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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옥련암 원문보기 글쓴이: 산빛노을(원광)
법륜 열
보시
Daana
The Practice of Giving
비구 보디 역음
혜인 스님 옮김
차 례
들어가는 말 ----------------------- 비구 보디
보시의 실천 ----------------------- 수잔 엘바움 주틸라
빨리 경전속에 나타나는 보시 --------- 릴리 드 실바
마음에서 우러난 보시 --------------- M. O'C. 월슈
보시는 속마음의 표시다 ------------- 니나 봔 고르콤
보살의 보시행 (짜리야 삐따까 주석서) -- 비구 보디 영역
들어가는 말
비구 보디
무엇인가를 베푸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기본이 되는 인덕(人德)의 바탕으로 알려져 있다. 베푸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가 얼마나 속 깊은지 또는 자기의 한계를 얼마나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도 역시 베풂의 덕을 펴는 것은 정신적 발전의 기반이자 씨앗이라고 하여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빨리 경전을 보면 근기에 따라 베푸셨던 부처님의 점진적 설법들 가운데 '베풂에 관한 말씀(daanakathaa)'이 늘 제일 먼저 다루어지고 있음을 자주 접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아직 귀의를 하지 않은 대중들에게 설법하실 때마다 으례 '베풂'의 덕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먼저 가르치셨다. 그들이 이 보시의 진가를 이해하게 된 다음에라야 부처님께서는 계행, 인과법, 출가의 공덕과 같은 불법의 다른 면들을 말씀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이런 원리들이 깊이 새겨진 다음에야 부처님 당신께서 독특하게 발견해 내신 사성제(四聖諦)를 자세히 설해 주셨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시는 팔정도 가운데 하나의 항목도 아니요, 깨달음의 필수요건(bodhipakkhiyaa dhammaa, 助道品)에 드는 것도 아니다. 보시를 행한다고 해서 곧 바로 지혜가 나타나거나 사성제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므로 거기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보시는 수행에서 담당하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 즉 수행의 궁극적 단계인 깨달음의 과정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자리잡기보다는 수행인이 번뇌에 찌든 마음을 맑히기 위해 기울이는 온갖 노력을 조용히 뒷받침해 깨달음의 토대가 되고 새로운 마음의 각오를 갖게 하는 것이 보시의 역할이다.
따라서 비록 보시행이 팔정도의 여덟 항목 가운데 하나는 아니지만 해탈의 노정에 기여하는 보시의 공덕이 간과되거나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정해 주신 여러 가지 수행 체계들 가운데서 보시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그 공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보시는 점진적인 설법의 첫번째 주제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세 가지 복짓는 일(pu~n~nakiriyavatthu, 三福業事)註1)이나 네 가지 남들을 이롭게 하는 일(sangahavatthu, 四攝法)註1), 그리고 십바라밀에서도 항상 첫번째 덕목으로 꼽힌다. 특히 십바라밀은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발원한 사람이면 누구나 닦아야 하며, 완전한 부처의 경지인 최상의 깨달음을 향해 보살의 길을 걷는 이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용맹 정진하여 닦아야 할 거룩한 덕목들이다.
베풂은 달리 말하면 관대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보시행에서는 보시물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겉으로의 행위보다 베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이 베풀려는 마음은 베푸는 행위에 의해 강력해지고, 다시 그 강력해진 베풀려는 마음은 마침내 자기 희생적인 보시행까지 가능하게 한다. 관대함은 소위 선지식(sappurisa)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이다. 선지식이란 물론 그 밖에도 신심이나 계행, 교법의 이해나 지혜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격자들이다. 보시를 이처럼 관대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보시행은 성불을 위해 기울이는 모든 노력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 수행의 목표는 결국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인데, 관대한 마음을 키우면 곧 탐욕과 성냄이 사그러드는 한편 마음이 유연하게 되어 어리석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법륜 문고는 이처럼 중요한 불교의 덕목인 '보시'를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해 보고자 편집되었다. 사실상 지금까지 생활 속의 실천 불교를 다루는 책자에서마저도 보시행은 누구나 다 아는 것으로 여겨 적절한 설명없이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이 책자에서는 불교 경전에 대한 깊은 학식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수행하고 있는, 네 사람의 이 시대 불교인들이 보시의 다양한 측면들을 음미하는 동시에 불법 수행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검토해 보고 있다.
