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92
12월2일[연중 제3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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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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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program.cpbc.co.kr/tv/dailymissa/vod/79946/22000606327
[서울대교구 임현호 도미니코 신부(대치2동 본당 보좌)]
++(대림특강)++++
<마라나타! 주님을 기다리며... > 이정순 프란치스카 수녀님
https://youtu.be/1WsyAzhQ7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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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한 해의 끝자락에서>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 출신 몽골 선교사인 이호열 시몬 신부님께서 얼마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이 주관한 개발원조의 날 기념행사 때 영예로운 해외봉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올 여름 잠시 몽골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신부님은 마치 몽골 아이들의 자상한 친 아버지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몽골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몽골 아이들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신부님이기에 아이들은 하루 온 종일 신부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로 탈바꿈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원조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조가 인적 자원의 원조입니다.
하루하루 생사마저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분쟁 지역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혹독한 가난과 그로 인한 고통뿐인 세상의 끝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헌신하고 있는 수상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표로 두 분의 소감을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무뎌질 대로 무뎌진 제 마음을 크게 건드렸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인생을 좀 더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하던 끝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큰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지만 여기 오기를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이 오지의 전쟁터로 보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세상을 세우는 일이며 사람을 구하는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생애도 그곳 형제들을 세우고 구하는 일에 전념하겠습니다.
해외봉사 시작할 때 내가 뭔가 그들에게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제 큰 사랑과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들 사이에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 그들 사이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총의 선물인 ‘새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때입니다.
세상의 끝으로 나아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분들과 견주어 보니 그저 내 발밑만을 바라보며 나만을 위해 허덕이며 살아온 지난 삶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마지막 날에 저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메시지도 오늘따라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장 34절)
바오로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2~13절)
우리가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 마치 섬광처럼 다가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의 내 삶을 진지하게 한번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진흙탕처럼 흐려진 영혼의 상태를 진정시켜야겠습니다. 아직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다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좀 더 영적이고 좀 더 단정하고 품위 있는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좀 더 자주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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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근심 대신 찬양을, 걱정 대신 감사를!>
오늘 우리는 적당적당히, 두리뭉실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삶을 살기 위한,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족집게 강의를 해주고 계십니다. 말씀을 묵상해보니 연봉 수십억의 일타 강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3가지 장애물에 대해서 주의를 주십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방탕입니다. 무언가에 과도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정돈되어 있지 않고 심하게 흐트러진 상태입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만취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주(主)님이 자리잡고 있어야 마땅한데, 주님 대신에 또 다른 주님인 주(酒)님이 떡하니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니 삶이 늘 비틀거리기 마련입니다. 꼭 술에 취한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혹 거리나 우상에 푹 빠져 취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장애물은 일상의 근심입니다.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 일상 한가운데 현존하시며, 매사를 돌보시고 섭리하심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근심 걱정이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종합해보니 과도한 근심 걱정의 결론은 만취입니다. 만취의 반복은 우리를 방탕한 삶으로 몰고 갑니다. 그로 인한 무질서한 삶의 원인은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기도의 결핍입니다. 영적인 삶은 뒷전이고, 오로지 육에 함몰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은 즉시 무질서해지고 방탕한 삶으로 연결됩니다.
교회 전례력에 따르면, 오늘로서 한해가 마무리됩니다. 내일부터는 또 다른 한해의 첫 출발점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저무는 한해와 새롭게 시작되는 한해가 교차하는 참으로 의미 있는 하루입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나큰 은총과 축복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이런저런 근심 걱정 모두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리고 새롭게 맞이할 한해도 주님 섭리에 손길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며, 순간순간 주님 은총 안에 머물기를 희망하며, 근심 대신 찬양을, 걱정 대신 감사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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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가 쓴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산을 향해 날아가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산을 떠나면 죽을 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을 읽어보면 세상의 종말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상 종말이 어떻게 한 해의 시작과 어울릴 수 있는 복음이 될까요? 사실 하느님은 우리를 새로운 땅으로 초대하실 때, ‘고난의 역풍’을 이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전 것에 질리고 싫증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좀처럼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에서의 그 새도 이겨내기 힘든 역풍이 아니었다면 그 황량한 땅이 가장 좋은 것인 줄 알고 결코 거기를 떠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 역풍에 몸을 맡기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1959년에 세상을 떠난 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의 국보일 뿐 아니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이 사는 일본 동경의 고아원에서 자라나야 했습니다.
