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님 진짜~~~~ 이야~~~~
영어 해석하랴 을라(충이) 키우랴 농장 다니랴
공부하랴~~
와~ 진짜 존경스럽슴다~ 본받아야쥐~
: 포에니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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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와 페니키아의 식민시(植民市) 카르타고와의 전쟁.
: 포에니라는 말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가리킨다.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후(前後)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세계적 전쟁이다. 이른바 동서 결전(決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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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차(BC 264 - BC 241)
: 주로 시칠리아를 전장(戰場)으로 한 싸움.
: 시칠리아 북동단(北東端)의 그리스 식민시 메사나를 에워싼 싸움이 발단이 되어 로마군은 시칠리아 남안(南岸)의 아크라가스를 점령한 후, 새로 강력한 해군력을 길러 BC 260년 시칠리아 북안의 해전(海戰)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BC 256년 로마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아프리카로 원정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전장은 다시 시칠리아 서부로 옮겨져 시칠리아 서단(西端) 아이가테스해전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무조건 항복시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로마는 거액의 배상금을 얻는 한편, 카르타고 세력은 시칠리아에서 일소되어 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屬州:프로빈키아, 해외속주의 시작)가 되었다. 이어 로마는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제2의 속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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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BC 218 - BC 201)
: 제1차 포에니 전쟁 뒤 몇 년이 지나자 로마는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빼앗고 카르타고에게 전쟁 직후에 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전쟁 배상금을 내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결국 하밀카르 바르카와 아들 한니발, 사위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가운데 카르타고는 스페인에 새로운 기지를 얻어 로마와 다시 전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BC 219년 한니발은 이베리아 반도 동해안에 있던 사군툼(사군토)을 함락했다. 로마는 그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카르타고가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로마는 선전포고를 했다. 로마가 해상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한니발은 육로로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을 지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BC 218년 보병 2만 명, 기병 6,000명을 이끌고 포 강가에 있는 평야에 이르렀다.
: 로마군은 그의 진격을 막으려고 애썼으나 힘이 달렸으므로 한니발은 북부 이탈리아를 확보하게 되었다. BC 217년 갈리아인들의 증원을 받아 한니발은 남쪽으로 나아갔는데, 로마를 바로 공격하는 대신 시민 반란을 부추기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2번째로 큰 도시 카푸아로 갔다. 그는 몇몇 전투에서 이겼으나 로마 시를 공격하는 것만은 참았으며, BC 216년 칸나이에서 많은 로마군을 섬멸했을 때도 로마로 쳐들어가지 않았다.
: 로마는 이 패배 뒤부터 기운을 되찾아 저항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뛰어난 수비 전략으로 전투를 치르지 않고서도 카르타고군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양군은 BC 211년 로마가 카푸아 시를 되찾을 때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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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07년 리구리아와 갈리아의 군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대규모 군사를 이끌게 된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넘은 알프스의 길을 따라와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뒤 반도를 내려가 한니발과 합류해 로마를 공격했다. 로마는 전쟁 때문에 지쳐 있었으나 하스드루발을 막기 위해 군대를 내보냈다.
: 남부 로마군 사령관 가이우스 네로는 북쪽으로 빠져나가 메타우로스 강둑에서 하스드루발을 물리쳤다. 한니발은 BC 203년까지 남부 이탈리아에서 진지를 지키다가 아프리카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리하여 15년 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적이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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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토에서 전쟁이 오래 계속되는 동안, 로마의 주요식량원이었던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섬에서도 전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 시라쿠사에서 일어난 내부반란을 이용해 카르타고는 시라쿠사에 다시 주둔했다(BC 215-210). 한편 로마군은 스페인에 있는 카르타고 요새에 계속 압력을 가했으며, 결국 BC 206년 로마 장군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일리파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에서 이긴 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본토에 쳐들어가기로 마음먹고 204년 아프리카로 가서 침략 발판을 확보했다.
