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과 점술-----------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신 18:11-14)"
인간이 살아가면서 허구를 실화나 사실로 믿고 살아가는 것 만큼 어리석고 무식한 경우가 없다. 이미 답이 왔는데도 답을 답으로 여기지 않고, 허구를 사실과 대안으로 믿고 바둥대며 사는 인간의 모습을 실존해 계시는 창조주하나님이 본다면 어떻게 여길 것인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을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 안에 들어 왔다는 사람도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구원관, 예정론이나 미래관(종말관)이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전의 방식대로 점, 사주팔자, 토정비결, 역술 등을 거리낌이 없이 행하고 있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며 성경적으로 조명해 보고 답을 찾을려고 하기보다는 돈 몇푼에 눈이 어두워 인간의 지저분한 과거나 들추며 겁주고 협박하는 한심한 나부랭이 앞에 굽신거리는 치부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면 크게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영적인 교회 지도자들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기보다 성경적인 관점으로 정확히 조명하여 성도들의 영적무지를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1996년 우리 정부산하 공보처가 공적으로 조사하여 발표한 '한국인의 의식' 가치관 조사에 보면 '역술가의 예언이나 운세풀이를 어느 정도 믿는가? 라는 설문에 대해 매우 그렇다'가 4.8% 어느 정도 그렇다가 33.2%로서 합 37.9%가 점술에 대해 긍정적인 신뢰의 태도를 보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큰 차이는 없는데 갤럽이 몇 년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인의 약4분지 1이 점성술을 신빙할 만한 것으로 보고 있고, 또 일간지에 나오는 '점성란'을 읽는다고 밝히고 있다. 도심 곳곳을보면 운명 감정소, 철학관, 작명소, 예언의 집 그리고 각종 도사의 집들이 깜짝 놀랄만한 정도로 많이 있다. 그리고 대학가 주변에도 '오늘의 운세'니 '사랑의 별점'등 컴퓨터로 점을 보는 기구들이 즐비해있고, 10대들도 볼펜점을 즐기고들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엄청나게 점술 사이트들이 생겨나고, 케이블 TV상단에도 ARS(700번)를 이용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요즈음에는 pc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해 안방에서 쉽게 컴퓨터 점을 치게 되어 있어 젊은이들이 자주 보게된다. 심지어 작명소도 인터넷으로 5만원을 받고 이름을 지어준다. 오늘날에는 대학가앞에 점술촌이 집단으로 형성되어 고급 인테리어를 갖추고 영업(?)을 하며, 심지어 점보는 학원까지 생겨 배울려고 오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룬다고 한다. 새해나 무엇을 시작할려고 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운세를 알고자 토정비결을 보고 점을 친다. 혹자는 이러한 점술이나 무속은 사회의 혼란기와 역사의 과도기에 성행한다고 하지만 오늘의 우리사회나 서양사회는 꼭 그렇지만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성경을 통해 조명해 보고 믿음으로 지혜롭고 현명하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먼저 살피기 전에 염두해야 할 것은 "점은 허구다. 그들이 무슨 소릴해도 그것은 속임수요, 거짓일 뿐이다"라는 것이다(레26:31). 이 거짓은 개인의 피해뿐 아니라 사회의 악이 될 수 있다.
1. 사전적인 의미
1)국어사전 : 예언, 관상등의 방법으로 초인간적인 존재와의 접촉에 의하여 미지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는 과정.
2)한자사전 : 占(차지할 점)-차지하다, 지키다, 수호하다, 점치다
3)영어사전 : Divination -예언, 예견. fortunetelling-길흉판단, 점
4)구약성경의 용법
vj'n:(나하쉬, nachash): 기본어근;본래 의미는 쉿하는 소리를 내다, 즉(마술 적인)주문을 속삭이다, 예지하다, 확실하게 점치다, 복술사, ×복술, 경험으 로 배우다, ×참으로, 열심히 관찰하다
5)신약성경의 용법
manteuvomai(만튜오마이) - 미리 말하다, 신탁을 말하다, 예언하다.
