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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남한글서예 60년 새길 열기의 선구자
-혜정 류영희 선생의 작품세계-
정태수(월간 서예문화 주간)
1. 좋은 습관이 좋은 작가를 만든다
“반복적으로 하는 일.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그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습관이 모여서 인생이 되듯이 세상만사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꾸준히 반복하여 아래로부터 돌이 쌓여 하나의 탑이 완성되듯이 서예가로 대성하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꺽이지 않고 이겨내는 한결같은 습관이 요구된다. 혜정(蕙汀) 류영희(柳永喜) 선생은 인생길 80년, 서예가의 길을 걸어온 세월이 60여 년이다. 그 동안 손에서 붓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고전을 연마하면서 새로운 창작을 위해 고민해 온 좋은 습관이 오늘날 영남 한글서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정립(定立)시킨 원동력이었다.
선생은 1942년 대구 침산동에서 태어난 대구토박이이다. 선생은 영남지역 한글서예계를 대표하는 원로작가로서 지역의 한글서단을 이끌고 있다. 오늘날 선생의 이러한 성취가 있기까지 두 분의 스승이 있었다. 동강 조수호 선생과 소헌 김만호 선생이 그분들이다. 동강 선생은 작품에 철학을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소헌 선생은 작품보다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서예공부를 병행하였는데 1966년 제15회 국전에서 영남지역에서는 한글로 처음 입선을 하였다. 당시 국전에서는 입상자가 몇 명 되지 않았고 특히 한글은 두서너 점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국전에 입상하면서 교단에서 분필을 쥘 것인가 서단에서 붓을 잡을 것인가 고민하던 중 교사의 길을 접고 서예가로서 일생을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자 1976년 15년 동안 몸담았던 교직을 그만두고 혜정서예연구실을 개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불교에서 수행의 단계에 수파리(守破離)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행의 단계나 사제간을 설명하는 용어로 확장되기도 한다. ‘수(守)’란 ‘가르침을 지킨다’라는 뜻으로 기본을 충실하게 몸에 익히는 단계를 말한다. ‘파(破)’는 원칙과 기본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틀을 깨고 자신의 개성과 능력에 의하여 독창적인 세계를 열어가는 단계이다. ‘리(離)’는 스승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어간다는 단계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선생의 60년 서예역정을 위의 세 단계에 대입하면, 입문할 때부터 80년대 중반까지의 20여년을 고전학서기[守]로, 다양한 한글서체를 실험하고 연구해 온 2000년경까지 20여년을 변화모색기[破]로, 2003년 3회 개인전 이후 최근까지를 자가서풍기[離]로 나누어서 조망하려고 한다.
2. 고전에서 길을 찾은 古典學書期
조선의 연암 박지원은 초정집서에서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을 유행시켰다. 여기서 옛것을 본받는다는 법고(法古)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함이 아니다. 옛것 중에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리고 그 좋은 취지와 근본은 함께 가져와야 한다. 창신(創新)은 있던 것을 전부 버리고 새로이 함이 아니다. 혁신적인 새로운 모습을 발굴하되 기존의 법도와 정신에 맞게끔 발굴하는 것이다. 서예는 어떤 장르의 예술보다 고전을 바탕으로 삼아 부지런히 익혀야 비로소 자신의 개성이 묻어나는 본인의 서풍을 드러낼 수 있다.
1997년 혜정선생이 한글서예를 공부하는 제자들을 위해 만든 서체진도표에는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한글고전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어느 정도 자신의 서풍을 형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제정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맹목적으로 스승글씨 흉내내기를 강조하는 공모전이 지배하는 서예교육현장에서 한글서예의 창신(創新)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실제 구체적으로 접근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차근차근 고전공부를 통해 자신의 시각으로 자기개성미를 갖추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사출신인 혜정선생의 지도방법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서체진도표는 바로 혜정선생 자신이 공부해 온 과정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선생이 처음 붓을 잡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재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내에서 서예를 잘 한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하면서 서예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55년 대구의 명문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부속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미술교사였던 동강 조수호선생과의 만남으로 인해 어린 소녀의 가슴에 서예의 매력이 뚜렷이 각인되었다. 붓글씨에 자질을 보인 소녀에게 동강선생은 칭찬으로 격려를 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사제의 연으로 이어졌다. 교사가 되길 소망했던 그 여학생은 명석한 학생들이 갔던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1961년)에 경주내남초등학교 교사로 초임발령을 받아 근무하기 시작했다. 사범학교를 마치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소녀시절부터 가슴에 묻어두었던 먹향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혼자서 서예공부를 해 보았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시 서울보성교등학교에 재직하던 동강선생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니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내게 되고, 방학 때 상경해서 본격적으로 서예지도를 받았다. 그 때부터 방학이 되면 동강선생의 자택에 머물면서 서예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서예를 공부하고싶은 열정이 지극했으면 스승의 댁으로 들어가서 공부할 용기를 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이 세상을 마치는 그 날까지 스승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못한다고 말하니 그 마음이 느껴진다.