: 카르타고 평의회는 항복 조건을 내놓았으나 마지막에 태도를 바꾸어, 최후의 전투에 희망을 걸었다. 한니발이 이끄는 가운데 하나로 뭉쳤던 카르타고군은 자마에서 항복했다.
: 카르타고는 스키피오가 내놓은 강화 조건을 받아들여 배상금을 내고 해군을 양도했으며, 지중해에 있는 섬들과 스페인을 로마에 넘겨주었다. 한편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 곁으로 도망했다가 다시 비티니아왕에게 의탁하여 재기(再起)를 꾀하였으나 허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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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차(BC 149 - BC 146)
: 카르타고의 숨통을 완전히 끊은 전쟁. 카르타고와 그 이웃 나라인 누미디아의 마시니사전투에 끼어든 로마가 BC 149년 전단(戰端)을 열어 소(小)스키피오가 인솔하는 로마군이 마침내 카르타고를 포위하여 이를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3차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카르타고의 옛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속주가 되었다. 200년 이상에 걸친 전쟁의 범위가 서지중해 전역에 걸쳤을 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의 카르타고와 동방 마케도니아의 동맹이 보여주듯이, 이 전쟁은 고대에 있어서 세계대전의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한 로마가 일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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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차 포에니 전쟁(BC 264-241, BC 218-201)으로 사실상 카르타고는 정치적 권력을 잃었으나 상업세력은 BC 2세기에 갑자기 커져 로마의 상업지역을 자극했다.
: BC 150년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가 쳐들어오자 무력으로 맞섰다. 이는 로마와 맺었던 조약을 공식적으로 어기는 것이었으므로 로마는 아프리카로 군대를 파견했다. 카르타고는 보상으로 인질을 풀어주고 무기를 넘겨준다는 것에 동의했으나, 해상 상업을 더이상 할 수 없는 내륙 지역으로 옮겨가 살아야 한다는 규정에 격분했다. 반란을 일으킨 카르타고는 2년 동안 로마의 포위공격에 맞서 싸웠다.
: BC 147년 로마 군대 지휘권은 옛날에 카르타고를 정복했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양손자(養孫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넘어갔다. 그는 철저한 봉쇄로 도시가 있던 지협(地峽)을 가로막고, 해외 물자 공급원을 끊었다. 또한 항구 쪽을 집중 공격해 도시 진입에 성공했으며 요새로 향하는 길을 모두 장악했다.
: 마지막으로 카르타고가 항복했을 때는 약 25만 명이 넘었던 도시인구 가운데 5만 명만 살아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당했다. 카르타고가 다스렸던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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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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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레의 고대 페니키아인(人)이 북아프리카의 튀니스만(灣) 북 연안에 건설한 도시 및 도시 국가.
: 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人)라 불렀으며,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대개 BC 720년경으로 추측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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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고는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로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상로상에 있었으므로 BC 600년경에는 서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잡고 코르시카섬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지에도 진출하였으며, BC 6세기 중반기에는 전(全)시칠리아를 장악했다.
: 그들에게는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女神) 타니트와 남신(男神)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그리고 여신 타니트는 카르타고의 주신(主神)으로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의 모습과 닮은 데가 많았다.
: 국가형태는 1년 임기인 2명의 행정장관, 종신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백인회(百人會:실제인원은 104명), 시민총회로서의 민회, 임기 무제한의 특별직, 장군 등을 가진 도시국가로서 실질적인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제였다.
: 한편 용병제도를 채용한 점은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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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하였다.
: BC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人)과 결탁하여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BC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BC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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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다. BC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BC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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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후 에피루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한편 로마인과의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전쟁 후 양자의 대립이 격화하여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BC 264-BC 241)는 시칠리아에 있는 영토와 제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시칠리아를 주전장(主戰場)으로 하여 싸웠으나 패하고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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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BC 218-BC 201)는 에스파냐에서 멀리 이탈리아로 진격, 한니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자마전투에서 로마의 대(大)스키피오에게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제3차(BC 149-BC 146)에서는 로마의 장군 소(小)스키피오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카르타고도 멸망하였다.
