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가 곧 보리'는 번뇌는 미혹하여 일어나는 나쁜 마음 작용이고 보리는 깨달음을 가리키며, 번뇌가 곧 깨침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번뇌의 본체와 보리의 본체가 원래하나라고 보며, 보리가 곧 번뇌요, 번뇌가 곧 보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번뇌는 끊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리가 보리, 곧 진리라고 합니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번뇌를 깨닫는 수단은 무엇인가요?
번뇌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와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은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본래 다르지 않다는 대승적 사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번뇌 자리에 보리가 있고, 생사 속에 열반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마경'에서 설하는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은 번뇌와 보리는 한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 번뇌의 자리에서 보리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사즉열반'은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생사로 인해 얻은 괴로움 때문에 고통스러운 생명 경애를, 깨달음을 통해 안온한 경애(열반)로 열어 나타낼 수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번뇌즉보리'와 '생사즉열반'은 번뇌에서 보리가 피어나고, 생사 속에 열반이 있다는 의미로, 선사의 가르침에 따라 사용됩니다. '화엄경'의 번뇌론은 번뇌를 생사윤회의 뿌리라고 선언했고, 밀교경론에서는 번뇌의 종성이 보리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화엄경의 번뇌론은 어떻게 해석된다?
번뇌를 뿌리라고 선언하는 다른 경전은?
이 가르침이 다른 종교에서 어디서 사용되나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각을 이루신 것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인연생기법을 직관하시고 부처가 되셨습니다. 깨치고 나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은 그대로 있고, 도만 깨칠 뿐이었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세상이 크게 변하는 줄 압니다.
부처님이 도를 얻으시고 세상을 바라보니 나무는 나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도를 깨치기 전이나 깨친 후나 똑같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도를 통하고 난 후부터는 더 이상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부처로 보이더라’ 이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도를 통하기 전만 하더라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차별 있게 보았는데, 부처가 되고 보니 나와 똑같이 부처더라. 그러니 생사(生死) 따로, 열반(涅槃) 따로 있지 않다 이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천국과 사바세계가 분명히 나눠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생사와 열반이 같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도 공불이색(空不異色) 이라 하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물은 온도가 변하면 고체가 되기도 하고, 기체가 되기도 합니다. 기체, 액체, 고체로 모양이 변하기도 하지만 물을 떠나있지 않습니다. 물이 곧 얼음이고, 얼음이 곧 물입니다. 말만 있을 뿐 물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도 번뇌를 떠난 보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바세계를 떠난 열반세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공간을 나눌 때 여기가 사바세계고 저 세계가 극락세계라고 합니다. 왜 다르게 볼까요?
유식(唯識)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의지해서 일어난 생각으로 다르게 본다고 합니다. 잠재의식, 무의식 이것을 아뢰야식이라 합니다.
아뢰야식은 전생부터 쌓아놓은 업(業)덩어리가 안에 들어가 있다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나타나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체, 액체, 기체는 명칭만 있을 뿐이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덩어리인데 인간들이 잘난 것, 못난 것, 좋은 것, 나쁜 것, 과거현재미래를 나누어서 봅니다.
‘내가 지금 받는 고통은 과거에 나쁜 업을 지었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게 맞는 말일까요? 맞기도 하지만 틀릴 수도 있습니다.
아뢰야식을 의지해서 고통이 나타나는데 중생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중생은 욕망의 동물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욕구와 욕망을 버리면 ‘생사즉열반’이고 ‘번뇌즉보리’인데 욕망 때문에 둘로 나누어봅니다.
어떻게 하면 생사가 열반인줄 알 수 있습니까?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은 업을 닦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다고 닦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기도만 열심히 하면 그 분이 이끌어 간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끌어 가지 않습니다. 절도 하고, 주력도 하고, 참선 명상도 하고, 끊임없이 나란 존재를 관찰 하는 것입니다.
‘나를 끌고 다니는 이놈이 실체가 없다면 어떠한 인연으로 나타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영혼이란 놈이 상대방 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인연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을 빨리 깨치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공부하고 수행하는 종교입니다. 매달리기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천국이 정말 좋은 곳이라면 죽을 때도 즐겁게 가야 되는 것 아닌가요? 죽을 때는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여서 죽게 되지 않습니까?
불교에서는 무기(無記), 희론(戱論) 이렇게 말을 합니다. 무기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고, 희론은 ‘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천국이나 극락이 확실히 있다면 그걸 믿어야 하지만 믿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천국과 극락’은 정말 희한한 곳입니다.
해는 항상 떠있지만 지구의 자전에 따라 어두움이 있고 밝음이 있을 뿐이지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둡다’, ‘밝다’라는 것이 이미 머릿속에 고착되어 있어서 어두운 곳이 있고 밝은 곳이 있다 합니다.
‘생사즉열반’이고 ‘번뇌즉보리’입니다. 그러니 이 사바세계에서 즐기라 말씀 드립니다.
즐기는 사람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이 더디고 빠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으면 한 시간이 일 분처럼 느껴집니다. 마음에 부담 있는 사람과 있으면 시간은 더디게 흘러갑니다. 시간이 빠르고 늦음이 아닙니다. 시간은 항상 여여하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즐기고 사는 사람들은 하루가 여삼추(如三秋)입니다. 즐겁게 지내는 사람들은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고, 빈둥거리며 지내는 사람은 하루가 지루합니다. 그러니 자기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잘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즐기며 사세요. 즐기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생사가 열반이고 보리가 번뇌인데 한 생각에 따라서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고 무량원겁즉일념(一念卽是無量劫)입니다. 즐기려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못된 말을 하더라도 ‘내가 너에게 전생에 빚진 게 있는가보구나’ 이렇게 들어야 하는데, ‘내가 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고 살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저걸 어떻게 해버릴까’ 할 것 없습니다. 아니면 그만 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것이 아니야’ 하며 있는 그대로 보는 그 진실. 그것이 참된 불자라 말씀 드립니다.
6월 10일 일요법회에서의 회주스님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