Puvqwn(퓌돈) : 퓌돈 the Python (아폴로가 죽인 뱀의 이름), 점치는 영.
a) 퓌돈은 신약성경에서 행 16:16에만 나타난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여기에 나오는 빌립보의 한 여종은 점하는 귀신(Python spirit)이 들렸는데, 여기에 나오는 "프뉴마 퓌도나(pneuma pythona)"란 두 단어는 동격 관계이다. 우리는 이 문구를 '한 영인 퓌돈'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퓌돈이라는 영', 또는 '퓌돈의 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아마도 여기서 중요한 점은 퓌돈이 소녀를 통하여 말하는 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점장이 복화술사로서 그녀는 마귀 또는 귀신과 관계한다. 여종은 아마도 사로잡혀 있는 귀신에 의해 길러진 투시력을 가졌을 것이다.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복화술사들이 사기꾼들이지만, 이 여종에게 있어서 복화술은 어떤 점치는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여종을 사로잡고 있는 영은, 마치 예수께서 지상의 사역 활동을 할 때에 여러 귀신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뿐만 아니라 바울도 이와 같은 출처로부터 고백된 증언을 그대로 수락하지 않고 그 귀신들을 내쫓았던 것이다.
b) 초기 교회의 문헌들에서 퓌돈은 복화술사들에 대하여 사용되지 않고, 그 복화술사나 혹은 그 여자를 통하여 말하는 영을 대신하여 사용하였다. 제롬은 사 8:20에서 무당 귀신들로서 복화술사에 대한 정체를 폭로한다(Walter Bauer)
점이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앞날의 운수나 길흉을 미리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점이란 용어와 거의 같이 사용되고 있는 점복은 인간의 운명이나 미래에 대한 어떤 징조를 미리 판단하고자 하는 술법 혹은 기술을 뜻한다. 점복은 점술과 복술로 나뉘어지는 바 그것은 인간의 지능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이나 알 수 없는 일을 주술의 힘을 빌어 추리 내지는 판단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점복과 함께 예조, 금기, 주술 등이 있어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예조나 점복은 미래를 사전에 미리 아는 지식과 기술을, 금기나 주술은 예측 불가능의 결과를 예방하고 처리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러나 흔하게는 점복, 금기, 주술 모두를 점 혹은 점복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점이 생겨난 역사는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그것이 단지 미개인만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다. 점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존재해왔다. 심지어는 현대의 복잡하고 세속화된, 그리고 과학이 발달된 사회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알고 있거나 소유하고 있는 정보만 가지고는,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아 일의 수행에 있어 판단과 결정이 어려워질 때에 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인류학자들은 점 혹은 주술이라는 것이 자연의 원리나 인간의 생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었던 미개인들에게서만 주로 보여진다고 믿었다. 즉 미개인들에게 있어서 사건들의 연속은 우연이 아니었고, 그것은 어떤 불변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며 그 작용은 정확히 예견되고 측정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자연과정에서 추방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즉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진화론적 시각에서 보면 점 혹은 주술은 과학이 발달하면 점점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의 시대에도 점은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 혹은 점복의 역사는 인류생활과 더불어 찾아볼 수 있고, 인류의 문명은 점복의 발달과 더불어 병행되어왔다. 원래 점복은 개인적, 심리적인 것이었으나 점차 사회로 확산되면서 하나의 점 문화가 형성되어왔다. 일찍이 중동지방에서는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이 유명했다. 중국에서는 동물뼈, 거북이 등껍질을 사용하는 점복이 발달했다. 또한 후에는 역경의 원리를 응용하는 역점도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중국의 영향으로 삼국시대부터 동물뼈나 거북이 등껍질을 사용하는 점이 많았다. 고대사회에서는 점복 담당자를 점복관혹은 무자라 불렀고 국가의 제반사를 점쳤다. 신라시대에는 관상감이라 불리우는 점복 담당자 소속 관청이 있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점복을 담당한 사람을 태복감 이라고 불렀는데, 점복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보다 발전된 토정비결, 오행점, 사주법 등이 성행했고, 전문적인 점자를 복사라고 불렀다. 토정비결은 조선 중종때 학자인 토정 이지함(1517-1587)이 만든 운명 지침서이다. 고대 중국인 들이 창조하고 연구하여 동양에 전파된 역학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분야이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활용해 "개개인의 인생을 미리 내다보고 개척해나갈수 있는 길을 터준다"하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즐겨보고, 심지어 학원까지 생겨났다.
점복의 유형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는 자연현상에 의한 점복이 있다. 이것은 특이한 자연현상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사건의 예조로 믿는 일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월성신의 이변, 풍운뇌우,수변,지변, 동식물 이변 등으로 점을 치는 것이다.