: 그 후 카르타고의 영역은 전부 로마의 속주(屬州) 아프리카로 전락하였으나, 카르타고의 도시 자체는 카이사르에 의해서 재건되어 로마제정시대에는 크게 번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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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수사학(修辭學)·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3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주교도시(主敎都市)가 되었다. 그러나 439년에 반달인(人)에게 점령당하고, 698년에는 아라비아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원형극장과 공중욕탕 등 로마 식민지시대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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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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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 Hannibal (BC 247 - BC 181,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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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고의 장군.
: 고대의 위대한 군사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 때 로마에 대항해 카르타고군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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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위대한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었다.
: 그의 생애에 관한 주된 라틴어 사료인 폴리비우스와 리비우스의 저서에 따르면 한니발은 그의 아버지가 스페인에 데려가서 이른 나이에 로마에 대해 적개심을 갖도록 키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BC 229(또는 228)년부터 BC 138년경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니발의 생애는 로마 공화정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 그가 가장 최초로 지휘권을 받은 것은 카르타고의 속주였던 스페인에서 하밀카르의 사위이며 후계자인 합스드루발로부터였다.
: 그는 성공적인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BC 221년 합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군은 나이 26세에 불과한 그를 총사령관으로 선포했으며 카르타고 정부는 신속하게 그의 야전 사령관직을 승인했다.
: 한니발은 즉각 카르타고의 스페인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스페인의 공주인 이밀케와 결혼하고 다양한 스페인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 그는 올카데족과 싸우고 그들의 도읍인 알타이아를 점령했으며 서북부의 바카이이족을 평정했다.
: BC 221년에는 항구도시 카르타게나(카르타고 노바, 카르타고령 스페인의 수도)를 기지로 삼아 타호스 강 지역에 있는 카르페타니족을 상대로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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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19년에 한니발은 에브로 강 남쪽에 있는 이베리아의 독립도시 사군툼을 공격했다.
: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에 뒤이어 로마와 카르타고가 체결한 조약에서 에브로 강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세력권의 북방 한계로 설정되었다.
: 사군툼은 실상 에브로 강 남쪽에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그 도시와 '친선'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실제적인 조약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함) 그 도시에 대한 카르타고의 공격을 전쟁행위로 간주했다.
: 사군툼 포위전은 8개월간 지속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한니발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카르타고에 항의하는 사절단을 보낸 로마인들은(그들은 사군툼에 지원군을 파견하지는 않았음) 사군툼이 함락된 이후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했다.
: 이렇게 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측에서 선포했으며 카르타고측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한니발이 주도해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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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은 BC 219년부터 BC 218년 겨울까지를 카르타게나에서 보내면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전쟁을 벌일 준비를 했다.
: 동생인 합스드루발에게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방위를 위한 상당수의 병력을 맡겨놓고 그는 BC 218년 4(또는 5)월에 에브로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 로마인들은 이 소식을 듣기 직전에 전쟁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9만 명의 보병과 1만 2,000명의 기병, 그리고 상당수의 코끼리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폴리비우스의 수치는 아마도 과장된 것이며 총병력은 4만 명 정도로 추정됨). 피레네 산맥에서 그의 군대는 피렌 부족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 이 저항과 일부 스페인 병력의 이탈로 군사가 크게 줄어들었으나 그는 갈리아 남부의 부족들로부터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론 강에 당도했다. 한편 로마의 장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반란 때문에 북부 이탈리아에 붙들려 있었던 그의 군대를 바다를 통해 마르실리아(마르세유)로 파견했다.
