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객이 김삿갓과 하루 놀다
충북 제천에서 강원도 영월은 버스로 40분도 안걸리는 지척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제천을 강원도에 속한 것으로 착각한다. 강원도 남부에 위치한 영월군은 북쪽으로 평창, 정선, 동쪽의 태백, 남쪽에 경북 영주, 서쪽은 충북 제천과 단양에 둘러싸인 인구 4만의 작은 군이다.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에 감싸여 여러 석회동굴과 동강, 서강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최근 관광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이다. 또한 김삿갓으로 유명한 난고(蘭皐) 김병연의 고향으로 그의 무덤이 있다. 영월군은 2009년 김병연이 자란 하동면을 김삿갓면으로 개칭했다. 또한 서강 강줄기가 휘돌아 한반도를 닮은 지형으로 관광지가 된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바꿔 관광산업의 의지를 보여준다. 영월, 상동 2개 읍과 7개 면으로 구성된 영월군은 4만 인구 중 2만 2천이 영월읍에 집중되고 여타지역 인구밀도는 극히 낮아 오지에 속한다. 상동읍의 경우 중석광이 호황이던 70년대 2만 5천 인구가 지금 1200명으로 줄어 읍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유령촌으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광산업에 의존했던 영월군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이용해 관광지로 탈바꿈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내가 영월로 일정을 잡은 것은 단종애사의 현장인 창령포와 장릉 그리고 난고 김병연의 유적지를 보기 위해서다. 영월 터미날에서 나는 바로 김삿갓면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김삿갓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너무 유명해 김삿갓을 전설 속 인물로 생각할 정도다.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 김병연(1807-1863) 선생은 조선후기 시선(詩仙)으로 불리울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천재성은 열살 때 사서삼경을 통달했을 정도다. 그의 뛰어난 시작(詩作)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이고 해학적인 가십들만 부각되어 술좌석 입담거리로 쓰여지는 등 오랫동안 평가절하되어 왔다. 그의 작품이 당시 대접받던 양반문학이 아닌 민중문학이었던 탓도 있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살되던 해 1811년 선천부사(宣川府使)인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해 역적 자식이 된다. 그는 어머니와 형과 황해도에 숨어지내다 후에 김익순의 처벌은 당대에 그친다는 사면을 받는다. 그러나 폐족 가문이라 어머니는 형제를 데리고 영월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어머니는 와중에도 자식들 글공부만은 철저하게 시켰다. 할아버지 행적을 몰랐던 김병연은 19세 때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가했다. 이날 시제는 '홍경래난 때 항복한 김익순의 죄상을 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한 김익순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다는 요지의 뛰어난 문장으로 장원을 차지했다. 이날 어머니는 울면서 그분이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충격을 받은 김병연은 조상을 욕되게 해 하늘을 쳐다볼 수 없다며 처자식까지 버리고 삿갓을 쓰고 방랑을 시작했다. 둘째아들 익균이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 몇차례 만나 귀가를 호소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는 57세에 전라도 화순에서 객사할 때까지 전국을 떠돌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시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내용이 많아 백성들의 인기를 모았다. 화순에 매장된 그의 유해는 둘째아들이 고향 영월로 이장했다.
나는 시내버스 종점인 노루목 김삿갓 유적지에 내려 난고 김삿갓문학관부터 관람했다. 문학괸에는 김병연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관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전시해 놓았다. 나는 난고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 그는 말장난인 문자놀음으로 해학적인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시에는 방랑생활을 통해 터득한 사물의 이치와 자신의 인생관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결코 술좌석의 안주거리로 가볍게 회자될 내용들이 아닌 깊은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김삿갓이 방랑하던 중 담양 죽물시장에서 다 헤진 삿갓을 버리고 새 것을 사면서 즉흥적으로 죽(竹) 타령을 읊었다. 그의 천재성이 번뜩인다.
