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위고 Victor Marie H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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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기상천외한 인물이었다.
쾌활하고 호탕한 성격이었고 색정광으로도 이름이 자자했다.
나이 80살 먹어서도 메이드들이나 여러 여성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사실 동갑내기 친구인 알렉상드르 뒤마나 명탐정 비독도 똑같은 면이 있었다. 셋 다 돈도 많이 벌었고 호탕한 성격에 춤이나 여러모로 여자 유혹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장수하며 방대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이자 재능 넘치는 데생 화가이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정치인이자 만족할 줄 모르는 만인의 연인으로 ‘세기의 전설’이었다.
그의 삶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으며 급작스럽게 정치적 성향을 바꾸면서도, 인도주의적인 자신의 신념만큼은 충실하게 지켰다.
정치적이기보다는 이상주의적이었던 그는 ‘권력가’라기보다는 자유와 정의를 섬기는 ‘사상가’였다.”
1802년 2월 26일 프랑스의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여인이었다.
10살 때 코르디에 기숙학교에 입학한 이래,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되었던 위고는 이듬해 그의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
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기록해 두면서, 불과 11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문호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이다.
프랑스 문학사는 물론,
유럽 문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대표작은 뮤지컬과 디즈니 애니메이션 등으로 널리 알려진 빠리의 노트르담(노트르담 드 파리, 일명 노틀담의 꼽추).
이러한 문학활동으로 23살의 위고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의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 당시 반대파로 활동하여 국외로 추방되어 19년간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다.
망명생활은 결실이 풍부한 시기가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71년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가 가리발디의
당선 무효에 항의하여 사퇴했다.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 시기에는 파리에 남아 시민들과 함께 견디었지만 파리 코뮌 시기에는 브뤼셀에 머물렀다.
그후 파리 코뮌 추방자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브뤼셀에서도 추방당했다가 1871년 9월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마지막 소설 《93년(Quatrevingt-treize, 1874)》을 쓴 것도 이 시기이고,
이전에 썼던 여러 글을 출간하기도 했다. 1876년과 1882년에는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활동을 했다. 1885년 5월 22일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졌고, 시신은 프랑스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팡테옹 문서 참조).
하지만 위고의 성욕에 대한 집착이, 첫째 아내 아델이 친한 친구이던 평론가 생트 뵈브(1804~1869)와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하자 여성에 대한 증오가 생겨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위고는 다른 여성들과 여러 관계를 맺었으나 자식은 아델에게 얻은 자식 밖에 없었다.
(첫째 아이는 태어난지 3달 만에 사망.)
아델은 생트 뵈브와 사랑에 빠지자 가차없이
사랑을 찾아 떠났고
갓 태어난 막내딸 아델은 아내를 그리워한 위고가 그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후 위고는 자신이 쓴 연극 《뤼크레스 보르지아》에 나온 배우 쥘리에트 드루에와 사랑에 빠져 1833년부터 쥘리에트 드루에가 죽을 때까지 관계를 유지했다. 쥘리에트 드루에는 위고가 망명할 때도 동행했다.
당시 엄청나게 오래 83살까지 살다보니 막내를 빼고 모든 자식과 아내 아델과 연인 드루에마저도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는다.
드루에는 죽기 전에 편지로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을 곁에서 돌보고 싶어도 이젠 몸이 말을 안듣는군요. 먼저 가서 먼저 간 아이들과 같이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는 글을 남겨서 위고를 더 슬프게 했다.
위에 나온 것처럼 큰아들은 태어난지 3달만에 죽고, 둘째이던 큰딸 레오폴딘은 19살 나이에 사고로 물에 빠져 죽었고, 나머지 둘도 차례로 병으로 죽었기에, 위고가 죽을 당시 남은 건 막내딸인 아델 뿐이었다. 하지만 아델은 실연당한 뒤로 충격으로 23살 때 자살까지 기도했다.
겨우 목숨은 구했으나 실어증에 걸려 웃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며 그대로 65년이나 살았다.
그마저도 1872년에는 정신이상증세를 보여 43년은 정신병원에 지내야 했다.
그래서 손녀 잔느가 그의 마지막을 돌봤고, 유언으로 잔느에게 인삿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색정광이란 비난도 있던 위고지만, 자식들을 너무나도 아꼈기에 하나둘 먼저 떠나는 것에 대하여 슬픈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막내딸인 아델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다른 남자도 소개하고 산책이나 온갖 용하다는 의사에게 진찰도 했으나,
35년동안 단 한마디도 딸에게
어떤 말을 들을 수 없음을 슬퍼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심지어 딸은 아버지 장례식 때조차 말없이 그냥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나마 감정은 살아 있어서인지 말 대신 글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그렇게 아버지인 위고가 죽고나서도 말 없이 살다가 1915년 88살로 독신으로 눈을 감았다. 그래서 위고의 직계는 끊어지게 되었다...는 아니고,
둘째 아들인 샤를 위고의 후손들이 현재까지도 살아있어 직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아델의 이야기는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아델 H이야기'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랑에 집착하다 미쳐가는 이자벨 아자니의 광기 연기가 일품.
