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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 그 깊은 우물
이 홍사
어지간히 덥다.
우기가 끝이 난 이 나라는 11월에서 3월까지가 비도 오지 않고 가장 시원해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가이드북에 수록되어 있지만 어지간히 덥다. 와서 들으니 우기가 끝난 11월과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5월이 가장 덥다고 했다. 가이드북을 다 믿을 건 못된다. 11월 말인 지금이 더위의 절정이란다. 파라솔을 사서 쓰고 왔지만 강렬한 햇빛은 파라솔의 얇은 천을 뚫고 들어오는 듯 했다.
어디를 가나 풋보리 설익은 밥처럼 입에 설겅설겅 씹히는 놈이 있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무리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되질 않고 눈에 심하게 거슬리고 밟히는 놈들이다. 새로 발령을 받아가서 어느 학교, 몇 학년을 맡아도 그런 놈이 단박에 눈에 띄게 마련이다. 교단에 서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졌다면 그런 놈을 피해갈 수가 없다. 정정하자. 선생이 아니라 교사라고 하면 피해가지 못한다. 선생은 이제 어떤 딱히 말로 할 수 없는 위상이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이다. 그러나 여기, 이 학교는 그렇게 씹히는 학생이 없다. 나중에 다 선생님이 될 인제들이 모여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두 번이나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눈이 마주쳤지만 눈에 씹히는, 껄끄러운 눈동자는 없었다.
한국에선 선생은 더 이상 선생이 아니라 교사다.
선생이 아니라 나는 교사다.
그 말을 곱씹어 본다.
선생과 교사의 차이는 교사의 입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면서 곤란하고 미묘한 차이가 있고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풍기는 뉘앙스도 다르다. 작금의 시대에 교사는 있어도 선생은 없다. 아니다. 교사는 학교에 있고 선생은 학원에만 있다. 학부모들은 학원에서는 맞아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애정공세로 여긴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맞으면 기가 죽는다고 한다.
무상교육이 실시되고부터 사태는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조차 무상교육이 되었다. 무상교육과 평준화가 되고부터 교사의 지위가 땅바닥에 뚝 떨어졌다. 베이비붐 시대가 지나서 지금은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 둘이 고작이다. 그러니 집에서 왕자가 아니고 공주가 아닌 녀석이 없다. 그러니 모든 게 자기중심이고 제 위에는 아무도 없다. 시대는 바야흐로 핵가족시대가 되었다. 위계질서란 찾아볼 수가 없다.
아파트 문만 쿵하고 닫으면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가정교육은 고리타분한 옛말이다. 문만 닫으면 사회와 철저히 격리되는 아파트가 문제다. 이제는 핵가족이 되어 가정교육? 그런 건 기대하기가 어렵다. 할아버지는 남의 식구로 인식이 굳었고 아파트 현관문만 쿵, 하고 닫으면 그 안에서 무슨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듣는 앞에서 너희 담임은 어쩌고저쩌고 험담을 그냥 마구하는 모양이다. 옛날 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그런 세상은 분명히 아니고 집에서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 게 분명하다. 물론 예외인 집안도 있겠지만 대다수가 그럴 거라는 게 요즘 교사들의 통념이고 이를 아는 교사들은 방어막을 치고 있는 실정이라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요즘은 어떻게 된 건지 교사는 학부모의 봉이다.
학부모가 촌지를 가져다바치는 건 고사하고 자칫 실수로 학부모에게 박봉의 교사 주머니가 딸딸 털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을 대할 적에는 호시우보를 외치고 보아야 한다. 호시우보! 소처럼 천천히 걸으면서 호랑이 눈으로 살핀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아이들을 그렇게 대해야 하는데 돌이키니 나는 그러질 못했다.