此竹彼竹 化去竹(차죽피죽 화거죽)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風波之打 浪打竹(풍파지타 낭타죽)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飯飯粥粥 生此竹(반반갱갱 생차죽)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是是非非 付彼竹(시시비비 부피죽) 옳다면 옳거니 그러면 그러려니 그렇게 아세
賓客接待 家勢竹(빈객접대 가세죽) 손님접대는 집안형편대로 하고
市政賣買 歲月竹(시정매매 세월죽) 장터에서 사고팔기는 시세대로 하세
萬事不如 吾心竹(만서불여 오심죽)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는 안되니
然然然世 果然竹(연연연세 과연죽)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아가세
대나무 죽(竹)자를 이용한 절묘한 문자놀음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보다 나는 정처없이 방랑하는 김삿갓의 인생을 달관한 모습이 느껴진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길이며 순례의 길이다. 그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자족할 수 있다면 세상살이에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는가. 다만 마지막 구절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아가세'는 너무 염세적이다. 현세에서 본받을 자세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김병연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날 김삿갓의 일생일대 회고록 같은 장문의 '회향자탄'(懷鄕咨歎) 또는 '난고 평생시'라는 제목의 시를 읽고는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왔노라"로 시작되는 회고시는 김병연이 결코 낭만적인 선택으로 방랑한 것이 아니라 역적 자손에 할아버지까지 능멸한 죄인의 피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고행 방랑했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은 고행은 당시 유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적 가치인 충효(忠孝)를 동시에 거스린 죄인으로 자처한 김병연이 선택한 평생 속죄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관 광장에서는 삿갓과 죽장 등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지만 평일이라 한산했다. 광장에는 김삿갓이 처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모습을 상징하는 조각품과 길에서 스님을 만나는 장면 등 많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다리 건너 김삿갓 묘소와 생가로 오르는 길이 있다. 나는 막걸리 한병을 구입해 묘소로 향했다. 입구 약수대 노루목 물맛이 시원하다. 나는 묘소에 막걸리를 붓고 큰 절을 올렸다. 요즘 내 처지와 심정이 김삿갓 그대로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의 정성에 천지가 감응했는지 묘소 옆 작은 움막에서 김삿갓이 불쑥 나타난다. 큰 삿갓에 흰 수염과 죽장을 짚은 것이 영낙없는 김삿갓이다. 그는 나에게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더니 차한잔 대접하겠다고 한다. 현대판 김삿갓 최상락 씨 생활이 재미있다. 50대 후반 정도 나이로 김삿갓과 비슷한데다 2킬로 떨어진 산중턱 생가를 관리하면서 10년 째 김삿갓 노릇을 하고 있다. 김삿갓 생가로 가는 길에는 곳곳에 시판을 세워놓아 지루하지 않다. 그곳까지 오솔길은 충청북도와 접경이라 충청도, 강원도 땅을 11번이나 오간다고 했다. 김병연은 경기도 양주 출생으로 이곳이 생가는 아니다. 다만 이곳에서 그가 어린시절 대부분을 지냈고 가출하기 전 장가든 곳이니 '옛집'이라고 해야 맞는다. 현재 건물도 10년 전 지은 것으로 고적(古跡)은 아니지만 김삿갓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관조하기에는 좋다. 최상락 씨가 일하는 묘소 입구 '난고정'은 차라리 움막에 가깝다. 안에는 지필묵과 바위에 앉아 피리부는 자신의 사진까지 걸어 놓아 제법 김삿갓 분위기를 내고 있다. 그는 김삿갓 일생을 꿰뚫어 관광객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로 생활하고 있으니 신선놀음일 수도 있겠다. 그는 전생에 김삿갓에게 빚진 것이 있어 현생에 갚기 위해 김삿갓이 되었다며 웃는다.
나는 김삿갓과 그가 내놓은 과자를 안주삼아 남은 막걸리를 마시고 묘소를 떠났다. '외씨 버선길'로 명명된 도보길을 따라 면사무소까지 12.4킬로 길을 걷는다. 외씨 버선길은 경상북도 봉화, 영양, 청송군과 강원도 영월군까지 13개 코스로 총 2백 킬로 도보길이다. 스페인 샌디에고 순례길이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으자 제주도 올래길을 시작으로 지방자치 단체별로 도보길이 경쟁적으로 개발되었다. 주민 건강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관광객 유치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웬만한 지역에는 이런 도보길이 잘 꾸며져 있다. 길의 명칭도 지역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작명되었다. '외씨 버선길'은 영양출신 시인 조지훈(1920-1968)의 시 '승무'에서 따왔다. 조 시인은 승무에서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 버선이여"라고 춤추는 여승들의 자태를 노래했다. 나도 어릴 때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등 조지훈 시인의 환상적인 시어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외씨 버선길에는 구간 별로 '치유의 길', '보부상길', '약수탕' 길 등 고유이름이 있는데 이날 걷는 길은 '김삿갓문학길'이다. 문학관부터 시작되는 도보길 곳곳에 시비가 세워져 읽으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삿갓 뿐 아니라 다른 근현대 시인들의 작품도 세워져 있다. 김삿갓 고향다운 발상이다. 첫 걸음부터 김삿갓의 간산(看山)이란 제목의 시를 만났는데 순례하는 나의 생각을 노래하는 것 같다. 서두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여행은 천천히 걷는 것이 제일이다.