: 스키피오는 론 강 우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다가 한니발이 이미 강을 건너 좌안에서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갈 계획인 것 같다고 깨달은 스키피오는 북부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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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 강을 건넌 이후 한니발의 자세한 행적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폴리비우스는 바다로부터 행군하여 4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강이 아직 한 줄기로 흐르는 지점에서 그가 강을 건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알레스 맞은편에 있는 포우르케스가 그 지점인 것으로 추측된다.
: 하지만 그는 이제르 강과 론 강의 합류점 북쪽에서 도강을 했을 수도 있다. 한니발은 이 지역에서 징발한 가죽배와 보트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 강 안쪽으로 잔교(棧敎)를 만들고 거기서 흙을 덮은 뗏목에 코끼리를 태워 건너게 했다.
: 말들은 커다란 배에 싣거나 수영해서 건너가게 했다. 도강작전을 수행하는 중에 적대적인 갈리아 부족들이 맞은편 강둑에 나타나자 한니발은 한노를 지휘관으로 삼아 분견대를 보내 멀리 상류에서 도강하여 그들을 배후에서 공격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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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고군은 강을 건넌 뒤에 북부 이탈리아의 보이족을 우두머리로 하는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 지도자들을 영접했다.
: 보이족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통로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니발의 계획에 귀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후에 카르타고군은 뒤랑스 강(또는 더 정확하게는 아비뇽 부근에서 론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그 강의 지류)을 건너 '섬'이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 이 지역이 정확하게 어디인가를 밝히는 것은 한니발의 육상이동로를 파악하는 데 관건이 된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그곳은 산악과 론 강, 그리고 아이게스 강 아니면 이제르 강을 경계로 하는 비옥하고 인구가 밀집한 3각형의 지역이었다.
: '섬'에서는 두 형제 사이에 내분이 벌어지고 있었다(어느 부족인지는 분명하지 않음). 형 브랑쿠스는 한니발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카르타고군에게 보급품을 제공했다.
: 카르타고군은 카르타게나로부터 4개월간 1,207㎞를 행군한 뒤였으므로 극도로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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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의 군대는 콜드그리몬 또는 콜드카브르 계곡에서 알프스산에 접근해 뒤랑스강 분지를 지나거나 아니면 주네브르 관문 또는 몽스니 관문을 지나 포 강 상류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적대적인 타우리니족의 영토로 내려갔다.
: 그곳에서 한니발은 그들의 도읍(지금의 토리노)을 습격했다.
: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에 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알로브로게스족이 한니발의 대열 배후를 공격하여 위협을 가했다. 횡단로의 중간지점에서는 다른 켈트 부족이 짐 나르는 가축들을 공격하는 한편, 높은 곳에서 아래로 돌을 굴려 사람과 짐승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가파른 길에서 실족하게 만들었다.
: 한니발은 대응조치를 강구했으나 이로인해 엄청난 병력손실을 입었다. 3일째 되는 날 그는 갈리아 부족의 마을을 점령하고 창고를 털어 2~3일분의 식량을 군대에 공급했다. 한낮에 높은 곳에서 지키는 갈리아 부족의 공격에 애를 먹은 데다 갈리아 부족 안내인들의 충성심도 믿음이 가지 않아 한니발은 드러나 있는 거대한 암벽에서 야영을 하면서 야간에 자신의 말들과 짐 나르는 동물들이 아래쪽의 계곡으로 통과하는 것을 엄호했다. 통행로 정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이 더욱 위험했다.
: 전 해에 내린 눈이 굳어진 단단한 얼음 바닥 때문에 병사들이나 짐승들 모두 미끄럼질을 하면서 새로 내린 눈 속을 굴렀다.
: 산사태가 일어나 좁은 통로를 봉쇄했으며 그 길을 치우는 동안 군대는 하루종일 발이 묶여 있었다. 마침내 15일째 되는 날 카르타게나로부터 5개월간 행군한 2만 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 그리고 코끼리 38마리 중 남은 소수를 이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 그는 기후와 지형의 어려움,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부족들의 게릴라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족과 언어가 다양한 부대를 잘 적응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커다란 난관을 이겨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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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의 부대는 이제 스키피오의 군대를 대적하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최근에 창설된 플라켄티아(지금의 피아첸차)와 그레모나의 로마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 포 강으로 돌진해왔다.
