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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의 재조명 무궁화가 우리 나라에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으로 언급되는《산해경(山海經)》이 무궁화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산해경》은 어떠한 문헌이고 저자는 누구이며 저술의 배경은 어떠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정재서(鄭在書)가 역(譯)한《산해경》의〈산해경서록(山海經敍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산해경>〈산해경의 의의〉 옛부터 기서(奇書)로 일컬어 왔던《산해경》은 흔히들 중국 최고(最古)의 대표적인 신화집 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그 내용은 고대 중국의 사회·역사·지리·민속·종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갖가지 괴물이 등장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펄쳐지지만 여기서 우리는 유학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 정신의 또 다른 커다란 계통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산해경》은 중국의 모든 반(反)주지주의의 산물로 이를테면 불로불사의 신선, 영생(永生)의 유토피아, 이백(李白)의 자유와 환상 등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것들의 문학·예술적 실재를 가능케 했던 정신적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산해경》의 이러한 의의는 중국에 그치지 않는다. 《산해경》의 시간과 공간은 오늘의 중국을 초월한 것이기에 거기에는 중국의 주변, 이른바 동이(東夷)계 통의 신화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어 한국,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권(東北亞圈)의 민속·종교 등 기층문화(基層文化)전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소중한 시사를 던져 주고 있다.
그동안 우리의 중국에 대한 이해가 마치 달의 밝은 앞면을 보아온 것과 같았다면《산해경》은 어둡기는 하지만 앞면 못지않게 중요한 몫인 뒷면의 세계를 보여 주는 자료이다. 〈산해경의 저자〉 중국의 대표적 신화·지리서인《산해경》이 언제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라는 기본적인 물음에 대한 응답은 각 시대 학자들의 연구 시각에 따라 그야말로 신화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여러 갈래이다. 전통적인 응답은 하(夏)의 우(禹)임금과 그의 신하 백익(伯益)이 국토를 정리하고 각지의 산물을 파악한 결과로써 편찬하였다는 것인데, 우(禹)의 치수(治水)신화에 기댄 이러한 주장은 전한(前漢)유흥(劉缺)에 의해 언명(言明)된 이래 후한(後漢)의 왕충(王充), 조엽(趙曄), 동진(東晋)의 곽박(郭璞)등에 의해 지지되어 온 것이다. 후대로 내려가면서 남송(南宋)의 우모(尤茅), 주희(朱熹), 명(明)의 호응린(胡應麟)등이 이에 대해 회의를 제기하게 되나, 단편적인 지적에 그 치고 근대에 이르러서야 문헌 고증학·방언학·지리학·민속학등 제방면에서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다. 우선《산해경》이 우(禹)나 백익(伯益)같은 전설적 존재에 의해 도저히 그 같은 태고시대에 지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기본적 인식하에 근대의 여러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육간여(陸侃如) 《산해경》 중 〈오장산경(五藏山經)〉이 전국시대 초인(楚人)에 의해, 〈해내경(海內經)〉과〈해외경(海外經)〉이 전한(前漢)시대에,〈대황경(大荒經)〉및 독편(獨篇)〈해내경(海內經)〉이 후한(後漢)·위진(魏晋)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음. 모순(矛盾) 〈오장산경〉이 동주(東周)시대에, 〈해내경〉과〈해외경〉이 춘추·전국시대의 교체기에, 〈대황경〉과 독편〈해내경〉이 그보다 조금 후, 그러나 진(秦)통일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음.
몽문통(蒙文通) 〈대황경〉및 독편〈해내경〉이 서주(西周)초기 파국(巴國)에서, 〈해내경〉이 서주(西周)중기 촉국(蜀國)에서, 〈오장산경〉과〈해외경〉이 춘추·전국 교체기에 초국(楚國)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음.
위정생(衛艇生) 《산해경》을 전국 연(燕)소왕(昭王) 때의 음양오행가(陰陽五行家) 추연(鄒衍)에 의해 조직된 탐험대의 현지답사 기록으로 보고 있음. 탐험 범위를 동으로 일본 열도(列島) 및 연해주(沿海州)지역, 남으로 인도양(印度洋) 뱅골만(灣), 북으로 북극해 오비강 하류, 서로 북아프카니스탄 까지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음.
원가(袁珂) 〈대황경〉과 독편〈해내경〉이 전국 초기 흑은 중기에, 〈오장산경〉과〈해외경〉이 전국 이 후에, 〈해내경〉이 한대(漢代)초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음. 작자는 모두 초인(楚人).
0|풍무(李豊楙) 《산해경》의 원시 형태는 주(周) 왕실 혹은 제후국의 지리관계 문서였는데 전국 말기에 초인(楚人), 특히 무당이나 방사(方士)계통의 손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된 것으로 보고 있음.
상술(上述)한 견해들에 의거하면《산해경》의 성립 연대는 부분에 따라 가장 이르게는 서주(西周) 초기(기원전 12세기)로부터 가장 늦게는 위진(魏晋)시대 (3~4세기)에 이르기까지 워낙 커다란 시차(時差)로 주장되고 있어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작자 및 성립지역을 초인(楚人) 및 초국(楚國)으로 보는 견해와〈오장산경〉의 경우, 그 성립 연대를 전국시대로 보는 견해가 학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경향임은 유념해 둘 사항이다.
