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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슬픈 예감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게 하는 믿음이 있다
왜 슬픈 예감은 절대 틀리지 않는 걸까요? 왜 부정적인 예측은 항상 현실이 될까요? 이런 가사의 노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부정적인 이해가 현실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현 대통령이 한밤중에 계엄선포를 하였습니다. 군대가 국회를 난입하여 무언가를 장악하고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루 만에 감정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행인 것은 국회의원들이 당일 회의를 위해 대부분 서울에 머물고 있어서 신속하게 과반수 이상 모일 수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국회에 통보하지 않고 계엄을 선포해 소위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려 하였다면 이는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내란죄의 수장과 깊이 관련된 이들에 대해서는 사형이나 무기징역과 같은 벌에 처합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윤 대통령은 왜 자기 운명을 이렇게 재촉하는 것일까요?
그가 사는 세상은 무언가 두려움의 세상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음해하려는 종북세력이 넘쳐나는 환경에 놓인 것입니다. 거의 망상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상황의 판단이 안 될 때 생기는 감정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잃을 게 많다는 잘못된 믿음과 나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이들이 많다는 잘못된 두 믿음의 결합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두려워하면 두려운 일이 생기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하나만 뽑으라 하면 저는 이것을 뽑고 싶습니다. 이 원칙은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법칙을 믿지 않습니다.
아마 윤 대통령이 많이 갖지 못했을 때는 그만큼 두려움도 적었을 것입니다. 감사원장, 서울 지검장 탄핵 결의가 있는 날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는 대통령 관저와 김건희 여사와 직결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사실 예산안에 대한 것은 거의 700조에 가까운데 심의에서 4~5조 조정안에 관련된 것이라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설사 이유가 된다고 해도 국회에서 예산안 심의 하는 것을 가지고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포할 사유는 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람은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때는 아무것도 가질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이번 계엄은 대다수 전문가가 볼 때 국가 혼란 상태는 아니었다는 결론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는 대로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일까요? 오늘 두 소경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할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디까지 믿어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은 나를 창조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곳에 흔들다리를 만들고 유리로 아래가 보이게 하는 관광지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국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즐깁니다. 놀이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가끔 사고도 나지만, 교통사고 날 확률보다 적기 때문에 그런 것을 즐깁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만든 이가 바로 인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녀도 탈 수 있는 놀이기구를 위험하게 만들 리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과 온 세상의 창조자를 믿기 전까지는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두려우면 두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긍정적인 믿음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바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망가지면 고치실 수 있고 죽으면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을수록 우리는 평화를 얻고 그 평화가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하며 결국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창조자를 믿어서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9,27-31: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본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 주시며 아무에게도 일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이 소경들의 치유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 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 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 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으려면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일까요? 아니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정상일까요? 사람들은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한결같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는 비난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일까요? 어느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한 겹이야? 삼겹살도 세 겹인데….”
여러분의 마음은 몇 겹이 되는 것 같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한 겹이 될 수 없습니다. 무수한 마음과 감정이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너는 이중적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겨우 두 겹밖에 안 된다는 것으로, 너무 단순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저녁, 저녁에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다른 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똑같은 모습만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미사에 참석할 때 매번 기쁘십니까? 당연히 주님의 잔치에 함께하는 것이니 기뻐해야 하지만 때로는 슬픔의 감정도 갖게 됩니다. 활기차게 오늘 하루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피로감을 느끼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어때요? 이렇게 몇 겹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비정상적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인 ‘나’인데, 이런 인간인 ‘남’을 왜 인정하지 못할까요? 자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다중적인데, 다른 사람의 이중적인 모습에 분노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모습인가요?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도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그들이 직접 예수님의 능력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문은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한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있었습니다. 또 유다인들이 존경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아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하셨고,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무성한 소문에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이 많습니다. 그런 말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이라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오늘의 명언: 저녁 무렵 자연스럽게 가정을 생각하는 이는 가정의 행복을 맛보고 인생의 햇볕을 쬐는 사람이다. 그는 그 빛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카를 베히슈타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이사 29,17)
하느님의 나라는
소송과 재판과
죄와 불화가 없으며
겸손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나라라네.
그곳은
그분의 자비로
믿음의 눈을 뜬 이들이
열매를 맺는
성령의 과수원이며
은총의 거대한 숲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믿음을 통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보며
새로운 삶을 사는 이는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입니다.
반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 못하는 자는
영적인 눈이 먼 사람입니다.
달을 가리키며 “저기 봐라”했을 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는 곳이 아니라
달을 응시해야 하듯이...
때로는 달을 응시하지 못하고
주님의 손가락에 매달려 궁극적인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거친 파도는 보면서도 그 파도를 움직이는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은 느끼지 못하고
바닷물 속의 거대한 움직임은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하면 일을 그르치고
그 일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결과로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과정이 없는 결과는 메마릅니다.
세상을 그렇게 보면
세상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볼 수 없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9,17-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27-31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