: 양군 사이의 최초의 접전은 티치노 강 서쪽 평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대가 우세를 보여 스키피오는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로마군은 플라켄티아로 퇴각했다.
: 2번째 집전을 유도하기 위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스키피오의 연합군은 플라켄티아 남쪽의 트레비아 강 좌안에서 한니발을 맞이했으나 크게 패배했다(BC 218. 12).
: 이 승리로 갈리아족과 리구리아족이 모두 한니발의 편에 붙었고 그의 군대는 켈트족 신병들을 모집해 상당히 보강되었다.
: 혹독한 겨울을 보낸 뒤(이때 한니발은 눈병에 걸렸음) BC 217년 봄에 멀리 아르노 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로마의 2개군이 출동하여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는 아레티움에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를 책략으로 제압하고 파이술라이(지금의 피에솔레)와 페루자에 당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계획대로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는 무방비의 전투에 이끌려 들어왔다.
: 그들이 트라시메네 호의 북쪽 언저리와 맞은편의 언덕 사이를 지나갈 때 한니발의 부대는 준비된 위치에서 공격을 가해 수천 명을 살해하고 나머지는 호수에 빠져죽게 만들어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 가이우스 켄테니우스가 이끄는 약 4,000명의 기병대 증원군은 도착하기도 전에 중도에 습격을 받고 역시 궤멸당했다.
: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너무 지쳐서 승세를 몰아 로마로 진군할 기력이 없었다. 게다가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세력들이 이탈하여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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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은 피케눔에서 쉬면서 217년 여름을 보냈으나 나중에 풀리아해와 캄파니아를 공격해 파괴했다.
: 한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쿵크타토르가 이끄는 로마군은 지연전술을 구사하여 양군 사이에서 소규모 접전만이 벌어질 뿐이었다. BC 216년 초여름에 한니발은 갑자기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우피두스 강변에 있는 칸나이(지금의 몬테디칸네)의 대규모 보급기지를 장악했다. 그곳에서 8월초에 칸나이 전투가 벌어졌다.
: 한니발 부대의 중앙선에 배치된 갈리아와 이베리아 보병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 보병대의 돌진을 막아내지 못하고 대열은 유지한 채 밀려났지만 리비아 보병대와 양 진영의 기병대는 굳건히 버티면서 로마군의 공격대열을 중복시키고 배후에서 포위하는 작전을 통해 승리한 로마 군단 병사들을 오히려 추격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 이러한 육상전의 대승리는 바라던 효과를 가져왔다. 많은 지방들이 이탈리아 동맹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BC 216~215년 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카르타고군의 전투력은 점차 약해져갔다. 파비우스가 제안한 전략이 실행되었다.
: 그 내용은 로마에 충성을 바치는 도시들을 방어하고 기회가 닿으면 한니발에서 함락된 도시들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되, 적군이 싸우자고 할 때 싸우지 말고 카르타고군을 항상 모든 전장에서 긴장상태로 있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병력의 열세 때문에 로마군을 상대하기 위해 자기 부대를 산개시킬 수도 없고 집중된 병력으로 결정전을 벌일 수도 없게 되었다.
: 그는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벌이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수세에 밀렸으며 카르타고의 본국 정부로부터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로마의 제해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익한 지구전을 벌이기 위한 지방 보급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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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렌툼(지금의 타란토)을 점령한 것을 제외하면 한니발은 보잘 것 없는 승리를 거두는 데 그쳤다(BC 215-213). 카르타고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BC 213년에 카실리눔과 아르피(한니발이 BC 216~215년 겨울에 점령했던 곳)가 로마군에게 수복되었으며 BC 211년에 한니발은 로마군에게 포위당한 카푸아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해야 했다.