산해경 저술의 사회적 배경〉 전한(前漢) 애제(哀帝) 때의 학자인 유수(劉秀)의 〈상산해경표(上山海經表)〉 에《산해경》저술의 배경이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시중(侍中)·봉거도위(奉車都尉)·광록대부(光祿大夫)인 신(臣) 수(秀)가 책임 교감하고, 비서(秘書)인 언(言)과 비서(秘書)로서 태상(太常)의 속관(屬官)인 신(臣) 망(望)이 교감한《산해경》은 모두 32편이었는데 이번에 18편으로 정리를 마쳤습니다. 《산해경》 이란 책은 요(堯)·순(舜)시대에 나왔습니다. 옛날에 큰물이 온 나라를 휩쓸자 백성들은 생활의 근거를 잃고 산꼴짜기에서 헤매거나 나무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곤( )이 치수(治水)에 아무런 공적도 이루지 못하자 요(堯)임금은 우(禹)에게 그 일을 계승토록 하였습니다. 우(禹)는 네 가지 탈것을 타고 이르는 산마다 나무를 베어 젖혀 높은 산과 큰 강을 정돈하였습니다. 익(益)과 백예(伯 )는 새와 짐승을 몰아내고 산천에 이름을 붙이고 초목을 분류하며 강과 육지를 구분하는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사방 제후의 우두머리들이 이 일을 도와 온갖 지역에 두루 미쳐 사람의 발자취가 잘 닿지 않던 곳과 배나 수레가 잘 가지 않던 곳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안으로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면의 산을 나누고, 밖으로는 여덟 방면의 바다를 구분하여 그곳의 진귀한 보물과 기이한 물건들과 낯선 지방의 생산물과 강과 육지의 풀·나무·새·짐승·곤충·기린·봉황이 사는 곳 과 상서로운 조짐이 감추인 곳 및 이 세상 바깥으로 외따로 떨어진 나라나 색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우(禹)는 구주(九州)를 나누어 토지에 따라 공물(貢物)을 정하고 익(益)등은 사물의 좋고 나쁨을 유별하여《산해경》을 지었습니다.
〈산해경의 성격〉 사마천(司馬遷)도“감히 말할 수 없다〔不敢言之也〕”고 했던 기서(奇書)《산해경》의 내용은 오늘날 여러 방면에서 검토되고 있는데, 그 중 현저히 대립되는 두 가지 해석 경향은 신화적 입장과 지리학적 입장으로부터 유래되며 그것은 두이미(杜而未)와 위정생(衛挺生)으로 대표되는 견해들이다. 먼저 두이미는《산해경》을 신화서로만 규정하고 그 내용을 일정한 상징체계로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산해경》은 태음숭배(太陰崇拜)의 산물이다. 변화무쌍하고 불사불멸하는 음(陰)과 양(陽)의 양성구유(兩性俱有)적 존재인 달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불사관념(不死觀念)을 기조(基調)로 한 월신(月神)·월산(月山)·월수(月獸)등의 존재가 상상되었다는 주장 이다.
그리하여 그는《산해경》에서 출현하는 황제(黃帝)를 비롯한 모든 신화적 영웅들을 월신(月神)의 다양한 현시(顯示)로, 곤륜산(昆侖山)을 비롯한 모든 산들과 괴상한 형태의 동·식물을 달의 의화(擬化)된 존재로 파악한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산해경》은, 달의 상징체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반면에, 위정생은《산해경》을 완벽한 지리서로 간주한다. 그에 의하면《산해경》은 전국 연(燕) 소왕(昭王)때의 외래 학자 추연(鄒衍)이 왕명을 받들어 조직한 탐험대의 세계지리 현지답사 기록이다. 위(衛)는 지리학자와 합작하여《산해경》의 각 지역을 현재의 지명에 일일이 비정(比定)한 〈산경지도(山經地圖)〉까지 작성하였다. 《산해경》이 이와 같이 실제 (實際) 지역에 대한 기록일 때 그곳의 동·식물 및 광물 역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인양 해석되기 마련이다. 두(杜)·위(衛)양 학자의 견해는 모두《산해경》 의 한쪽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이다. 두(杜)의 주장대로《산해경》에는 태음숭배의 요소가 다분하고 불사관념이 기조(基調)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 정황일 수도 있는 개별적인 사항 하나 하나까지 무리하게 신화적인 전제로 환원시킨 감이 있다. 《산해경》을 지리서로만 보려는 위(衛)의 견해는 한층 위험스럽다. 그는 궁극적으로《산해경》 의 전지역을 연(燕)제국이 개척한 영토라고 주장하였는데, 한반도(韓半島)의 대부분과 일본 열도까지 개척범위로 포괄한 그의〈산경지도(山經地圖)〉의 고대사적 상식에 대한 타당성 여부는 차치(且置)하더라도 연구의 진의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산해경》은 일정한 방위 개념에 입각한 각 지역에 대한 조사 기록으로 볼때 기본적으로는 지리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수록된 내용은 해당 지역의 민속·종교·구전신화(口傳神話)등 원시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기에 신화서적인 성격 또한 지니고 있다. 따라서《산해경》에 대한 해석은 얼마간의 지리서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신화연구 방법들을 적용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산해경과무궁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전통적으로《산해경》의 저자를 우(禹)임금과 백익(伯益)이라고 한다. 우(禹) 임금이 위(位)에 있었던 것이 기원전 2183~2175년 의 9년 동안이므로〔동작빈(董作賓)의 연표학(年表學)에 의함〕《산해경》은 지금으로부터 4,200여 년 전 우리 나라 상고의 단군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러한《산해경》에 우리 민족, 특히 무궁화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대목이 들어 있다. 《산해경》의 제9권〈해외동경(海外東經)〉에 보면 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讓 군자국재기북의관대검식수사이대호재방기인호양 不爭有薰華草朝生夕死 부쟁유훈화초조생석사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그들은 의관을 정제히 하고 칼을 차며 짐승을 먹이고 호랑이를 곁에 두고 부리며,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다투기를 싫어하는 겸허의 덕성이 있다. 그 땅에는 훈화초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 라 하였는데, 훈화초(薰華草)의 주(注)를 보면, 곽박 (郭璞 276~324)은“어떤 판본에는‘근(菫)’으로 되어 있다”했고, 학의행( 懿行 1757~1825)은 “목근(木槿)혹은 근(菫)은 일명 순(蕣)이라고도 하는데 순(蕣)과 훈(薰)은 발음이 상통한다.”하였다. 또《예문유취(藝文類聚)》권(卷)89 에는 君子之國多木菫之華人民食之去瑯邪三萬里군자지국다목근지화인민식지거낭야삼만리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백성들이 그것을 먹는다. 낭야로부터 3만리 떨어진 곳이다. 라고 하였다.