기네스북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자신의 책에 대한 반응이 궁금하여 출판사에 편질 보냈는데 큼직한 종이에 "?" 하나만 적었다고 한다. 출판사는 역시 세상에서 가장 짧은 답장을 해주었는데 답장은 "!" 위고가 "?(잘 팔립니까?)"라고 보내자 출판사가 "!(네, 잘 팔립니다!)"라고 보낸 이야기로 그 책이 바로 그의 불후의 명작인 레 미제라블이다.
덧붙여서, 반대로 이 세상에게 가장 긴 편지를 쓴 사람은 인도의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가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낸 편지로 교도소 안에서 썼는데 책으로 나온 세계사 편력이 바로 이 편지다.
한국에선 3권짜리 책으로 나왔는데,
150페이지에 달한다.
여담으로 조커의 모티브 중 하나인 괭플랭이 등장하는 웃는 남자도 이 사람 작품이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명언의 당사자.
작가로 크게 성공해 사회적으로 명망 높고 부유한 삶을 살았음에도, 특이하게 정치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현대로 비유하면 일명 '강남 좌파', '리무진 좌파'에 가까운 형태이다.
그것도 특이하게도 젊은 시절에는 오히려 모계의 왕당파 신념을 이어 받은 전형적인 근왕파 보수였던 반면, 나이를 먹어 가며 결정적으로 1848년 혁명과 프랑스로 몰려든 각지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며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레 미제라블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며,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황제가 될 당시 공화정을 지키겠다며 직접 무기를 들고 대항하기도 했다.
인생 늘그막에는 파리 꼬뮨으로 인해 당국의 추적을 받거나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비호해 주고 그들의 사회 재정착을 돕는데 큰 힘을 썼다.
정계에서도 당대 프랑스 국회 내에서 루이 블랑과 함께 좌파의 거두로 활약했으며, 저 멀리 프랑스의 멕시코 침공에도 반대해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자 프랑스군에 대항한 베니토 후아레즈에게 지지를 보냈다.
한가지 재미있는게 후아레즈가 전쟁에서 승리한 뒤 꼭두각시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를 처형할 당시, 빅토르 위고는 막시밀리안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후아레즈에게 요청했었다.
다만 막시밀리안 본인은 선량한 인물이었고 나폴레옹 3세와 멕시코 보수파에게 이용당한 면이 크므로 후아레즈에 대한 지지와는 별개로 위고가 구명운동을 벌인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후아레즈 본인도 개인적으로는 막시밀리안에게 호감을 가졌을 정도였으니까. 한편 미국의 일에도 관여하여 노예 해방론자 존 브라운의 사형을 반대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존 브라운은 그대로 처형당했지만.
결론을 내리면 빅토르 위고는 비단 문학적인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인 입지로도 19세기 프랑스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란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베트남의 신흥종교인 까오다이교의 성인이기도 하다아닌 게 아니라 자칭 진보 인사라는 양반들도 당대의 인종주의적 편견에 빠져 있던 시대에 위고의 휴머니즘은 식민지 피지배민들에게도 닿아서 베트남, 북아프리카등의 프랑스 식민지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했으며,
이들을 프랑스의 하인이 아니라 나름의 문명이 있는 문화 민족으로서 동등한 입장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프랑스 제국이란 체제 내에서 지위 향상을 주장했다는 시대적, 입지적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말이다.
여담으로 레 미제라블에서 동양의 퇴비를 매우 극찬한 바가 있다.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업고 파리의 하수구로 달아나는 씬에서 "우리 유럽인들은 이 아까운 자원들을 그냥 갖다 버리는데, 동양의 농부들은 이것을 활용하여 농사를 지었고, 그 덕분에 아시아의 경작지들은 천지창조 때 만큼이나 젊다!"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그후로도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동양식 퇴비를 비위생적이라고 덮어놓고 까던 것에 비하면 매우 선견지명을 가졌던 것이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위고가 집필한 희곡
Le roi s'amuse(환락의 왕)를 읽고 베르디가
오페라를 만든 것이다.
위고는 처음엔 자신의 작품으로 오페라를 제작한다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지만 정작 완성된 오페라를 감상한 뒤에는 자신의 원작보다 더 훌륭하다는 칭찬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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