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 영성
도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관상기도』
구원의 마리헬레나 지음
이유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질 때도 가만있지 말고 그 마음을 느끼는 대로 주님께 온 마음으로 봉헌해보라.
봉헌하는 것과 그냥 자기가 불안 초조함을 가지고 있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난다.
인간과 달리 하느님은 무엇을 드렸느냐에 별 관심이 없으시고, 뭘 바치든 온 맘으로 바쳤느냐에 관심이 더 많으시다.
현재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온 맘으로 바치면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까닭 없는 분노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어릴 때 혼자 자랐거나 슬픈 경험이 있었던 사람은 쉽게 외로움이나 슬픔에 젖어 있기가 일쑤이다. 부정적인 감정이라 보지 않기에 더욱 혼자 안고 외로움과 슬픔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외로움도 계속 봉헌해가면 없어져 밝고 건강하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매사에 감사하라” 하셨는데 이와 상반되는 감정이 일어나거나 그런 자신이 의식이 될 때마다 혼자 안고 있지 말고 예수님께 꽃을 드리듯이 다 바치는 봉헌이 중요하다. 또한 괴롭고 답답하고 압박감이 드는 마음도 마찬가지로 봉헌하면 사라진다. 즐겁고 기쁜 마음도 혼자 즐거워하지 않게 이 또한 봉헌하면 사라지는 기쁨이 아닌 모든 것을 초월한 기쁨이 자리 잡게 된다.
무의식적인 것을 봉헌
계속 기도를 심도있게 해 나가다보면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아픔과 슬픔, 분노 등이 의식의 표면으로 구름 한 장이 떠오르듯 살짝 고개를 내미는 걸 만나게 된다. 이럴 때 이런 것들도 떠올라오는 그때 그때 봉헌하는 것이다.
왜 기도를 하면 바라보고 싶지 않은 어릴 때의 억압된 감정과 사건들이 떠오르는지 가끔 의아해 할 수 있다. 인자하신 주님은 기도하는 사이에 하나하나 내면을 정리해주시고 비우게 해주시는 것이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비추어 주시어 그것도 주님께 바침(봉헌)으로 비워내라 하심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도 제대로 기도를 꾸준히 하다보면 다 비워져 마치 상처 없이 밝게 자란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주님께 자신의 분노와 아픔을 기도 속에서 꾸준히 바쳐왔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고통의 선물(봉헌)을 아주 귀하게 받으시고 아픔과 슬픔이 자리했던 그 빈자리에 당신 속성인 평화와 기쁨을 나누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다. 자기가 어릴 때부터 유산처럼 가지고 있는 그게 슬픔이든 아픔이든, 이 소유를 주님께 다 드리지 않고서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 드리기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것은, 첫째는 그것이 분노, 슬픔, 성질내는 것 등 마치 넝마처럼 구질구질한 것들이라 드리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고, 둘째는 넝마조각 같은 것들임에도 자신의 일부처럼 덮씌워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져 벗기가 어렵고, 또 벗으면 허전해질 것 같아 계속 걸치고 싶기 때문이다.
그걸 다 바치면 주님께서 당신 영광으로 감싸주실 거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음에도 선뜻 내놓기가 어려운 것이 이 때문같다.
이처럼 가지고는 있지만 좋지 않은 것도 바치기가 힘든데 하물며 좋고 선하고 아름답고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더욱 아까워서 바치기가(봉헌하기가) 힘들 것이다. 이 좋은 것을 다 바치고 나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는데도 그 실천이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여튼 다 바친다(봉헌한다)는 것은 큰 믿음 없이는 쉽지 않다.
인간 본성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신 안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어떤 것(슬픔이나 고통 등)을 비워내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또 상처들은 자신의 존재의 일부처럼 되어 버리다시피 해서 벗어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마치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첫 감정만 그렇게 느끼지, 막상 봉헌해놓고 나면 개운하고 시원하고 공중을 나는 새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며 종달새처럼 기쁨을 노래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무화(無化)에 이르기까지 짜내어 주님께 드리면 그 비어있는 곳에 주님은 주님 자신으로 채워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다 바치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라면, 좋은 것을 지녔다가 바치는 것이나,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다가 바치는 것이나 같다. 결국 핵심 포인트는 「다 바치는 것」이니 어떤 것을 지녔다가 바치는가는 주님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고통을 지녔다(소유했다) 바치는 사람은 아픈 깊이만큼 훨씬 더 깊은 봉헌이 필요하다. “십자가가 큰 만큼 영광도 크다”는 말은 이런 상처가 깊고 많은 사람에게 해당이 된다. 중요한 포인트는 자신이 지닌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봉헌하는 것이다. 좋은 것도 궂은 것도 남김없이 바치는 것이다.
아픔과 상처가 깊고 큰 사람은 주님의 수난에 더 깊이 참여하고 더 주님과 닮은 사람이 되도록 부름(초대)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천국에서 주님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볼 때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이런 고통들이 가장 큰 은혜로 바뀌게 됨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고통은 지상의 눈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 세상은 그 진가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과 십자가는 영원의 선상에서 평가할 때 제대로 평가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잘 아시기에 인간이 좁은 눈으로 불평해도 못 들은 척 하시는 것 같다. 그러다가 우리는 나중에서야 “아! 주님이 이 때문에 이런 고통을 허락하셨구나. 그 고통이 없었더라면 아마 망나니가 되었을 거야!” 하고 감사하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주님은 이때가 오리라 알기에 묵묵히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다.
또한 자신 안의 좋은 것을 볼 때도 예를 들면, 그 좋고 예쁘고 재기발랄한 재주를 볼 때마다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해드리면 자신 안에 갇히는 나르시시즘이나 바리사이처럼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게 된다. 만일 자신이 미인이라면 거울 앞의 아름다운 자신의 미모를 보고 감탄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그 마음을 즉시 하느님께 드리면서 참 잘 만들어주심을 감사하고 찬미 드리면 자신 안에 갇혀 우쭐거리고 자신 만만해하는 모습이 비워진다.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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