《예문유취》는 당(唐)나라 구양순(歐陽詢 557~641)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중국 유서(類書)의 하나로 명나라 가정(嘉靖)연간의 간행본이 전한다. 위의 여러 가지 주(注)를 보건대‘훈화초’가‘무궁화’임은 확실한 것이다. 우리 나라 단군시대에는‘근수(槿樹)’즉,‘환화(桓花)’가 많이 있었으므로‘훈화초’는 곧‘환화’를 일컬은 것이 된다. ‘훈화초’의 의미를 김석경의《겨레얼 무궁화》에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훈화초(薰華草)란 골자의 뜻을 음미해 보자. 즉, 훈(薰)의 의미는 향초···작야, 열야(香草···灼也, 熱也)등의 의미인 것으로 미루어 무궁화의 담담 하면서도 은은한 향기〔薰〕를 이름이요, 그 꽃의 빛깔이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 곧 훈화초(薰華草)일 것으로 풀이된다.
▲<산해경>제9권<해외동경>부분환언하면, 무궁화는 다른 꽃처럼 간사스럽도록 요염한 자태의 꽃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민족성과도 같이 품위를 갖추고 의젓한 격조(格調)를 잃지 않는데서 내재(內在)의 미를 겉으로 발산하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함초롬이 머금고 있어 가히 군자의 꽃〔君子之花〕임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지라 일찍이 고대의 수많은 시인(詩人),묵객(墨客)이 극찬(極讚)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또, 류달영의《나라꽃 무궁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또 하나 밝혀 둘 것은, 위에서 언급한《산 해경》제9〈해외동경(海外東經)〉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有東口之山有君子之國其人衣冠帶劍亦使虎豹好謙讓也 유동구지산유군자지국기인의관대검역사호표호겸양아 동쪽 입구의 산에 군자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의관을 정제. 하고 칼을 차고 또, 호랑이를 부리며 겸양하기를 좋아하였다. 여기서‘동구지산(東口之山)’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이 매우 흥미있는 문제거리이다.
류승국(柳承國)박사는 그의 역작《동양철학연구(東洋哲學硏究)》 (1983.槿域書齋刊 p.59~61)에서‘동구지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동쪽 입구 산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고 한‘東’은 대황동(大荒東)의‘東’이다. 그러므로 대동(大東), 극동(極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대황동의 대 (大)는 대동(大東)이요, 황(荒)은 포황〔包荒, 《周易》; 泰九二〕의 뜻과 같으니 지극히 넓고 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동은 바다 건너 대동(大東)을 말하는 것으로《시경(詩經)》 〈노송(魯頌)〉에 나오는‘수황대동지우해방(遂荒大東 至于海邦)’이라고 한대동의 해방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노송의 노(魯)나라는 산동(山東)에 있으니, 산동에서 동쪽으로 바다 건너 나라라고 한다면, 한반도의 서북쪽을 가리킨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방향이 요동 지방의 청구국(靑邱國)과 다르다고 하겠다. 즉, 왕검조선(王儉朝鮮)을 가리킨 것이요, 동구지산(東口之山)이라 함은 구월산(九月山)근처 입구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군자국의 산물을 들어서‘有薰(或作菫)華草 朝生 夕死〔유훈(혹작근)화초 조생석사〕’라고 하였으니, 훈화(薰華)를 근화(菫華)라고도 한다.
근화(菫華)는 근화(槿花)로 무궁화를 말한다. 곽씨주(郭氏註)에도‘多木槿花(다목근화)’라고 하였으니, 무궁화가 피는 곳은 역시 만주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류승국 박사의 연구에 의해서 옛날의 우리 나라 무궁화의 자생관계와 분포도가 더욱 분명히 밝혀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무궁화는 단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가장 두드러진 아름다운 꽃이며, 신라시대에 는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 자기 나라를‘근화향(槿花鄕)’곧, 무궁화 나라라고 표현할 만큼 피어 있었으니, 무궁화는 신라시대에 이미 나라꽃으로 굳어져 있었던 것이라고 확신 할 수 있다.
