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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묵상글 ( 부활 제3주일. - 부활의 증인이 되기까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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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부활의 증인이 되기까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시고,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도들이 그 증인이 된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사도들이 증인이 될 자격이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증인인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증인이 되기엔 어림없는 겁쟁이이고 의심쟁이입니다.
증인이 되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너무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 착각을 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것처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조차도 유령으로 보는 겁니다.
증인이 되려면 또한 한 점 의혹이 없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라고 꾸짖으십니다.
이런 그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갖은 애를 쓰십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당신의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의혹에서 벗어나라고 구운 고기를 그들 앞에서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이 노력이 즉시 사도들에게 통했을까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도들이 즉시 문을 열고 증언하러 나갔던가요?
일거에 모든 것을 다 깨닫고 주님 부활을 완전히 믿게 되었던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한 자리에서 그리고 말씀 한마디로 깨닫게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무릇 모든 깨달음은 인생의 여러 과정을 거쳐 얻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교만 때문에 자신을 과신하고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그래서 지금까지 바보처럼 살았고, 잘못 살았고, 헛똑똑이로 살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한 것이 실패로 끝났을 때입니다.
욕망과 욕심이 좌절되고 불행해진 뒤에 좌절감과 허무감이 덮칠 때입니다.
교만 때문에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안다고 착각하다가 큰코다친 다음입니다.
자기 한계를 모르고 내 힘으로 승리하고 성공하려다가 패배하고 실패한 다음입니다
이런 다음에야 진리와 진실을 깨닫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되는데,
이런 다음 결정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은 역시 성령이십니다.
요한복음의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신 다음 성령을 보내주실 텐데
성령께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일리(一理)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주장을 우리가 긍정해줄 때도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라고 얘기해주는데
이 말은 네 말은 ‘말도 안 돼’ 보다는 긍정해주는 것이지만
실은 네 진리는 모든 진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인데 우리는 종종 하나를 아는 것일 뿐인데
마치 모든 진리를 알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려면 이런 교만의 착각이 깨진 다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이신 주님 안으로 이끄셔야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성령을 받고 먼저 깨달은 사도들이
이제 증인이 되어 우매한 군중에게 증언을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무지를 아는 것,
무지를 깨는 것,
진리를 아는 것,
진리를 증언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과정이요 완성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물론 이것뿐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 곧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서간은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깨달음의 완성이요
증언의 완성임을 깨닫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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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범죄학자 조지 켈링과 정치학자 제임스 윌슨이 명명한 ‘깨진 유리창 이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리창이 깨진 차를 방치하면 이곳의 법과 질서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로 읽혀서 강력범죄로 확산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을 사회학적으로만 볼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 각자의 마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깨진 유리창처럼 형편없어지면 어떨까요? 점점 더 자기 마음의 상태가 무너지고 맙니다. 자기 비하가 계속 심해지면서 자존감 하락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의 수리는 얼른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또한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배가 갑작스럽게 아프면 어머니께서 “엄마 손은 약손”이라면서 배를 문질러 주셨습니다. 배를 쓰담는 그 손이 제 배의 아픔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나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손이 필요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나의 ‘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보면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깨진 마음이 아닌 아주 건강한 마음이 되어 이 세상에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은 다락방에 문을 걷어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들립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기뻐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숨어 있는 자기들 모습이 떳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불안한 마음, 완전히 깨어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마디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놀람에 자기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까지 보여주시면서 유령이 아닌 육체의 부활임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십니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부활임을 그들 앞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또 깨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프고 깨진 마음을 고치기 힘들지만, 전지전능하시고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충분히 정상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분이기에 우리는 주님 말씀처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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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너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콩도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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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성전 문 곁에 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한 다음, 솔로몬 주랑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영광이 드러나셨음을 선포합니다. 곧 앉은뱅이의 치유를 예수님 부활의 징표로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온 세상의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주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여전히 우리를 위해 함께 하고 계심을 일깨웁니다.