둘째는 인사에 의한 것으로 그 사람이 지닌 어떠한 특징이나 생활하는 가운데 우연히 발생한 일을 가지고 점을 치는 것이다. 여기에는 생득적인 특징에 의한 사람의 동작, 행위에 의한 점복, 우연한 일에 의한 점복, 꿈에 의한 점복 등이 있다.
셋째는 신비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탁점라는 것으로 이것은 신령이 점자의 육체에 강림, 빙의 하게 함으로써 점자 자신이 일시적으로 신령이 되어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이것을 인체강령점이라고도 한다. 다른 하나는 신시점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각종 기물에 신령이 빙의하도록 하고 점치는 자가 거기에 나타난 신의 뜻을 파악하여 미래의 길흉을 예측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물강령점이라고도 불리운다. 신비점은 신의 강림이나, 인간의 영과 신령 사이를 교통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점쟁이만 할 수 있다. 신탁점은 몇 가지 간단한 도구(방울 같은 것)를 사용하고 정감을 일으키는 언어와 행동으로써 신을 접하게 되는 것이고, 신시점은 점치는 자의 육신 대신에 어떤 기물에 신령이 빙의 하도록 하고 나타난 징표로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으로 이때 기물로는 쌀, 엽전, 재, 분등이 사용된다. 예컨대 척미점은 상위에 쌀을 흩뜨려 놓고 주문을 외며 쌀 알을 집는다. 그리하여 잡힌 낱알이 짝수인지 홀수인지, 그리고 몇 개인지 혹은 상 위에 쌀이 흩어진 상태는 어떠한지에 따라 점을 치는 것이다.
넷째로는 인위점이 있는데, 이것은 우연한 예조나 현상, 또는 주력에 의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어떤 일을 조작하여 거기에 나타난 결과로 미래를 판단하는 점법으로 비전문적인 일반인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인위점에는 승부점과 오락점이 있다. 승부점은 경기로써 길흉을 따지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신전에서는 승부는 곧 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승부의 결과로 미래의 길흉을 점치려는 승부점 혹은 경기점이 발생했다. 승부에서 이기면 길, 지면 흉을 예측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기의 신성성은 유희나 오락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석전, 줄다리기, 차전, 쥐불놀이 등은 승부에 따라 길흉을 점치던 놀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종교적 기능은 사라지고 오락적 기능만 남아 있다. 한편 오락점은 유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동네끼리, 집단끼리 연날리기, 그네뛰기, 윷놀이 등으로 그해운수를 점치는 것인데 점속 이라고도 불리운다. 이것 역시 오늘날에는 단순한 오락이나 유희가 되고 말았다.
다섯째는 기타 점복으로 여기에는 작쾌점과 관상점이 있다. 이것들은 비교적 이론적 체계를 갖춘 과학적 점복으로 어느 면에서는 학의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다. 작쾌점은 음양오행, 수리를 기초로 괘를 만들어 이것을 수리적으로 해석하여 길흉을 판단하는 점복이다. 관상점은 사람의 안면, 골격, 수족 혹은 음성이나 거동 등에 나타난 특징을 보아 그 사람의 성격, 심성, 운명 등을 판단하는 것이다. 보는 신체에 따라 관상학은 비상, 구상, 이상, 수상, 골상 등으로 나뉘어진다. 조선시대에서는 관상점은 점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상학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원시인이든 문명인이든 어떤 중요한 일에 대하여 결정을 하는 데 있어 생겨날 수 있는 문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무지하기 때문에 직면하게 되는 부정확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집단 안에서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의 의견의 불일치 문제이다. 점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된다. 무지하기 때문에 결정을 하기 어려운 일의 예는 언제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을지, 언제 어느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좋을지, 병을 낫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들일 것이다. 결국 점이란 인간의 불안, 공포, 희망의 강한 감정적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할 것이다. 즉 인간이 해결할 수 없은 어려움을 만나거나 그의 지식이나 실제적인 통제능력의 한계에 직면할 때에, 그러나 그것을 추구해야만 할 때에 점은 흔히 행해지게 된다. 이때 점은 개인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인 불안이나 긴장을 해소시켜주는 작용을 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집단이 어떤 결정을 하고 함께 이를 수행해야 하면서도 하나만의 선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을 때는 집단 안에 의견의 불일치가 있게 되고,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을 야기시킬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점은 하나의 특정 선택권을 지정할 수 있고,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따라야 하므로 서로간에 갈등이나 충돌을 피할 수 있게된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외부적인 초자연적 힘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은 집단 안에서 보다 빠른 합의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점은 경험적 혹은 과학적 지식이 가장 부적합하고 불확실성이 가장 지배적인 시기나 지역에서 가장 많이 수행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점이 사라질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전히 오늘날도 불확실성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이 인간과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입시에 합격할지, 입후보해서 당선될지, 어떤 날 결혼하는 것이 운이 있을지, 사업에 성공할 수 있을지, 건강이 얼마나 유지될지 모두가 불확실한 일들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사람들에게 있는 한 점은 여전히 수행될 것이다. 