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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자: 2026.08.02주일 낮 예배 - 말씀: 사6:9-10/마18:3-4 /찬송(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 - 제목: 천국에서 큰 자되기 -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 은혜찬양: (118) 서로 사랑하자 -by 오세영/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by Anvely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마태복음 18:3-4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들어가는 말씀
벌써 8월이 되었습니다. 이상기온과 지각 변동으로 지구촌이 많이 흔들립니다. 지구가 흔들리는 것 또는 잠에서 깨이는 것을 어쓰퀘이크(Earthquakes) 지진이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엄청난 피해를 입은 모습이 보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지진활성화 지대인데 자주 지진이 발생합니다. 한국은 지진대가 비켜지나간 지형입니다. 그러나 만일 백두산이 숨쉬는 날이면 즉 화산이 터지면 한반도는 끝장이 납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한반도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신것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네 삶이란 것이 잠자는 화산과 같습니다. 잦은 지표면의 진동은 큰 지진을 불러옵니다. 경고등이 자주 켜지는 건물은 큰 위험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언제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즉 코앞에 다가 올 온갖 현상들을 눈을 뜨고도 못보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런 눈과 귀에다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태선생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 이사야선지자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이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로서 사명을 받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백성들의 완악함과 영적 무감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려면 진정한 회개와 마음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로는(주로 기도할 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능력 있는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칭찬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또 하늘에 가서도 남들보다 더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우리들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좋다. 그러나 교회는 싫다는 인디라 간디가 교회에 안가는 이유가 이렇습니다.
간디의 친구 중에 어떤 영국 선교사가 있었는데 간디는 그와 인간적으로 매우 친했고, 그에게 전도를 받고, 설교도 듣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간디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예배당 문지기가 유색인종이라고 해서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교회에 다시 나가지 않았답니다.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주님의 몸이십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욕되게 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영광돌리겠습니까?
우리는 이율배반의 신앙과 이율배반의 삶을 살지는 않는지 이시간 통회화고/ 자복하고/ 회개하여/ /천국에서 큰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물론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히 헌신하며 충성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 한편에는 내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섬김과 봉사로 헌신하며, 또 얼마나 많은 헌금을 드렸는데... 교회와 교인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적당한 칭찬이 없을 때, 우리는 얼마나 속상해하며 섭섭해하는지 모릅니다.
인지상정이랄까요? 교만도 때로는 능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닐 수 있습니다.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3~4)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깜짝 놀랄 사실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이 자기를 기다리며 깨어 있었던 충성된 종들을 자리에 앉히시고 허리에 띠를 띠고 나아와 그들을 수종들며 섬긴다고 말씀합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눅 12:37)
그리고 주님은 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마 20:28)
천국은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을 받는 나라가 아니요, 서로 먼저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서로를 사랑하여 수종들며 섬기는 나라가 곧 천국이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작은 자가 되어도 좋으니까 우리 모두 천국행 열차에 승차하시기를 기원하면서 본문말씀으로 은혜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1. 돌아서라 - turning point
예수는 사람이 반드시 회심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회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epistrepho”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돌아섬”입니다. 일정한 목표를 정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요한복음 3:7). 이것은 급진적인 마음의 변화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회심은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입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리움을 받은 슈바이쳐박사가 나이 17세 무렵 마루에 엎져 밖을 보니 부상자 상이용사들이 목박을 짚고 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커서(30세 이후)의사가 되어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회심이 아닙니다. 결심입니다. 나는 무엇무엇을 하겠다.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은 회심이 아닙니다. 그러면
회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길 원하나요? 죄인은 회심이 필요한 것이지,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주의”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교회에서 회심을 대신해왔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결단을 내려왔으나, 회심되지는 않았습니다.
