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이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이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눈을 뜨는 건 시인입니다만, 사물을 분간하는 것은 눈꺼풀과 눈길의 영역입니다. 사물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셈이지요. 사람이 보기에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은 필사의 직립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아 넘기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담을 높이는 공사는 칼라소음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새도 와서 발자국을 남기고 강아지도 멋모르고 뛰어들었다가 흔적을 남깁니다. 내 피부에도 누군가 아픈 상처가 되어 이름을 남겼습니다. 날씨마저 습해서 상처가 덧날수도 있지만 시인은 상처에 순응하는군요. 누가 시인에게 상처를 입혔을까요?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날씨가 습합니다. 습한 날씨는 나에게 상처가 되었고요. 그 습한 날씨에 이상한 일들이,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컵이 저절로 미끄러지는군요. 손대지 않은, 의심하지 않던 일이 일어납니다.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손대지 않은 컵이 미끄러지는 일,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지는 일, 상처가 되는 일. 누가 원인일까요? 나일까요, 아니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일까요?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이가 참 많습니다. 눈도 잠도 나를 지켜봅니다.
소음에는 칼라소음(color noise)와 백색소음(white noise)가 있습니다. 칼라소음은 높은 음역대의 소음이지만 백색소음은 넓은 음폭의 소음대를 유지합니다. 쉽게 말하면 백색소음은 좋은 소음이라는 뜻이죠. 바람소리, 빗소리, 파도소리, 그리고 일상의 소리와 같은 것들이 모두 백색소음입니다. 내 피부에 조용히 내려앉은 습기는 소리로 치자면 백색소음일까요? 우리는 수 많은 소음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나에 관한 소문, 평가, 비교, 그런 것들이 모두 상처가 되어서 나에게 가라앉습니다. 하나하나는 칼라소음이지만 모든 것들은 익숙해져서 백색소음이 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들도 늘 우리 주변에 머물죠. 그들이 상처입은 나를 지켜봅니다. 말은 없지만 '오래 나를 지켜보는'걸 보면 든든한 지원군인 셈이죠.
저는 되도록 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어요. 슬픔의 시들도 결국은 희망을 주고자 하는 것 아닐까요. 일교차가 너무 심해졌어요. 나무들도 필사의 직립을 하고 있겠죠. 늦게 핀 코스모스도, 쑥부쟁이도, 구절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