이 선집 끝에는 중세의 주석가 담마빨라(Dhammapaala)註1)스님의 짜리야삐따까(Cariyaapi.taka)註2)주석서 가운데 바라밀 설명에서 발췌한 '보살의 보시행' 부분을 번역하여 실었다.
보시의 실천
수잔 엘바움 주틸라
보시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 불자가 반드시 먼저 닦아야 할 덕목들 가운데 하나이다. 무언가를 베풀면 그것은 바로 공덕이나 선업의 바탕이 된다. 그것은 또 도덕성과 선정력과 통찰력[戒, 定, 慧]을 계발하면서 거듭되는 생의 바퀴인 윤회(samsaara)로부터 해탈을 성취하게 해준다. 이미 해탈로 향하는 길에 굳건히 들어선 사람들조차도 보시행을 계속한다. 보시는 그들이 해탈을 이루기까지 몸받아 살게 되는 남은 기간 동안 경제적 안정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보살들은 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팔 다리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음으로써 보시의 궁극적 경지인 보시 바라밀(daanapaarami)을 성취하기도 한다.
모든 선행이 다 그러하듯이 보시의 행위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인과법에 따라 장차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가 그 같은 사실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보시는 금생에나 다음 생에 이로움을 가져다 주겠지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바른 이해[正見]와 조화될 때 보시의 공덕은 훨씬 커지게 된다.
보시를 통해 얻는 공덕은 베푸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보시했는가, 받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순수한가, 그리고 어떤 물건을 얼마나 보시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항상 우리는 자기가 한 행동의 결과와 마주치며 살고 있다. 바른 행위로는 좋은 결과를, 옳지 못한 행위로는 나쁜 결과를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선업을 많이 쌓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보시행에서 본다면 이것은 곧 베풀 때 순수한 마음을 지닐 것, 될 수 있는 한 훌륭한 수혜자(受惠者)를 선별할 것, 그리고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가장 적당하고 후한 시물을 선택할 것을 의미한다.
보시의 동기
보시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보시하는 사람이 베풀기 전과 베푸는 동안, 그리고 베풀고 난 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알맞은 시물이나 최상의 수혜자를 고를 수가 없고 적절한 시물과 수혜자를 갖추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보시를 하고 난 다음 그것을 후회하게 될런지도 모른다.註1)"
불교에서는 베푸는 이의 마음 바탕을 유심히 살피어 어떠한 마음으로 베푸는지, 그 마음 상태를 여러 가지로 나눈다. 우선 분별없이 되는 대로 주는 것과 지혜롭게 베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후자가 전자보다 수승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를테면 나이 어린 소녀가, 자신의 행위가 어떤 뜻을 갖는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어머니가 그리 하라고 일렀기 때문에 집에 모신 불단에 꽃을 올리는 경우, 이는 가장 초보적인 보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덕을 베푸는 모든 과정이 지혜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보시행이 된다.
지혜롭게 베푸는 데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첫째,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업의 법칙에 따라, 보시 행위는 미래에 반드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명히 이해하면서 베푸는 것. 둘째, 베풀어지는 물건이나 주는 이, 받는 이 모두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고 베푸는 것. 셋째, 깨달음을 향한 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베푸는 것이다. 시물을 베푸는 데는 다소간의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므로 한 번의 보시행을 하면서도 베푸는 과정의 여러 단계에서 이같은 세 가지 마음을 다 경험하며 베풀 수 있다.