◀ <산해경>본문중의 도해
중국 문헌에 드러난 무궁화
무궁화라는 꽃이름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려 중엽 이후 우리가 만들어 쓰게 된 한국 한자어이다. 그러므로 이 식물과 꽃을 중국인들은 우리들처럼 무궁화라 일컬은 적은 없었다. 우리가 무궁화라고 일컫는 것에 대한 중국 나름의 이름 지음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시경 (詩經)》이다. 《시경》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으로 국풍(國風)·소아(小雅)·대아(大雅)·송(頌)의 4부로 구성되며, 국풍은 여러 나라의 민요, 아(雅)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儀式歌), 송은 종묘의 제사 에서 쓰는 악시(樂詩)이다. 각 부를 통하여 상고인 (上古人)의 유유한 생활을 구가하는 시, 현실의 정치를 풍자하고 학정을 원망하는 시들이 많은데,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사적 평가도 높으며, 상고의 사료(史料)로서도 귀중하다. 국풍(國風)중의 정풍(鄭風)가운데에 전하는〈유녀동거(有女同車)〉란 노래에 순화(舜華)·순영(舜英)이란 꽃이름이 보이며, 이 꽃으로써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형용하여 쓰고 있다. 有女同車顔如舜華 유녀동거안여순화 ...〈중략〉··· 有女同行顔如舜英 유녀동행안여순영 수레에 같이 탄 아가씨, 얼굴은 무궁화 꽃 같이 가는 아가씨, 얼굴은 무궁화 꽃 순화·순영은《시경》전(傳)과 소(疏) 및 그밖의 서적의 목근(木槿), 곧 무궁화를‘일컫는 것이다. 《시경》의 전(傳)에는舜木槿也순목근야 순은 목근(무궁화)이다. 라고 되어 있고 또 소(疏)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陸機疏云舜一名木槿一名 一名 齊魯之間謂之玉 육기소운순일명목근일명츤일영단제노지간위지옥 蒸今朝生幕落是也 증금조생모락시야 육기(陸機 261~303)의 소(疏)에 이르기를 순(舜)은 일명 목근·촌·단이고 제나라와 노나라 에서는 옥증이라 하는데 지금의 조생모락은 곧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위 기록들에서만도 우리는 우리의 무궁화에 해당하는 중국의 화명(花名)이 순·순화·순영·목근·츤( )·단( )·옥증(玉蒸)·조생모락(朝生幕落)등 임을 알게 된다. 또, 중국 고대 유가(儒家) 경전인《예기(禮記)》는 그 성립에 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전한(前漢)의 대성(戴聖)이 공자(孔子)의 제자를 비롯하여 한(漢)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된《예기》 200여 편 속에서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곡례(曲禮)·단궁(檀弓)·왕제(王制)·윌령(月令)·예운(禮運)·예기(禮器)·교특성(郊特性)·명당위(明堂位)·학기(學記)·악기(樂記)·제법(祭法)·제의(祭儀)·관의(冠儀)·혼의(婚儀)·향음주의(鄕飮酒儀)·사의 (射儀) 등의 제편(諸篇)이 있고, 예의 이론 및 실제를 논술한 것인데, 〈월령〉편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仲夏之月···鹿角解蟬始嗚半夏生木菫榮 중하지월 녹각해선시명반하생목근영 음력 5월···사슴뿔이 떨어지고, 매미가 울기 시작하고, 반하(半夏)가 나올 무렵에 목근(무궁화)은 번성한다. 또, 그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적어 여러 가지 무궁화 명칭을 밝히고 있다. 木菫···其華朝榮幕隕然經或曰秀或曰華或曰生或曰 목근 기화조영모운연갱혹왈수흑왈화흑왈생흑왈 榮何也··其言各有所當也 영하야 기언각유소당야무궁화···그 꽃이 아침에 피어 저녁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책에 혹은 수·화·생·영이라 불렀으니 어찌된 것이냐?···그 말은 각각 마땅한 경우가 있다. 기원전 2세기경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이 지은 것으로 전하여지는《이아(爾雅)》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서(字書)로,《시경(詩經)》, 《서경(書經)》 중의 문자를 추려 19편으로 나누고, 자의(字義)를 전국(戰國)·진한대(秦漢代)의 용어(用語)로 해설한 것인데, 3권으로 되어 있다. 이 《이아》의〈석초편(釋草篇)에 木槿 木槿 단목근츤목근단은 무궁화, 츤도 무궁화 라 했는데, 이것에 대하여 곽박(郭璞)의 주서(注書) 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別二名也似李對華朝生夕隕可食或呼日及亦曰玉烝별이명야사이수화조생석운가석혹호일급역왈옥증 두 가지 다른 이름이다. 오얏꽃과 비슷하고 아침에 피어 저녁에 떨어지는데 먹을 수 있다.
