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째 '사랑의 집수리' 실천, 건축가 박철용씨
▲ 흰돌하우징 대표 박철용씨.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처지를 바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다’란 뜻을 가진 사자성어. 누구보다 이 말과 잘 어울리는 이가 있다.
20년 전 처음으로 건축업에 뛰어들어 전원주택을 지어왔던 건축가였을 때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의 불편함을.
그랬던 그가 작업 중 불의의 사고로 휠체어 생활을 지낸지 7년. 성공적으로 일상에 복귀한 그는 “휠체어에 앉아보니 건축이 이렇게 쓰여야 하는구나”라 느끼며 5년째 ‘사랑의 집수리’를 이어오고 있다. 캐노픽스 전문 시공업체 흰돌하우징 박철용(54세, 지체1급) 대표의 이야기다.
그에게 잊지 못할 날은 바로 지난 2008년 10월이 아니었을까. 서울의 한 재건축현장, 지붕을 철거하기 위해 올라간 박 대표가 떨어졌다. 3m의 높이에서 추락한 그는 커다란 돌에 곧장 부딪친 것.
처음에는 단순 골절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고 등이 뻐근하다’라고 느끼며 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119를 통해 병원에 실려 간 그는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병원 생활 내내 ‘다시 일어날거다’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다시 걸을 것이라 굳게 믿었기에, 6개월이 넘도록 병원용 휠체어만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며 뒤에서 가슴 치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박 대표의 부인이었다. 처음부터 하반신 마비판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는 남편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서야 스스로 받아들일 수밖에.
“집사람은 장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말을 못한 거예요. 6개월이 지나서야 휠체어 비싼 거 사야한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까지도 '왜 걸을 건데 비싼걸 사냐'고 타박했죠. 그런데 입원한지 6개월이 지나도 다리는 계속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서서히 장애가 다가온거죠.”
누구보다 활동량이 많던 박 대표에게 ‘장애’는 큰 충격이었다. 주말마다 꼬박꼬박 조기축구는 물론이요, 사람 만나는 것을 누구보다 즐겼던 그에게 심리적 절망감은 너무나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정의 든든한 가장이었다. 회사의 대표였기 때문에 산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이 전부 그 만을 바라보는 상황. 사고 한 달 전 미국유학을 간 큰아들, 대입시험을 준비하는 둘째 아들까지. ‘그래, 돈을 벌어야겠다’란 생각뿐이었다.
“절망할 시간이 없었어요. 장애는 너무나 좌절이지만 내가 넋 놓을 상황인가요. 나만을 바라보는 가족들은 어떡하겠어요. 큰 아들에게는 다쳤다는 사실 조차 털어놓지 못했죠. 유학을 보냈으니까 등록금을 위해서라도 빨리 일을 해야 했어요.”
▲ 박철용씨의 일상.일터에서 작업하며 남들의 도움을 받아 일상의 삶을 누린다.
“앞으로 건축 일을 할 수 없겠다”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단언에도 그는 1년여의 병원 생활 후 곧바로 일상에 복귀했다. 그의 사고로 인해 잃은 것은 너무나 많았다. 오랜 시간 신뢰하며 일 해온 직원들, 회사 앞 사람보다 높이 자란 잡초, 쌓인 임대료까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침7시에 출근해 오후9시에 퇴근했다. 주말이고, 휴가고 그에게는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야만 했다. 정신없이 일에 집중하며 마이너스를 지워나가기 시작했을까. 이제는 매년 매출이 2배씩 뛰는 든든한 업체의 대표로 거듭났다.
성공적으로 일상에 복귀한 박 대표. 지체1급 척수장애인이 되면서 얻은 것이 있다는데. 바로 불편한 장애인들의 삶이었다. 다치기 전에는 “불편하겠구나”란 생각이 들면서도 실천을 못했지만 직접 휠체어를 타는 당사자가 되니 자연스럽게 눈높이도 내려가게 된 것.
“저는 그래도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병원에 있다 보니 안쓰러운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한 사람의 삶을 두 사람이 살고 있더라고요. 사업을 하면 꼭 불편한 사람을 도와줘야 하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복귀하자마자 사랑의집수리를 자연스럽게 시작했어요.”
‘흰돌하우징은 사랑의 집수리를 합니다. 독거노인, 장애인, 소년소녀 가장 후원 및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연락바랍니다’
흰돌하우징의 카탈로그 맨 뒷페이지에 적혀있는 문구다. 그는 지난 2010년부터 ‘사랑의 집수리’를 통해 5년간 매년 2000만원 예산에서 무료로 집을 고쳐주고 있다. 올해도 벌써 3군데의 집수리를 마쳤다는데.
“오늘도 사랑의 집수리 작업이 있어요. 동국사랑병원에서 퇴원한 장애인인데요. 장애인 편의에 맞춰서 화장실, 턱 등을 수리할 예정이에요. 가장 필요한 게 아무래도 장애인화장실이거든요. 예전에는 미처 몰랐죠. 당사자가 되니까 건축가로서의 자세가 바뀌었어요.”
늘 좋은 일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장애를 갖고 나서 서러움도 많았다. 세무신고를 하러간 세무서에서 장애인주차장을 사용하지 못해 저 멀리 차를 대고 ‘끙끙’ 대며 휠체어를 밀고 왔다. 장애인주차장에 비장애인이 떡하니 주차해놓은 모습에 대해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바쁠 땐 아무나 차를 대도 되지”란 짜증 섞인 말이었다.
▲ 그가 5년째 해온 '사랑의집수리' 작업 모습.휠체어 장애인을 위해 욕실 경사로를 설치하고 욕실
문을 바꿔줬다.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무료집수리는 꾸준히 할 예정이다.
“너무 충격이었죠, 장애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요. 그 뿐이겠어요? 견적을 위해 찾아간 곳에서 한 아주머니가 ‘당신이 할 일이 아니잖아’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저에 대한 존재를 불편해하는 곳도 많구요. 저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려면 뭘 해야 하나라고 생각한 끝에 생각한 건 더 열심히 드러내는 것이었어요.”
그는 최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제38회 MBC 건축박람회'에서도 4일내내 회사의 부스 자리를 지켰다. 박람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게끔 했다. 장애인 차별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라는데. 장애인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만큼 좋은 장애인식 개선이 없는 것 같더란다.
“4일내내 부스에서 지키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봐요. 장애를 입고 나서 몇 년은 부스에 나오지 않았더니 나중에 견적을 내러가면 반응도 좋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숨기지 않고 자꾸 드러내서 거부반응을 줄이려고 노력해요. 무엇보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장애인식 개선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