<복음>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깨우치시고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를 매일 모시면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그렇습니다. 눈도 귀도 마음을 열어주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당신 말씀의 영으로 하여 그 통로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외적인 눈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마음을 열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막달레나 마리아도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눈’을 떠야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면’ 곧 부활입니다. 눈이 열리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부활의 신적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당신 빛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을 열어 주소서.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 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고, 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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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허물은 기억하지 않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 허물과 잘못을 없애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품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옛말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두지 말고 혹 새기려면 모래에 새기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돌 판에 새겨 잊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빨리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되씹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당신을 내맡기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구세주라고 생각했건만 어찌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그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 불똥이 튈지를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자들도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과거의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당신을 유령을 보는 줄로 알고 놀라며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길에서 겪은 일, 즉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 풀이를 해 주실 때 가슴이 뜨거워졌던 일,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체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내로 참아 주시며 눈높이 사랑, 맞춤 사랑으로 마음을 열어주시며 일깨우시는 예수님을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의 말씀 전례 안에서 주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성찬 전례를 통해 마음 안에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체험을 합니다. 따라서 자주, 정성껏 미사 참례를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니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왜 몰라봤을까요? 예수님께서 누누이 예언한 바대로 되살아나셨는데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무엇으로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으면 아직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허물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를 평화와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푼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여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이 행한 방법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은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증거하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마땅히 선포되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지금 삶의 자리에서 나의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해져야 합니다.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하고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옛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제발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기억하고 남의 허물은 잊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의학, 신학, 법학, 수학, 천문학등 다양하게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따라 그의 묘지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오른쪽 강도에게 주신 용서(구원)를 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용서받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용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용서를 얻어야 하고 또 그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의 허물을 기억하기 전에 주님 앞에 나 자신의 흠 없는 삶을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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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2024년 4월 2일에 ‘산티아고 꼼뽀스텔라’로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신문에 성지순례 안내 광고를 냈습니다. 40여명의 순례자가 신청했습니다.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산티아고’는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도 산티아고 순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다른 순례와는 달리 산티아고는 보는 순례가 아니라 걷는 순례입니다. 매일 3시간 이상을 걷기에 큰 어려움 없이 순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제게 산티아고 순례는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2월 13일에 인사이동이 있었고, 저는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의 소임을 마치고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새로운 소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는 새로운 임지로 떠났습니다. 그동안 준비하였던 산티아고 순례는 후임 신부님이 가기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아쉬움을 아셨는지 새로운 방법으로 산티아고에 갈 기회를 주셨습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는데, 전임 신부님이 인사이동으로 한국으로 갔습니다. 자연스럽게 제게 성지순례를 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새로운 본당으로 온지 몇 달 되지 않았기에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님이 다녀와도 된다고 하였고, 전임 신부님이 같이 가기로 했었기에 저도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주로 성모님 성지를 다녀오는 것인데, 그 길에 ‘산티아고’ 순례도 있었습니다. 온전히 산티아고 순례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제게 산티아고 순례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릴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없다.’ 이는 시간은 흘러가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아이는 소년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노년이 됩니다. 저는 이제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행복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친구를 만나 기억과 추억의 한 점이 됩니다. 이것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머무는 우리의 삶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은 ‘순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릅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축제’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흘러간 물로 다시 방아를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에서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다시 한 번’이라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회개와 희망이 만나면 ‘기회’는 현실이 됩니다. 교회의 전례는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절이 매년 돌아오듯이 성탄과 부활은 매년 돌아옵니다.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냅니다. 저는 2024년 ‘부활’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맞이했습니다.
신앙인들은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순환하는 시간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회개하고 기쁜소식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의 강을 건너서 있는 먼 미래가 아닙니다. 부활은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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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활 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이렇게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의 번민과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려는 주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웅크리고 있는 제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하나의 제자들을 위한 도움은 바로 물고기를 드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제자들과 하시던 대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제자들 마음속 깊숙이 자리한 공포를 없애기 위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기쁨을 순수한 기쁨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주님과 음식을 나누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하루의 햇살 안에서 미사 안에서 특히 평화의 인사를 통해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일상에 함께 하십니다. 특히 우리가 의미 없게 생각하는 지극히 평범함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런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실까요?