보시의 동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열반을 성취하고자 쏟는 노력들을 북돋우기 위해 베풀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해탈은 모든 마음의 번뇌(kilesa)들을 없앰으로써 성취되는데, 이들 번뇌들은 모든 행위 뒤에 그 행위들을 주관하며 계속 존속하는 '내'가 있다는 미혹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일단 이러한 미망이 소멸되면 이기적인 생각들은 더 이상 생겨날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보시를 통해 참다운 평화와 청정함을 얻고자 한다면, 완전한 베풂인 보시 바라밀을 실천해서 깨달음의 성취를 열매맺을 공덕의 창고를 지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목표를 세우고 나갈 때 우리의 속마음은 베푸는 행위 뒤에서 자연히 유순해질 것이며, 이처럼 부드럽고 푸근한 마음이야말로 해탈을 이루는 데 가장 근본 요소인 선정과 지혜 계발에 꼭 필요한 자질이리라.
이른바 성자(ariya, 尊者)들, 이미 성스러운 사과(四果)의 어느 단계엔가 들어선 거룩한 이들은 그 마음이 지혜라는 바탕 위에서 작용하는 까닭에 늘 순수한 뜻을 가지고 베푼다. 이러한 수준에 아직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가끔 건전하지 못한 마음으로 경솔하게 혹은 공경심 없이 주어버릴 수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몸과 입으로 짓는 모든 행위가 다 그러하듯이 보시행도 거기에 수반되는 의도가 보시의 덕스러움을 재는 잣대임을 가르치신다. 가령 어떤 사람이 스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때 공경하는 자세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짓이다. 구걸하는 사람을 떼어버리기 위해 동전을 던져주는 행위도 보시행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베풂이 최상의 결과를 낳게 하려면 베푸는 사람은 적절한 시물을 때 맞추어 베풀도록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중간 사람을 통해 베푸는 것은, 예를 들면 본인의 손으로 직접 스님들께 음식을 공양하지 않고 하인을 시켜 전달하는 것 등은 보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이다. 자기가 한 행위의 결과는 자기가 받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채 베풀 때, 그 보시 또한 공덕의 힘을 줄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보시할 마음은 먹었으나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 공덕의 성취는 아주 미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가로막지 않는 한 베풀려는 마음은 항상 재빨리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보시행을 한 다음 혹시라도 괜히 했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 보시의 공덕은 대부분 잃어지고 말 것이다.
덕스러운 사람은 공손하고 정중하게 베푼다. 그 베푸는 시물이 즉흥적인 것이든 미리 계획된 것이든 간에 시물의 내용이나 베푸는 때가 받는 이에게 합당한 것인지를 알아볼 것이다. 남방 불교 국가에서는 가정 주부들이 매일 이른 아침 몇 분 스님들을 공양에 초대하여 음식을 올리는 일이 많다. 이 주부들은 가족들의 조반을 차리기 전에 스님들에게 손수 공양을 올린다.
만일 보시를 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좋지 않게 여길까봐 불안해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압력에 못 이겨 베푼다면 그 공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미미한 결과 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하는 자선 행위 역시 이기적인 것이어서 값진 보시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상대의 호의에 대한 응답으로 베풀거나 보답을 바라고 주는 것 역시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전자의 경우는 빚을 갚는 것과 같고 후자는 뇌물을 건네주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보시를 받는 사람
받는 사람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는 보시의 공덕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된다. 즉 받는 사람이 훌륭하면 할수록 보시자에게 돌아올 공덕이 큰 까닭에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수혜자로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과 출세간의 도(magga, 道)를 닦아 과(phala, 果)를 이룬 당신의 제자들 같은 거룩한 성자들을 꼽으셨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지혜를 통해 성취한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베푼 이의 보시행으로 하여금 많은 공덕을 가져오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상의 공덕을 쌓기 위해서는 그런 분들께 할 수 있는껏 많이, 그리고 가능한 한 자주 보시를 베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성스러운 경지에 들려는 목표를 세우고 수행하는 스님들께, 혹은 오계를 수지하고 불법에 따라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베푸는 보시 또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성과를 증득한 거룩한 이들이 공양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베푸는 이로 하여금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공덕을 지을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가장 높은 두 가지 성스러운 경지에 올라선 아라한(arahant, 應供)과 아나함(anaagaamin, 不來)은 이미 감각 대상이 되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린 분들이다. 따라서 이 분들에게 보시할 때, 그 분들의 마음은 보시물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보시하는 사람에 대한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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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법구경) 주석서註1)에 있는 시왈리(Sivali) 스님 이야기는 비록 사소한 물건이라도 부처님께서 이끄시는 승가(Sangha, 僧伽)에 베풀어질 때 큰 공덕을 이룬다는 사실의 좋은 예이다.
