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관덕정 순교터
조선 땅에 복음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이래 1백여 년에 걸쳐 진행된 혹독한 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들의 피와 땀은 이 땅 구석구석에 뿌려져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을 계기로 박해 정책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었던 당시 조선 땅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이를 없었던 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지방 관리나 유림들에 의해 빈발했고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지방 관리와 교인들 사이의 분쟁이나 교인들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예컨대 충청도 아산, 전라도의 지도(智島), 황해도의 장연(長淵), 강원도의 이천(伊川) 등지에서는 계속적인 교난 사건이 발생했다.
관덕정은 제주도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즉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에 의한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다. 이 사건은 제주에서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교안으로 신자 수백 명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민군(民軍)에 의해 피살되었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새로운 조세 정책, 즉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封稅官)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어 가는 것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현재 제주시의 중심부인 삼도 2동에 위치하고 있는 관덕정(觀德亭)은 본래 조선 초 세종 30년(1448년)에 목사 신숙청(申淑晴)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정자(亭子)이다. 관덕정의 편액(扁額)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필치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었고, 현존하는 편액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가 쓴 것이다. 관덕정은 제주도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제주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이 정자를 처참한 사형장으로 만들었다. 저항을 물리치고 봉세관과 천주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다. 특히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 광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교회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의 신자가 피살된 것으로 보았으나 당시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제주 지역의 선교를 맡았던 라크루(Lacrouts) 신부는 프랑스 함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관덕정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었다. 1901년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찍은 사진에는 교우들을 때려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함께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고,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가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게 되었다.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한 뮈텔(Mutel)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 과정에서 피살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가 1903년 11월 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1997년 ‘신축교안’을 재조명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는 제주교구는 2003년 11월 7일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와 함께 화해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100년 동안 평행선을 달려왔던 양측이 과거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화해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화해 선언문 발표로 교회는 과거 전통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던 점들을 인정하고, 제주도 민중들도 봉기 과정에서 무고한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 시각을 버리고 해묵은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6월 6일)]
가. 제주 중앙주교좌성당과 관덕정
1)중앙주교좌성당 설립 120주년, 주님이 섭리하신 제주 복음사
주님의 자비가 깃든 천혜의 제주 땅에 대한 본격적인 전교는 1899년 제주본당 설립이 기점이다. 이는 한국천주교 설립 115년만의 일이었고, 그로부터 다시 120년이 지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피울음 같은 동백꽃으로 시작되어 왕벚꽃, 유채꽃으로 봄 풍경이 이어지는 4월 제주는 4·3의 계절이다. 4·3 당시에 불법·탈법적인 군사재판에 의해 옥고를 치러야 했던 4·3 수형인들은 최근 대한민국 사법부에 의해 무죄판결이나 다름없는 ‘공소 기각’을 통해 명예를 되찾았다. 하지만 70년 넘도록 이들은 물론 4·3 피해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함께 겪었을 피를 토하는 통한의 아픔, 그 고통 속에 살아온 세월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지 아직은 막막한 일이다. 그래서 4·3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제주교구장 강우일 베드로 주교는 “4·3은 대한민국 국민 90% 이상이 잘 모르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역사이고, 이런 역사의 진실을 국민 전체에 오롯이 알리고 과거의 잘못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한다.
부교구장 문창우 비오 주교는 “3·1운동의 정신으로 하나 된 조국의 해방과 완전한 독립을 꿈꾸며 개최한 1947년 3·1만세 운동 기념대회 현장에서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집회를 구경하던 초등학생과 아기를 업은 20대 초반 젊은 부녀자 등 6명이 숨졌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경찰은 사과는커녕 오히려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리고 닥치는 대로 체포해 고문하는 등 제주 사회가 요동쳤다. 결국 1948년 4월3일, ‘탄압이면 항쟁이다’라고 외치며 무장봉기가 일어나게 된 것”이라 4·3 발발 동기에 대해 설명했다.