문제는 점이 사실을 밝혀주느냐 아니냐, 그것이 과학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초래하는 역기능에 있는 것이다. 점은 한마디로 직간접으로 초자연적인 힘과의 교제를 통하여 복을 누리고자 하는 기복성의 발로이다. 재물, 출세, 성공, 건강 등의 모든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점이 주로 이용된다. 그러나 점은 무엇보다 의타성을 조장한다. 즉 자신의 운명을 점의 결과에 맡김으로 스스로 운명을 개척을 나가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려고 하는 의지를 약화시킨다. 모든 생활현상의 근거와 책임이 초월적인 힘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 삶의 길흉화복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여기에는 주체적 결단이 없으며 운명을 신령에 맡기고 그 중재마저도 무당 혹은 점쟁이에게 위임하고 마는 의타성과 무책임성이 뒤따르게 된는 것이다. 점을 치는 사람은 나의 문제점이나 부족함을 살피고 따져서 보완하기보다는 나의 불행과 곤경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거나 초자연적 힘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점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갖게 만든다. 점복 혹은 주술은 종교와는 달리 그것들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다. 종교의 경우에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앙이라든가 사랑의 실천 혹은 희생이나 헌신과 같은 수단이 필요하게 되며, 이러한 수단의 추구는 자연히 이웃을 생각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점의 경우는 그것 자체가 수단이 되며 목적은 개인의 여러 가지 복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타적인 관심이나 실천의 여지가 없게 된다. 이렇게 하여 나만 잘되면 그만이고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적 사고를 하게 만든다. 자신의 실력, 능력, 노력의 결과를 무시하고 행운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게 함으로 요행심리에 젖어들게 만든다. 점은 현실주의적 인생관을 조장하기도 한다. 미래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없다면 어떤 목표를 세워놓고 미래의 성취를 위하여 오늘을 준비하고 노력하는 수고를 하게 된다. 그러나 미래의 운명을 알려주는 점은 오늘의 수고와 노력을 간과하게 만들고, 따라서 오늘을 쉽고 편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기 쉽다. 점을 통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 자체도 거의가 현세적이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낙천적인 인생관을 만들어내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즐기며 살게 만든다. 인간의 실존적인 고뇌라든가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와 같은 목적적 가치가 과소평가된다.
점은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점은 개인적인 소망이나 가족적인 관심을 넘어서는 넓은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점은 사회정의나 복지, 자유와 평등과 같은 가치의 인식과 실천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질서, 민족통일, 인류평화와 같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식과 그 실천에도 무관심하다. 따라서 사람들의 시야나 삶의 영역, 그리고 활동의 범위를 축소시켜 성숙한 사회인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점복에 있어서는 윤리적인 선악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권선징악의 관념이 여기에는 없는 것이다. 점은 하나의 수단일뿐이기 때문에 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양심적으로 사는 따위의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다. 악하고 불의한 사람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따위의 일은 점복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점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줄 뿐이다. 따라서 점은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도덕성의 문제에 대하여는 공헌하는 바가 없다. 오히려 부도덕한 사람들의 그 부도덕성을 은폐하거나 혹은 지속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점이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점은 사람들에게 불확실성의 상황 가운데서 생겨나는 불안이나 긴장, 상호간의 갈등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들을 해소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만드는 작용을 한다. 점은 사람들을 현실주의자로 만들고 몰역사적이고 탈사회적인 존재로 만들며, 비윤리적인 사고와 수행을 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문제라고 할 것이다. 점은 또한 의존적이고 무책임한 유아기적인 퇴행성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점을 유행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분위기이다. 즉 요행이나 운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 불로소득자가 많은 사회, 성실하게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점 문화가 성행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 자체가 합리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 능력과 실력과 노력으로 정당하게 평가받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성경에서는 "점"을 무어라고 하는가?