옛날 위빳시(Vipassi) 부처님 당시 어느 도시에 사는 시민들과 왕 사이에 누가 부처님과 승가에 가장 큰 보시를 할 수 있는지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시민들은 공양 올릴 물건들을 빠짐없이 갖추었지만 거기에 싱싱한 꿀이 빠진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해 오도록 하기 위해 여러 심부름꾼들에게 각기 충분한 돈을 주어 내보냈다. 심부름꾼 가운데 한 사람이 그 때 마침 방금 딴 벌집을 팔려고 시내로 들어오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심부름꾼은 그에게 벌집 한 개 값으로는 너무 많다 싶었지만 자기 돈 모두를 주고라도 그 벌집을 사겠노라고 제의하자 농부는 의아해 하면서 물었다. "당신 제 정신이요? 한 냥 값도 안될 것을 천 냥을 주겠다니 그 까닭이 뭡니까?" 그 꿀은 시민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의 마지막 품목인 만큼 그만한 값이 있노라는 심부름꾼의 설명에 농부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그렇다면 돈을 받고 팔지는 않겠소. 그 보시의 공덕을 내가 얻을 수 있다면 거저 드리리다." 시민들은 그만한 횡재를 쉽게 마다하는 농부의 신심에 감동되어 보시의 공덕을 그에게 돌리기로 기꺼이 동의했다.
위빳시 부처님 때 올린 이 작은 공양 덕분으로 그 농부는 그후 거듭거듭 천상에 태어났고 바라나시 국의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물려 받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생인 지금에서 그는 시왈리 존자가 되어 부처님 제자로서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도 그 벌집 보시는 계속해서 결실을 맺었다. 이미 여러 겁(kappa, 劫) 전에 맛있는 것을 보시한 그 분에 대한 예우로 하늘 신들은 부처님과 시왈리 존자를 포함한 오백 명의 스님들이 여러 날 인적 없는 지역을 지나는 동안 쉴 곳과 음식을 마련했던 것이다.
정신적으로 그다지 향상되지 못한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에도 보시는 역시 유익함이 있다. 베푸는 이의 뜻이 좋으면 비록 받는 사람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보시하는 사람은 공덕을 쌓게 되며, 나아가 이런 보시행으로 인해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탐욕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이 굳건하게 자리잡힌다. 마음 속으로는 거룩한 승가에 올리고자 했던 공양물이 실제로 덕스럽지 못한 스님들에게 베풀어진다 하더라도 그 보시 또한 큰 결실을 맺는다. 나쁜 사람을 억지로 좋은 사람이라 여기면서 베풀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는 무언가를 베푸는 동안 자신이 어떤 자세로 하고 있는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태도이지 남은 아니기 때문이다.
베풀어지는 것[施物]
보시행의 세 번째 요소는 무엇을 베푸는가인데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물질이 아닐 수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전해 주는 법보시야말로 어떤 선물보다도 좋은 것이라고 하셨다(Dhammapada, 354).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해 주는 분들, 이를테면 불법을 알려 주거나 설명해 주거나 경전을 암송하는 스님,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들은 대중들과 불법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최상의 보시를 실천하고 있다. 법을 가르쳐 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다른 방법으로 법을 베풀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누구에게 주거나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펴게 될 진귀하고 새로운 사본을 번역, 출판하는데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다. 또한 자주 불교에 관한 토론의 기회를 만들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계를 지키게 하거나 참선을 하도록 권장하는 것도 모두 훌륭한 보시행이다. 그리고 남들을 위하여 불법에 관해 해설을 쓸 수도 있다. 선원(禪院)이나 거기에서 참선을 지도하는 분은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므로 이런 수련원을 위해 금전을 베풀거나 몸으로 일을 거들거나 지도하는 분을 돕는 일들은 모두 법보시가 되는 것이다.