이젠 아이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소신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니.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다. 거듭된 말이지만 소신을 발휘하기가 정말 어렵다. 학생들의 인권에 관한 제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매로 다스려라? 이건 옛말이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그 말을 엄청 듣고 살았다. 허나 시대가 달라졌다. 교사라면 그걸 인식해야 한다. 교육청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에 의한 제재를 비롯해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학부모의 간섭이다. 요즘 학부모들은 너무 똑똑하다. 너무 똑똑한 게 아니라 최소한 교사들보다는 똑똑하다는 말이다.
점심을 먹고 나니 나른하지? 자! 힘내자. 너희들은 앉아서 공부를 하지만 선생님은 서서 가르치니 얼마나 힘이 들겠니?
교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 2학년 3반의 수업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기지개를 한 번 켤 기회를 주고 쌈빡하게 수업을 진행하려고 그 말을 했다. 헌데 돌아오는 대답이 소름이 오싹 끼치는 말이었다.
선생님은 돈을 받고 가르치고 우리는 돈을 내고 배우잖아요?
그 말을 듣고 그게 무슨 뜻인지 인지하는 순간 피가 역류하는 듯 전율을 느껴야 했다. 그러니 선생은 서서 가르쳐야 되고 학생들은 앉아서 배워야 한다? 돈의 논리로? 중학교 2학년짜리 여학생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렇잖아도 풋보리 설익은 밥처럼 눈에 씹히던 녀석이었다. 쌈빡하게 수업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너 앞으로 나와!
녀석을 교단으로 불러냈다. 통로를 따라 나오는 녀석을 좇아가서 귀싸대기를 한 대 후려쳤다. 그게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일로 인해 나는 학기 중이지만 베트남을 거쳐 미얀마에 와 있다. 혼자 생각하고 나 자신을 돌아볼, 성찰의 기회를 갖기 위해 배낭을 꾸린 것이다. 남편도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교사다. 남편은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훌훌 털고 기분전환을 하고 오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이해를 하지 못해도 남편은 교사이기에 나무라기는커녕 그날의 상황을 듣고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오히려 독려해 주었다.
며칠간의 여정이라는 염두에 두지 않고 인터넷을 뒤져서 가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를 돌아볼 비행기 티켓 중에서 싼 것을 고르다 보니 하노이에서 이틀을 쉬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돌아갈 적에는 호찌민에서 이틀을 쉬고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교적 싼 베트남항공의 여정이다. 배낭을 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학생을 학생으로 보아야 하지 제자로 보면 안 된다고 지적을 하던 주걱턱 교장의 아가리에 오물을 쑤셔 넣고 싶은 욕구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나중에 화를 풀고 한 발 물러서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니 그 교장의 말도 시대정신에 걸맞은, 교육자로서 자신과 적당한 타협을 지닌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는 걸 인정했다.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교육이념으로 무장된 인물은 아니고 그런 정신으로 출세를 넘보고 있었으니 그 나이에 교장이 되었겠지만 교사인 내가 가장 혐오하고 경멸하는 유형의 교육자다. 동료교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제가 할 일만 하는 교사, 아이들은 교사의 품성을 보고 배우는데 거리를 두면 안 된다는 게 우리 부부의 사명이고 내 지론이다.
교육청에서 알면 학교가 시끄러워지니까 이 선생께서 알아서 학부모와 합의를 보세요. 그게 좋을 거요. 무슨 여선생이 손이 그렇게 거칠어요.
점잖은 말로 위장된 주걱턱 교장의 냉담한 조언이었다. 그건 좋은 표현이고 골칫거리에 자신만은 빠지고 싶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그 말은 여행을 하는 내내 수시로 귀에서 되살아난다. 학부모와 합의를 보세요. 합의? 대상이 선생과 제자 사이라면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이젠 그 주걱턱 교장을 볼 일도 없을 거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복직하여 바로 전근을 간다. 공립이니 다행이지 사립학교에서 그런 교장을 만나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을 거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교실이 엄청 조용하다. 메쑤라는 교장선생의 목소리도 나근나근 조용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시로 마주앉은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곤 한다. 한국의 수업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방금 양곤의 제2교육고등학교를 둘러보러 들어왔다. 교육대학이 아니라 교육고등학교였다. 교육고등학교? 궁금증이 일었다. 미얀마에서는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부터 교육자의 자질과 교육자로서의 인성에 대해서 조기교육을 받는 모양인가 보다.
