 실수라는 우연이 만들어낸 베를린 장벽붕괴, 그리고 다음 해인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최원정: 아마 대한민국 국민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이 남 애기 같지 않았을 것 같애요. 더 염원하는 소망이 생긴 것 같애요.
최태성; 절단기 있다니까요.
다니엘: 항상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늘 같은 얘기를 해요. 정말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한 순간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유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송충기: 베를린 장벽은 억압적인 국가가 국민들의 자유를 막은 거잖아요. 근데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맨 손으로 가서 직접 그것을 부셨다는 거다. 그것을 남기고 싶은 거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허준: 누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원정: 다음 시간에는 세계기록유산 다섯번째로 안내의 일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71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④ 베를린 장벽 붕괴된 날에서 정리).
① 1989년 11월 9일 밤,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뛰쳐나왔다. 도끼와 망치로 28년간 동독과 서독을 가른 장벽을 부수기 시작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동독사람들에게 장벽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벽을 넘었고 장벽은 무너졌다. 그날 밤 베를린을 넘어 독일 전역은 환호와 희망으로 가득찼다. 서독 주민들도 호응하며 국경을 넘은 동독 주민들을 환영했다. 동독 국경 수비대는 밀려드는 사람들을 막지 못했다. 마침내 마주한 동서독 주민들, 11월 9일은 독일의 분단과 20세기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날이었다.
②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고로 축조와 붕괴에 관련된 기록들이, 2011년에 세계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가 되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분단 되었다. 독일은 동서로 분단이 되었다. 서쪽은 영국 프랑스 미국이 관할을 하고 동쪽은 소련이, 서쪽은 자본주의 진영, 동쪽은 사회주의 진영이다. 베를린 장벽은 61년에 생겼다. 그런데 동독 고급 인력들이 인재들이 서독으로 많이 넘어왔다. 자유세계에서 본인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원했다. 탈출을 하니까 완전히 폐쇄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동독사람들이 대거 서독으로 넘어오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③ 이산가족 상봉이나 인도주의적 방문은 허용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허용되지 않았다. 무단탈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동독인들의 이주현황은 무려 270만 명이 넘는다. 당시 동독 인구가 1700~1800여만 명인데 270만 명이 넘어갔다. 매년 20만 명씩 넘어 갔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동독인들은 왜 서독으로 넘어 갔을까. 그 이유는 1위가 경제 생활고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은 서로 다른 체제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가는데 제일 중요한 게 먹고 사는 경제문제다.
④ 미국은 독일 분단 이후 서독에 엄청나게 많은 지원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라인 강의 기적이일어났다. 반대로 동독은 소련이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동독의 공업 공장설비를 막 뜯어갔다. 동독 주민의 생활수준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전후인데 소련한테 뜯겨서 동독은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체제 하에서 민간기업을 국유화하고 모든 걸 국가가 통제 했다. 동독 정부는 국제 경쟁력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소비재라든지 공산품은 생산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인 1950년대를 보면 동독의 생산성은 서독보다 25%가 낮았고 국민들이 느끼는 생활수준은 무려 40%나 낮았다.
⑤ 동독과 서독의 1인당 소득은 분단 싲점부터 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동독이 서독 보다 못 산다고 하더라도 동구권 공산국가 보다는 잘 살았다. 동독 사람들은 장벽을 넘어서 탈출을 시도했다. 배가 고프기 보다 배가 아팠다. 동독 국민들은 동구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살았던 서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독이 잘 살고 있는데 동구권에서 제일 잘 살고 있는 건 동독 사람들한테 위로가 되지 못했다. 독일하면 자동차인데 동독은 당시 생산성이 열악했다. 당시 동독의 국민차는 트라반트였다. 고급차도 아니고 강화 플라스틱으로 2기통 오토바이 엔진에 멀리 못 갔다. 이 차 를 살려면 좋지도 않은데 14년 정도 기다려야 된다. 당시 서독은 폭스 바겐 등 우수한 성능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⑥ 동독은 베를린시에 장벽을 세웠다. 장벽 건설은 성공적이었을까. 서독과의 생활 격차, 경제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장벽을 넘는 탈출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북한이 폐쇄적으로 되는 이유가 바로 동독 상황을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도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가 크기도 했지만 나중에 통일이 가까워질수록 정치적 사상적 자유도 요인이다. 우린 이미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왔다. 동독인도 그래왔다. 동독에서는 사상적 자유가 없었다. 검열과 도청이 되게 심했다. 나치나 소련은 억압하는 체제인데 동독이 훨씬 더 악압적이었다. 베를린 장벽은 자국민들을 외부로부터 격리시키고 이동의 자유를 막는 특이한 장벽이다.
