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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 20 일곱 별과 촛대의 비밀
계 1: 20 일곱 별과 촛대의 비밀 -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들과 일곱 금촛대들과 ‘이제 있는 일’ 즉 당시 교회들의 일과 ‘장차 될 일’ 즉 교회 역사상 되어질 일들과 주님 재림 직전의 일들을 기록해야 했다.
일곱 교회는 세상에 있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대표할 것이다. ‘일곱 별의 비밀’이라고 한 것은 목사들의 영적 상태와 충성의 정도를 교인들이 잘 모르고 주님만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오른손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너무 염려하거나 너무 낙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주장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20) 두 가지 비밀 :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비밀'에 해당하는 '뮈스테리온'(*)은 원래 '가둔다.' 혹은 '닫는다.'는 의미의 '뮈오'(*)에서 파생된 말이다(10: 7. 17: 5, 7).
단순히 '신비롭다'는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환상에 대한 내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Charles, Robertson).
* 단 2: 7 -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하니
* 골 1: 26 -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 살후 2: 7 -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비밀을 알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들뿐이다.
* 마 13: 11 -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 눅 8: 10 –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 일곱 별 - 일곱 교회의 사자.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 교회에서 가장 우세하고 지배적인 정신(the prevailing spirit of the church)을 의인화한 것이다(Mounce).
Ⓑ '교회 자체'를 상징한다(Bleek, Sweete).
Ⓒ 일곱 교회의 감독을 가리킨다(Zahn, Weiss).
Ⓓ 이 사자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점을 들어 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주의 종들이다(Johnson, Moffatt, Charles, Rist).
이러한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 단 10: 13, 20-21 - 13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20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왔는지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주와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의 군주가 이를 것이라 21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항할 자는 너희의 군주 미가엘 뿐이니라.
말세에 큰 비밀을 맡은 '종'이 되려면 일곱 별 같은 종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되려면 일곱 금촛대 교회가 되어야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수 있다.
별의 비밀은 별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일곱 별이 되어 많은 사람을 살린다.
* 단 12: 3 -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별이 떨어지면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비밀이다.
* 계 8: 10-11 -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 계 9: 1-6 -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 유 1: 13 -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 사 56: 9-12 - 9 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다 와서 먹으라 10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2) 일곱 금촛대 - 일곱 교회.
촛대로 상징된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선택된 교회를 말하나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세계의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
* 엡 3: 10 -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① 교회의 비밀은 음녀 교회가 되면 망하게 된다.
* 계 17: 1-4, 16 -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② 신령한 교회가 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비밀이다.
* 계 12: 1-2, 6, 13-16 - 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육십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 계 2: 1 -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대
* 계 3: 1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 주일에 대하여
오늘날의 달력은 B. C. 45년경 율리우스 씨이저 때부터라고 한다. 바벨론 사람들은 별들을 숭배하여 요일마다 행성의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일요일(Sunday, 태양), 월요일(Monday, 달)등이다.
교회법적 공고는 서기 364년 라오디게아 공회에서 토요일(안식일)의 예배일을 일요일로 바꾸었다. 그 전에 콘스탄틴 황제가 제정한 일과(서기 321년) 또한 약 2세기경부터 공예배일이 일요일로 변경되었다는 추정도 있다.
우선 일요일이라는 말은 이교적 명칭이다(순교자 저스틴이 처음으로 이 말을 부득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하신 날은 안식 후 첫 날, 즉 토요일 다음 날인 일요일 새벽이다. 그래서 사도 시대부터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 것으로 나타났다(주일, 주의 날, 주의 부활하신 날).
① 구약의 안식일은 지금의 토요일이다.
안식교도들은 토요일에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안식일 계명을 신약에도 지켜야 구원을 얻은 것으로 주장하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며 이단적 견해이다.
주일성수 뿐 아니라 십일조나 모든 율법적 행위로 구원 얻을 수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힘입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신약의 구원 방편이다.
② 예수께서는 (구약)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며 모든 율법을 이루신 분이다.
롬 10: 4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했다.
이는 (마 5: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즉 이루신 것은 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재해석만 남았을 뿐이다.
③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다음 날인 지금의 주일에 부활하셨다. 신약 성도에게는 이 날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다.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약의 모든 요구를 듣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당신의 영광스런 부활을 기념하며 이 날에 예배하고 안식하는 것이 신약 성도의 바른 안식일 준수가 된다.
* 마 12: 8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 마 28: 1 -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 계 1: 10 -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하나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지으시고 일곱째 되는 날에 쉬심으로 이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곧 지금의 토요일이다. 안식일 다음 날이 되는 지금의 주일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이 날이 더욱 귀하여 사도 때부터 주의 날(부활하신 날)에 예배하며 헌금한 사실을 보여준다.
* 고전 16: 2 -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④ 주일(主日)은 주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낱말이고 일요일(日曜日)은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의로운 태양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을 뜻하기 위한 낱말이다.