이 학교를 찾으려고 찾은 게 아니라 쇼핑센터에 있다는 스타박스에서 먹을거리를 좀 사고 대형마트에 생리대를 사기위해 찾아가다가 교문 옆 담벼락에 시멘트로 양각된 교명을 보았다. 담벼락엔 어지간히 정성을 기울인 교명을 새겨놓았다. 그야말로 예술품이었다. 그곳에 양곤 제2교육고등학교라고 영어로 쓰여 있어서, 교육고등학교? 고개를 갸웃하고는 나도 모르게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교육고등학교 앞에 기초라는 Basic이 붙어 있어서 더 궁금했다.
이게 뭔가?
우리나라의 사범대가 아니라 옛날의 이 년제 교육대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가?
교사는 오래된 목조건물이었지만 정갈했고 특히 기름칠을 한 목조교사를 우람한 고목이 여러 그루가 에워싸고 있어 학교의 유서를 대변하는 듯했다. 고목아래는 닭들이 병아리를 데리고 평화롭게 모래를 쪼아대고 있었다. 밖에서 그냥 보면 학교라는 걸 모르고 숲이나 공원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뻔했다. 수업 중이라 실례인 줄 알면서 조용히 복도를 따라 이층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학급 수는 열 학급정도 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학교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웬 여선생님이 이방인인 나를 내다보고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미얀마 사람치고는 얼굴이 유난히 뽀얀데 볼에 다나까 분말을 칠하고 있었다. 미얀마 학교의 특징은 교사와 학생의 복장이 동일하다는 거였다. 녹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 참 잘 어울렸다. 한국의 중학교 교사라고 하면서 미얀마는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궁금해서 들렀다고 하니 그러냐고 하면서 웃으면서 들어와서 차를 한잔 하고 가라고 권했다. 나이가 지긋한 여선생의 미소에 가식이 없는 친절함이 배어나고 있었다. 내 서툰 영어가 예사롭게 통했던 모양이고 못 들어올 곳에 들어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들어가니 교무실이었다.
교무실은 상당히 비좁았지만 정갈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나무로 된 접대용 의자에 앉았다. 거기서 인상적이었던 건 한 학생이 선생님의 심부름인지 교무실에 뭘 가지러 들어오고 나간 다음이었다. 둘이 마주앉아 라팔예라고 불리는 미얀마 전통차를 마시며 찻잔을 놓고 있으니 그 앞을 여학생이 지나가는데 한쪽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혀 머리를 조아리고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지나가는 공손함을 보였다. 한국의 되바라진 아이들과는 태도가 달랐다. 참 인상적이었고 나나,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할 태도였다. 배움은 도처에 늘려있고 가르치는 사람이 오히려 배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차를 마시며 한국의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임을 거듭 밝히고 조용한 복도로만 지나왔는데 수업을 한번 참관해도 좋겠느냐는 주제 넘는 제의를 했다. 그건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라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메쑤라고 이름을 밝힌 여교사는 자신도 역사를 가르친다면서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다음시간에 수업을 들어가는데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방해가 되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아이들이 오히려 좋아할 거라고 했다.
차를 마시며 여교사인 메쑤와 많은 얘기를 했다. 들어보니 미얀마는 우리와 학년제가 다르다. 우리는 초등학교 육 년! 나도 그 점이 못 마땅하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사학년과 오학년의 차이가 뭘까? 꼭 찍어 차이점을 지적하라면 누구도 얘기할 수가 없다.
