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신학神學 / 송영희
금붕어가 죽었어요 하느님
그동안 저와 한집에서 동고동락한 친구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하느님이 좋아서
그저 한량없이 고맙고 황송해서
그동안 기도는 감히 언감생심,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엎드려 빕니다
세상에 와서 그 친구는 매일 저의 넋두리만 듣다가
외로움만 달래 주다
감옥같은 어항 속에서 쓸쓸하게 갔습니다
불쌍하고 가엾습니다
그 친구를 다시 환생시켜 주세요
제가 금붕어로 대신 태어나도 좋으니
하나뿐인 제 친구, 금붕어의 완전 부활을 꼬옥, 꼭 부탁드립니다
그 옛날 당신 아드님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시듯
심청이가 인당수 연꽃으로 피어나 아버지를 만나듯
그렇게요, 하느님!
가을연못 / 송영희
참 오래된 찻잔입니다
드문드문 흰 꽃술들의 갈대며
가장자리 산딸기 잎들이며
점점 찍힌 쑥부쟁이 무늬까지
그 못가, 가까이
오늘도 의자 두 개 갖다 놓습니다
어쩌다 산길 오르는 약초꾼들
잠깐 쉬었다 가라고 놓아두지만
아침나절 지저귀던
산새 울음 몇 소절 놓여 있을 뿐
늘 빈 의자입니다
오늘도 햇살 혼자서 종일
찻물 달구어 놓습니다
감국차도 끓이고 솔잎차도 달이고
그런데 노을 질 무렵
잠깐 누가 다녀갔는지요
산 그림자 슬며시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
찻물이 확 줄어 들었습니다
서서히 못물에 어둠이 듭니다
저물 녘 그 사이 / 송영희
아무도 없어도 누가 돌보지 않아도
이 여름, 내 앞에 저 빛나는 것들
휘어져있던 마음이 반짝 중심을 세우고
내 안의 환한 이름들 비로소 바람결에 얹힌다
7월의 무더위를 건너온
자두 복숭아 고추 머위 도라지
저 어린 것들이
그동안 내 몸과 정신을 붙들어왔구나
그래서 그나마 내 기도가 가벼웠었구나
단풍 / 송영희
저물녁 버스에서 내리자 갑자기 소나기 쏟아진 것 뿐인데
피해 들어간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 뿐인데
서로 안부 물으며 저녁 한 끼 덤덤히 먹은 것 뿐인데
아, 헤어진 뒤 반짝 멧세지 들어온 것 확인은 했는데
현관 들어서며 창밖 복자기나무 언뜻 본 것 같기는 한데
그 저녁 그게 전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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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 송영희 시인
겨울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밤부터 간간히 내리더니 오늘은 종일입니다.
겨울 숲의 적요한 풍경이 창속으로 온 몸을 묻고 들어와
있습니다.
창 밖에 기대어 흐르는 빗방울들도 왠지 오늘은 순하고
간절해서 먼 길 떠났다 돌아오는 발걸음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시간입니다.
고단한 몸을 누군가의 품 안에 묻고, 또는 기대고 때로는
돌아오는 발걸음으로 다가서고 싶은 시간… 그와 만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내게 시는 무엇일까 가끔 반문도 하지만 너무 친근해서
너무 순결해서 오히려 버려두고 싶은 마당 끝 복자기 나무
같은, 많은 곳을 헤매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온 뒤,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서야 문득 찾아가는… 제게 시는
그렇게 오래된 연인이고 한 그루 나무였습니다.
때로는 너무 오래 못 만나 부끄러워 피하고 싶기도 한,
눈길도 못 마주치어 서먹한 채 딴청을 부려야만 하는,
그러나 이렇게 예전에도 그랬듯 오늘도 겨울비의 감성으로
마주 앉아 있습니다.
이 세상 꿈꾸는 사랑이 없다면, 함께하는 사랑이 없다면
정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어느 시인도 고백했지만
시는 내게 늘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합니다.
혼돈과 갈증의 세상살이에 수십 년 멀미를 하다가 어느
해인가 강원의 외진 곳 작은 오두막텃밭을 마련했습니다.
마당만 넓은 산골 두메였지만 그 비밀의 곳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스멀스멀 웃음이 삐져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여 년을 강원 골짜기 밭고랑에 기대여
정신을 파묻다 보니 내 몸에서도 이제는 어느 정도 흙냄새가
묻어날 법도 한데 여전히 나는 도시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뜨거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요즈음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도 그렇다는 걸….
밭 한 고랑의 뜨거움 힘겨움 발버둥이 채마밭의 내력이듯
자연이나 사물, 삶의 모든 내력은 통증으로 시작되었다는
근원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뼛속까지 닿는 통증의 시들이 읽혀지고 또 그런 시들의
사유가 눈물나게 아름답다는 걸 요즘 다시 절실히
느낍니다.
사랑이란 말도 요즈음에서야 햇살 받듯 편하게 씁니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나빠지고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좋아질 뿐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세상도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 박노해,「조금씩조금씩꾸준히」부분
당연히 시도 그렇다고 믿고 싶습니다.
전혀 새롭지 않는 내 시에 절망하고 있을 때, 문득 채마밭의
그 어린 새싹들의 밀어내는 힘을 보며 감히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라고 그게 바로 신의 선물이라고 이리 뒤늦게
시에 대한 나의 고뇌를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시에 대한 나의 절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사랑에 대한 절망도 절대로 버려지지 않을
것임을. 오, 저 뜨거운 겨울비 종일입니다.
[출처] 기도의 신학神學 외 / 송영희|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