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 목 | 그 날 |
| 본 문 | 히 9:27~28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
| 일 시 | 2026 08 30 주일예배 |
며칠 전 네팔에서 장마도 없었고 아무런 징조가 없었는데 갑자기 위에서 물이 내려오는데 집채만한 바위가 떠내려 오고 다리라는 다리는 다 무너져 내리는 엄청난 재해가 있었습니다. 인명피해가 엄청나서 지금까지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실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상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아무런 준비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런 비극을 보면서 생각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날. 그날은 언제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이 땅에 두 번째 나타나시는 날입니다.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는 날입니다. (벧후 3:10)
그리고 그날은 도둑같이 아무도 모르게, 짐작조차 못 한 때 옵니다. 성경 말씀 여러 곳, 많은 구절에서 그날이 도둑같이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날은 그냥 말씀 속에서만 있는 날이고 실지는 그날이 오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무런 대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다 일하다가 어떤 사람은 들려 올라가고 어떤 사람은 멍하니 쳐다만 보게 됩니다.
이번 네팔의 비극적 사고는 아무런 예고가 없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십년 전부터 이곳 저곳에서 이런 비극을 예고하는 경고가 나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날도 아무런 예고 없이 오지만 반드시 온다고 여러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는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만약에 오늘 밤이 ‘그날’이라면, 이 세상이 불처럼 녹아내리는 ‘그날’이라면, 여러분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그날은 예고 없이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놓고 있는 때 반드시 임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오늘 본문을 잘 인용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언제 죽는지는 말할 수 없어도 반드시 죽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죽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그 뒤에 심판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착하게 산 사람이나 악하게 산 사람이나 모두 지옥에 보내는 심판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의하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왕이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심판입니다. 그날의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길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회복의 길이요, 소망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구약성경은 약 8,800개의 히브리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5,800개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히브리어 단어 8,800개, 헬라어 5,800개를 합치면 14,600개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숱한 단어 가운데 ‘평등 equality’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창조 받은 모든 생명의 가치는 다 똑같습니다. 평등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온 삶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평등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평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하나님은 equality (평등) 가 아니라, equity 공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찌 살아왔는지 저울에 올려 보시고, 우리가 산 대로,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심판’을 말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상 주심’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3가지 중요한 사항을 일깨워줍니다.
첫째는 이신칭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화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으므로 지금부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어졌기 때문에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상 주심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심판하시고 우리 삶의 결과에 대해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4 복음서를 보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상을 받지 못하리라’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상을 여러 번 언급하셨습니다.
히11:6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두 말씀을 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내가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거야?’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다시 물어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짜 믿는다고 하면 이렇게 엉망으로 살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지금 내 곁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믿는다면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불의를 저지를 수 있습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삶을 거리낌없이 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두 번째는 ‘상주시는 이를 믿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숙제를 줍니다. ‘너희들이 숙제를 잘해 오면 선생님이 상으로 이 공책을 줄게!’ 아이들이 그 상을 타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숙제합니까? 그러나 그 아이들 크면 선생님의 노트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동기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내가 선생님보다 커지면 선생님이 주시는 상이 우습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씀함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상을 우습게 여깁니다.
왜요? 내가 하나님과 같거나, 하나님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내가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상을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처럼 설렁설렁 사는 사람과 주님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많은 선진이 하나님으로부터 평등하게 똑같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 하나님이 과연 공의의 하나님이십니까?
그래서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고 공의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 사도와 같은 분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더 큰 상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세속주의에 물들어가는가요?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가요? 궁극적으로 그날이 왔을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점과 하나님의 상 주심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 하나님의 평가! 그 평가를 믿을 때만 내가 포기할 것 포기할 수 있습니다. 돈 싫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돈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돈보다 더 큰 것을 바랄 때 아무런 주저 없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저도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날’이 오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셈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의 행위대로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지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을 면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죽음 이후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셈하심의 근거는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셈하심은 바로 내 자신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날 비수처럼 내게 날아올 그날을 의식하면서 그날을 준비하고, 나 자신을 매일매일 성찰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할 그 때에 멸망이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날, ‘바깥 어두운데’ (마8:12, 22:13, 25:30) 쫓겨나 이를 갈며 울지 않을 것이고 땅을 치면서 통곡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신랑이 오시는데 기름을 구하러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튀르키에 공동묘지에는 이런 비문이 있다고 합니다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 지나온 삶을, 앞으로 남은 삶을 얼마나 숙연하게 해 주는 글인지요!
내일은 내 차례요, 그다음 날은 너의 차례요, 또 그 다음 날은 우리들 차례인데 무슨 욕심 낼 것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왜 그렇게도 움켜쥘 것이 많습니까? 움켜잡으면 잡을수록 배고픔과 허무감만 더 커지는데도 말입니다.
사람들 욕심에서 벗어나 속되지 않게 해 주는 분명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상주심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소망이 희미하다면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멀리하고 점점 어두워져 가는 이 세상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평생 짝퉁 그리스도인이면서 아닌 것처럼 스스로 속이며 살아갈 것입니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순간까지,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해 왔습니까? 복음에 주리고,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재산은 지켰지만, 깨어진 나의 정의는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은 지켰지만, 영적으로 중환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노후대책은 철저하게 세웠는데, 영혼의 최종 대책은 전무하지 않습니까? 과연 무엇이 중합니까?
주일은 꼬박꼬박 지키면서 열심히 헌금도 했지만, 삶 가운데서는 거짓된 기쁨으로, 거짓된 평안으로, 거짓된 감격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속의 천박한 것들에는 목숨을 걸면서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사는 우리들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희생한 적은 있었습니까?
이런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희생은, 영원의 소망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죽음 너머의 심판을 인식하는 사람만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희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나온 세월이 마디마디 시리고 아파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해서 그날이 아직은 오면 안 됩니까? 아니면 뭔가 이루어야 할 것이 있는데 아직 못 이루어 아직은 오시면 안 됩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시간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원할 때 그날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날이 그날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은 예고도 없이 별안간 찾아오는데 그날을 늦추거나 멈추게 할 재간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 어디서 그날이 오더라도 두렵지 않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이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니 모두 준비하자고 해도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백 년이 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먹고 잠자고, 장가가고 아이 낳고 평안하다, 살만하다고 할 때 그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날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울며불며 땅을 치며 후회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우리의 목숨을 건질 수 있는 Golden Time임을 왜 모르십니까? 갈라디아서 6:7절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이보다 더 큰 위로의 메시지는 없을 것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이 말씀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심어왔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거두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각자 매일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남은 삶이 주님 안에서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보내온 허송세월들. 돌아보면 아깝기 그지없지만 돌이킬 수 없기에 이제 남은 시간이 더욱 귀합니다. 그날을 대비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야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지요.
그렇다고 집안 다 팽개치고 하던 일 다 뿌리치고 아프리카로 선교를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서 있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제자답게,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날’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눈을 감고 가만히 자신을 돌이켜 보고 오늘 말씀을 지렛대로 기도로 다시 우리 마음을 가다듬겠습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