점술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떠난 타락한 인간의 불신적이고, 미신적 행위이며 그릇된 삶의 태도요 또 악한 영과 인간 죄성이 합세해서 빚어 낸 영적 죄악이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점술행위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악이요,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 성질을 가진 인간 점술가를 더 의지하고 신뢰하는 행위이므로 그 죄는 크다고 볼수있다. 말하자면 점술행위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현상만 아니라 그 근원과 본질에 있어서 종교적, 영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등지고 무시하여 반역하며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미신적 행위를 일삼으며 살아왔는지 자세히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는 우상숭배자, 신접자, 점성가, 요술가, 초혼자, 점술가들의 그릇된 종교적 우상행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점과 점쾌 점술가들에 대해서 성경은 매우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있다. 구약에서의 '케셈' '나하쉬(vj'n)' '야난'등의 히브리어 낱말들과 신약에서의 '퓌돈(Puvqwn)', '만테우오마이(manteuvomai)' 등의 헬라어 개념들은 다 '점' 과 '점쾌', 그리고 '점치는 행위'를 지칭하는 낱말들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여러 가지 형태들의 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점들은 현상적으로 1) 자연물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과 2) 인간들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 수단별로는 1) 심령적이고 내적인 형태와, 2) 개인적이고 사적인 방식, 또 본질적 형태로는 1) 악한 영의 도움으로 하는 형태와 2) 거짓과 속임수로 하는 형태가 있다. 이런 다양한 이중적 구분은 어떤 경우에는 양자의 혼합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면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어떤류의 점들이 있는가?
1) 점성술 : 이 점술은 다른 점술과 달리 고대에서는 국가가 독점한 것으로써 고대 중국과 바벨론에서 발달한 것으로 성경에도(사47:12-15, 렘10:1-11) 언급되고 있다. 이 점술은 여타의 점술에 비해 악한 영이나 귀신의 술수와 관련되기보다 비 계몽과 관련되어 천문학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2) 해몽술 : 고대 헬라의 사상에서는 인간이 잠을 잘 때 영혼이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꿈을 통해 미래를 투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구약에는(렘23:25-27) 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꿈을 통해 예언력을 가질려는 부질없는 시도가 나와 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꿈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지시의 방편으로 쓰이고 있다.
3) 간장점 : 고대 바벨론에서 보편화 되었던 이 점은 간장을 피의 샘으로 보는데 근거하고 있다. 피는 생명의 원천이므로 제물로 드려진 양의 간장을 살펴 신들의 뜻을 간파해 내는 점술이 행해졌던 것이다. (에스겔 21:21-22)에 이 간점이 언급되고 있다. 간장외에 고대에서는 제물의 다른 부위, 이를테면 쓸개, 비장, 혀, 심장 등도 점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4) 막대점 내지 화살점 : (겔21:21)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갈래길에서 '살들을 흔들어' 어디로 행해야 할지 하는 점괘를 얻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점은 주로 화살이나 막대기를 공중에 던져서 그것이 떨어지는 방식과 위치로 알려고 하는 것인데, (호4:12)에도 '백성이 나무를 향해 묻고',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한다( 그 요술 막대기가 가르치니)'고 언급하여 이 점을 말하고 있다.
5) 수점 내지 액체점 : (창 44:5)에는 요셉이 베냐민의 자루에 넣게한 은잔이 점을 치기위한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잔 안에 물이나 술 등 액체를 부어 그 안에 물의 반짝임과 어우러짐, 요동과 반사 등을 통해 나타나는 형태를 가지고 점을 치는 방식이다. 또 고대에서는 기름을 물통에 붓고 나서 그속에 만들어진 거품이나 고리 모양을 관찰하는 것도 있다.
6) 자연점 : 여기에는 기상이나 천체의 변화를 살피는 기상점, 동물의 행동 내지 출현을 가지고 치는 동물점, 또 싹이 트기 시작한 각종 식물들을 살피는 식물점이 있다. 그래서 기이한 형태의 구름들, 돌발적인 폭풍우, 또 뱀의 출현과 사라짐, 개들과 비둘기, 제비, 까마귀의 모습 등을 관찰하므로 미래에 대한 예시를 받는다. 이에 대해 구약 성경은 여러 가지 암시를 주고 있다.