: 한니발이 강력하게 요새화된 로마의 성벽에서 4.8㎞ 이내까지 빠르게 행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푸아는 그해에 함락되었으며 시칠리아에서는 시라쿠사가 무너졌고 BC 209년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이 다시 로마의 수중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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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스페인에서 로마군은 큰 전과를 올려 그곳의 카르타고 권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 BC 208년에 합스드루발은 카르타고 주력군에서 분견대를 차출하여 한니발을 지원하러 가기 위해 아마도 형이 넘어간 길을 따라 알프스를 횡단했다. 그러나 합스드루발의 군대는 한니발의 군대와 합세하기 전에 북부 이탈리아의 메타우루스에서 패배했다(BC 207).
: 이렇게 해서 중부 이탈리아에서 형세를 만회하려던 마지막 희망마저 무산되자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브루티움에 집중하고 그곳에서 남아 있는 동맹세력의 지원을 받아 이후로도 4년 더 로마의 압력에 저항하면서 버텼다.
: 그러나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를 타격하여 카르타고의 주요동맹세력인 마사이실리아의 누미디아인들을 분쇄하고 카르타고를 위협했다. 위험에 빠진 자기 나라를 지원하러 가기 위해 한니발은 BC 203년에 이탈리아를 포기했다. 이미 예비적인 휴전협정이 선포되었고 카르타고군은 스키피오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들을 받아들인 상태였지만(BC 204~203 겨울) 한니발은 카르타고 군의 나머지 병력을 하드루메툼(지금의 튀니지 수시)에 집결시켰다.
: 예비적인 평화협정 제안을 가지고 로마에서 사절들이 돌아오고 있던 그 순간에 카르타고군은 휴전협정을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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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이은 전투에 관한 설명은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모두 각기 자신들의 누미디아 동맹세력과 합세하기 위해 바그라다스 강을 따라 자마레기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이때 한니발은 기병대가 없었고 전열의 용병부대와 제2열의 아프리카 보병대가 한꺼번에 패배했다.
: 스키피오는 정예병사로 이루어진 한니발의 제3열이 전혀 손실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 전열을 재편하는 한편, 자신의 누미디아인 동맹세력인 마시니사 기병대를 카르타고군의 배후로 올려보냈다. 한니발은 2만 명의 병력을 잃고 패배했으나 자신은 마시니사의 추격을 벗어나 몸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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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마 전투 이후 1년이 지나 체결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평화조약은 한니발의 필생의 목표를 좌절시켰다.
: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무기를 들고 로마와 싸우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비록 전쟁을 잘못 치루었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수페트(민간 행정관)가 되었으며 아울러 군지휘권도 그대로 보유했다.
: 수페트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는 카르타고의 과두적인 통치세력을 타도하고 일정한 행정적·정치적 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카르타고 귀족계급 내의 일부 세력과 사이가 나빠졌다.
: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를 부추겨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만들려고 한다는 혐의로 로마 당국에 고발당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에페소스에 있는 안티오코스의 궁전으로 피신했다(BC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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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로마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던 안티오코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수행에 관해 그가 타당한 충고를 하는 것이 점차 말썽의 원인이 되자 그는 안티오코스를 위해 함대를 마련하고 지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페니키아에 있는 도시로 가야 했다.
: 그러나 해전에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팜필리아의 시데 앞바다에서 로마 함대에게 패배했다.
: 육지에서 안티오코스는 190년에 마그네시아에서 패배했으며 로마인들이 그에게 내건 요구조건의 하나는 한니발을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또다시 한니발의 뒤이은 행적에 관한 설명은 여러 가지이다.
: 그는 크레타를 거쳐 비시니아의 프루시아스 왕의 궁정으로 달아났거나 아니면 아르메니아의 반군세력에 가담했던 것 같다.