신앙의 결단은 주님의 진리에 순수이 따르겠다는 결심입니다. 한 사람이 회중 앞으로 나와 하나님을 믿겠다는 약속입니다. 절대자의 주권에 대한 결단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겠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회심은 본질적으로 다름니다. 결단이 신앙의 행동 즉, 물리적이고 외형적인 약속임에 반하여 주님과의 일치를 위한 회심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로써 잃어버린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어 의로움과 중생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인의 자리에서 구원의 정복으로 바뀌며, 거룩한 삶이 타락한 영혼에 주어지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회심은 지금껏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고 아 이게 아닌데 라고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갖는 것입니다. 이른바 turning point라는 것을 말합니다. 돌어서는 지점이라고 해석할까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분토처럼 여겼다고 말씀하신 사도바울의 신앙결단은 모든 신자들에 대한 신앙고백이자 결단을 위한 표본 예시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3:8-11절 말씀에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결단을 내리는 것은 언제든 누구나 할 수 있는 인간의 결정이지만 회심은 초자연적인 일로, 인간의 삶과 영원한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영생을 위한 구원의 길을 시작하는 첫걸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니다. 회심은 많은 역경과 시련을 겪은 후에 주로 일어나는 심령의 새출발점입니다.
2. 낮추어라 -마18:3-4
어린이는 나이가 작은 사람을 말합니다. 나잇값대로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어린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 해답은 바로 마18:4절 말씀입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이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3절)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매우 단순하고 겸손하며 순전한 마음을 가집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순하고 겸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내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착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 내 힘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하늘나라에 간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만나인들은 어린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간 것도 사도 바울을 만난 간수 역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행 16:29,30). 오늘날도 어린 아이와 같이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오직 엄마, 아빠 밖에 모릅니다. 그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어린이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큰 자가 되어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권세를 부리기를 원합니다. 요즘보면 모 정당의 대표자를 뽑는데 모다들 자기가 적합하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세상의 권세는 한낱 풀잎에 이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과 다른 법칙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사람이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을 제자들은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해 말하면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마태복음18:4절 말씀의 요지는 겸손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겸손의 반댓말은 교만입니다.
겸손은 이익을 부르고 교만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주님은 강조하신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잠 16:18)
“진정한 회심의 확실한 증거는 겸손이다.” 라고 말합니다. 겸손하지 않고 참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분명한 인식 즉 회개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하지 않고 구원받을 길은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는 그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시작은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탕이 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에 대해 우리 주님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했습니다.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 엄격한 금식을 했습니다. 십일조도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최대한의 양을 드렸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자랑(교만)스러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본이 된 자신이 대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뉘우침의 표시로 가슴을 치며 비통한 목소리로 자비를 호소합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누구였을까요"
3. 주님의 인침을 받으라
바울은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갈6:1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 말씀에서는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으나 2장2절에서 증거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육적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발견한 이후부터는 세상에서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는 모든 표시를 분토처럼 버렸다(빌3:5-9). 그것은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그 모든 조건에 비할 수 없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소망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굳게 의지하므로 어떠한 시련이 닥친다고 해도 그는 그 시련을 감당할 뿐 아니라 그 시련 안에서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표시, 생명의 표시인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여겨야 하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기쁨과 소망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없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안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십자가의 능력 아래서는 어떤 인생의 짐, 죄의 짐이라도 다 벗어놓고 해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총은 우리의 심령이 메마를 때마다 새로운 샘물로 충만하게 적셔주십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유대인처럼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된다. 헬라인처럼 미련한 것으로 돌려 놓아도 안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못박히사 피흘리신 십자가를 믿으므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9장 4절 말씀에 보면 장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세상 끝날이 오게 되면 그리스도를 세상에 다시 보내셔서 심판하시게 될 것인데 "오직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사람들만 해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성령이 함께 하셔서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새로운 심령으로 변화되어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 마치는 말씀
마태복음 18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중요한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며, 천국에서는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커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겸손과 순수함의 가치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이어서 예수님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을 죄로 유혹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비유를 통해, 죄를 범하게 만드는 행위가 얼마나 무겁고 심각한 것인지 경고하십니다. 이는 공동체 내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하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길을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십니다. 충분한 양이 있더라도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8장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교회 내에서 죄를 범한 사람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한 형제를 개인적으로, 그리고 두세 증인을 데리고 타이르고, 끝내는 교회 앞에 데리고 나와 해결할 것을 지시하십니다. 이는 교회의 질서와 화합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원칙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 묻자, 예수님은 일곱 번에 일흔 번까지라도 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는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만 달란트 빚진 종과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비유( 마 18장 28∼30절)를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용서를 생각하며 이웃을 용서해야 함을 일깨우십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가장 작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천국에서 가장 크 자가 된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만나인을 위하여 주신 말씀을 함께 봉독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말씀은 살전 5:16-18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