▲이아 더러는 일급이라 부르고 또한 옥증이라고도 한다. 또, 《이아》의 단( )과 츤( )에 대해 정주(鄭註)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朝生幕落花也今亦謂之木槿一名玉蒸一名舜華조생모락화야금역위지목근일명옥증일명순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떨어지는 꽃인데, 근래의 목근을 이름이다. 옥증이라고도 하고 순화라고도 한다. 또, 송나라 육전(陸佃)이《이아》를 보완한《비아( 雅)》에서 단( )과 츤( )에 대하여 말하기를 華如葵朝生夕隕一名舜蓋瞬之義화여규조생석운일명순개순지의 꽃은 아욱과 같이 아침에 피어 저녁에 떨어지므로 일명 순(舜)이라 하니 순간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위의 기록들은 단( )·츤( )·옥증(玉烝)·순(舜)·순화(舜華)등이 모두 무궁화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진대(晋代)의 갈홍(葛洪 283~343)이 지은《포박자(抱朴子)》의 현행본은〈내편(內篇)〉20편, 〈외편(外篇)〉50편으로 이루어졌다. 〈내편〉에는 고래의 도교사상(道敎思想)이 체계적으로 논술되어 있으며, 〈외편〉에는 사회의 이해득실이 논술되어 있다. 도(道)는 우주의 본체로서 이를 닦으면 장수를 누릴 수 있고, 신선(神仙)이 되려면 선(善)을 쌓고, 행실을 바르게 가지며 정기(精氣)를 보존하여 체내에 흐르게 하고, 상약(上藥: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약)을 복용하여 태식(胎息:腹式呼吸)을 행하고 방중술(房中術)을 실천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갈홍은 노장사상 (老莊思想)을 기초로 하여 신선사상을 도교의 중심에 놓고, 누구나 선인(仙人)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 도교가 사상사상(思想史上)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기 에 이르렀는데, 《포박자》〈내편〉권 13 극언(極言) 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夫木槿楊柳斷殖之更生倒之亦生橫之亦生生之易者 부목근양류단식지갱생도지역생횡지역생생지이자 莫過斯木也막과사목야 무릇 무궁화와 버들을 잘라 심으면 다시 살아난다. 거꾸로 심어도 살고, 눕혀 심어도 사는 잘 사는 나무로는 이 나무 이상 없다. 《여씨 춘추(呂氏春秋)》는 중국 진(秦)나라 때의 사론서(史論書)로 26권인데,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진나라의 여불위(呂不韋)가 빈객(賓客) 3,000명을 모아서 편찬하였다. 하며, 《사고제요(四庫提要)》에 서는〈자부(子部)〉의 잡가편(雜家篇)에 수록되어 있다. 도가(道家)사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유가(儒家)·병가(兵家)·농가(農家)·형명가(刑名家)등의 설(說)도 볼 수 있다. 또한, 춘추천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시사(時事)에 관한 것도 수록되어 있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론서이다. 내용은〈십이기(十二紀)〉,〈팔람(八覽)〉,〈육론(六論)〉으로 나누어〈십이기〉는 춘하추동 사계절을 맹(猛)·중 (仲)·계(季)의 3기로 구분하여 논하고 있다. 또한 〈팔람〉은 유시(有始),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倚), 시군(恃君)으로, 〈육론〉은 개춘(開春), 관행(慣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士容)으로 나누어‘논하고 있다. 이《여씨춘추》의〈중하기(仲夏記)〉에는 仲夏···木菫榮중하 목근영 음력 5월에···목근이 번성한다 라고 했는데, 목근영 주(註)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木菫朝榮幕落···雜家謂之朝生一名蕣詩云顔如蕣華 목근조영모락 잡가위지조생일명순시운안여순화 是也.
▲설문해자 시야 목근은 아침에 피어 저녁에 지므로···세상 사람들이‘아침살이’라고 한다. 또다른 이름은‘순’이다. 《시경》에‘순화 같은 얼굴’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이다. 중국의 사전(辭典)으로《설문해자(說文解字)》가 있는데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편찬하였으며, 모두 15편이다. 그 중에서 말미의 서(敍)1편은 진한(秦漢)이래의 문자 정리의 연혁을 밝힌 것인데, 100 년에 완성되었다. 그 당시 통용된 모든 한자 9,353자를 540부(部)로 분류하고, 친자(親字)에는 소전(小篆)의 자체(字體)를 싣고, 그 각자(字)에 자의(字義) 와 자형(字形)을 설해(說解; 訓解釋)하였다. 부수(部首)와 친자의 배열에서는 자형 및 자의와의 연관에 따라 그 순서를 정하였으며, 자형 구성의 설명에는 육서(六書)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육서는 전한(前漢) 말경부터 생긴 한자 분류법인데, 그 중에서 합체자 (合體字:형성·회의)는 부수 분류를 가능케 하였으며 특히, 형성자는 후세의 상고 한어(上古漢語)연구(특히 상고음의 再構)를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 본서의 설해는 은(殷)·주(周)시대의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청동기 銘文)을 해독하는 귀중한 근거가 되었으며, 청대(淸代)의 소학(小學;주로 고대언어학)은 이 책을 연구·응용한 것이다. 현행 판본에는 오대말(五代末)·송초(宋初)의 서 현(徐鉉)·서 개(徐 ) 형제가 따로 따로 교정(校定)한《대서본(大徐本)》과 《소서본(小徐本)》이 있다. 이《설문해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蕣木菫朝華幕落者從艸순聲 詩曰顔如蕣華 순목근조화모락자종초순성 시왈안여순화 순은 무궁화인데, 아침에 꽃이 피어 저녁에 떨어진다. 초와순의 소리를 따르고《시경》에‘순화 (무궁화)같은 얼굴’이라 하였다. 또,《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이라는 중국 청(淸)나라의 주준성(朱駿聲)의 문자 연구서는 18권인데, 검운(檢韻)·설아(說雅)·고금운준(古今韻準)을 부록으로 하여 1850년에 간행되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수록된 문자를 단옥재(段玉裁)·왕염손(王念孫)의 연구를 이은 고음십팔부설(古音十八部說; 상고 한어의 韻母분류)에 따라 분류하고, 각 문자에 대하여 본훈(本訓;근원이 되는 字義)을 설명하였다. 한자의 세 속성인 형·음·의(形·音·義)중에서 성(聲;字音)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이를 형(形:字形)으로 보강하고, 전주(轉注)·별의(別義)·가차(假借)·성훈(聲訓)·고운(古韻)·전음(轉音)의 항목을 등으로써, 자형을 중시했던 종래 자전의 내용과 체재를 일변시켰다. 특히, 육서(六書)의 전주와 가차에 대하여 독창 적인 해석과 정리를 가하고, 한자의 용법에 반영된 고대 중국어의 파생어와 음통(音通)의 현상 등을 풍부한 용례로 제시하여, 중국어와 한자간의 관계를 언어학으로 구명하는 근본적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현재까지도 한어 문자학 연구상의 필수적 문헌이 되고 있다. 여기에 마음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菫字亦作槿, 舜假借爲蕣 근자역작근 순가차위순 근(菫)은 근(槿)에서 만들어졌고, 순(舜)은 순(蕣)의 가차이다.