: 결국에 그는 프루시아스에게 피신처를 구했다. 프루시아스는 당시에 로마의 동맹세력인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와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한니발은 이 전쟁에서 프루시아스를 도왔으며 해상에서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이던 중 뱀이 가득 들어 있는 큰 솥들을 적군의 배에다 던져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 마침내 로마인들은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과정을 통해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 이번에는 피신할 길이 없게 되자 한니발의 비시니아의 리비사라는 마을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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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援軍)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대(大)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도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 피로스와 비견되는 고대사상 굴지의 전술가로 인정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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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밀카르 바르카스 (BC2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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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고의 장군.
: 한니발의 아버지. 제1차 포에니전쟁 말기인 BC 247년 이후 시칠리아에 근거지를 두고 카르타고군을 지휘하여 이탈리아의 남부 ·중부의 해안을 공격하는 등 로마를 괴롭혔다.
: BC 241년 아에가테스제도(諸島)에서 카르타고군이 패하자, 그는 전권사절로서 로마와의 화평교섭을 하였으며, 전후에 카르타고 용병(傭兵)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민의(民意)를 얻었다.
: BC 237년 카르타고의 국력 회복을 위하여 광산물(鑛産物)이 풍부한 에스파냐에 건너가 개발에 전념하였고, 원주민의 왕들을 자기 세력하에 두어 카르타고의 속령(屬領)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일족의 사적인 세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한니발은 이 기반을 거점으로 하여 로마에 도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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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우스 막시무스 쿵크타토르 Quintus Fabius Maximus Cunctator (?-BC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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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군사령관·정치가.
: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 초기 단계에 신중한 지연 전술을 써서, 로마가 힘을 회복하여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침략군에 대해 공세를 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었다.
: 파비우스주의는 점진적이거나 신중한 정책을 의미하게 되었다. 파비우스는 BC 233, BC 228년에 콘술(집정관)을 지냈고, BC 230년에는 켄소르(감찰관)로 일했다.
: 그는 한니발이 스페인의 사군툼(지금의 사군토)을 점령한 데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기 위해 BC 218년 로마 사절로 카르타고에 간 듯하다. 한니발이 트라시메네 호에서 로마군을 무찌른 뒤(BC 217), 파비우스는 딕타토르(독재관)로 선출되었다.
: 그후 그는 지구전으로 침략군을 지치게 하는 지연 전술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한니발의 기병대가 힘을 쓸 수 없는 구릉 지대에서 작전을 벌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한니발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 파비우스의 전술은 로마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기병대장인 미누키우스 루푸스와의 논쟁을 초래했다.
: 그러자 로마 시민은 미누키우스와 파비우스에게 지휘권을 분배했다. 파비우스는 적을 지치게 하는 지연 전술에 충실하여, 한니발이 캄파니아를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을 방임했다.
: 그의 딕타토르 임기가 끝나자, 로마인들은 다시 침략군을 섬멸하려고 했다. 그결과 로마는 칸나이에서 참패를 당했고(BC 216), 로마인들은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을 다시 도입했다. 3번째(BC 215)와 4번째(BC 214)로 콘술에 선출된 파비우스는 캄파니아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BC 209년에 5번째로 콘술이 된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3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타렌툼(지금의 타란토)을 탈환했다. 파비우스는 아프리카 침략(BC 205)을 준비하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강력히 반대했지만 실패했다.
: 그는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최고 신관으로 일했고, 62년 동안 아우구르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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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피오 Publius Cornelius Scipio (?-BC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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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의 장군 ·정치가.
: BC 218년에 콘술(집정관)을 지냈으며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프로콘술(속주 총독)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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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18년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의 이탈리아 진격을 막기 위해 남부 갈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항해해갔다.
: 그러나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자신은 이탈리아로 돌아와야 했으나 그때까지 스페인에 있던 카르타고군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에게 그의 군대를 맡겨 스페인으로 과감하게 진군하도록 했다.