베풂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물질적인 보시이다. 시왈리 스님의 벌집 이야기에서 보듯이 시물이 꼭 비싼 것이어야만 큰 공덕을 가져온다는 법은 없다. 하루에 밥 한 그릇 밖에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 그날 양식의 전부인 한 그릇의 밥을 보시할 때 그는 매우 큰 보시를 한 셈이고 공덕 또한 지대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부자가 스님이 탁발하러 올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앞의 가난한 사람이 한 것과 같은 분량의 밥만을 준비했다면 그 공덕은 지극히 빈약한 것이 될 것이다.
버마 사람들은 스님들께 공양할 과일은 보통 때 자기네들로서는 값이 비싸 사먹기 힘든, 시장에서 제일 좋은 과일을 산다고 한다. 우리도 최소한도 자신이 쓰기에 손색이 없는 정도의 물건을 베푸는 자세를 갖춰야 마땅하다.
승가에 대한 보시물로는 음식, 의복, 약 또는 스님들이 기거할 사원 등이 있으며 이들은 저마다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승가에 바치는 보시의 한계는 부처님께서 비구 승단이 순수하고 튼튼하게 유지되게끔 필요에 맞게 제정해 놓으신 계율(vinaya)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승단이 지켜야 할 계율을 미리 재가 불자들이 잘 알아 비구, 비구니 승가에 적당한 물건을 적당한 시기에 보시할 수 있다면 그 공덕은 무량하다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 으뜸가는 여(女) 재가 불자의 하나인 위사카(Visaakhaa) 이야기(Buddhist Legends, 2;67-68)는 큰 보시가 가져온 공덕을 말해 주는 재미있는 일화이다. 위사카의 아버지는 딸을 시집보내게 되자 오백 수레 씩의 금, 은겣톩구리그릇겫奏?버터와 쌀, 농사에 쓸 연장 등 엄청난 분량의 혼수감을 공들여 마련했다. 그리고 딸에게 가축도 함께 주어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위사카 아버지는 일꾼들을 시켜 한 골목을 채울 만큼의 소들을 우리에서
내몰게 했다. 그 골목에 소들이 꽉 들어차자 부친은 "이만 하면 충분하겠지" 하고 우리 문을 닫아 걸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문빗장이 걸렸는데도 여러 마리의 황소와 암소들이 위사카 몫으로 나간 소들을 따라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꾼들이 갖은 애를 다 썼는데도 그 소들을 다시 잡아 가둘 수는 없었다.
이 가축들이 위사카를 따라간 데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오랜 옛날 까사빠(Kassapa) 부처님 당시 위사카는 이만 명의 비구와 사미들에게 다섯 가지 우유 제품을 푸짐하게 베푼 일이 있었다. 바라나시를 다스리던 끼끼(Kiki) 왕의 일곱 딸 가운데 막내였던 그녀는 충분히 들고 난 스님들에게 계속 우유, 커-드(요구르트), 버터 등을 더 드시도록 권했던 그 때의 보시 공덕으로 그렇게 많은 가축들이 금생에 위사카로 태어난 그녀를 따라갔고 누구도 그 공덕의 결실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새 법당이나 탑을 세우는 데 시주하는 일, 탑모(搭帽)의 도금을 위해 금박을 시주하는 일, 또는 절에 불상을 모시는 데 시주하는 일 등은 종교적 성격을 띤 물질적 보시가 된다. 그러한 보시의 수혜자는 일반 대중이 되며 그 절을 찾거나 불상 앞에 예배하는 사람들 모두가 보시를 받는 사람이 된다.