평범함 안에 비범함이 들어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평범함 안에, 밥 한술 뜨는 그 평범함 안에 비범함이 들어있습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특별한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그렇게 평범함으로 만나셨듯이 우리와도 우리 평범함 안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밥 먹고, 숨 쉬고, 웃고, 떠들고, 하는 그 모든 곳에서 말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그리고 우리 평범함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을 찬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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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의 유혹
저는 갑곶순교성지를 지키는 사제입니다.
매일 저녁 6시가 되면
이곳을 혼자 지킵니다.
어젯밤의 일입니다.
잠자리에 들려던 밤 11시쯤 누군가 부릅니다.
분명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고
홀로 있는 그 시간인데 말입니다.
또 누군가가 저를 부릅니다.
주방에서 부르는 듯합니다.
아…. 라면이었습니다.
아…. 너무 강한 유혹이었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혹과 시련을 맞이합니다.
어제의 저처럼 인내와 기도로 잘 넘기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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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복음을 통해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이탈리아의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은 아주 유명한 법률가로 그가 맡은 사건은 언제나 승소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작은 사건에 패소한 후 명성과 화려했던 삶이 사라져버리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실패는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절망의 순간 하느님을 떠올리고 주님의 위안으로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분이 바로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 수도원(Congregatio Sanctissimir Redemptoris)”을 설립한 신부님이십니다.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깨달음을 주십니다.
시련은 아픔입니다. 그러나 아픔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면 아픔의 의미가 없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함으로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 하늘나라의 영광이 모두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스승을 잃은 아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들 앞에 나타난 그분을 보고도 믿지 못한 그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함께 밥을 드시고, 성경 말씀을 들은 후 비로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나의 삶이 힘들 때는 주님을 원망합니다. 경악할 만한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면 더욱 비판적입니다. 그 분께서 일부러 사건을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알지만 혼란 속에 침묵하고 계신 주님을 원망하고 부정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련과 기쁨에 담긴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나를 깨닫고 주님의 인도로 새로운 영혼, 고귀한 삶으로 가던 길을 재 정비해야 합니다.
실패를 당하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실패와 고통 모든 순간에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조차 믿지 못하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믿음이 강해지자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보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믿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통해, 복음을 통해 주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미사 중에, 성경 속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기도 속에서 주님을 보십시오. 무엇보다 혼자 하는 기도 속에서 가식을 버리고 나의 모습, 진실된 모습 그대로 주님과 대할 때 주님과의 친밀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매일 독서를 통해 주님을 더욱 깊이 깨달으십시오.
묵상을 통해 주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생활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삶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께서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주님께 모든 것을 위탁할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십시오.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은 슬픔을 느껴보았습니까?
2. 고통 끝에 평화를 경험해 보았습니까?
3.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며 주님의 뜻을 찾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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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삶, 회개의 삶, 증인의 삶-
“평화가 너희와 함께!”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주리이까?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소서.”(시편34,7)
2008년도 시작된 왜관수도원 계간지 “향기로운 길, 분도”가 16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니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2012년 봄호 18호에 실린 ‘산중한담(山中閑談)’란 ‘문(門)과 벽(壁)’이란 글이 앞부분을 나눕니다. 벌써 12년전 글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창문 좋은 방이 제일이다. 내 집무실이나 성당 내 자리에 지극히 만족하는 것은 좋은 창문 때문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창밖 풍경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그림도 없다. 굳이 그림이나 꽃꽂이가 필요없는 성당이고 집무실이다.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행복감을 느낀다. 창밖의 푸른 하늘을 그대로 하느님 마음 같기도 하고 얼굴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창밖을 보며 써놓은 시도 부지기수다. 예전에 써놓고 흡족해 했던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그림,사진...