1966년 대구 내당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제15회 국전에 처음 출품해 입선의 영광을 얻었다. 전지 두 장을 붙인 화선지에 <청춘예찬> 1,300여자 전문을 한글로 서사하는데 10시간이상 소요되었다고 한다. 당시 국전에서는 서울작가의 판본체 1점과 선생의 한글이 입선할 정도로 한글은 입상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입선되었다는 소문이 영남지역서단과 교육계에 알려지면서 종로초등학교 서예특기교사로 임명되었고, 교사들의 서예연수를 담당하는 한편 어린 꿈나무들의 서예지도도 열심히 하였다. 그 때 동료교사들이 선생의 별명을 ‘붓글씨’로 불렀다고 하니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처음부터 한글과 한문을 병행해서 공부해 왔었는데 초기작품은 1968년 <부도(婦道)>에서 보듯이 동강선생의 필의(筆意)가 느껴진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 1975년 24회 국전까지 9년 동안 계속해서 낙선하게 된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매년 서체를 바꿔가면서 부지런히 출품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자신의 서풍을 가꿔나가는데 있어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1975년 24회 국전에는 <송풍각>을 한문으로 출품해서 입선했고, 1976년 25회 국전에는 <범방전>을 한문으로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러나 지방작가의 한계와 공모전에 대한 회의가 들게 되어 좌절감이 깊어갔다. 그러던 1979년 대한민국신사임당여성대회를 공정하게 운영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품하였는데 당시 한글의 대가인 갈물 이철경여사가 공개심사를 하면서 장원으로 선정되었다. 그 때부터 다시 용기를 얻어서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갈물선생은 친히 궁체자료를 넘겨주면서 “지방작가는 당신이 처음이니까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83년에는 한글 <옥호빙심>으로 특선을, 87년에는 한글 <겨레의 맥박>으로 특선하면서 공모전을 마쳤다. 이 때 제작된 작품들은 대체로 한글은 고전에 충실하려고 하였고, 한문도 1978년 제작된 <한산시(韓山詩)>를 절임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이 선생의 고전학서기는 한문과 한글고전을 두루 섭렵하면서 20년 가까이 충분히 안목을 넓히면서 필력을 다져왔다고 할 수 있다.
3. 새로운 양식을 모색한 變化摸索期
예술가의 생명은 변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여있는 물은 상하기 마련이듯이 과거의 익숙한 양식에 사로잡혀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작가는 잊혀지기 쉽다. 이를 매너리즘이라고 한다. 작가로서는 늘 경계해야할 덕목이다. 일찍이 왕허주(王虛舟·청나라 서예가)는 옛사람의 글씨를 임서함에 있어 “처음에는 고법을 취하는데 힘쓰고, 취하여 자기 것이 되면 다음에는 고법을 잘 버려야 한다. 취하기는 쉬우나 버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힘들여 잘 취하지 못하면 잘 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분명 어렵게 얻은 고법을 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가들의 서품에 갇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면 고전을 배우는 의미는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고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법박(法縛)이라고 한다. 무릇 서예공부는 고전임서로부터 비롯되지만 어느 정도 공부가 된 상태에서는 고전을 바탕으로 그것을 뛰어넘고자하는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자기세계를 펼칠 수 있다.
