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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1일(수)
* 시작 기도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롬 11:32)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주님...
주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이라는 죄 아래 가두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창세전 언약을 온전히 설명하기 위하여 아담 또한 그 불순종의 죄 아래 가두셨습니다.
물론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것을 먹을 것도 아시고 그렇게 동산 중앙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심으신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죄를 조장하심이 아니라 창세전 언약을 설명하기 위하여 필요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를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살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서 저는 오늘 이 아침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죽기에만 합당한 내가 감히 무어라고 설교단에서 설교를 한단 말입니까?
이처럼 이 종은 설교할 자격도 가치도 없는 자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서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오늘도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주님과 함께 연합하게 하소서.
한국에는 종다리라는 태풍이 올라왔는데 이를 통하여 힘들고 어려운 자들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은혜를 부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살전 2:1-12
제목 :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 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 나의 묵상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점을 치면서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난다(행 16장).
그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바울을 심히 괴롭게 하였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있는 귀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내니까 즉시 귀신이 나오고 여종은 멀쩡해졌다.
문제는 여종이 점을 쳐서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는데 귀신이 쫓겨남으로 인하여 더 이상 주인에게 돈을 벌어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인이 열 받아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가로 끌고 가 고발한다.
결국 그들은 빌립보 감옥에 갇혔으나 성령님의 기적적인 섭리로 감옥을 지키는 간수와 그의 온 집안을 복음으로 구원케 하고 감옥에서 풀려나 그 후에 데살로니가로 오게 된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게 된다.
복음전도자가 만약 그 고난만 생각하게 되면 힘들고 지쳐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자의 고난과 능욕은 내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감당하는 것이기에 수많은 대적자들이 있어도 넉넉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데살로니가교회에 복음을 전한 것도 마찬가지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회당에 들어가서 세 안식일, 즉 약 4주 정도 성경을 풀어 가르쳤다.
그들이 가르친 내용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박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계속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이 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복음을 듣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를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하여서 소동을 벌였다.
즉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명을 어기고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고 악의적으로 소란을 피운 것이다(행 17:1-9).
결국 이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자 데살로니가의 믿음의 형제들이 그들을 베뢰아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겨두고 바울만 아덴으로 가게 한 것이다.
또한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함께 천막을 만들며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였따.
그 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부터 바울에게 도착하여 데살로니가교회의 모든 상황을 보고하였다(행 17장, 살전 3:6-7).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너무나 기뻐서 곧바로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 복음을 전한 것은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간사하거나 부정한 방법, 또는 속임수나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을 가지고 하지 않았다(3, 5절).
그들은 오직 마음을 감찰하시고, 그 동기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였다(4절).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결코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6절).
예수님도 병든 사람을 고쳐주거나 귀신을 쫓아내실 때 결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사역을 한 뒤에 주님 자신은 감추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하셨다.
그래서 은혜를 입은 자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눅 18:43).
바울은 또한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얼마든지 물질적 부담을 지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밤낮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하였다(7-9절).
그의 사역의 모토는 유모가 자녀를 기르는 것처럼, 아버지가 자녀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10-12절).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것을 기뻐하였다.
이는 정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의 사랑받는 자녀와 같았기 때문이다(8절).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많은 목사나 선교사 등 주의 종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하기보다 성도들이 듣기 원하는 것을 말씀을 이용하여 전하면서 그들의 필요가 정당한 것임을 확증해 주는 불의를 행한다.
하나님이 전하기 원하시는 것은 영생을 주는 복음의 말씀이다.
이를 위하여 아들이신 예수님도 공생애의 모든 사역을 이 영생을 위하여 행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땅에 속한 것, 만물 안에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모든 신앙의 관심이 집중되어 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나 다를 바가 없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은 단지 교회에 나가고 안 나가고의 차이인 것 같다.
물론 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주기 원하셨던, 그리고 지금도 원하시는 그 ‘영생’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쯤으로 알기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즐기고, 할 것 다 해 본 다음에 나는 예수 믿으니까 죽어서 천국에 가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에 가기 위한 일종의 보장보험인 셈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세 안식일, 즉 약 4주 정도에 걸쳐 아주 짧은 시간에 복음을 들었다.
하지만 그 복음이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래서 그들이 그동안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살전 1:9).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었다(살전 1:10).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이 땅, 곧 만물 안에 있는 존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오직 하나님 나라, 즉 영생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도들이 범하는 잘못은 무엇인가?
그것은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로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 우선적인 책임은 목사에게 있다.
목사가 인본주의적인 보상신앙이나 번영신앙 등 지극히 세상적 가치로 설교를 하게 되면 성도들은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로 듣게 마련이다.
그러나 진짜 복음을 전하는 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들어서 그것을 평가하고 부정하고,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위로받고 싶은데 맨날 복음만 전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더라도 그들에게는 역사하는 힘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역사하는 힘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복음을 제대로 전하였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였는가?
돌이켜 보면 그러지 못했던 때가 참 많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구약을 설교하면서 그저 교훈적인 설교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감동을 주고 나서, 그저 은혜 받았다는 반응을 듣기 위한 설교가 다수였음을 고백한다.
어떻게 하든 설교 듣고 감동이 되어서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기만을 바라는 것이 나의 바램이었다.
아닌 척 하면서도 숫자에 민감하여 숫자가 빠지거나 떨어지면 견디지 못하는 자였다.
물론 그들이 정말 예수 믿고 천국가기를 바랐으며 또한 이 땅에서도 영생의 삶을 살라고 권면도 하였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가 일관되게 선포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자녀를 기르는 엄마와 같이, 자녀를 훈육하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목양해야 했음에도 나의 욕심으로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로 인하여 시험이 들어 교회를 떠난 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어느 교회에 가든 정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이제는 본인 스스로 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 올바르게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성도의 눈치를 보고 성도에 따라 대하는 간사함,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사용하려는 것에 대한 부정과 속임수, 돈 많고 부자인 성도들에게 아첨하는 말,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이 오늘날 이 시대 목사들의 얼굴이기에 정말 낯 뜨겁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나라고 여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나 역시 내 안에도 이러한 마음이 있었음을 솔직하게 자백한다.
어쩌면 그런 부끄러운 마음과 자괴감 때문에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를 사임했는지 모른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믿기에 감사로 받아들인다.
이제는 선교사로서 나도 온전한 복음을 전한다.
몰랐을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복음만 전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온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이제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임을 안다.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과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간다.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어 날마다 주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리라.
* 묵상 후 기도
주님...
간사함과 부정, 속임수와 아첨하는 말, 그리고 탐욕이 제 안에도 가득하였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간사함과 아첨으로 성도를 대하였고, 부정함과 속임수로 성도를 속이는 자였나이다.
탐욕은 제 안에서 싹이 자라 물질과 명예와 사람들에게 보란 듯한 인정을 받고자 하는 내 안의 엉겅퀴와 가시나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목회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지금은 베트남의 조그만 지역에서 눈으로 보기에 아주 작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지 정말 그 복음을 듣는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이 땅에서 만물 안에 있는 존재물에 천착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보는 참 영생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를 위하여 부족하지만 이 종이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것이오니 주님께서 제한 없이 사용하시도록 나를 드립니다.
주여 나를 주님의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소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렇게 살지 못했던 내 자신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으나,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다시 한 번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성령께서 임마누엘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