▲<신당서>와 <구당서>중국 당 왕조(唐王朝)의 정사(正史)인《구당서(舊唐書)》는 200권으로 이루어진 기전체(紀傳體)의 역사 서이다. 후진(後품)때 중앙 관청에서 재상(宰相)유구(劉 )등이 편찬하여, 945년에 장소원(張昭遠)이 완성하였다. 1060년에 북송(北宋)에서 다시 당(居)의 정사를 구양수(毆陽修)등이 편찬·출간 하였으므로 먼저 것을《구당서》, 후의 것을《신당서》라 한다. 송(宋)나라 이후《구당서》는 오랫동안 읽히지 않았으나, 학자들 중에 신·구 두 책을 비교·연구하고《구당서》가 더 낫다고 주장하여 다시 읽히다가, 청조(淸朝)에 이르러 두 책 모두 장단점이 있다 는 결론이 내려져 병용(佛用)하게 되었다. 《구당서》 199권〈신라전(新羅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고 전하는 책도 있다. 高麗時表蘇稱本國罵僅花椰 고려시표사칭본국위근화향 고려 때 표사에서는 본국(고려)을 일러 근화향 이라고 하였다.
또, 《고금주(古今注)》는 진(普)나라 혜제(惠帝 290~306)때에 태부(太傳)를 지낸 박물학자 최 표(崔 約)의 저서로 조수(鳥默), 어충(魚蟲), 초목(草木)등 에 대하여 귀중한 기독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君子之國地方千里多木僅花 군자지국지방천리다옥근화 군자의 나라는 지방이 천리나 되는데, 목근화가 많다. 위의 기록은 또한《원중기(元中記)》에도 보인다. 《고금주》가 저작된 시대를 우리 나라에 비추어 보면 삼국 정립기(三國定立期)에 해당된다. 이것으로 우리 나라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무궁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운서(題書;발음표기 자전)인《집운(集題)》은 1039년(北宋 寶元 2)에 정도(丁度)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것인데 10권이다. 《예부운략(禮部韻略)》과는 반대로 절운계(切題系) 운서의 체재에 따르면서 다시 그것을 해박(該博)하게 하였다. 《광운(廣題)》과 같이 206운(韻)으로 나누고 있는데, 글자의 소속에는 약간의 이동이 있다. 수록된 글자는 5만여 자로 《광운(廣題)》의 약 2배이며 이체자(異體字)와 이독(異讀)을 널리 수록하였다. 반절(反切;한자 2자를 맞추어 한 글자의 소리를 나타내는 방법) 용자(用字)나 소운(小題)의 배열 순서에도 대폭적인 변경이 있고, 당시의 발음 상태나 음운학의 발전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근(僅)은 蕣(순)과 橓순)으로 씀을 나타내고 있다. 槿蕣也蕣木童朝華暮落者或作橓 근순야순목근조화모락자흑작순 근은 순이다. 순은 목근인데 아침에 꽃피어 저녁에 벌어진다. 혹은 순(橓)으로 쓴다. 또,《통지(通志)》는 중국 남송(南宋)때 정초(鄭體 l104~1162)가 지은 기전체의 역사서인데, 1161년에 200권으로 간행하였다.〈제기(帝紀)〉18권, 〈황후열전(皇后列傳)〉2권, 〈연보(年讀)〉4권, 〈약(略)〉51권, 〈열전(列傳)〉125권으로 이루어졌다. 《통감(通鍵)》, 《통감 기사본말(通鍵記事本末)》과 더불어 송나라 사학(史學)의 대표작이다. 저자는 왕조 중심의 단 대사(斷代史)를 배제하고 역사는 사회 전체를 중심으로 한 통사(通史)를 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제기〉, 〈열전〉, 〈연보〉는 상고(上古)에서 수(階)까지 서술하였다. 특히, 정사(正史)의 여러〈지(志)〉에 해당하는 20약(略)은 그가 가장 힘을 기울인 것으로 그 사론(史論)의 가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통지》의〈곤충초목략(昆蟲草木?〉에는 木權曰繹曰假曰懶日及齊魯名玉蒸 목근왈순왈단왈츤일급제노명옥증 목근은 순·단·촌·일급을 말하는 것으로 제 나라와 노나라에서는 옥증이라 부른다. 라 하여 무궁화 명칭으로 일급(日及)·옥증(玉蒸)도 사용함을 나타냈다. 본초(本草)라는 것은 생명체에 대한 양생·치료· 예방에 제공되는 천연의 약물 즉, 초근목피를 위주로 하고 동물·광물을 포함하는 약품을 말함인데, 특히 한방 약물을 대표하는 말이다. 본초라는 문자가 처음으로 문헌에 기재된 것은 반고(班固 32~92)의 저서인《한서(漢書)》에서‘본초석지한온(本草石之寒溫)’ 이라 한 것이 곧 본초 명칭의 기원이다. 그후‘방약본초’‘방술본초’라 하여 본초가 의술만이 아니고 방사(方士)들에 의해 신선도(神仙道)와 깊은 관계가 있었고, 본초의 개념은 전한(前漢)무제(武帝)이후 성제(成帝)에 이르는 100여 년 사이에 성립되었는데, 의술과 함께 취급되어 오던 본초가 후세에 와서는 약품에 관한 서적을 대신하여 부르게 되었다. 요컨대 천연 약물을 말하며 특히, 초근목피를 근본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본초라고 한 것이다. 