1984년 열린 첫 개인전 이후부터 작품에 낙관을 할 때 성명을 ‘유영희’에서 ‘류영희’로 바꿔쓰기 시작하면서 선생의 작품양식에도 변화가 보인다. 이때부터 고전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서서히 자신의 시각이 가미된다. 그렇다고 궁체에 대한 관심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 기법이나 표현에 있어 세련미가 이전보다 빼어나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영남지역 서단에서 궁체를 전문으로 하는 작가가 많지 않았을 때 궁체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1984년 서각으로 제작된 <법구경>은 궁체의 해석력을 확장해서 글자의 흐름과 획의 강약(强弱)에서 변화를 모색한 점이 엿보인다. 1987년 작품 <훈계자손가>는 한글과 한문을 섞은 혼서인데 한문과 한글을 병행해서 공부해 온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90년대에 이르면 궁체위주에서 관심의 폭을 필사본으로 넓혀 많은 작품을 한다. 이러한 관심은 1991년 작품 <나옹선사시>에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는 한글과 한문의 어울림이 자연스럽고 한글 세로획에서 굵기 변화가 눈에 띈다. 그리고 같은 글자가 반복되면 변화를 구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1992년에 선보인 작품 <부부 공경하는 글>에서는 방필(方筆)의 굳건함을 표현하고 있다.
한글전문작가가 여러 서체의 한문법첩을 임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생은 처음부터 한문과 한글을 함께 공부해 왔기에 궁체의 곱고 연미한 필획에 한문을 휘호하던 붓의 탄력성을 접목하고자 하였다. 한글도 한문처럼 서체를 다양하게 구사해야겠다는 선생의 연구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시기에 원필을 구사한 판본체 작품을 보면 둥글둥글한 필의와 세로획의 기필과 수필의 굵기에 차이를 주고 행기(行氣)를 넣은 협서를 하여 자신의 시각이 깊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4. 영남한글서단의 새 풍격을 제시한 自家書風期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청대 유희재(劉熙載)는 “글씨에는 정신이 들어가야 하며 정신에는 나의 정신과 다른 사람의 정신이 구별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신이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변해서 옛것으로 되는 것이오. 나의 정신이 들어간다는 것은 옛것을 변화시켜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유희재가 말한 나의 정신[我神]과 남의 정신[他神]을 구별해야한다. 아무리 훌륭한 고전이라도 지금의 나에게 있어 참고와 공부의 자료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나의 작품이 되지는 못한다. 오직 자기의 정신이 자신의 작품에 들어가야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2000년 이후부터 20여 년 동안 영남 한글서단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궁체에서 벗어나 한문과 한글을 혼용한 판본체류의 작품과 선생특유의 서간문형식의 한글글씨체를 구사하고 있다. 2002년도에 제작된 <사랑>은 자간(字間)과 행간(行間)을 의식하지 않고 한글과 한문을 섞어서 구성한 작품으로 한문이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려 보인다. 글자의 크기를 다르게 한다든가 획의 윤갈(潤渴)을 살려서 변화를 꾀하고 있다. 2006년 서울세계서예축제에 출품한 작품 <흑백의 진실>에서는 기필과 수필을 경직되게 하지 않고 천의무봉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2008년 히로시마교류전에 출품한 작품 <지혜>는 최근에 보여주는 판본류의 형상이다. 이렇게 개성이 담긴 글씨꼴에 대해 동강선생은 2003년 3회 개인전도록에서 “천진난만하고 구수한 글씨”라고 평한 바 있다. 바햐흐로 혜정체(蕙汀體)라고 부를 수 있는 글씨꼴들이 이제 무르익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발표한 <오늘 맑은 이 아침>과 <인연>을 통해 우리는 혜정체의 자연스러움과 개성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영남한글서예의 새길을 열고 있는 선생만의 독자적이고 농축된 서니(書美)가 대중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기를 기원드린다.
