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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할 중보기도②
2007년 11월 11일 / 대예배 / 창 18:22-33
평양 대부흥 100주년도 다 지나고 2개월도 못 남았습니다. 새로운 부흥을 많이들 외치고 있었지만 아직 눈에 띄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부흥이 아니고 새로운 부흥을 하나님께서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점점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습니다. 전 세계 150개 지역에서 부흥의 영으로 임하고 계십니다. 이 부흥들은 웨일즈나 아주사나 평양과는 다릅니다. 참고로 아주사에 있었던 일을 소개합니다.
■ 1906년 4월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 312 2층 건물의 허름한 마구간에서 놀라운 성령의 불길이 점화됐습니다. 흑인노예 가문의 윌리엄 시무어 목사와 10명도 채 안 되는 성도들이 국가와 인종, 교파를 초월하여 기도하던 이곳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기도하며 찬양하던 이들은 방언을 하며 심령이 변화됐고 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주님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심령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로 이어졌고 사회의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어울려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들은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모든 인간은 ‘한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룬’ 엄연한 사실을 삶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줬습니다. 아주사에서 시작된 성령 부흥운동은 미국을 거쳐 캐나다와 독일, 스웨덴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조선에서 일어났던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가장 위대한 성령운동’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아주사 부흥운동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할 부흥은 새로운 부흥입니다. 그 전 부흥은 과정적 부흥이라면 이제는 종국적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마지막 부흥입니다. 열방 가운데 미전도 종족 숫자가 급격히 줄고 있고 소돔과 고모라 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바벨탑 사건들이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 트렌스젠더가 2만 명입니다.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 계실 수 없는 현실입니다. 종국적 부흥이 와야 할 때입니다. 한국은 이제 대부흥 백 주년을 맞아 대규모 집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뭔가 계획하신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부흥으로 인도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부흥의 바람과 기도의 열기
지난날의 교회 역사를 보면 한 시대를 놀랄만한 충격적인 부흥이 일어났던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는 강한 회개와 변화가 일어났고, 침체되었던 교회들은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며, 심지어 한 도시 전체가 성령의 사로잡힘 아래 놓여 상점과 학교와 직장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새롭게 변하는 부흥의 바람이었습니다.
■ 남미의 콜롬비아 아마존 부근에 위치한 칼리(Cali)는 마약의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1978년, 훌리오 선교사내외는 ‘칼리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칼리로 이주한 훌리오 선교사 부부는 마피아의 세력에 억압된 칼리가 자유하기 위하여 목회자들과 함께 연합하여 도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보기도가 시작되자 하루에도 15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도시에 48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무런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변화가 온 것입니다. 10일이 지났습니다. 철야기도모임이 있는 날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55,000명 수용할 수 있는 축구운동장에 60,000명의 참석자가 모였습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러 교회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훌리오(Fulio)선교사를 마약거래상인 마피아들이 총격하여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동네가 술렁거리고 많은 사람이 마피아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훌리오 목사의 순교로 그 동안 연합되지 않고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꺼려했던 목회자들과 10만의 성도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200여명의 목회자가 연합하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전 교회가 중보기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급격하게 도시가 변하고 마약사용이 철폐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 가난, 강간 등의 성적폭력으로 가득했던 아프리카 케냐의 키암부(Kiamby)는 술집이 상점보다도 훨씬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1980년 말에는 케냐에서 가장 무서운 범죄가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저녁이 되면 여자들은 무서워 밖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 하나님은 무티목사에게 ‘키암부로 가서 교회를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6개월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나요? 또 무엇을 상대로 싸워야 하나요?”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술을 하며 악령을 섬기는 자들이 있어 그 힘을 얻은 마귀가 그 동네를 장악하고 있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도시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영적전쟁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예배와 기도에 힘쓰면서 도시의 영적권위를 회복되어짐을 선포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기도가 시작된 지 하루 만에 마마장이는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갑작스럽게 도시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녁에 사람들이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 할 정도로 무서웠던 도시가 케냐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변하였습니다. 동네 술집들이 문을 닫고, 교회가 새로이 세워지고, 무너져가던 교회들에게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 남미에서 끔찍하게도 가난한 도시이면서 술 중독자들로 우글거리고, 우상숭배가 만연된 인구 2만 명의 도시가 과테말라의 알라모농가(Alamolonga)입니다. 이 도시는 수세기 전 스페인 사람들이 왔을 때부터 카톨릭과 혼합된 우상숭배로 인해 도시의 권한을 악령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사람들은 늘 술에 취해 싸움을 하였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다 일어나는 살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감옥은 항상 넘치고 있었습니다. 땅은 황폐하여졌고 경제상황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실업자는 늘고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황폐하여졌습니다. 그 도시에 마리아노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가난과 폭력을 좌우하는 악에 대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주일에 3, 4일씩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고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만이 아니라 도시가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0,000명이 조상숭배를 하는 도시에 24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19,000의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로 프로그램을 만든 것도 아니고, 전도하러 다닌 것도 아닌데 마리아노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는 2,000명 교인으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 도시에 있던 4개의 감옥이 문을 닫았습니다. 감옥이 전혀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들이 생겼습니다. 지독히도 농산물의 소출이 없어 농부들이 먹을 것조차 얻지 못했던 알라마농가는 과테말라에서 가장 좋은 과일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수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약속된 것처럼 땅이 복을 받아 과일도 야채도 많이 그리고 큰 것으로 생산되어 예년에 비해 1000%의 생산이 증가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당근이 사람의 팔뚝만하고, 사과가 사람 얼굴만큼 큰 것이 나무에서 열리고, 배추의 크기는 보통 것의 2배 이상으로 큰 것이 생산되는 것이었습니다.