초등학교를 오 년제로 만들면 안 되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얀마는 엘러멘터리Elementary 스쿨이라고 불리는 초등학교가 사 년제란다. 중학교 이 년, 고등학교 이 년. 대학 사 년 모두 12학년이면 끝이 난다고 했다. 우리나라 16년과는 사 년의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보다 사 년이나 일찍 사회에 배출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교육을 받으면 엘리트에 속하고 보통은 대학을 이 년으로 해서 10학년까지 마친다고 했다. 그 다음은 직업교육인데 사회에 나가서 각 분야별로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교육제도에 관한한 우리보다 선진국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 남학생들은 대학까지 마치려면 군에 갔다가 오는 시간이 있어서 서른이 가깝다. 인생의 절반을 교육을 받는데 시간을 탕진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일 것이다. 인력에 대한 시간낭비를 상당히 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인데 우리는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미얀마의 교육제도는 근대기에 영국의 지배를 받을 적에 도입되었으니 영국의 룰이라는 건 그 여교사의 말이고 일찍 교육을 마치니 조혼을 하고 출산율이 높다는 건 내 짐작이었다.
메쑤에게 그 말을 듣고 한국의 교육제도를 설명하는데 영어가 서툴러 진땀이 났고 손발이 동원되는 보디랭귀지가 필요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이드북을 사서 보니 미얀마는 인구가 우리나라보다 조금 많다. 그러나 연령대 분포도를 보면 우리나라는 상대가 안 된다. 여기는 한마디로 젊은 나라라다. 우리나라 전후 세대에 베이비붐이 일어났다. 그 세대가 지금 초로가 되어 심각한 고령사회가 되어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는 반면 미얀마는 인구가 연령대별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그게 우리나라와 다르다. 고령화로 사회문제를 일으킬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다. 또 우리와는 달리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 그것도 나라발전에 희망을 부여하는 일이다. 이곳에서 길에 다니다 보면 아랫배를 밀고 다니는 만삭의 임산부를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그 중에는 스무 살 남짓한 아주 앳된 소녀 같은 임산부도 있다. 나는 외동딸로 자라서 형제가 많은 집이 그렇게 부러웠다. 만삭의 임산부들을 보면 아랫배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여교사인 메쑤에게 아이가 몇이냐고 물었더니 넷이란다. 딸 셋에 아들 하나, 딸들은 다 결혼을 했고 아들이 지금 12학년이라고 했다. 12학년? 메쑤의 나이가 궁금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화장을 하지 않고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는지라 더 늙어보여서 실제 나이를 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화장품은 전혀 쓰지 않고 다나까라는 나무를 갈아서 얼굴에 분말을 칠하고 다닌다. 학생이나 선생이나 마찬가지다. 미얀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 이제는 낯설지 않다.
실례지만 나이가 몇이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메쑤는 자신을 밝히기에 소탈한 건지 아니면 이 나라에서는 나이를 묻는 게 실례가 안 되는지 올해로 딱 쉰이라고 했다.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언니라고 했더니 교육자로서 삼십 년이 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한국에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나이 쉰에 교직 삼십 년을 채울 수가 없다. 나는 마흔이지만 겨우 십삼 년차이고 남편은 마흔둘이지만 겨우 십이 년차이다. 남편은 박사과정을 밟느라고 좀 늦었다.
메쑤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국은 지금이 방학이냐고 물었다. 방학이 아니고 몸이 조금 좋지 않아 한 학기를 쉬면서 휴양을 겸해서 여행을 왔다고 둘러댔다. 메쑤라는 이 여교사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상황, 몇 달간 학기 중에 휴직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 한국의 선생이나 학생들을 이해나 할까? 아서라, 할 말이 따로 있지 그런 일로 국제적인 망신을 초래할 이유가 없다. 거짓말도 때로는 필요한 물건이다.
한국에서는 이제 교사는 천직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준 천직天職이 아니라 천직賤職. 즉 미천한 직업이 된 것이다. 교단에 서서 앵무새처럼 나불거리고 월급을 받는 막노동으로 전락한 것이다. 아이들이야 알아듣건 말건 지도안에 맞추어 진도만 나가는 교사들이 드물지 않은 실정이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고 있다는 얘기이고 같은 교사로서 안타까울 뿐이다.
