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칸딘스키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자라면서 음악과 미술에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법학과 경제학을 배웠고 이 분야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어느 날 모스크바에 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화가로서는 비교적 늦은 30세 때 칸딘스키는 독일로 가서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초기에는 화려한 색채의 풍경화나 러시아 민속화에서 영감을 얻어 이것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으나. 점차 구상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과 상관없이 형태와 색채, 선들 속에서 무한한 표현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 후 "형태는 잘 알아볼 수 없어도, 즉 대상이 없어도, 색채만으로도 감동을 준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작품 활 동에 임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알아볼 수 있는 사실적인 형태를 완전히 버리게 되면서 순수 추상화의 세계 를 이끌어 가게 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의 아버지이자 청기사파의 창시자로 사실적인 형체를 버 리고 순수 추상화를 탄생시킨 화가이다.
화가로서 인정받은 칸딘스키는 1922년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가 강제로 폐쇄되자 그는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 하게 된다. 그 당시 나치는 칸딘스키를 퇴폐 예술가라고 지적했고, 그림들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이유만으 로 작품을 몰수하기도 했다.
칸딘스키는 20세기 초반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준 신지학(Theosophy)이라는 종교의 영향도 받았으며, 이 는 그의 예술관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신지학은 기독교와 불교를 신봉하는 신비주의 경향의 종 교로 정신적 철학을 강조하고, 창조는 기하학적인 단계를 통해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신지학은 정신 과 물질의 합일을 추구하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며 사물의 본질 즉 리얼 리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지학의 관점으로 칸딘스키는 음악과 문학, 예술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선상에서 종합되고 발전돼야 한다고 믿었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궁전 극장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고, 또 바그너가 주장한 통 합예술에 공감하면서 모든 예술을 통합해 하나의 완전한 공감각(Synesthesia)의 예술을 만들겠다는 포부 를 갖고 그만의 독특한 추상화, 즉 '즉흥' 시리즈를 그리게 된다.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하며, 칸딘스 키는 "색상은 건반이고, 정신은 피아노, 화가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영혼을 울리는 손이다."라는 말까지 남겼습니다.
그는 "예술이란 것은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힘찬 것이며,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 휘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통합예술을 강조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칸딘스키는 예술의 이론이나, 작품 이름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말을 잘 사용했는데 즉흥도 그중의 하나이다. '즉흥(improvisation)' 시리즈에 서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감흥을 자유롭게 화면에 정착시키려 했다. 칸딘스키는 '즉흥 시리 즈'를 1909년에서부터 1913년 말까지 총 34점의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