일본 아이들은 이 불쌍하고 나이 어린 우장춘 소년을 마구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자기책상 앞에 밟히면서라도 「피어나는 민들레같이」라고 써 붙이어 마치 자기를 일본인들이 자꾸 짓밟아주는 민들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민들레가 반드시 피어오르듯 자기도 꼭 성공할 날이 있을 것이라 믿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큰 뜻을 가지고 자라난 우장춘 소년은 세계적인 농학박사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세상에 짓밟히고 있다고 느낄 때, 그 때가 국경을 넘어야 할 때이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싫증이 나야 더 나은 세상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세상에 속해있을 때는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를 부르시고 계셨음을 지금은 알지만, 살아오면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돈 벌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던 것이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란 그리스도의 생애를 담은 10권짜리 책입니다. 그것을 5년 동안 읽고 났더니 복학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더 이상 강의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저를 역겹게 만들었습니다.
경영학을 했는데 이전과는 다르게 더 이상 돈 때문에 좌지우지 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서야 땅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부르시고 계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들으려 하지 않았던 바로 그 부르심이었습니다.
오늘 저희 성당에서는 개신교 목사님, 광주지역 노회장까지 하시다가 천주교로 개종하신 김재중 요셉 형제님의 대림피정 강의가 있습니다.
그 분이 젊으셨을 때 최연소 노회장(천주교로 치면 주교님과 비슷한 위치라고 합니다)을 하시며 박정희 대통령보다 연봉이 높아서 당시 1억 원을 넘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이 성모님을 그렇게 싫어하다가 성모님에게 오히려 한 방 맞으셔서 그 성모님을 미워하게 만들었던 개신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풍은 대단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개신교에서는 개종을 하자 모든 돈을 다 끊어버려서 몇 년 동안 거지처럼 사셔야 했고 굶는 날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리아론을 전공한 저까지도 배울 것이 많을 정도로 성모님에 대한 박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신학교에서도 마리아론이 사라져가는 이때에 여러 지역을 다니시며 많은 좋은 강의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고취시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그 기쁜 소식을 천사들이 알렸습니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우렁찬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고작 목동들 몇 명뿐이었습니다.
왜 베들레헴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 찬미의 노래를 듣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세상에 심취해 있어서 눈을 하늘로 들어 올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냥 세상이 재미있었던 것입니다.
학생이 창문 밖을 보며 딴 생각을 하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마치 구걸하는 장님이 동전 바구니를 들고 지하철 안을 돌아다니는데 모두가 스마트폰에 집중해 머리를 숙이고 그 사람에겐 관심을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느님은 하늘에 별을 뜨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별을 본 사람들은 동방박사들 세 명밖에는 없었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밝고 새로운 별을 보지 못했을까요?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 여유도 없고 또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그 세 명만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던 이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요? 그것은 김재중 요셉 형제님에게 물어보아도 똑같을 것입니다. 그런 역경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절대 자신이 전에 살던 곳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아마 요셉 형제님도 굶어죽으면 죽었지 다시 이전으로는 돌아가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이 행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신학교 들어온 이후로 다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국경을 넘는 고통은 정말 쉽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팬다. 거기다가 그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그들은 셋방살이 형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대학 교수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베토벤을 낳은 어머니는 베토벤이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11살 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 예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서른 살 때 음악가의 생명인 귀를 잃었습니다.
이런 역경 덕분에 그의 음악은 강한 주제를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 끝부분에 가서는 환희를 노래합니다.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대로 “괴로움을 뚫고 나가서 기쁨을 발견”한 것입니다.
베토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나이가 들고 성공할수록 깊은 신앙의 세계에 빠졌다고 합니다. 신앙이 그를 모든 파괴적이고 체념적인 불행의 조건에서 구출하여 높은 경지로 인도한 것입니다.