대부분 군더더기
쓸데없는 짐
이 보다 더 좋은
임 만드신
창문 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4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자다.”
12년전 그대로의 환경에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문과 벽’이란 위 글은 34년전 1990년 부활 제2주일 강론 제목에서 착안한 글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라는 강론이었는데 제목의 신선함 때문에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강론이요, 그 이후로도 참 많이 생각했던 주제이고, 오늘 다시 사용하는 강론의 제목입니다. 영적 삶의 여정에 중요한 세요소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만남의 삶입니다.
만남들로 이뤄진 우리의 삶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두번의 만남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매순간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니 우리 영적 삶은 말그대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주님 부활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입니다. 지난주는 요한복음이었는데 오늘은 루카복음입니다. 분명 문은 닫혀 벽뿐이 방이었을 텐데 제자들의 공동체에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입니다. 임재(臨在)하니 이 말마디를 너무 좋아하신 지금은 고인이 된 문세화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제가 대구가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만남과 더불어 벽은 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평화입니다. 주님의 만남과 더불어 선사되는 평화와 더불어 제자들의 절망과 슬픔, 두려움에 닫혀 벽같이 되었던 마음도 활짝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평화와 더불어 기쁨의 선물이요 닫힌 벽같은 마음도 활짝 열린 평화의 문, 기쁨의 문이 됩니다.
둘째, 회개의 삶입니다.
만남과 더불어 회개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부활의 증인이 된 베드로의 열화같은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도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이제, 형제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요, 무지보다 인간에게 큰 걸림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이나 비극은 바로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탐욕, 교만, 질투 모두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마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인간이라 정의할만 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 역시 인간 무지를 반영합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은 주님과의 만남에 이은 전적인 회개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게 돌아서는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죄는 지워지고 무지에서 점차적인 해방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무지의 벽은 변하여 지혜의 문이 될 것입니다. 온갖 내적 벽이 변하여 문이 되는 것 역시 회개의 은총입니다. 새삼 회개의 선택, 훈련, 습관을 위해 평생 매일 바치는 영성훈련이 공동체가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증인의 삶입니다.
사도들처럼, 성인들처럼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이렇게 살도록 해줍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이자 사도들이 참 좋은 주님의 증인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부활의 증인, 회개의 증인, 용서의 증인으로 이웃에 활짝 열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베드로의 힘찬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인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살리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얼마나 장쾌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감동적 고백인지요! 예전에 주님을 부인하던 그 나약하고 겁많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샘솟는 용기의 사도,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 베드로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 때, 교황님의 가르침의 주제도 용기(fortitude)였습니다. 현명(prudence), 인내(patience,) 정의(justive)에 이은 용기(fortitude)란 주제였습니다. 은총으로 유지되는 용기가 날마다 우리를 도우며 해결을 강화하고 장애를 극복함을 강조했으며, ‘용기없는 신자들은 무용한 신자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 역시 부활의 증인이자 용기있는 사도로써 베드로의 진짜 후계자답습니다. 부활의 증인, 요한 사도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누구든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에게는 진리가 없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그분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의 계명을, 말씀을 지키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삶, 회개의 삶, 증인의 삶에 항구할 때, 말그대로
무지의 벽은 지혜의 문으로,
두려움의 벽인 평화의 문으로,
미움의 벽은 사랑의 문으로,
슬픔의 벽은 기쁨의 문으로,
절망의 벽은 희망의 문으로,
불신의 벽은 믿음의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바로 “벽이 변하여 문으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의 모든 내외적 벽들이 활짝 열린 하나의 문, 주님의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은 벽이 없는 온통 문이신 분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10,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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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증인의 바람>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앞선
당신 계시어
여기
나 있듯이
뒤선
나 있으니
여기
당신 계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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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부활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도 해당됩니다.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당신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는 증인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자기복음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남을 복음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복음의 사람의 되어야 하듯 자신 스스로가 먼저 죄의 용서를 받아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체험이 있어야 또한 타인을 용서하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는 회개로 이끄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갈릴래아 첫 전도에서 하신 말씀인 ‘회개와 복음’의 선포가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 제자들에게 거듭 재확인 됩니다. 회개와 복음의 선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핵심 메시지이며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온세상에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와 복음의 선포’는 그리스도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우는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주님의 메시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기에 수도회 창설 초기에 다른 이들에게 불리워지기를 바랐던 수도회 이름은 ‘아시시의 회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성인은 죽음을 앞둔 유언에서 먼저 언급한 것은 회개입니다. 이 회개체험이 곧 복음의 체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죄를 인식하여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회개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대교부들이 얘기했듯이 죄는 죽음이 원인이 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를 통한 죽음의 상태가 칼라너가 얘기한 것처럼 영혼의 시작이며 인간이 자유로이 자신의 현존재를 전체적으로 완성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잘못이나 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바라보기 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보게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뵙고 나서야 자신의 비참함과 불순함을 고백합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회개체험을 하게 됩니다.