우리 나라도《삼국유사》의 개국설에 나오는 환웅유엽(桓雄遺業)에 보면, 이미 쑥과 마늘이 등장하는데, 본초의 비조(鼻祖)라 할 수 있고, 또 단군께서는 제 3 자 부소(快蘇)에게 명하여 의약을 관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본초에 관한 많은 저서를 중에 송나라 당신휘(唐愼徵)가 짓고 구종석(寇宗奭)이 수정한《중간경사증류대전본초(重刊經史證類大全本草)》 는 약칭으로《본초(本草)》라고도 하는데 약 1,800종 의 약물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무궁화에 대하여, 街義曰木僅如小葵花淡紅色五葉成一花朝開幕敏· 연의왈목근여소규화담홍색오엽성일화조개모렴 湖南北人家多重植爲籬障 호남북인가다종석위리장 《본초연의》에 이르기를“무궁화는 작은 아욱꽃 과 같은데 분홍색의 꽃잎이 다섯 개 모여 한 꽃을 이루었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이운다.···호남· 호북 지방에는 인가(人家)에 많이 심으며, 울타리로 섬는다.”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 중국 명(明)나라의 본 초학자(本草學者)인 이시진(李時珍 15l8~1593)이 본초학서(本草學書)를 집대성하여 엮은 52권의 약학서(藥學書)《본초강목(本草鋼目)》에는 1,871종의 약재가 망라되어 있는데, 전편(全篇)을 수부(水部)·화부(火部)·토부(土部)·금석부(金石部)·초부(草部)·곡부(穀部)·채부(菜部)·과부(果部)·목부(木部)·복기부(服器部)·충부(蟲部)·인부(購部)·개부(介部)·수부(默部)·인부(A部)등 각류(各類)로 나눈 다음, 정명(正名)을 강(鋼)이라 하고, 별명을 목(目)이라 하였다. 그 다음에는 집해(集解)·변의(辯疑)·정오(正誤)의 조목을 두어 그 산지(塵地)·형상(形狀)등을 밝히고, 이어 기미(氣味)·주치(主治)·처방(處方)을 기록하여 실용에 쓰이도록 하였다. 권(卷)36의〈목근조(木槿條)〉석명(釋名)에, 假懶舞日及朝開幕落花蕃離草花奴玉薰時珍曰此花 단촌순일급조개모략화번라후화노옥증시진왈차화 朝開幕落故名日及曰權曰舞增僅榮一關之義也爾雅 조개모락고명일급왈근왈순유근영일순지의야이아 云 木僅構木僅郭環注云別二名也或云白曰 赤曰 운단목근촌목근곽박주운별이명야흑운백왈단적왈 齊魯謂之玉蒸言其美而多也詩云顔如舜華卽此 츤제노위지옥증언기미이다야시운안여순화즉차 단, 츤, 순, 일급, 조개모락화, 번리초, 화노옥증, 시진이 말하기를‘이 꽃은 아침에 피어 저녁에 떨어지므로 이름을 일급, 근, 순이라 하며, 겨우 얻은 영화로움도 오래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라 하였다.《이아》에 이르기를 단은 무궁화이고 츤도 무궁화이다. 곽박의 주(注)에 이르기를 두 가지 다른 이름인데, 흑은 흰색을 단이라 하고 붉은 것을 츤이라 한다. 제나라와 노나라에서는 옥증이라 하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경》에 이르는‘순화(무궁화)와 같은 얼굴’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해서《집해(集解)》에, 宗奭曰木僅花如小葵淡紅色五葉成一花朝開幕斂湖 종석왈목근화여소규담홍색오엽성일화조개모렴호 南北人家多數植鳥籬障花與技兩用時珍曰僅小木也 남북인가다종식위리장화여지양용시진왈근소목야 可種可提其木如李其葉末尖而有 齒其花小而艶或 가종가삽기목여리기엽말첨이유아치기화소이염혹 白或料紅有單葉千葉者五月始開故逸書月令云仲夏 백혹분홍유단엽천엽자오월시개고일서월령운중하 之月木僅榮是也結實輕虛大如指頭秋深自製其中子 지월목근영시야결실경허대여지두추심자열기중자 如 萊泡樞馬兜鈴之仁種之易生嫩葉可茹作飮代茶 여유래포동마도령지인종지이생눈엽가여작음대다 今傷醫用皮治擔蘚多取川中來者厚而紅色 금양의용펴치창선다취천중래자후이홍색 종석(宗奭)이 말하기를 목근의 꽃은 작은 이욱과 같은데 담홍색이며, 화판은 다섯이고, 아침에 피어 저녁에 오므린다.
그리고 호북의 인가에 많이 심어서 울타리를 만드는데, 꽃과 가지가 모두 쓸 만하다. 시진(時珍)이 이르기를 무궁화는 관목(灌木)으로서 씨로도, 꺾꽂이로도 번식한다. 나무 모습이 오얏과 흡사하며, 그 잎은 끝이 뾰족하고 가장귀에 톱니가 있다. 꽃은 자그마하고 곱다. 흰꽃도 있고 분홍꽃도 있으며, 홑꽃도 겹꽃도 있는데, 5월에 펴기 시작하므로《일서월령(逸書月令)》이란 책에‘중하(件夏)에 무궁화는 제철이 된다’라는 것은 이를 두고 이름이다. 열매는 가볍고 속이 비었는데 큰 것은 손가락 끝 만한 크기이며, 늦가을에 스스로 터진다. 씨는 느릅나무, 오동나무, 쥐방울(馬兜鈴) 들의 씨와 비슷한데, 뿌리면 싹이 잘 튼다. 풋잎은 나물로 먹을 수도 있으며, 차〔茶〕대용으로 달여 마실 수도 있다. 껍질은 상처를 낫게 하고, 또 옴〔疥癬〕치료에도 효과가 크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쓰찬성〔四川省〕생산품이 두꺼우며 붉다. 고 하였다. 또, 앞에서 언급했듯이《본초강목》의 〈부상조(扶桑條)〉에도 부상은 불상(佛桑)·주근(朱僅)·적근(赤樓)·일급(日及)으로 무궁화의 다른 종자(別種)라고 하였다.《남방초목장(南方草木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朱僅花··深紅色五出大如園쫓有藝一條長於花葉上 주근화 신홍색오출대여촉규유예일조장어화엽상 綴金層日光所燦疑若焰生一叢之上日開數百朶朝開 철금설일광소삭의약염생일총지상일개수백타조개 幕落提技郞活出高凉郡一名赤槿一名日及 모락삽지즉활출고량군일명적근일명일급 주근화는···짙붉은 색으로 다섯 가지가 나타나는데 큰 철쭉꽃 같다. 꽃잎보다 긴 꽃술이 한 줄기 있는데, 윗부분은 금가루을 뿌린 듯하고, 햇빛을 받으면 꼭 불꽃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매일 한 떨기 에 수백 송이의 꽃이 피는데, 아침에 피어 저녁에 떨어진다. 가지를 꺾꽂이 하면 살고, 높고 서늘한 고을에 나는데 일명 적근·일급이라 한다.