보시 가운데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이웃들을 위해 베푸는 사회적인 보시도 있는데 여러 가지 복지 기관에 기부하는 일, 병원이나 공공 도서관에 헌금하는 일, 주변 공원을 깨끗하게 가꾸는 일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 누구든 그러한 사업을 위해 돈만 내놓는 데 그치지 않고 몸으로 하는 노력 봉사로까지 참여한다면 그 과보는 아주 지대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보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청정한 마음으로 행해진다면 그 공덕은 엄청날 것이다.
완전한 보시 [보시 바라밀]
보시행 가운데는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베푼 결과가 어떤 세속적 이득을 가져올 것인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런 보시가 있다. 그러한 보시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없애겠다는 생각, 즉 탐욕에서 벗어나겠다는 깊은 뜻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나 가장 주기 어려운 것을 베풀고자 애쓴다. 이처럼 보살들은 언제라도 기회만 오면 오로지 최상의 완전한 보시인 보시 바라밀을 실현하기 위해 베푼다. 보시 바라밀은 성불을 위해 반드시 최상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완성시켜야 할 열 가지 덕목 가운데 첫번째이다. 보살이 완전한 보시행을 달성하려면 보통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해내야만 한다. 고따마 붓다가 과거에 보살이셨을 때 자기 몸이나 세간의 이익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어떻게 보시했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본생담(Jaatakaa)에 수없이 나온다. 보살이 덕을 베풂에 있어 오로지 성불하는 데 꼭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자 하는 것에만 마음을 쓰고 있을 뿐이다.
소부경(小部經)의 하나인 소행장(所行臧)註1)은 보살의 전생 이야기 열 가지를 담고 있다. 이 전생 기간 동안 보살이 한 번은 상카(Sankha)라는 이름의 브라흐민으로 태어났다. 어느 날 그는 한 벽지불(Pacceka-buddha)이 사막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공덕을 쌓겠다고 발원했으면서 지극 정성으로 보시하기에 가장 훌륭한 분을 만나고도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 공덕은 줄어들고 말 것이다"라고 생각한 상카 브라흐민은 자신도 체질이 허약해서 꼭 신어야 하는 자기 신발을 그 벽지불에게 드렸다[1장, 제 2화].
한 번은 또 보살이 마하 수다싸나(Maha Sudassana)라는 이름의 황제였을 때 날마다 자신의 영토 전역 수천 곳에 관리들을 시켜 국민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이 있는 자는 와서 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음을 알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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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든 밤이든 걸인들은 무엇이든지 받아갈 수 있노라"고.
마하 수다싸나 왕은 오직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아무런 집
착이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진실로 아낌없이 베풀었던 것이다[1, 4].
보살이 최고 경지의 보시행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는 물질적인 재화보다 훨씬 더 주기 힘든 것을 베풀어야 한다. 자기 몸의 일부나 자기 자녀들이나 아내,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조차 거침없이 내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역시 부처님께서 아직 보살로서 시위(Sivi) 왕이었을 때, 눈먼 노인으로 나타난 제석천(Sakka)에게 맨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빼주었다. 제석천은 보살에게 이와 같은 훌륭한 보시행의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눈먼 노인 행세를 하며 시위 왕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시위 왕은 이 보시를 행하기 전에나 행하는 동안 조금도 망서리지 않았고, 나중에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
그는 "나의 보시행은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두 눈이 내게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깨달음이 더욱 소중한 것이기에 기꺼이 두 눈을 내주었노라"고 말했다[1, 8].