문 주교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기득권과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잔혹하게 탄압해온 역사의 부당한 오류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고, 이것이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민족의 통일을 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러한 역사 안에서 오묘한 주님의 섭리는 절해고도, 척박하기 만한 고난의 땅 제주 지역에 신앙의 씨를 뿌리시고 풍성히 자라도록 해주셨다. 100년이 넘는 한국천주교 박해사, 순교사, 그 신앙의 터 한 켠에 제주교회의 역사 또한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
2)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역사 제주 4·3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은 제주 중앙주교좌성당(주임신부 남승택 가브리엘)은 최근 ‘제주 중앙주교좌성당 120년사’를 펴냈다. 제주 땅의 신앙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왔는지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집대성 판이다. 4편으로 구성된 ‘120년사’ 제1장은 ‘주님의 섭리가 인도한 제주 복음사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종’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와 그 아들 황경한. 1800년대 지난했던 제주에서의 삶의 여정이 순례객들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사제서품 후 황해로 들어선 귀국길에 라파엘호의 제주 표착과 제주에서 올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땅 첫 미사에 대한 감동 또한 새롭다. 제주 출신으로 유일하게 복자품에 오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전교활동과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 통영에서의 순교 기록은 제주 땅에 내리신 주님의 섭리를 다시금 느끼며 찬미·찬송하게 한다.
“1899년에 제주와 한논 등 2개 본당이 설립된 지 2년 만에 발생한 1901년의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희생되면서 제주 지역의 공동체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교회 당국과 구 마르첼리노, 엄 에밀리오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노력 덕택에 제주의 신앙공동체는 오래지 아니하여 모든 것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1904년 봄에 제주 교회는 신자 수 190여 명을 기록하였다”
3) 제주 교회의 수난사이기도 한 ‘신축교안(辛丑敎案)’
‘120년사’ 제2장 서두 부분에서 옮긴 내용이다. 제주 교회의 수난사이기도 한 신축교안이 일어난 배경은 매우 복합적이다. ‘지역사회의 배타적인 성격과 문란한 제도, 일부 신자들과 주민 사이의 갈등, 선교사들의 지나친 간섭과 선교 우선주의 등 갖가지 문제가 원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고 정리된다.
신축교안은 1901년 5월5일, 6일에 당시 대정 군수 채구석에 의해 조세징수권, 상권 장악을 위해 설립된 사설 단체인 상무사 회원들이 회의를 열어 천주교 신자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상무사 분사장 채구석을 비롯해 명사장 오을길(오대현으로 알려짐), 관노 출신 집사 이재수, 사원 강우백, 명사원 강백이 등이 선봉에 선 무리는 한라산 남서쪽과 동남쪽 방향으로 나누어 제주읍성까지 진격해왔다. 한 달 가까이 진퇴가 엇갈리는 전투가 지속되었고 급기야 이들 무리는 성문을 열고 들어와 신자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현재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는 관덕정(觀德亭) 마당은 당시 신자 수백 명이 피살되어 사체가 널브러졌던 수난의 현장이기도 하다. ‘제주 중앙주교좌성당 120년사’ 기록에 의하면 “1899년 4월22일 제주본당이 설립된 지 2년 만에 제주의 신자 수는 241명(제주본당 104명, 한논본당 137명)을 기록할 정도로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교안으로 인해 이런 희망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교회는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제주 교회 신앙의 못자리 수난사에 고개를 숙이게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5월호, 안창흡 프란치스코(제주 Re. 명예기자)]
4) 주님의 섭리가 인도한 제주복음사
산수국 흐드러진 제주 들녘은 어느새 성하의 계절이다. 뙤약볕 아래 신축화해길(황사평성지-화북성당-별도봉-관덕정-중앙성당, 총 10.8km 성지순례길)을 걸으며 120년 전에 이 땅에서 펼쳐졌던 신축교안, 관덕정 마당을 교우들의 피로 흥건히 적셨던 역사, 교회 수난사가 눈앞에 펼쳐져 가슴 저미게 만든다.
신축교안(辛丑敎案)은 제주교안, 신축교난, 이재수의 난, 제주 민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제수의 난이나 제주민란이라는 명칭은 당시 봉세관 무리 등에 의한 대민 조세 수탈과 교회의 부분적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봉기한 민중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시각이다. 반면, 신축교난이라는 이름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당하고 순교해야 했던 박해사적·수난사적 요소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규정된다.