5. 대구한글서예를 이끈 60년을 넘어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선생이 걸어왔던 60년 서예가의 길은 그대로 대구의 현대 한글서예역사이기도 하다. 예컨대 2009년 창립한 대구한글사랑모임은 선생을 중심으로 류지혁, 강국련씨가 공동회장을 맡아 9년 동안 반석에 올려놓았다. 2010년 제1회 대구한글서예대축제를 개최한 이래로 김정숙 2대회장과 현재 3대 최민경 회장이 창립당시의 뜻을 계승하도록 밀알을 파종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인이 된 소헌 김만호 선생이 지도하던 봉강연서회 회원전에는 1968년 1회전부터 현재 56회 전시까지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2017년 봉강연서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묵연 60년 특별행사로 제50회 봉강연서회서전 및 학술발표회를 주관하였으며 생을 마칠 때 까지 앞으로도 계속 봉강연서회전에 참여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66년의 전통을 지닌 사단법인 대구경북서예가협회의 36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대구서단을 위해 봉사하였다. 그 동안 민간단체로 이어온 협회를 사단법인화 하였으며 영남서예대전을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3체부를 신설하였고, 난치병 학생들을 돕기 위해 협회에서 대구교육청에 1400만원을 기부하기도 하였으며, 대구한마당축제를 통해 대구서단의 융합을 도모하는 등 탁월한 리더쉽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대구문화방송과 함께 대구와 경북의 간이역 10곳에 MBC간이역 캠페인에 참여하여 간이역을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는데 앞장서기도 하였고, 2008년 대구시와 히로시마시의 우호친선을 위해 초대전에 참가하여 한인교포들에게 작품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1974년 서예연구실을 개원한 이래로 1980년 경북서예학원을 거쳐 현재까지 16회의 회원전과 다양한 전시 및 지도를 통해 수 백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여 오늘날 제자들이 대구한글서예계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아울러 작가로서 직접 휘호한 작품들이 전국에 산재되어 있다. 약 80여점의 석각, 현판 등의 제자(題字)한 작품은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한글서예역사에 남을 작품들이다. 각종 그룹전과 한국서학회전 등 비중있는 국내외 전시를 통해 해외에서도 선생의 작품에 대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2000년 이후 선생의 활동상은 화려한 수상으로 입증된다. 2012년 ‘자랑스런 중구 구민상’을 수상하였고, 2015년 대구를 대표하는 예술인을 선정해 대구광역시가 시상하는 ‘대구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2016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선정한 ‘예술문화명인 인정서’를 받았고, 2017년에는 대구경북서예가협로부터 ‘대구경북서예상’을 받았으며, 2020년에는 대구미술협회로부터 ‘서예대상’을 수상하였고, 2021년 대구 수성구청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업적과 예술적 성취를 인정하여 선생의 글씨로 ‘수성혜정체’를 선정하여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선생은 예술가로서의 길 외에도 주부로서의 길도 잘 걸어왔다. 서예가로서 활동하면서 시부모님을 40년 동안 모셔왔고, 10년 동안 소리 없이 병수발을 해왔다. 가족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도 소홀함이 없었기에 아이들이 성장하여 자기분야에서 제몫을 다하고 있다. 선생은 작가와 어머니로서의 두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부군과 불교의 영향이 컸다고 공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선생의 좌우명은 “머리에는 지혜가, 가슴에는 사랑이, 얼굴에는 미소가, 손에는 일이 있으라”이고, 서실에서 후학들을 지도할 때 강조하는 말은 “기능보다는 훈훈한 사람이 되자”라고 한다. 서예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서예는 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다.”라고 말한다. 이런 좌우명이나 원훈을 보면, 자신에게는 가을의 서릿발처럼 냉정하고 남에게는 봄날의 훈풍처럼 살고자 한 삶의 목표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서예술로 환치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이다.
선생은 이제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한글서예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대구지역에 일찍부터 이 분야에 천착하여 지나 60년 동안 지역서단의 한글서예 대중화에 공헌한 길이었다면, 앞으로의 길은 새로운 양식을 가진 한글작품을 남겨 우리서단에 공헌하는 길이 될 것이다. 불교와 대구에 관계된 글들을 모아 작품으로 꾸며보고 싶다는 소망을 펼칠 그 길은 평생도반과 함께 걸어가며 자신의 예도를 끝없이 가꾸어 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예술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고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움직임을 불러일으키며,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 우리가 전 세계적인 도전에 계속 직면하고 있는 지금, 사회 변화를 위한 도구로서 예술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특히 한글서예는 우리의 정서와 사상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최상의 예술분야로 그 어느 때 보다 대구한글서단의 원로로서 선생의 역할과 행보가 기대된다. 선생의 건승을 기원 드린다.
2023. 8. 7.(682)
日損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