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베며 마음을 닦다
산자락에 낮은 봉분들이 누워 있다. 오래도록 사람의 손길을 기다렸던 풀은 허리까지 자랐고 덩굴은 나무와 봉분의 경계를 흐려 놓았다. 몇 사람이 예초기를 메고 풀숲으로 들어선다. 기계 소리가 적막을 깨자 길게 자란 풀이 차례로 쓰러진다. 누군가는 봉분 가장자리를 다듬고, 누군가는 베어낸 풀을 걷어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숨어 있던 봉분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벌초의 계절이다.
벌초는 단순히 풀을 베는 일이 아니다. 산 사람과 떠난 사람이 한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의식에 가깝다. 말이 없는 무덤 앞에서 우리는 오래전 사람을 떠올린다. 얼굴이 선명한 이도 있고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이도 있다. 그러나 풀을 베고 봉분을 어루만지는 동안 그들의 시간은 잠시 현재로 돌아온다. 사람은 떠났지만 기억은 풀처럼 다시 돋아난다.
예초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풀냄새가 짙게 올라온다. 금방 베어진 풀에서 나는 냄새는 이상하게 어린 시절을 불러온다. 어른들을 따라 산소에 올라가던 날, 풀밭에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던 풍경,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조상의 이야기를 듣던 시간이 생각난다. 그때는 왜 해마다 산에 올라 풀을 베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 따라갔을 뿐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 일이 한 집안의 기억을 이어가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오늘의 걱정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지금의 성공과 실패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마음을 쓴다. 그러나 무덤 앞에 서면 생각이 달라진다. 한때 저 봉분 아래 잠든 이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으며 부모였고, 자신의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이었을 것이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다투며 수많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봉분은 말없이 인간의 시간을 가르친다. 우리가 그토록 붙잡으려 했던 것들이 결국 얼마나 오래 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돈도 명예도 지위도 이곳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느냐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묘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삶이 겸손해진다.
벌초를 하던 사람들이 잠시 손을 멈춘다. 땀을 닦고 물을 마신다. 누군가는 봉분 앞에 앉아 음식을 놓고 두 손을 모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숲속을 지나간다. 떠난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지만 침묵이 반드시 부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답을 듣기 위해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풀은 참 부지런하다. 지난해 그렇게 깨끗하게 베었는데 어느새 다시 무성해졌다. 사람이 찾아오든 말든 풀은 자라고 계절은 지나간다. 자연에는 망각도 애도도 없다. 봄이면 싹이 나고 여름이면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마르고 겨울이면 땅으로 돌아간다. 그 질서 앞에서 인간의 삶 역시 하나의 계절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벌초는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삶을 생각하는 일이다. 무덤을 바라보며 우리는 오히려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걸을 수 있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손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죽음을 의식할 때 삶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이 귀해진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 많은 것을 미룬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다음으로 미룬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바쁘다는 이유로 뒤로 미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일조차 언젠가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덤은 말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언젠가’가 무한하지 않다고.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때 전하고, 함께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한다고.
풀을 베어낸 봉분은 처음보다 훨씬 단정해졌다. 무성했던 잡초가 사라지자 둥근 선이 드러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마음에도 벌초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안에도 오래 묵은 풀들이 자란다. 미움이라는 풀, 후회라는 덩굴, 욕심이라는 잡초가 마음을 뒤덮는다. 처음에는 작은 감정이었는데 방치하면 어느새 마음의 주인처럼 자리를 차지한다.
마음의 잡초는 예초기로 벨 수 없다. 스스로 들여다보고 하나씩 걷어내야 한다. 오래 품었던 서운함을 내려놓고, 지나간 잘못을 용서하고, 필요 이상으로 움켜쥐었던 욕심을 조금씩 비워내야 한다. 그것은 산소의 풀을 베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다. 풀은 베어내면 쓰러지지만 마음속 미움은 베어냈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다시 돋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돌보는 일도 벌초처럼 반복되어야 한다. 한 번 용서했다고 영원히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비웠다고 욕심이 다시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마음을 살펴야 한다. 어느 곳에 잡초가 자라고 있는지, 무엇이 내 마음의 길을 막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삶을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마음의 풀을 베어내는 일인지 모른다.
벌초가 끝난 산소는 조용하다. 둥근 봉분 사이로 햇살이 내려오고 주변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조금 전까지 예초기 소리로 가득했던 산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적막을 되찾는다. 사람들은 도구를 챙기고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한다. 우리는 떠나지만 봉분은 다시 그 자리에 남는다. 그리고 다음 계절을 맞을 것이다.
해마다 풀은 다시 자랄 것이다. 사람들도 다시 찾아와 풀을 베고 떠난 이를 기억할 것이다. 그 반복 속에 인간의 시간이 이어진다. 기억은 거창한 기념비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먼 길을 찾아와 무덤의 풀 한 포기를 베어주는 일, 꽃 한 송이를 놓아주는 일, 이름을 한 번 불러주는 일에도 한 사람의 생은 이어진다.
산을 내려오며 뒤를 돌아본다. 가지런해진 봉분들이 햇살 아래 조용히 누워 있다. 죽은 자의 집을 다듬고 내려오는 길인데 이상하게 마음은 오히려 맑아진다. 오늘 내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많이 가지는 것보다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 높은 곳에 오르는 것보다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한 사람으로 머무는 것. 그것이 어쩌면 한 생을 잘 살아낸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언젠가 우리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 사람이 된다. 그때 어떤 이름으로 남을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결정한다. 그러니 오늘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하고, 조금 덜 미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한 번 더 잡아야겠다.
산소의 풀을 베러 갔다가 나는 내 마음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바라보고 돌아온다. 벌초는 떠난 사람의 자리를 깨끗이 하는 일이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다시 가지런히 세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