일찍이 이 사건에 대해 제주교구는 ‘교난’이 ‘박해’와 같은 성격의 용어라는 점을 들어 조선왕조에 의한 박해 이후의 사건이라는 면과 민란의 요소가 결부되었다는 점, 사후 외교 마찰로 비화되었으며, 제주 지역사회 특성과 관련한 교회와 민중간 갈등, 교회의 복음 전파 등 복합적인 배경을 고려해 ‘신축교안’이라 명명함이 타당하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교구 홈페이지 ‘교구 역사’ 편에서는 “제주도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된 것은 중문면 색달리 사람 양용항(베드로)에 의해서였다”고 소개한다. “그는 육지에 있을 때 세례를 받고(1898년 4월경) 고향에 돌아와 이웃 사람들에게 전했다”며 “이렇게 신앙의 터전이 마련되었을 때, 성직자를 우리 향토에 모셔오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99년 두 분 성직자가 들어와 성사와 전례를 집전함으로써 제주교회 공동체는 공식으로 성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5)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성직자 두 분 모시며 제주교회 성립
한불조약 이후 ‘여아대(如我待-국왕을 대하는 것처럼 대우하라)’ 신표를 지닌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한 치외법권 아래 조선에서 전교가 자유로워진 때이기는 했으나 이와 같은 움직임은 한편으로 제주 지역 역시 한국 천주교 전래처럼 평신도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는 제주본당 설립을 선포하고 주임 페네(C. Peynet, 裵嘉祿 가를로,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신부와 보좌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파견했는데, 1899년 4월22일의 일이다. 이로부터 1년 후, 라크루 신부가 제주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자 김원영 신부는 산남 지역 전교를 위해 서귀포시 한논으로 옮겨 한논본당을 설립했다. 1901년 5월에 신자 수 137명(정의군 101, 대정군 36명)과 예비신자 620명(정의군 382, 대정군 238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는 확장일로였다.
초기 입교 신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무척 다양한 것으로 나타난다. 제주로 귀양 온 유배인들을 비롯해 입도한 관리들, 제주지역 향리와 하급관리, 무관들은 물론 상민, 빈민층도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봉세관 강봉헌이 입교하면서 그를 돕는 세금 징수 담당 세력으로 성장한 일부 무뢰배 신자들은 지역민들에게 눈총을 받고 불평·불만을 사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앙의 불길이 제주 땅에 한창 번져가고 있을 때인 1901년에 신축교안이 발생했다. 지역사회, 지역민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서 빚어진 불행한 역사다. 가령 교회에 거짓으로 의탁해 이익을 도모하려던 유배인 부류라든지 신자 폭행을 이유로 평민을 끌어다 체벌하는 경우, 지역적 폐습을 타파하려는 교회에 대한 불만, 더러는 신자의 이름으로 폐단을 일으키면서 주민들에게 원망을 사기도 했다.
6) 1901년 신축교안 발생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 희생
결정적인 계기는 ‘오신락 자살사건’이었다. 1900년 6월, 한논본당 설립 과정에서 인근 마을의 반발이 일자 현규석, 오신락 등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고 다음날 관아로 넘기려 하는 중에 밤사이에 오신락이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해버렸다.
한편 피정 차 육지부로 나갔던 김원영 신부는 새 임지로 이동하면서 제주로 돌아오지 못했고, 1901년 4월27일, 무세(G. Mousset 文濟萬 제르마노) 신부가 한논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1901년 5월5일부터 이틀 동안 대정군수 채구석에 의해 설립된 상무사(商務社) 계원들이 회의를 열어 천주교 신자들을 공격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신축교안의 시발점이 되었다. 상무사는 채구석이 조세 징수권과 상권 등을 장악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지역 상인들과 지방민을 규합, 조직한 사설 단체였다.
이후 대정군민들이 중심이 되어 봉세관의 폐해와 교회의 폐단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민회가 소집되었고, 상무사의 명사장 오대현과 관노 출신 집사 이재수, 사원 강우백, 명사원 강백이 등이 지휘관으로 나서서 대정을 출발,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나눠 제주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는 ‘상무사의 폭동’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제주성을 포위해 함락시킬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는 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여기에다 제주 연안 어획과 제주지역 교역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일본 어로인들에 의한 민군 대상 무기 공급까지 암암리에 이뤄져 민군의 전투력은 총포 무장 등 한층 강화된 측면이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7월호, 안창흡 프란치스코(제주 Re. 명예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