: 그는 포 강의 지류를 따라 진격하던 한니발의 군대에 맞서 북부 이탈리아에서 지연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티키누스 강에서 패배하고 부상을 당했다.
: 트레비아 강으로 후퇴해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합류했으나 롱구스는 싸움을 고집하다가 참패당했다(BC 21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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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17년 스키피오는 스페인의 프로콘술로 파견되어 갔으며, 형과 함께 에브로 강 근처의 전투에서 이탈리아로 뚫고 들어오려던 하스드루발을 격파하고(BC 215) BC 212년에는 사군툼(지금의 사군토)을 함락시켰다. 그들은 더 남쪽으로 진군해갈 수 있었다.
: 그러나 각자 진격해가다가 둘 다 재난을 만나 BC 211년 푸블리우스는 바이티스(과달키비르) 강 상류에서, 그나이우스는 카르타고노바(카르타헤나) 내륙지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 결국 패배로 끝났지만 이들 형제의 활약으로 7년 동안 한니발은 스페인의 자원을 이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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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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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나이 전투 (Battle of Cann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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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포에니 전쟁중 이탈리아 동남부의 풀리아에 있던 고대 부락 칸나이 부근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 사이에 벌어진 큰 전투(BC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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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아프리카·갈리아·스페인(히스파니아) 동맹군의 지원을 받는 한니발 부대에 참패를 당했다.
: BC 216년 로마 콘술(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한니발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작정으로 약 8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칸나이로 진군했다. 카르타고군은 약 4만 명의 보병과 1만 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 로마군은 서남방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아우피두스 강을 따라 후방으로 바다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포진했다.
: 그들은 약 6,000명가량의 기병대를 양날개에 배치하고 보병을 이례적으로 깊숙한(따라서 좁다란) 대형으로 중앙에 밀집시켜 적군의 중앙을 힘으로 밀어붙여 파괴할 생각이었다. 여기 맞서서 한니발은 신축성 있는 대형에 의지했다. 그는 갈리아와 스페인 보병을 중앙에 놓고 아프리카 부대를 둘로 나누어 그 양옆에 배치하는 한편 기병대를 양날개에 포진시켰다.
: 그러나 적군과 교전을 벌이기 전에 전열을 초승달 모양으로 바꿔 중앙이 전진해가는 데 따라 양옆의 아프리카 부대는 사다리꼴 대형을 이루었다. 한니발이 예상했듯이 그의 기병대는 양날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 일부가 적군의 배후로 밀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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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로마군 보병은 한니발의 중앙군을 점점 밀어붙였다. 마치 승패가 한니발의 부대가 버티느냐 못 버티느냐에 달려 있는 듯했다.
: 한니발의 부대는 뒤로 물러나기는 했으나 흩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군의 중앙부가 점차 덫에 끌려들어가는 형국이 되었고, 한니발의 초생달 대형은 이제 원으로 바뀌었다. 밀고 들어오는 로마군을 옆에서 지나보내던 아프리카 부대가 안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들을 공격했으며 카르타고 기병대가 배후를 쳤다. 빽빽하게 밀리는 바람에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로마군은 포위된 채 도륙을 당했다.
: 겨우 1만 4,000명의 로마 병사들이 달아났을 뿐 1만 명 이상이 생포되고 나머지는 살해당했다. 카르타고군은 약 6,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칸나이 전투는 전쟁사가들이 이중포위전략의 승리를 보여주는 고전적인 사례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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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니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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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시무스가 뭐냐면요 글레디에이터에서 나오는 장군 이름인데 막심었어의 사투리도 되요
: : : 닉네임,
: : : 인상적입니다. 영어보다는 훨 났네요
: : : 근데
: : : 그 닉네임대로 식충이 막심는것은 아닌지.....
: : : 조심스레 심으세요.
: : : 식물기르기는
: : : 정성이 반 입니다 (공연한 걱정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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