* 말 4: 2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⑤ 이 날을 기억하라고 하셨다(기억하여...).
잊어버리고 있다가 주일을 당하면 당황한다든가 하는 것은 바른 안식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⑥ 이 날을 기억하며 6일간은 힘써 일을 해야 한다.
6일간 세상에 빛과 소금되는 성도의 충실한 삶을 통하여 영광을 돌리고 주일을 맞이하는 것이 옳다. 6일은 세속주의로 살고 주일만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정서상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우리들의 삶 자체가 거룩함으로 영광을 돌리며 주일은 특별히 성도들이 모여 주간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영생을 찬미하고 또한 영혼과 사회를 위해 기도하며 온전하게 하루를 살아드리는 것이다.
이 날의 언행은 우리 자신을 위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한 날이어야 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날이다.
* 출 20: 9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살후 3: 10 -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 요 5: 17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⑦ 육축(짐승)도 일하지 않아야 하고 집에 온 손님도 일하지 않아야 한다.
⑧ 주일은 예배를 드리는 때만 거룩한 것이 아니다. 온 종일 거룩한 날이다.
⑨ 구약의 안식일 준수는 그야말로 율법적으로 매우 세밀하고 엄격했다.
* 사 58: 13-14 –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⑩ 특별 사항은 생명과 위급한 일에 관련한다.
병원, 약국을 영업하라는 것이 아니며 위급해 찾는 자가 있을 시나 본인이 필요할 시 가능하다. 국가 안보 문제나(군복무) 일정으로 잡혀 있는 직장 당직 관계인데 가능한 예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국이 아닌 사회에서 주일을 성수하기 힘이 든다. 그러나 신앙 양심이 허락하는 한 주일을 성수 할 수 있는 직업과 직장이 돼야한다. 경비를 서는 일 등도 예배의 날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경 사업, 건설업 등은 월요일 아침부터 작업을 하기위해서 일요일에 작업 준비(나무, 시설물 등)를 하게 되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가능한 토요일쯤에 월요일에 착수할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다. 주일에는 일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주일은 주님의 일로 충실해야 한다.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는 날이며 믿음의 일을 하는 날이다.
구약의 안식일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들이 신약에 와서도 그렇게 율법대로 행할 의무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구약처럼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정신에 있어서 구약의 안식일과 다름없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구약의 모든 율법의 존재와 그 목표가 완성되었다는 신약적 구약의 재해석에 따른 안식일의 개념은 행위 언약은 폐하고 은혜 언약적 내용은 그대로 전수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많은 지도자들이 주일성수를 현실 문화에 비추어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정통신학에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주일성수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많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대 생활에 적용 문제로 주일에 상거래를 하는 것이나 인간 중심으로 주일을 지내는 일들이 많다.
과연 신앙 양심이나 신학의 문제일까? 아니면 현실주의에 따른 합리적 해석일까? 우리는 주일성수가 구원을 얻는데 결정적인 율법적 요구가 된다는 이론은 내세울 수 없다. 신약에 예수님의 속죄 사건 중심으로 소위 하나님의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이 해석돼야 한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셔서 부활하시게 되므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안식일보다 날 자체로도 주일이 더욱 중요한 날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는 온전한 예배와 이웃의 아픈 자, 약한 자를 돌보며 위로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많이 얻고 기도로 영성 훈련을 하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영생을 충분히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어야 할 것이다.
주일에 생업에 종사하는 것은 내세의 소망이 없는 불신자들의 불신적 삶이 된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생업이나 어떤 상거래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잘되고 세상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믿음의 순종이 되는 것이다.
먼저 주일에는 시장 보는 일은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업을 하게 되는 불신자는 결국 이 날에 주님께 찾아올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힘든 세탁은 전날에 해두는 것이 유익하다. 이날 너무 힘겨운 청소나 세탁하는 일로 고달픈 것은 주의 부활을 즐거워하는 날에 조화롭지 않다.
간단한 목욕은 가정에서 가능하며 오락을 즐기는 것은 부당하다. 이날은 인간의 안식이 되기 전에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토대로 하는 신령하고도 영광스러운 기념의 날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처럼 오락으로 육체적인 즐거움에 취하는 것은 거룩한 행위가 아닐 것이다.
직장 시험 치르는 것과 국가고시 자격증 시험 등에 대해 본인은 거절한다. 아무리 개인적인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결코 축복받을 행위는 아니라고 본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는 것은 무척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갈 수 있다.
현실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우리는 합리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주일에 대한 신약적 이해 그리고 신학적 해석이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은 많은 논란이 따른다.
그런데도 주일은 전통적으로 상업적 거래나 인간중심의 오락적인 행위를 금하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주일 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부분에서 신자들의 삶의 규칙이 흔들리고 있다. 십일조의 개념이나 주일성수나 신약적 재해석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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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