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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8: 22-24
그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총체적으로 말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받는 일이 최우선하고, 그 다음은 기도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라고 보아서 오늘 낮과 밤은 기도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이제 그 도시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 부분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1. 본문 22절은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입니다.
1) 모세는 그 사람들이 먼저 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은 그들이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아브라함을 떠나갔다고 전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께서는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서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흔히 헤어질 때에 금방 떠나지 않고 무언가 서로 한 마음으로 할 말이 있거나 아직 무언가 다하지 못한 자세로 떠나기를 머뭇거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그 여행을 언급할 때 그는 예의를 갖추고 그 사람들이라는 칭호를 천사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으로 보기는 사람들의 모양이었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충분히 그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보통 멸망될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고 계시는 그런 외적인 상징들을 그분께로 우리가 직접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고 방해하는 것으로 허용한다면 우리는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이 잘못을 범하기 쉬운 존재들이며 그리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외적인 상징들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믿음의 판단으로 하나님께로 향하여 돌진해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분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경건히 자신을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여기서 간섭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논쟁으로 따져볼 생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본성에 매달리듯이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말이 그 자신의 큰 겸손과 온후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정말로 고백하는 것은 때로는 육신의 생각들로 빗나간 거룩한 사람들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평을 털어놓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은 그런 불평이라고는 전혀 없이 경건하게 하나님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전혀 비난 받을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마음의 애착입니다.아브라함은 그 애착하는 마음으로 소돔 사람들을 대표해서 그의 기도를 드리도록 강요받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소돔 사람들과 그밖의 도시 사람들보다는 자기 조카만의 안전에 관하여 그토록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으로 자신을 제재하고 있는 그가 과연 다른 엄청난 사람들의 멸망을 도외시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단 한사람만을 위해서 그렇게 부탁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위장을 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은 절대로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그는 정말로 그 다섯 도시들에 대한 공통적인 사랑에 압도되어 그들을 위해서 간구 하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갔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주의 깊게 헤아려 보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 다섯 도시사람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구출했던 자들이 이제 갑자기 모두 멸망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 서둘러 교전(交戰)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으니 그것은 마치 무가치하고 사악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여 자기가 무장하고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로 그는 적잖은 고통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최근에 구원받은 사실을 거역하는 사람이 그들 가운데 전혀 없다는 그 배은망덕한 사실을 믿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겠다는 말을 듣고 간단한 말로 그분에게 따진다는 것도 그로서는 정당하지 않은 자세였습니다.
3) 하나님만이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을 가장 잘 알고 계시며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형벌을 받아야 될지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이 묵묵히 복종(黙從)하지 않고 있는가?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냥 지나치고 계시며 나머지 사람들과 공통적인 멸망에서 하나님이 성급하게 잡아서 처리해 버리시는 의로운 사람들이 소돔에 몇이 있다고 왜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이 감동되었던 인간성의 감정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셨던 것입니다.
첫째는 사태가 진전함에 따라서 그는 사실의 전체적인 인식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는 위로를 얻으려는 순전한 목적을 위하여 절제와 복종하는 마음으로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멸망당한다는 말에 무척 놀랐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생각하기를 그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몇 명 정도는 정직한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안목과 생각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매우 자연스럽고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가 그렇게 철저하게 불우한 자들이며 모두 죄악에 버려진 자들밖에 없단 말인가? 하고 자문자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과연 용서를 받을 만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를 짐작해서 여쭈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형벌을 받지 않고 그냥 봐달라고 요구하는 일에는 너무도 경솔하게 행동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선한 행위를 보고 그렇게 해주시라고 요청했다는 것은 조급하게 취한 처사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거기에 의인 50명만 있다면 그곳을 멸망시키지 말아주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답변하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그 기도는 그 도시들을 징계하지 말아주시라고 하나님께 부탁할 만큼 확대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도시를 모두 깡그리 남김없이 멸망시키지 마시라고 간구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오 여호와여, 그 죄인들에게 무슨 형벌을 내리시든지 그래도 의인들을 위하여 그들이 거할 곳은 남겨 두시지 않으시렵니까? 거기에는 살아 남을 사람이 있을텐데, 어떻게 그곳을 그렇게 철저하게 파멸시키려고 하십니까? 그 남은 사람들이 거주할 땅은 남겨두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고 말한 듯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의로운 사람들과 섞여 있는 악한 자들을 하나님의 손에서 피하게 하려고 그렇게 원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은 전 민족에게 대중적인 형벌을 내리시는 중에도 그 멸망에서 남은 선한 사람들을 이 형벌에서 감면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 본문 23-24절은
“(23)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24)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입니다.