고난은 불행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신앙과 만날 때 가치와 행복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역경을 통해 (이전과 같으면서도)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육체를 지니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순결한 몸으로 아버지께 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베토벤이 자신의 장엄미사곡의 악보에 남긴 메모는 그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기도’라는 이름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와서 마음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신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신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내적인 평화와 외적인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드려야 한다. 기도! 기도!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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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피정 강의 중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께서 만난 장소는 ‘우물’이었습니다. 성서에서 우물은 미래의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모세와 십보라가 만났습니다. 이사악과 레베카가 만났습니다. 야곱과 라헬이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5명이나 있었다는 것은 사마리아를 지배하던 이민족의 숫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사마리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민족이 지배했던 사마리아였지만 구세주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 15)”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고,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정오’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인이 우물가에 가는 시간은 오후 늦은 시간입니다. 여인들은 우물가에서 정담을 나누기 마련입니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의 이야기,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는 이야기, 시댁에서 쫓겨 왔던 새댁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우물가는 사랑방이 됩니다. 우물가에서 동네의 소문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그 시간에 우물가에 가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정오는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왕으로 선포된 시간이기도 합니다. 군중 앞에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선포된 시간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오십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점점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점차 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예언자’라 부르고 나중에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죄인이었던 여인은 이제 마을로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죄인을 통해서도 구원의 등불을 밝히시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박해하였던 사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선포를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의 도구는 죄인이었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났던 은총이 고백성사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고백성사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죄의 사함을 받은 우리들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참된 예배, 참된 관계는 주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새로운 사도로 변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영이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느님께서 거처하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처인 우리를 끝까지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거짓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한 순간도 나를 잊지 않으십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으로 오시는 예수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시는 예수님. 나를 당신의 도구로 바꿔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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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34-36: 늘 깨어 기도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34절) 영원하신 임금님, 영혼과 육신의 의사이신 주님께서 만취와 방탕과 일상의 근심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다. 만취는 모든 것을 망치는 원인이다. 육신과 함께 영혼까지 약하게 하는 유일한 병이다. 술에 취해 살면 육신과 영혼이 파멸한다. 육신과 영혼이 한꺼번에 타락하는 것이다. 모든 지체가 약해지면서 손과 발이 말을 안 듣고, 혀는 풀리고 눈은 어두워진다. 정신 또한 망가져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심하면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술 중독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아직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애써 잊으려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당당히 버티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여간에 우리 인간은 언제고 어느 때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지금 당장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 있게, 기쁘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기쁘게 잘 만날 수 있으려면 평소에 죽는 연습을 잘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이기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죽는 연습이 잘 되어있다면,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이 세상 삶도 잘 마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이며, 우리는 그날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이겨내고 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항상 기도하는 자세와 함께 이루어갈 수 있다. 기도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들의 삶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아름다운 기도로써 바쳐질 수 있도록 한다면 진정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새기고 실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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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날’을 잘 대비하라고 단단히 이르십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구원 여정의 마지막 날이고, 그분의 나라가 완성에 이르는 때이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21,27) 때입니다. 이는 다니엘 예언자가 환시로 미리 본 장면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어제 제1독서)
‘사람의 아들’께서 행사하실 통치권은 놀랍게도 그분 나라에 속하게 될 백성의 권한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분과 같은 영광에 참여하며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통치권과, 온 천하 나라들의 위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리라. 그들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되고, 모든 통치자가 그들을 섬기고 복종하리라.”
연중 시기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그날’을 그려 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날이기보다 기쁨과 설렘이 충만한 날입니다. 새 도읍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과 어린양을 섬기며, 영원무궁토록 다스리게 될 날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2,1-5 참조) 다만 우리가 이 영광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마지막 날에 내려질 심판을 대하는 신앙인의 떳떳한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당신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고, 온갖 유혹으로 독한 술들을 빚어 우리의 정신을 흔들어 놓습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그날, 술에 잔뜩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지금부터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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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루카 복음의 종말론적 설교로 전례주년도 끝나고 이제는 대림 시기로 넘어갑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뒤로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음에 대한 루카의 권고에는 특별한 것, 곧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과 기도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서로를 지탱해 줍니다.