《정자통(正字橫)》은 중국의 사서(蘇書)로 명말(明末)의 장자열(張自烈)의 저서이다. 12집(輯)으로 되어 있는데, 그후, 청초(淸初)때 요문영(參文英)이 원고를 입수하여 새로 편집 간행하였다. 체제는《자휘(字棄)》의 형식을 따랐으며〈一〉부에서〈약( )〉부 까지 214부를 부수(部首)배열로 하였고, 한자는 획(劃)으로 찾게 되었다.
해설(解說)즉, 훈고해석(訓 解釋)은《자휘》를〈구본(舊本)〉또는〈구주(舊注)〉로 삼고 인용하나, 이것은 다시 그것을 크게 보완하여 출전(出典)을 명시하였으며 저자의 박식함을 나타내었다. 불전(佛典)과 도교(道敎)의 서적까지 이용하였고 거기에 관한 용어 해석도 자주 볼 수 있다. 이 체제는《강희자전(康熙字典)》에 계승되었으나 반절(反切;字音表記)은 당시의 음을 그대로 따랐다. 부수에 대한 해석은 문자 연구사의 한 자료가 된다. 여기에 僅木僅一名蕣詩鄭風有女同車顔如蕣華南人以殖籬 근목근일명순시정풍유녀동거안여순화남인이식리 亦名灌離草花有緊有白有紹紅有大紅千葉者作飯代 역명번리초화유자유백유부흥유대흥천엽자작음대 茗可治風
<남방초목장>의 목근조와 이 글이 실려있는 <영각함순본좌씨 백천학해>▶
명가치풍 근은 목근으로 일명 순(蕣)이다.《시경》정풍에‘수례에 함께 탄 아가씨 얼굴은 무궁화 꽃’이라 했다. 남쪽 사람들은 이것을 울타리로 심어 이름 또 한 번리초이다. 꽃은 보라, 흰색, 분홍, 진분홍 등 이 있고 겹꽃이다. 차 대용으로 만들어 마시면 풍(風)치료에 좋다. 하였다. 또, 《군방보(群芳讀)》〈목근조(木僅條)〉에는, 木僅···木如李高五六尺···花小而觀 有深紅 杓紅白목근 목여리고오육척 화소이염 유심홍 분홍백 色···小兒忌弄 令病 俗名題子花 색 소아기롱 영병학 속명학자화 무궁화나무는···오얏나무 같은데 키는 5~6자쯤 자라고···꽃은 작은 편이나 탐스러우며 짙붉은색·분홍색이 있다.···아이들이 꽃을 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손을 대면 학질에 걸린다고 하므로 속명을 학질꽃이라고 한다 하였고, 중국 청(淸)나라 때 편찬된 백과사전인《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은 1725년에 완성되었으며, 총권수 1만권, 목록 40권인데, 초목전(草木典) 제295권 목근부(木樓部)의 석명(釋名)에 순(釋)·단(假)·촌(懶)·일급(日及)·번리초(藏離草)·학자화(題子花)·화노옥증(花奴玉薰)·조개모락화(朝開幕落花)라 하였고, 《운회(題會)》에도 舞木樓朝開幕落者陸個云取一降之義亦作繹 순옥근조개모락자육전운취일순지의역작순 순은 목근인데, 아침에 피어 저녁에 떨어진다. ▲<고금도서집성>의 목근조육전(陸f田)이 이르기를,‘한 순간의 뜻을 가져 순(釋)이다’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중국의 문헌에 나타난 무궁화의 기록을 대강은 정리한 셈이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구당서》에서 위의 글을 찾을 수 없었고, 《설문통훈정성》은 보존관계상 열람할 수 없었으며, 《고금기》《원중기》《운회》등은 그 원전(原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군방보》와《고금도서집성》에 언급된 무수한 인용 서적과 인물들에 대해 낱낱이 조사하지 못한 것도 아쉬움을 남긴다. 이와 같은 미흡한 부분들에 대한 연구가을의 연구를 기대하는 바이다. 어쨌든 무궁화의 화명(花名)이 보아온 바처럼 다양한 까닭은 무궁화의 방언(方言)이 많고, 그 꽃잎이 단엽(單葉,홑꽃)·천엽(千葉,겹꽃)등으로 다른 것이 있고, 그 꽃의 색깔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이것을 고루 반영하느라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기록들은 무궁화가 중국에서도 많이 심어 가꾸어져 왔고 여러 시인, 묵객들이 이를 찬미하여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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