또 웨싼따라(Vessantara) 왕자로 태어났을 때 보살은 경쟁 상대인 이웃 나라 사람들이 행운의 상징인 용맹스런 왕궁 코끼리를 달라고 하자 그대로 넘겨 주고 말았다. 이 관대한 처사 덕분에 그는 결국 아내와 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외진 산 속으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아내가 낮이면 식구들이 먹고 살 산 열매를 찾아다니는 동안 그는 오두막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하루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나그네가 그에게 아들 딸을 달라고 청했다. 웨싼따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이들을 내주었고, 나중에는 정숙한 아내까지도 남의 손에 넘겨 주고 말았다. 그는 "아이들이 귀찮아서도, 아내 맛디(Maddii)가 싫어서도 아니었다. 완전한 깨달음만이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었기에 사랑하는 그들을 버렸노라"고 말했다[1, 9]. 물론 그 당시 자녀들이나 아내는 일반적으로 가장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맛디 부인 또한 이미 오래 전에 보살의 아내가 되어 보살께서 성불하기까지 겪어야 할 모든 시련을 함께 나누기로 원력을 세운 바 있었다. 그녀가 세운 서원의 과보가 웨싼따라 왕자의 성불 의지를 도와 완성시켰고, 자신은 남의 손에 넘겨지도록 했던 것이다. 그 아이들 또한 부모를 떠나는 것으로 자신들의 과거 업의 과보를 겪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언젠가 보살은 영리한 토끼로 태어난 적이 있었다.
그는 배고픈 브라흐민에게 공양을 올려 허기를 면케 하려고 기꺼이 불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브라흐민은 이번에도 제석천의 변신이었다. 이렇게 보살이 몸과 목숨을 내던져 최상의 보시를 행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설사 타는 불이 그의 몸을 에워싸도 그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보살은 그 때 일을 이야기하면서 "완전한 보시 바라밀을 실현했던 까닭에 실로 그 불은 마치 시원한 물인 양 나를 진정시키고 평온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다.
보시의 궁극적 목표
수행에 나선 불자의 목적은 거듭되는 생사 윤회의 고(苦)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다.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음[無明]과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번뇌들을 뿌리뽑을 때 고(苦)가 완전히 없어진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번뇌는 우리로 하여금 '자아'라는 환상에 집착하게 하며, 본질적으로 무상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들로서 그 끝없는 감각적 욕망을 채우려고 안달하게끔 만든다.
부처님께서는 보시행이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노력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선한 마음으로 행해지는 보시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고의 근절을 돕는다. 첫째, 우리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줄어 든다. 따라서 베푸는 버릇을 몸에 붙이게 되면 불행의 주된 요소 가운데 하나인 갈애가 점차 약해진다. 둘째, 선한 마음으로 보시행을 하면 다음 생에 청정한 불법을 만나 수행하기에 적합한 복된 곳에 태어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베풂을 통해 열반을 성취하기에 족할 만큼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보시를 하면 그 너그러운 행위는 곧바로 계, 정, 혜(siila, samaadhi, pa~n~na)의 향상을 북돋워준다. 계, 정, 혜는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고귀한 팔정도의 내용이며 이 팔정도의 완성이야말로 고를 벗어난 해탈이 아닐 것인가.
만일 우리가 내세에 복된 삶을 얻겠다는 어떤 바람 속에 베푼다 해도 보시를 착실하게 행하기만 한다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내생의 세간적인 복을 구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해탈을 향한 수행으로서의 보시가 훨씬 수승하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복을 받겠다는 바람으로 하는 보시는 어딘가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갈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시행으로 얻어진 공덕은 덧없는 즐거움 속에서 언젠가는 끝장이 오고 그렇게 얻은 세간적인 행복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생사 윤회 속을 언제까지나 헤매게 만든다.
결국 그렇게 얻어질 행복을 좀 더 깊숙이 헤쳐 본다면 다른 형태의 고(苦)에 불과한 것이다. 갈애와 연결된 보시는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결코 멸하지 않을 영원한 행복에의 길은 아니다. 그러한 경지는 오로지 갈애의 완전한 소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갈애와 집착으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보시행은 불법(佛法)이 살아 있는 시대, 즉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시대에만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바로 그런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는 우리가 무언가를 베풀고자 한다면 곧 갈애를 뿌리뽑으리라는 원력을 세우고 그리 해야 마땅하지 않으랴.
갈애가 끝날 때 고는 멈추어지고 그것이 곧 해탈일 터이기에!
이 법보시 공덕이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 나누어지이다.!
첫댓글 새해엔 생각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