언젠가 하릴없는 조사기관에서 교사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 걸 보면 정말 한국에는 뜨신 밥을 먹고 그렇게 쉬어터진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결과 조사에 응한 교사 30%만이 교육자로서 보람을 느낀다고 대답했고 53%는 교사가 된 걸 뼈저리게 후회한다는 조사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교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신성한 직업이 아니다. 호구지책으로 마지못해 교단에 서는 교사가 태반이 넘는다는 조사결과다. 미얀마도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다면 한국보다는 상황이 낳을 것이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메쑤의 얼굴과 말투에는 교직의 보람이나 긍지가 가득 차 보였다.
차를 마시던 메쑤가 시계를 보더니 일어서서 창문을 열고 창밖에 매달린 종을 쳤다. 고요한 교정에 퍼지는 종소리. 실로 오랜만에 듣는 종소리였고 추억이 묻어나는 종이었다. 종은 놋쇠로 만든 옛날의 물건이라 정감이 갔다. 쉬는 시간은 십 분이라고 했다. 그 점은 우리랑 같았다.
수업을 마친 선생님들이 하나 둘 교무실로 돌아왔다. 남선생님들은 학생들과 같은 교복을 입지 않았고 론지라고 불리는 치마에 윗도리만은 학생들과 같은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처음 보지만 들어오시는 선생님 모두가 이방인인 나를 보고 먼저 인사를 했다. 메쑤는 선생님들이 들어올 적마다 미얀마 말로 나를 소개했는데 미얀마 말이라 무엇으로 소개 했는지 모르지만 코리아Korea라는 말만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고작 열 두셋 정도가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없느냐고 메쑤에게 물으니 놀랍게도 메쑤 자신이 교장에 해당한다고 했다. 일찍 묻고 싶었지만 교장이라는 프린시팔Principal, 한국의 욕설과 비슷한 그 단어를 떠올리느라 한참이나 걸렸다. 갑자기 그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교장선생님도 수업에 들어가느냐고 물으니 가끔 들어간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니 교장이 따로 필요가 없는 학교라고 해서 다소 놀라웠다. 교장실은 따로 없고 교무실에서 같이 근무하는 이상적인 학교였다. 교장의 권위도 교장의 쓸데없는 간섭도 없는 학교였다. 모두가 교사의 재량인 모양이다. 이런 학교가 한국에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장이 없는 학교는 첩첩산골의 분교뿐이다. 그건 옛말이고 이젠 그런 분교도 없어지고 한국에서는 그런 오지의 학생들은 차로 본교로 실어다 나르는 실정이니 선생님들은 사사건건 교장의 간섭을 받게 마련이다.
쉬는 시간을 마치고 메쑤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실내에서는 선생님도 맨발이었고 학생들도 맨발이었다. 물론 나도 맨발이었다. 파고다에 들어가는데도 양말은 벗어야 한다. 이 나라의 예법이 그렇다. 대통령이 외국 귀빈을 맞이하는 데도 맨발이란다.
한 교실에 메쑤를 따라 들어가니 이방인을 본 학생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눈치였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는데 보니 학생들 모두가 두 손으로 합장을 하고 인사를 했고 메쑤도 합장을 하고 마주 인사를 했다. 불교국가라 불교식인 모양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메쑤가 학생들에게 나를 소개했는데 미얀마의 언어이니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나를 보고 자신을 소개하라고 했다. 학생은 스무 명가량 되는 작은 학급이었다. 모두들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서툰 영어로 한국의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임을 밝히고 만나서 반갑다고 하며 나도 메쑤처럼 합장을 하고 인사를 했다. 내 소개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 학생이 교실 뒤에 있는 나무의자를 앞으로 가지고 나왔다. 메쑤가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학생들과 마주보고 앉았다. 수업은 시작되었고 말은 못 알아들어도 눈치를 보니 15세기의 미얀마 불교의 역사에 대해서 수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앞에 마주앉아 있으니 수시로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 저 깊은 우물!