이 둘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 믿음과 희망으로 고무된 삶의 버팀목이요 반석입니다.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라고 콜로새 신자들에게 권고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기도는 믿음과 깨어 있는 희망을 지탱하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사람과 하느님의 만남과 대화를 지속시켜 줍니다. 따라서 기도는 개인과 공동체 삶 안에서 하느님의 시간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감성과 내적 성찰을 흐려 놓는 영적 해이와 나태를 물리치는 데 가장 좋은 해독제입니다.
또 기도는 세상 종말에 있을 큰 싸움을 예시하는 일상의 유혹을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깨어 있음과 깨어 있는 기도의 탁월한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은, 겟세마니에서 자고 있는 제자들과는 달리 고뇌에 싸인 예수님이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버지께 드리는 주님의 기도의 여섯 번째 청원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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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다니엘 예언자가 말하는 왕국들의 권세는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시리아 제국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모욕하는 짐승의 뿔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권능은 영원하며 이 세상의 패권은 멸망한다고 알려 줍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모욕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세상 끝 날에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멸망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상급을 받고 그분의 정의로운 심판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시기를 아는 것보다 그날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인간의 종말은 덫처럼 갑자기 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권세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우리의 종말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마치 종말이 없는 것처럼 앞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하고 깨달을 때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깨어납니다. 방탕과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 영원한 진리에 대하여 눈을 뜰 때 우리는 깨어 사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살아가지 않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찾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순간의 일을 소중히 여기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과 선행을 선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과 그 길이 무엇인지 늘 묵상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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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자아도취>
마약이나 술이나 쾌락이나 오락에 빠진 사람은 자아도취 상태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관만 있고 객관은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 우월감이나 열등의식으로 무엇을 선택하지 못하고 의존하고, 불안하고, 안락함에 빠져 자기 밖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무서운 것 없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어떤 질서도 무시하고 나 외는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라.” 이는 갑자기 덮치는 사건에 대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자신감, 우월감, 자기만족으로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살다 보면 정신없이 큰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지나친 애착심이 사랑인 줄 알고 자식을 위하여 부정하는 사람이나 자기 문제에 빠져 옆도 돌아보지 않고 문제에 허덕이는 사람이나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덤벙 되거나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먼저 가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람과 같이 됩니다.
오늘 세상의 종말이 오고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간다고 해도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일어난 일에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아무리 큰일이라도 정신만 차리면 해결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으려면 깨어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생각 안에 갇히지 않고 밖을 보고 자기를 떠나 남을 볼 줄 알게 됩니다.
자기 분노, 소리 지름, 과격한 행동, 자기 과시, 자기 자랑, 고집불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사물의 본질은 무한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인간은 사물에 대하여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도취에 취해 있는 사람은 자기는 능력자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무능력자로 보고 무시하고, 억누르고,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내가 무시하는 사람은 내 행위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살아 있습니다. 나의 작은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말고 오로지 사랑의 신비 안에 자비와 일치와 친교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당당하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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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늘 깨어 기도하여라>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를 말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둘째,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는 깨어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시간과 만남, 하는 일’이 우리 삶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지금 누구와의 만남을 이루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한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21,36)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ㅈ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살아갑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후회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유혹받으셨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시간을 모르니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6,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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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150년 뒤에도 살아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의학, 과학의 발달로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불가능함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마치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억울하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너도나도 서로 먼저 받으려고 합니다. 첫 번째 아이가 받는 선물과 마지막 아이가 받는 선물이 똑같은데도 말이지요. 선물은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빨리 되도록 먼저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뒤에 있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계속 보았고, 그들과의 만남이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원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봐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참 기쁨을 누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봐야 했습니다.