게으른 말을 타서 산구경하기 더 좋아 / 일부러 채찍들어 치지도 않노라 /
바위사이로 오직 오솔길 하나 / 연기나는 곳에 초가 서너채 /
꽃 예쁘게 피었으니 봄이 왔는지 / 새냇물 소리 들리니 비 지나갔는가 /
돌아갈 곳 까맣게 잊고 있는데 / 하인이 말하기를 해저물어 간다하네 /
김삿갓문학길은 유리알처럼 맑은 물이 바위사이로 거세게 넘치는 '곡동천'을 따라 숲속으로 이어진다. 길따라 작은 표지판에 세워져 있는데 간혹 표지판을 찾지못해 헤매기도 했지만 이 또한 여행의 일부이다. 곡동천 계곡 왼편으로 깍아지른 절벽옆으로 나무난간 도로가 만들져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의 경치가 일품이다. 양옆으로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계곡 오른편으로 조선 민화박물관과 묵산 미술박물관 그리고 김삿갓 주막이 있다는 표지판이 나왔지만 나는 이날 다른 것에는 일체 시선을 돌리지 않고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만 바라보며 걷기로 했다. 송송백백암암회(松松栢栢岩岩廻) / 수수산산처처기(水水山山處處奇) /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가니 / 물과 물, 산과 산, 곳곳이 절경이로다. /라고 읊은 김삿갓의 심정이었다. 나는 진짜 김삿갓, 아니 성이 다르니 김삿갓은 될 수 없고 장삿갓이라도 된 기분으로 오솔길을 타고 걷는다. 계곡을 내려와 큰길에 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송어양식장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최근 생긴 것으로 보이는 대로와 터널이 나타났다. 나는 이곳에서 길표시를 놓쳐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제법 높은 산이다. 약초를 캐는 사람이 있어 길을 물으니 이것이 면사무소로 가는 옛 차도인데 도보길과는 다르지만 거리는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배낭을 매고 산에 오르는 것이 힘들다. 정상에 오르니 발아래 마을이 보인다.
태극기가 보이는 곳이 면사무소다. 나는 산길 내리막길을 뛰다시피 걸어 옥동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시간표를 확인하니 한시간이나 남았다. 산골이라 그런지 여섯시 무렵인데 벌써 사위가 어둑어둑하다. 정류장 앞이 식당이라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나는 여행 중 거의 순대국, 소머리국 같은 탕으로 식사했다. 평소에는 극히 피했던 음식들인데 기운을 쓰려면 그래도 고기국이 낫다. 텅빈 식당에 들어가니 주인내외가 반색하며 환영한다. 이들은 식사내내 내 앞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이곳이 자기가 자란 고향인데 그동안 도시에 살다 낙향해 식당과 민박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농촌인구가 줄어 큰일이라며 면에 하나 뿐인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학생이 많지 않다고 했다. 옥동 중학교 경우 학생 25명, 교사 13명으로 학생 두명에 교사 한사람 꼴이다. 학생이 적은 대신 학교에서는 연구학교, 방과후 학교, 스포츠클럽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는 운동장 시설도 훌륭하고 깨끗했다. 농촌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것은 큰 문제이지만 이 정도면 교육의 파라다이스이다. 도시학교보다 교육적으로 훨씬 이상적일 것 같다. 이날 주인 내외는 미국에 유학보낸 딸자랑에 열을 올렸다. 부모 마음에는 자기 자식이 모두 수재로 보이는 모양이다. 딸아이가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 입학했다며 딸에게서 온 편지봉투를 보여주는데 아무리 봐도 랭귀지 스쿨이다. 나는 훌륭한 따님을 두어 기쁘시겠다며 축하해 주었다. 버스를 타고 영월 터미날에 도착하니 8시가 넘었다. 서둘러 여관을 찾아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종일 산길을 걸어서인지 다리가 무척 뻐근하다.
(2014.8.9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