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설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다
曲學阿世 (곡학아세) <사기>
진리나 신념을 굽혀 세상 사람들이나 권력자에게 영합하려는 학설이나 언변을
늘어 놓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원고생(轅固生)은 문제(文帝)의 다음 경제(景帝)와 그 다음 무제(武帝)를 섬긴 유학자였다. 그 무렵 유교는 계속 번영했으나, 이를 비판하고 싫어하는 자도 많얐다. 그런 사람은 정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유교의 사고방식을, 전통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복잡해지는 사회에 걸맞은 정치를 펴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 경제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유학을 공부한 자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경제의 모친은 '무위자연'을 으뜸으로 여기는 <노자> <장자>의 사상을 좋아해 유교를 꺼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원고생을 붙잡고서 물었다.
"당신은 <노자>를 어떻개 생각하시오?"
원고생은 물론 태후가 노장 사상을 좋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고생은 자신의 생각대로 예기했다.
"그것은 자기 몸에만 신경을 쓰는 머슴의 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적어도 천하와 국가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문제 삼을 가치도 없는 책입니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태후는 원고생을 돼지우리에 쳐넣어 버렸다. 이런 일화가 있을 만큼 원고생은 자신의 사상은 결코 굽히지 않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경제는 이 강직한 유학자를 중용해 삼공과 함께 요직으로 꼽히는 태부(太傅)에 앉혔다.
경제 다음의 7대 황제는 유교를 국교로 삼을 만큼 유교에 푹 빠졌다. 무제도 인재를 등용하는 일에 열심이어서 어질고 착한 선비를 찾는다는 조서를 내려 널리 알릴 정도였다. 원고생에게도 출사하라는 소명을 내렸다.
원고생은 이미 경제 만년에 노령을 이유로 사직하고서 운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제의 소명에 감격한 원고생은 아흔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출사를 했다. 그때 함께 부름을 받은 이가 젊은 학자 공손홍(公孫弘)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무제를 배알했다.
그때 원고생은 황제의 어전이었으나 이를 꺼리지 않고 공손홍을 질타하듯 말했다.
"지금 학문이 문란해지고 속설이 만연해 있소. 이를 방치하면 사학(邪學)때문에 정통의 학문이 무너지고 말것이오. 따라서 자네같이 젊고 현량한 선비들이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하오. 부디 바른 학문에 힘쓰며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힘써주기 바라오. 결코 자신의 학설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려고 들어서는 안 돨 것이오."
원고생은 젊고 어진 선비들이 신념을 가지고 힘써줄 것을 바라며 홤제의 어전에서 고언을 했던 것이다.
공손홍은 원고생의 강직함에 느낀 바가 있어 그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힘썼다.
굽히는 신념은 신념이 아니다
대개 자신의 의견이 소수파가 되어버리고 나면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때야말로 그 사람의 진가
를 알 수 있다. 소수파의 신념을 꺾으려 했던 사람도 내심 신념을 지키
지 못한 사람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대게 이
런 사람들은 신념대로 활동할 힘이 부족하여 쉽게 부화뇌동하는 사람
으로 평가받개 마련이다. 결코 '공학아세의 무리' 라는 평가를 받아서
는 안 될 것이다.
( 剛軒 選集 <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