7) 드라빔 : 점괘나 신탁을 얻기 위해 구약시대에는 드라빔을 사용한 예들이 더러 나타난다.(삼상15:23, 겔21:21, 호3:4, 슥10:2), 드라빔은 사람의 모양으로 생긴 가정 수호신이나 우상을 말한다. 이 드라빔이 죽은 선조들의 상이었다면 그것은 죽은 자들의 영혼과 교감할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다.
8) 영매술 : 삼상 28장에 보면 블레셋의 군대에 맞서게 될 사울이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 올리려는 장면이 나온다. 고대에서 주문이나 이런 술법으로 죽은 자의 혼령을 불러서 미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점술이 무당의 도움으로 널리 행해졌다. 신18:11, 왕하21:6등도 이것과 관련이 있으나 여러 구절들(레19:31, 20:6, 대상10:13, 사8:19-20)에서 이는 정죄되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해,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상기한 방식 중 일부(꿈, 제비, 환상등)와 제사장들이 사용한 우림과 둠빔이 도구로 쓰여졌음을 살필 수 있다.
또 신약에서는 행16:16-19에 점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빌립보에 살고 있는 어떤 여자 점술가가 귀신의 힘을 빌려 점술행위를 함으로 그 주인에게 많이 이득을 주고 있는 것을 사도 바울이 그녀의 몸에서 귀신을 쫓아내어 버리는 사건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역사로 더러운 영이쫓겨나는 장면을 목도하는 것이다.
하여튼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편만했던 점술행위는 이방 이교적 전통에 기이한 것이고, 하나님과 그의 뜻을 망령되이 하는 우상숭배적이고 미신적인 행위였다. 오늘날도 버젓이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도 점쟁이앞에 나가 미래에 대한 불안한 심리를 해소하는 어리석은 신앙이 연약한 성도들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팔괘, 오행, 육효 따위의 방식으로 점을 쳐 왔다. 그들은 갖가지 방식으로 점을 쳐 어떤 신적 내지 초자연적 힘을 빌려 개인과 국가의 길흉, 화복을 미리 알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배신적 행위요, 배반적 행위요, 묘욕적 행위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교 세계 속에서 행해진 점술을 수용해서는 아니됨을 엄숙하고도 단호하게 명령하고 있다. 출22:18, 신18:10-14에는 모든 형태의 점술행위를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엄금하고 있음이 잘 드러낸다. "그 아들이나 딸을 불가운데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자나 욧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레19:26, 31; 20:6,27) 라고 말씀 하신다. 이 구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이교적인 풍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세우실 선지자에게 경청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들은 거짓예언자들이다.(겔13:19, 미3:7 등) 그들이 하는 말은 '거짓 복술'이며(사44:25, 렘14:14, 슥10:2 등), 그들은 속임수를 쓰고 사술을 쓰며(민24:1) 또 악한 영을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점은 모든 다른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행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민들에게는 엄금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너희는... 복술을 하지말며 술수를 행치말며'(레19:26)라고 했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9:31)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 율법에는 박수된 자는 돌로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도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이러한 이방 풍습을 근절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니엘서에 보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의 얘기가 나온다. 이 영특한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3년동안 바벨론의 온갖 이방지식과 미신적 실습을 배웠지만, 그들은 먼저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들보다 열배가 나았고(단1:20), 또 미신적 행위와 하나님 섬김을 혼동 하지 아니하였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박수장 벨드사살'로 칭하여 또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의 점쟁이'가 모르는 꿈의 해몽을 얻는데, 이것은 다니엘이 하나님의 지혜로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박수와 술객이 모르는 특별한 지혜와 총명을 주신 것이다.
구약의 이방세계에서 많이 나올 뿐 아니라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의 복음전도 사역에 있어서도 적대자로 나오는(행13:6) 이 박수들은 자연현상 같은 것을 보고 점을 치는 일종의 남자 무당인 것이다. 이들은 악한 영의 도움과 속임수로써 복술을 행했고, 예언을 고하는 자들인데 다니엘은 하나님의 지혜로 이들을 능가하고 바울은 성령충만하여 물리칠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다니엘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영이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더러운 영들이 침입하지 못하였고 바울에게도 성령님이 임재해 계시므로 그 '마귀의 자식'(행13:10) 박수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악한 영들과 점치는 영들은 과거나 현재에, 성경적 세계에서나 오늘의 현실에서, 또 도시나 시골에서 할 것 없이 여기저기 존재하고 있다. 바울이 유럽 전도 여행에서 제일 처음으로 마주친 것이 점치는 여자였던 것처럼 이 영들은 오늘도 복음이 가는 길을 막고 곳곳에서 유혹하며 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계를 혼란시키며 사람들을 미신과 우상숭배의 길로 이끄는 마귀에게서 나온 작태이다. 이렇게 점술 가운데에 있는 악한 영의 유혹에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노출되어 있다. 성도들이 이런 사단의 전술에 유혹되어 이끌린다면 사단의 뜻을 도와주는 것은 문론 자신의 영이 어두워 진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관점과 자세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갖가지 문화적, 정신적, 영적 현상에 대해 올바른 영적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선지자직을 갖는다는 것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만 아니라 삶과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영적 현상을 직시하고 그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는 일이다.