학생들의 눈동자를 보며 전율이 일었고 그 눈동자를 보고 맑은 샘을 떠올렸다. 눈동자는 깊은 우물이었다. 샘은 깊고 신선하고 맑은 물을 담은 우물이었다. 장차 선생님이 될 학생들은 모두가 열대여섯 살의 소녀들이었는데 전부가 그런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선하고 맑은 눈동자였다. 나는 아이들의 눈동자를 피해서 이곳으로 왔다. 특히 그 녀석과는 눈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합의를 보세요. 합의.
주걱턱의 교장의 말이 또 되살아난다.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따귀를 한 대 때렸는데 손이 빗나갔거나 맞는 녀석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뺨이 아니라 귀에 맞은 모양이다. 그 녀석은 나에게 맞고 다음시간에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오후 내내 다른 교실을 돌아다니며 수업을 했다. 문제는 다음날 생겼다. 오전 시간에 교장실에서 호출이 들어왔다. 그 때는 내가 수업 중이었다. 급하게 찾는다는 전갈이라 수업을 중단하고 잠시 교장실에 내려갔었다. 교장실에 들어가니 교장과 마주앉은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내가 들어가도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걱턱 교장의 중재와 설명에 의하면 어제 맞은 녀석의 학부형이고 녀석의 귀에 고막이 나가서 달팽이관 때문에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지금 병원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녀석이 결석한 걸 모르고 있었다.
아! 이거 교육청에서 알면 시끄럽겠는데.
주걱턱 교장의 짜증이 가미된 말이었다. 그날 그 학부형은 어떻게 하실 건지 생각을 해보고 연락을 달라고 하고 인사도 없이 싸늘한 얼굴로 교장실을 나갔다. 협박이 따로 없었다.
애가 뭐 틀린 말을 했나요?
그 학부형이 교장실을 나가며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힐끔 돌아보며 던진 말이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그게 들린 말이 아닌가? 나는 아직까지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내에서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병원을 개업한 고등학교 동기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더니 달팽이관이 나가면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이고 간단하게 수술을 하면 재발이나 뒤탈 없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문제라면서 누가 달팽이관이 나갔느냐고 물으며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했었다. 가르치는 아이 하나가 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달팽이관이 나갔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둘러대고는 다음에 만나서 저녁이나 한 그릇 사라고 하고는 노심초사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다음날 또 교장실에 불려갔다.
합의를 보세요. 합의.
교장의 말 요지는 그것이었다. 마주 앉아 있기가 불편했다. 오늘 또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교장에게 그 학부형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나왔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내가 전하는 상황의 얘기를 듣고 그날 저녁에 바로 그 학부형을 만나러 나갔다. 나는 초조함을 감추고 애들 숙제를 도우며 집에서 기다렸다. 남편은 밤늦게 좀 취해서 돌아왔다. 그 학부형이 시내에서 참치횟집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만나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계좌번호를 받아서 수술비에 좀 얹어서 주고 없던 일로 하기로 한 모양인데 남편이 바로 카드로 송금을 해주어서 나는 금액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 양반 회를 치는 솜씨가 그만이던데? 맛있는 부위만 골라 먹었어.
남편은 억지로 평소와 다름이 없이 보이려고 노력하는 티가 역력했다. 남편의 그런 행동에 더 부아가 일었다.
다음날 시간표를 훑어보니 2학년 3반의 수업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두려웠다. 그 아이와 눈을 맞추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인간인 이상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떳떳하게 눈을 마주치고 수업을 진행할 수가 있을까.
두려웠다.
그 아이의 눈동자가 두려웠다.
다음날 오전 수업을 하고 병가를 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견딜 자신이 없었다. 기간제로 들어오는 임시 교사들이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파악하고 내가 하던 수업을 맡아서 할 것이다. 이번 학기를 전제로 하니 넉 달이 예상되는 병가를 낸 것이다.