⑦ 결국 동독 정부가 억압을 하면 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장벽을 넘었고 장벽은 더 견고해 졌다.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시 안에 동과 서를 가로 지르는 도심 장벽이 있고, 서베를린의 서쪽, 동쪽과의 접경지역을 둘러 쌓는 반원 모양의 장벽이 있다. 도심 장벽은 40킬로미터, 서쪽 접경지역은 155 킬로미터, 장벽의 높이는 3.6미터다. 서베를린은 동독 안에 섬처럼 되어 있다. 베를린 장벽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 버렸다. 베를린 장벽의 축조는 전 세계적인 화제였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말살하려는 소련의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서독은 굉장히 분노에 차서 항의를 많이 했고 미국은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⑧ 4개월 후 베를린 장벽 앞에 찰리 체크포인트는 동서 베를린을 오가는 검문소인데 1961년 10월 27~28일 여기서 미국하고 소련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양 부대에서 탱크가 나와서 한 200미터를 놓고 18시간 동안 대치한 적이 있었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케네디와 흐루시쵸프가 비밀협상을 해서 잘 마무리가 됐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⑨ 1961년 8월 13일 철조망을 쫙 둘렀고 이틀 후 벽체가 세워졌다. 1962년에 시멘트 장벽과 배후 장벽이 설치되었다. 1965년에 장벽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 시멘트 장벽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바꾸고 1975년에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L자 모형 구조물로 만들었다. 네 차례에 걸쳐서 베를린 장벽을 공고하게 하였다. 장벽과 장벽 사이에 다양한 시설물이 설치되었다. 전기 무인감지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정말 운좋게 철조망을 넘는다 해도 장애물이 있고 삼엄한 감시탑이 있었고 감시하는 군인과 무시무시한 큰 군견 약500 마리가 있었다. 장벽을 넘으려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라는 명령까지 내려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탈출은 계속되고 있었다.
⑩ 1961년부터 1989년까지 탈출민은 4만명 추산 사망자 최소 136명, 죽음을 무릎 쓰고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었던 동독 사람들, 열기구로 자일로, 자동차 엔진 변형을 해서 트렁크를 개조해서, 외국인으로 변장하거나 성별을 속여서, 지하철 선로를 따라서, 땅굴을 파서 다양하게 탈출을 하였는데 베를린 장벽에 70개 땅굴이 발견되었다. 1964년도에 발견된 땅굴은 깊이가 12미터고 길이가 145미터였다. 한반도에서는 북한 군인들이 침략을 위해서 땅굴을 팠다면 동서독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 민간인들이 땅굴을 팠다. 탈출민들에게는 보조금이나 정착금을 주었다.
⑪ 서독은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분명 사회주의 보다 강하다는 것을 동독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탈출민들의 러시는 계속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베를린 장벽은 더 견고해 지는 상황이었다. 분단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1970년 빌리 브란트에 의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그는 바르샤바에 가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들에게 사죄하였다.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독일나치 정권에게서 엄청 짓밟혔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는데 그 사건 하나로 폴란드 국민들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았다고, 한국은 일본으로 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못 받았다.
⑫ 빌리 브란트는 소련과의 기본조약 체결 폴란드와 국교수립 동독과 화해정책 추구, 그는 1969년 총리 취임 연설에서 동독을 국제법상 승인할 수 없으나 동독의 존재를 독일 내의 제2의 국가로 인정하여 동등자격의 기초 위에서 동독 정부와 만날 용의가 있다. 이게 그의 동방정책이다. 말이 동방정책이지 동서화해정책이다. 그는 서베를린 시장(1957~1966)을 지냈다. 거기서 장벽이 세워지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베를린 장벽을 본 그는 동독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동서교역을 시작하였다. 서독에서 동독 티브이를 시청할 수 있었다. 두 체제간의 동질성을 회복시키는데 노력했다.
⑬ 베를린 장벽은 작은 노력들이 차근 차근 쌓여서 큰 변화가 있었다. 이건 동독과 서독만의 문제가 아니고 국제사회의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였다. 1970년대부터 동서독간에 훈풍이 불었고, 소련에서는 고르바쵸프가 등장하여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의 분단 배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다. 1987년 6월 12일, 레이건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연설하는데, 고르바쵸프 서기장,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이 문을 여시오, 이 장벽을 허무시오.
⑭ 1989년 9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국경을 완전 개방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서방진영이고 헝가리는 사회주의 진영이다. 동독 사람들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헝가리로 가면 헝가리에서는 쉽게 오스트리아로 갈 수 있고 오스트리아에서 서독으로 가면 되었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는 우회로가 생겼다. 자유와 빵을 찾아 나선 많은 동독인들이 체코 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를 통해서 서독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동독 탈출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전 1989년 9~10둴에 최고조에 달했다. 두 달간 3만명이 탈주, 탈주민들을 위한 임시 천막까지 동원됐다. 이제 베를린 장벽은 있지만 이미 무너져 있었다. 동독 주민 수천 명이 열차 타고 서독으로 가는 동독 주민들이 탄 그 열차를 보기 위해서 엄청 많이들 나왔다고,
⑮ 1989년 11월 9일, 동독 주민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은 전세계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됐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인파에 장벽의 문이 열리면서 역사적 사건이 시작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동서간의 훈풍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말 실수라는 우연이 만들어낸 베를린 장벽붕괴, 다음 해인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한국 국민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이 남 얘기 같지 않았다.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베를린 장벽은 억압적인 국가가 국민들의 자유를 막으므로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맨 손으로 부셔버린 사건이었다. 그런 일들이 한반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