결국 죽음은 하나의 ‘문’이 아닐까요? 갓난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가 ‘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문’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문’은 더 의미가 있는 또 더 큰 기쁨이 있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세상으로 치면 12월 31일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지난해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맞이할지를 궁리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시기를 잘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마지막 날이 덫처럼 갑자기 닥치지 않게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열심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기쁨을 떠올리면서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나날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줄 압니다. 주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을 본받으면서 전례력으로 새해인 대림 시기를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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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을 살다>
루카 21,34-36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을 살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어제 너머
오늘을 살다
내일 앞서
오늘을 살다
어제와 내일
아우르는
오늘을 살다
끝날인 듯
오늘을 살다
첫날인 듯
오늘을 살다
끝날과 첫날
이어주는
오늘을 살다
오늘을 살아
늘 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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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정신을 차리는 것부터>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기 위해 적극적으로는 기도하라고 하시고, 소극적으로는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시며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으로서 특별히 세 가지를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방탕과 만취와 근심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방탕과 만취가 기도를 방해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근심이 기도를 방해한다는 것은 설명이 좀 필요할 것입니다.
근심한다는 것은, 우리 신자들에게는 기도할 것을 근심한다는 말이지요. 근심거리를 하느님 앞에 내놓지 않고 자기 안에서 끙끙거리는 것이요. 근심거리를 기도 거리로 만들어 하느님 앞에 내놓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을 별로 하지 않는 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세 가지 가운데 제게 문제가 되는 것은 술입니다. 그러나 술도 제가 먹되 만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기에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많이 먹지 않으니 괜찮다고 합리화하고 그래서 경계심을 품지 않으니 말입니다.
사실 술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만 제가 존경하는 어르신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은 신앙적으로 아주 열심하고 매일 말술을 드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이유는 그렇게 술을 드시고도 꼭 성당에 들러 잠깐이라도 조배하고 집에 가시고,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성당에 들러 집에 가신다는 점 때문입니다.
술 안 마시고 성당에 매일 들르는 분들보다 더 존경스러운 것이고, 술 마시는 제 입장에서는 더욱 존경스러웠지요.
그러니 술 자체가 아니라 술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경계심 없이 술을 마시고 저처럼 기도하지 않고 자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므로 술을 마시건 마시지 않건 관건은 오늘 마지막 말씀처럼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기도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끄지 않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가르칩니다.
그러니 썩어빠진 정신은 버리고 정신을 차리는 것, 곧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주님 오실 날이 한 달도 안 남았고,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하려는 의지와 마음이 물러지고 기도 정신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질락 말락 한다면 이제 경각심을 갖고 정신을 차리는 것부터 당장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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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6.27)
<마리아의 위대함!>
오늘 복음(요한19,25-27)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요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마리아와 제자와의 관계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결정적으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위대함'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Fiat voluntas tua."(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루카1,38 참조) 라는 응답으로 시작됩니다.
이 순명으로 마리아는 영원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한 생을 묵묵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지극한 겸손으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그 시신을 품에 안아 무덤에 묻으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위대함'이고, '우리가 신앙의 모범이신 마리아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공경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12월 첫 토요일에 드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에서 우리는 이렇게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
"하느님,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보잘것없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으시어, 구세주의 어머니로 삼으셨으니, 저희가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성실한 믿음으로 순종하며, 오롯이 하느님께 구원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본기도)
보잘것없는 마리아를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제 보잘것없는 나를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우리도 성모님처럼 "Fiat voluntas tua!"로 응답합시다!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성모님을 닮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성모 신심미사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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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jm3e-xp-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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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 34)
우리의 일상이
곧 우리의
인격입니다.
스스로
조심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깨어 기도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
곧 우리 일상을
어루만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러진 마음이
여물어지도록
헤아리고
다듬는 것이
자연스러운
마무리이며
자연스러운
성찰의
시간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스스로
우리의 삶을
파괴했던
방탕과 만취
일상의 근심을
반성합니다.
헛된 욕망으로
은총의 시간들을
탕진했던
지난 시간들을
봉헌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것에서 우리가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들을 만납니다.
망설임을
치유하는
깨어있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악의 끝으로
가려는
우리의 손을
잡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우리의 모든
어리석음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어김없이
찾아오시고
어김없이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일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일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봉헌합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하는 힘은
일상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늘 스스로
조심하고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을
멈추고
깨어 기도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이 한 해를
바치며
이 한 해를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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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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