둘째, 기복신앙과 미래에 대한 사적인 호기심을 버려야한다. 그리스도인이 점술과 같은 미신 행위에 노출되고 연약한 것은 그들이 기복신앙과 괜한 호기심을 갖기 때문이다. 미래라는 시간 자체도 역시 하나님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오늘 염려는 오늘에 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을 의탁하지 않고 내일을 알려고 자세 자체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7 "너희는 알바 아니다"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성도의 관심사를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 그리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과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5:22)는 말씀에 순전히 순복해야 한다. 장난으로 하는 언사, 재미로 하는 운세 풀이와 사주, 호기심으로 하는 토정비결 같은 모든 모양은 버려야 한다. 이런 모양을 통해서도 사탄은 우리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점꽤가 심령을 곤고케하여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 수 있다. 경건은 모양만 있으면 안되고 능력이 있어야 하나(딤후3:5) 악은 형식, 구조, 틀, 모두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결혼 풍습 중에서 신랑이 신부집에 함을 보내는 절차가 있다. 이 함 의식은 신랑신부의 사주팔자, 궁합등을 넣어 보내는 상자를 말한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른체 생각없이 행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행해지는 함의식은 신랑 친구들의 술먹기위한 술값벌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그 술값은 타락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본인은 결혼할 때 없애버렸는데, 없애기 보다는 좋은 전통으로 살려나가면 좋을 것이다. 함속에 건강 진단서나 신앙 고백서와 감사의 글을 또는 성경책을 보내면 좋을 것이다.
넷째, 사단의 직접적인 공격과 간접적 유인을 경계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물리쳐야 한다(행13:9 성령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점도 일종의 거짓된 영의 술수임으로 그것을 물리치는 것은 하나님의 영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늘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야 한다.
다섯째, 우리의 미래는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고 그를 신뢰해야 한다. 우리의 운명은 하늘의 별이나 구름의 모습에도, 또 인간이 행하는 어떤 거짓된 점괘와 사술 가운데 있는게 아니라 우주의 주권자이신 창조주 주님의 손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 알기보다 오늘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 곧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이다. 꼭 우리의 장래를 알고 싶으면 저밤 하늘에 반짝이는 뭇 별들에게 아니라 '광명한 새벽별' 이신 주님께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나 예수는...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계22:16).
3.점술에 대한 주제별 성경연구
1) 점의 가치
(1) 거짖된 것(겔13:7)
(2) 허탄한 것(겔13:23)
(3) 속이는 것(창44:5-15)
2) 점하는 자
(1) 이방인(겔21:21-22)
(2) 타락한 자(삼상28:6-25, 겔13:6,9)
3) 점술자
(1)영혼의 사냥꾼(겔13:18)
(2)귀신들린 자(왕하21:6, 행16:16)
(3)묵시를 본다는 거짖 선지자(겔13:16)
(4)돈을 사랑하는 자(미3:11)
4) 점술을 사랑하는 자
(1)여호와께서 말씀 하셨다고 하면서(겔13:6)
(2)거짖말을 지어내서(겔13:19)
(3)헛된 묵시를 보며(겔13:9)
(4)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한 선지자로(미3:11)
5) 점하는 자의 결과
(1)여호와께서 치심(겔13:8)
(2)영혼이 죽음(겔13:19)
(3)예루살렘의 호적에서 제명당함(겔13:9)
(4)미치게 됨(사44:25)
6) 결언
(1)점은 여호와 말씀하신 것 아니다(겔13:7)
(2)점치지 못할 때가 온다(미3:6)
(3)더듬어 찾아가게 하셨다(행17:27,롬12:2,엡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