▶ 이러한 부흥의 바람은 언제나 기도의 열기를 타고 일어났습니다. 한결같이 용광로같은 뜨겁고 열광적인 기도 모임이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기도 모임에 모였고 마치 폭발할듯한 열기로 기도의 불을 피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서 폭풍같은 부흥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여기서 부흥과 기도의 연관성을 볼 수 있습니다.
부흥의 불씨 - 작은 기도 모임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부흥의 역사를 살피면서 깨닫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런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소수의 비전을 가진 사람들의 기도 모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지만 우리가 이 교회에 타오를 부흥의 불길을 꿈꾸며 함께 모여 기도의 무릎을 모으기만 한다면 이 교회 안에도 토네이도 같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것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불어 닥칠 성령의 바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곳에 나타날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도성 전체에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주의 백성들이 복음을 들고 일어나며, 모든 우상들이 불이 타고, 어둠의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이 쫓겨나는 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경험하십시다.
합 3:1-2 / 서기오놋에 맞춘 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싶어도 찾지 못하고 기력을 잃어 침체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 시대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중보하는 기도자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민족을 품은 중보자들의 기도가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중보자가 깨어 기도하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유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부흥의 역사들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기적인 욕심이나 야망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맞춘 기도, 초점이 하나님께로 항한 중보자의 기도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에 대하여 봅니다.
삼상 12:20-24 / 사무엘이 그들을 위로하며 권고하였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비록 범죄하기는 하였으나 이후로는 여호와만을 섬기면서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십시오! 21) 여러분을 도와주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다시는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우상들은 전혀 유익하지도 않고 힘도 없어서 원수들의 손에서 아무도 해방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22) 여호와께서는 항상 진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이미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보호해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다시 여러분을 버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23) 나도 계속 여러분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드리고, 가장 옳고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내가 만약 기도하기를 그친다면 스스로 죄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24) 이제 여러분은 여호와만을 경외하면서 온전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순종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들을 도와주셨는지 항상 생각하십시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1. 기도의 태도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에서 기도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겸손이고 다른 하나는 용기라고 했습니다. “겸손과 용기의 덕이 없이는 아무도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겸손함과 동시에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27절 /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① 겸손함 / ‘티끌과 같은 나라도’ 이것이 아브라함의 겸손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잘 압니다. 왜냐하면 늘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놓친 사람은 언제나 교만합니다. 자신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② 담대함 /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담대함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연약함 중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를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과 다릅니다. 이것은 영적 담대함입니다. 성도의 영적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갑시다. 담대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시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붙들고 담대히 나아갑시다. 주께서 우리를 받으실 것입니다.
③ 인내함 /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겸손과 담대함만이 아니라 인내가 있었습니다(23-32절).
끈질긴 기도하면 우리의 머리에는 언뜻 야곱의 얍복강가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그는 천사로부터 환도뼈를 얻어맞고 힘을 쓸 수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옷자락을 잡고 애원합니다. ‘나를 축복해 주십시오. 그리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습니다.’ 환도뼈를 얻어맞아 그 뼈가 위골되었는데 어떻게 싸울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메달림이었습니다. 애원함이었습니다. 야곱의 애원은 기어코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냈습니다.
2. 기도의 특징
① 남을 위한 기도 / 아브라함의 기도는 이기심에 의해 발동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과 상관이 없는 소돔 성읍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중보의 기도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행 12:1에 보면 감옥에 갇혀 절망 중에 있던 베드로가 양손과 발의 착고가 풀어지고 감옥문이 열려 풀려나게 되는 기적이 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 사건을 두고 말하기를 ‘베드로를 감옥에서 끌어낸 것은 천사의 활동이었다. 그러나 천사를 움직인 것은 교회의 간절한 중보기도였다.’고 말하면서 중보기도의 능력을 가르쳤습니다. 교회가 연합된 힘으로 드리는 중보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② 대화하는 기도 / 33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갔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셨다고 기록합니다. 분명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에 대한 기록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하셨고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마치시니까 아브라함의 기도가 끝이 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어나니까 아브라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 즉 일방통행적인 차원으로 이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였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때 솔직히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좀 복잡해집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면 쉽겠는데 일방적인 아닌 쌍방이라는데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기도와 말씀의 상관관계를 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이 깊은 아브라함 또는 모세와 같은 경우는 대화식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을 때 혹은 설교말씀을 들을 때, 환상과 꿈을 통해 내가 간구한 것들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설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관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진정 우리의 기도는 기도 시간만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시간까지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 전부가 기도입니다.
3. 기도의 결과
아브라함의 기도는 의미 없이 마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가 아니면 체험할 수 없는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①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였습니다. / 아브라함이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얼마나 가깝고 깊은 대화를 주고받았습니까? 한 나라의 멸망을 앞에 두고 무한하고 죄 많은 인간이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축복입니다.
기도의 사람이었던 죠지 뮬러는 “사람이 기도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자신 안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합니다.
칼빈은 그의 <기도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첫째는 모든 좋은 것이 오직 그 분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둘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게 하시려 함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은 파괴되고 우리의 영혼은 비참하게 고갈됩니다. 기도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스스로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지혜로운 길입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계속 살아도 되는가? 내가 과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가? 내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일까?”
② 영혼의 구원이었습니다
창 19:29 /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에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여러분의 중보기도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까? 인생의 새로움을 찾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의 기도 때문에 한 영혼이 사망의 음부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누릴 영광중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약 5:19-20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더 이상 진리를 믿지 않게 되었을 때 누가 그의 마음을 돌이켜서 다시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20) 그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한 이 사람은 방황하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그 사람이 저지른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 일을 해낸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집은 기도하는 사람이 만듭니다. 문패를 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를 위해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영적인 가정인 교회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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