초기 사막교부들이 바라본 것처럼 죄를 ‘사랑이신 하느님께 입혀드린 상처’로 보게 될 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자기비관이나 절망이 아닌 사랑과 희망의 통회를 하게 됩니다. 이때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복음의 체험이고 이 복음은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됩니다.
팡세가 얘기한 것처럼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믿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사람들일 수가 있으며 오히려 바리사이파처럼 자신들이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는 역겨워하시며 죄인들일 수가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죄’에 대한 묵상을 통해 죄보다는 부활하신 사랑의 주님을 더욱 바라보도록 합시다.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그 죄를 판단한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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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브와-시뇰-이삭에서 피흘리는 성체
벨기에-1405년
1405년 성령강림절 전 금요일에 패터 오스트 (Peter Ost) 신부가 접전한 미사
쟝 뒤 브와는 마지막 세 번째 환영을 본 후 이번에는 쟝의 신부인 피에르 오스트 (Pierre Ost) 신부가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이 피에르 오스트 신부는 브와-시뇰-이삭 마을이 속해 있는 오트-이트레 (Haut-lttre)의 신부였다.
“피에르, 일어나라. 그리고 곧 브와-시뇰-이삭으로 가서 거룩한 십자가의 봉헌마사를 집전하여라!"
그 명령은 밝고 분명하게 울려왔다. 오스트 신부는 이 날 이트레에 있는 자기 관할 성당에서 기념제를 거행하려고 했으나 그 신비스러운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신부는 복사와 함께 숲을 지나 브와-시뇰-이삭으로 급히 갔다.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몇 명의 신자들이 재빨리 성당으로 몰려왔다. 신자들 중에는 몇 시간 전에 환영으로 중앙 제대 위에 있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는 분을 보았던 독실한 신자인 쟝도 있었다.
피를 흘리는 성체조각 하나가 성체포를 붉게 물들였다. 성스러운 미사성제가 시작될 때 오스트 신부는 당시의 전례에 따라 성체포를 세로로 제대 위에 펼쳤다. 그의 얼굴 표징은 매우 진지하였고 그의 경건함은 여느 때보다 한층 각별했기에 곧 신자들의 눈에 띄었다. 그는 미사 도중에도 계속해서 자기에게 이 미사를 거행하도록 재촉하신 그 신비스러운 목소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가 성작을 봉헌할 차례가 되었을 때 성체포를 완전히 가로와 세로로 펼쳤고 지난 화요일 미사 때 소홀히 해서 성체포에 그대로 놓아 둔 성체조각 곧 온전한 크기의 성체의 100분의 8 정도 되는 성체조각 하나가 성체포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바로 그 화요일에 구세주께서는 당신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아 그렇게 많은 상처를 입힌 무심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쟝 뒤 브와에게 나타나셔서 그렇듯 감동적으로 한탄하셨던 것이다.(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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