1) 먼저 이 부분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백성의 무리를 징계하실 때는 흔히 선한 사람과 타락한 사람들을 함께 똑같은 형벌로 포함시켜서 처리하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다니엘, 에스겔, 에스라와 기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의 나라에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겼으나 난폭스런 대소동이 밀어닥쳐 휘몰아 가듯이 그들은 갑자기 외국으로 유배(流配)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록되기를 “그들의 죄를 인하여 그 땅도 스스로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레18:25)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통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진노하신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마땅히 그것의 종말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구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소들이 발로 밟아서 쭉정이와 함께 뒤죽박죽이 된 곳간의 알곡을 농부들이 어떻게 골라내는가를 잘 알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성도들을 당분간 징치(懲治)하실 때 그들을 악한 자들에게서 농부들보다 훨씬 더 잘 구별해 내신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무가치하고 쓸모 없는 쓰레기 같은 자인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선한 성도들이 악인들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바로 그 사건에서 결국 하나님은 그분의 징계를 받고 고침을 받는 자들에게는 멸망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잠깐 동안 징계를 내리실 때 그들을 멸망시키시려 내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직 그들의 구원을 가져다 줄 약(藥)을 공급해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소돔의 최종적 멸망을 선언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에서 아브라함은 항상 그런 것이 아닌 예외를 여기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파멸이 의인과 불의한 자들에게 동일하게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악한 자들이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그들을 구해주시라고 부탁드렸다고 말하는 것에는 전혀 애매한 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몇몇 소수의 사람은 도외시하고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중적인 형벌들은 감면되고 있으니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인자하심과 부성애적인 눈길로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대답이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소돔 가운데서 의인 50명만 찾으면 그들을 보고 그 모든 지역을 멸하지 않겠다’ 라고 하신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여기서 항구적(恒久的)인 규칙으로 그분 자신을 구속하지 않고 계시며 그래서 그분이 흔히 좋게 여기시듯이 악인들과 의인들을 함께 형벌에 처하시는 것이 그분에게는 전혀 불법적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판하는 데에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런 면에서 언제나 똑같은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서 자유 자제로 결정하여 행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열 사람의 의인들을 보시고 소돔을 아껴두셨을 하나님이 예루살렘에게는 그와 같은 용서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거절하셨습니다(마11:2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기서 지금 자신을 어떤 필수성 밑에 매어 놓으시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부패되지 않은 곳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한 도시를 멸망시킬 때에 경솔하게 기분 내키는 대로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시려는 것입니다.
2) 이제 아브라함의 기도는 우리들의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1)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의사(意思)를 물어보는 것 뿐 입니다. 한사코 자기 요구대로 해 주시기를 원하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아(自我)를 포기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는 자는 자기 평안과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 중심하고 살 때에는 끊임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일이 안되어도 그 환경에서 기뻐할 줄 알아야 됩니다.
(2) 아브라함의 기도는 의(義)를 따라 갚아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시기에 천국의 구원을 입혀 주실만한 의가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가 받은 그리스도의 의(義)입니다. 그것을 받는 방편(方便)은 믿음입니다. 믿음 있는 증거는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되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마5:6).
(3) 아브라함의 기도는 남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의인들의 구원을 위함도 사실이지만, 소돔 고모라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 오심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라고 한 말씀(24절)이 그것을 뜻합니다. 남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쉽게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기도하지 않는 것을 성경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삼상12:23). 그런 기도가 쉽게 되어지지 않지만 주의 은혜를 입고서 힘쓰면 됩니다.
모든 좋은 일들은 힘쓰지 않고 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좋은 일이든지 힘쓰면 처음에는 잘 안 되던 것도 후에는 순조롭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깨달아 바로 알았을 때에 힘쓰므로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신 방식이요, 하나님의 법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를 “쳐 복종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9:27). 우리 스스로를 살펴 보아도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 입니다. 그리고 교회며, 교단이며, 나라의 상황과 세계의 현상도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실제로 기도해야 할 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