상의도 없이 병가를 내고 돌아오니 남편은 그런 일은 교사를 하다보면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고 대수롭잖게 생각하라고 했다. 심한 경우에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학부형에게 선생이 뺨을 맞는 경우도 있다면서 일례를 들려주었다.
어느 초등학교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삼학년 담임이었는데 현관에 설치하려고 가져다 놓은 방화수 빈 통에 쉬는 시간에 들어간 놈이 있었던 모양이다. 들어갈 땐 제가 들어갔지만 혼자서 나오지 못해 수업 종이 울려도 그 안에 갇힌 놈이 있어, 그렇게 들어가지 말라고 일렀거늘, 맛 좀 봐라! 하고 뚜껑을 닫아 한 시간을 가두어 놓고 수업을 했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체벌인 셈이었다. 한 시간 수업을 마치고 안아서 꺼내놓으니 그 녀석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한 시간도 안 되어 그 녀석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수업중인 여교사의 뺨을 때리고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고스란히 보는 앞에서.
그만! 그만 하라니까,
나는 내 머리를 난폭하게 쥐어뜯으며 소리를 쳐서 남편을 말을 잘랐다. 더 듣고 싶지도 않았고 상상이나 유추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 너무 과민해졌어. 어디 여행이라도 좀 다녀와. 애들은 어머니보고 집에 좀 와 계시라고 하면 돼. 가을걷이 끝나고 시골에 할 일도 없을 터인데.
남편이 이해를 해주고 그런 제안을 해주니 더 침울해졌다. 차라리 자신의 이성을 가누지 못하는 못된 교사라고 욕을 하고 천대를 했으면 마음이 편했을 거 같았다. 남편의 말을 듣고 나는 무작정 인터넷을 뒤졌다.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으로 그냥 돌아다니고 싶었던 것이다.
마주앉은 아이들의 눈망울을 살핀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는 아이는 수줍은 듯 눈길을 먼저 수업을 진행하는 메쑤에게로 돌린다. 참 선한 눈동자들을 지녔다. 한국 교실에서는 몇몇을 빼고는 보기 힘든 눈동자다.
되바라진 한국의 아이들이 육식동물의 눈동자를 지녔다면 이곳 아이들은 초식동물의 눈매를 지녔다. 눈동자, 그 깊은 우물에서 한마디 하면 샘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아, 이런 데서 아이들을 가르치면 얼마나 행복하고 보람을 느낄까? 교사인지라 그것부터가 부러웠다.
눈동자, 저 깊은 우물.
군침처럼 입에서 맴도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잘 떠나왔다.
이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본전은 충분히 건진 셈이다. 이렇게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어디 가서 볼 수가 있겠는가. 다음 학기에 교단에 서면 아이들에게 이 눈동자에 대한 설명은 꼭 해주어야지. 이런 아이들을 앉혀놓고 아이들 머리에 쏙쏙 들어가도록 설명을 하고 싶다. 그러면 가르치는 보람에 희열을 느낄 것이다. 선생의 희열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이 잘 알아듣고 모르는 부분을 배워가는 데 있는 것이다.
은사라는 말은 들어본 지가 오래 되었다. 한국의 요즘 아이들은 이런 단어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여기 아이들은 분명 메쑤를 은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세상이 험해져도 나쁜 아이들이나 못된 학부형보다는 선량한 사람이 다수일 거다. 통으로 싸잡아서 험하다고 하면 그 말에도 어폐가 있고 대대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고정관념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학부형들, 더 나아가서 시대를 탓할 일도 아니다. 선생이 하기 나름으로 은사라는 말을 듣고 말고 할 것이다. 은사가 되도록 노력해야지.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생각하니 이번 여행은 정말 잘 왔다. 문득 생각하니 이렇게 배려해준 남편에게 고맙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역시 교육학 박사답다. 아이들만 가르치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아내인 교사도 가르치는 양반임에는 틀림이 없다.
메쑤는 15세기의 불교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그 다음세기에 전파된 영향을 설명하고 있는 모양이다. 설명하는 걸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눈치로 보나 감으로 보나 메쑤는 열과 성을 다해 그 부분을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틈틈이 설명을 들으며 노트에 메모를 하곤 했다. 수업 분위기는 이래야 한다. 이 아이들이 장차 모두가 교단에 서는 선생님들이 될 아이들이다. 이 나라의 미래는 분명 밝을 것이다.
선생이나 아이들이나 참 애살이 있다.
문득 떠오른 말인데 이곳 아이들은 참 애살이 있다. 애살이란 경상도의 사투리인데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애착을 갖고 있는 건전한 욕심, 건전한 질투를 말한다. 애살이 있으면 모든 일에 애착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한국의 아이들은 애살이 없다. 애살이 있으면 참 보기가 좋다. 결국 잘하는 놈보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애살을 지닌 놈이 보기 좋다는 말이다.
아이들에게 애살을 요구하기 보다는 내가 애살을 지니고 가르쳐야지.
아이들은 눈빛은 무슨 마력을 지닌 모양이다.
아이들의 눈동자에 매료되어 있다 보니 한 시간은 금세 갔다. 메쑤가 수업을 마치고 나에게 수업을 참관한 소감 한마디를 말하라고 하며 교탁을 비워주었다. 서툰 영어로 나는 여러분의 눈동자가 참으로 맑고 수업 분위기가 좋았다고 하며 여러분이 선생님이 되는 날 미얀마의 미래는 분명히 밝을 거라고 서툰 영어로 말했다. 그러자 메쑤가 아이들을 보고 수업을 마치는 인사는 나에게 하라고 한 모양이다. 실장이 되는 녀석인지 누군가 앉아서 구령을 붙였다. 그 구령에 맞추어 합장을 하고 인사를 했다. 나도 합장을 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국처럼 상호간에 건성으로 한 인사가 아니었고 참으로 덧붙이고 뺄 것도 없이 정갈한 수업이었다.
한국에선 수업을 마치면 복도를 걸어 나가는 선생님을 앞질러 천방지축 뛰어가는 놈들이 허다한데 여긴 그런 게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 오는 학생들은 한쪽으로 조신하게 비켜서면서 허리를 굽혀 머리를 조아리고 길을 비켜주곤 했다. 한눈에 보아도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진 못한다. 그런 예의가 몸에 밴 것이다.
일층으로 내려오면서 메쑤에게 다 양곤의 학생들이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전국에서 몰려든 학생들인데 경쟁률이 엄청 심하다고 하면서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한다고 했다. 양곤의 아이들도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합숙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집이 멀고 교통사정이 좋지 않아 주말마다 집에 가지 못하고 방학이 되어야 집에 가는 아이들이 태반이란다. 일주일간 여행을 다녀봐서 알지만 웬만한 거리는 차로 열 시간이 넘게 걸리니 그 말에는 금세 수긍이 갔다.
메쑤는 그냥 보내기 섭섭하다면서 교무실에 가서 차를 한잔 더 하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내가 좀 급했다. 빨리 생리대를 사야한다. 곧 생리가 시작될 조짐이다. 생리가 시작되기 전에 아랫배가 싸늘하고 단전 부위가 딱딱하게 굳는 듯 하는 전조가 나에게는 있다. 그 전조가 심해졌다. 곧 생리가 시작될 모양이다.
메쑤에게 내일 시간이 되면 한 번 더 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메쑤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내일 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복도 끝 현관 앞에 벗어둔 신발을 찾아 신었다. 교사 밖으로 나와서 보니 교사 뒤편에 목조건물로 된 기숙사가 보였다. 창마다 빨래를 늘어놓아 한눈에 보아도 기숙사임을 알 수가 있었다. 내일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한 번 더 와서 눈으로, 뇌리 깊숙이 사진을 박아야 할 것이다. 눈동자, 그 깊은 우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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