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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골짜기 경상도 산청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안양에 터를 잡은 지 어언 37년,
지난 정월대보름 축제 행사를 보러갔다가 문화유산해설사회 8기에 가입 신청을 하였습니다.
안양문화원에서 충북 제천으로 역사탐방 일정이 잡혀있어서 1년 남짓 직장생활을 한 추억이 있는 제천 역사탐방에 동행하였습니다.
1. 탐방일정 : 2023.4.11(화)
2. 탐방장소 : 제천 의림지 및 청풍문화재단지
아침 8시 30분 안양문화원 앞에서 두 대의 버스를 나뉘어 타고 안양문화원 회원들이 탐방길에 올랐습니다.
문화로 가슴 뛰는 안양
안양문화원 목걸이 표찰
<제천 의림지 역사박물관>
제천 의림지 역사박물관의 모습
안양문화원장님과 안양문화원 회원들이 제천시 문화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박물관으로 들어갑니다.
박물관 입구 벽면에 의림지(義林池)를 노래한 완당 김정희(阮堂 金正喜, 1786~1856)선생의 시(詩)가 적혀 있습니다.
점말동굴에 살았던 사람들
석기시대 사람들은 햇볕이 잘 들면서 비바람을 막아주는 동굴(洞窟)에 살면서 뼈나 돌을 이용한 도구를 사용하여 사냥이나 식물채집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의림지를 노래하고 그린 그림들
의림지 제방 축조기술의 연구.
1972년 8월 태풍으로 인하여 의림지 제방의 일부가 유실되면서 드러난 제방을 조사한 결과 성질이 서로 다른 흙을 차례로 쌓은 판축법(版築法)에 식물의 풀이나 나뭇가지를 넣은 부엽공법(敷葉工法)을 활용한 첨단기술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넓은 청전뜰로 물을 공급하는 관개수로(灌漑水路)의 체계는 집수(集水)→저수(貯水)→도수(導水)→배수(排水)의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의 논으로 물을 퍼올려서 공급하는 무자위(水車, 수차)는 아랫부분을 물에 잠기게 설치하고 한 사람이 올라가서 날개를 밟아 내리면 사람의 무게에 의해 바퀴가 돌고, 바퀴의 날개는 물을 쳐서 밀어 올린다.
올려진 물은 판자로 만든 물 길(홈통)을 따라 흘러나온다.
<제천 의림지>
박물관 남쪽에는 김제 벽골제(金堤 碧骨堤), 밀양 수산제(密陽 守山堤)와 함께 고대 수리시설(水利施設)의 하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중의 하나인 삼한시대에 조성된 의림지(義林池, 국가명승 제20호)가 있습니다.
충청•경기도를 호서지방(湖西地方)이라 칭할 때 기준이 되는 호수(湖水)가 바로 의림지 입니다.
벚꽃이 활짝 핀 못 한가운데에는 조선시대 궁궐로 진상하였던 수련과(睡蓮科)의 순채(蓴菜)가 자생하는 순주섬이 있습니다.
의림지에 가두었던 못의 물이 넘치는 것을 흘려보내는 배수로 역할을 하는 서쪽의 용추폭포
용두산(龍頭山)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이 집중호우 때 오른쪽 의림지로 급하게 유입되지 않도록 중간 부분에 자연 암반으로 된 수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용의 울음소리 같다고 하여 이름붙은 용추폭포(龍湫瀑布) 위에는 유리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노송(老松) 숲 속에 들어앉은 아름다운 경호루(鏡湖樓)는 1948년 당시 제천 군수 김득연(金得鍊)과 서장 김경술(金京述)의 발기로 설치되어 의림지를 찾는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됩니다.
누각 안에 걸린 경호루 현판(懸板)
농경문화의 발상지 의림지(義林池)
의림지는 주변에 수백 년된 노송(老松)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어서 제림(堤林)이라고도 불려집니다.
남쪽 제방에는 1807년(순조 7년)에 이집경(李集慶)이 세운 후 6•25 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1954년에 고쳐 지은 앞면 2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영호정(暎湖亭)이 있습니다.
제방(堤防) 위의 노송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영호정은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 창의 당시 제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이강년(李康秊)이 제천 전투에서 승리한 후 부하 장수들과 정치를 논하였던 곳입니다.
호수의 동쪽에는 의림지를 축조했다고 알려진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고향을 그리며 가야금을 연주하였던 제비바위(燕子巖)가 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천시에서 2007년에 우륵정(于勒亭)을 세웠습니다.
의림지 탐방을 마치고 제천시 장락동에 있는 한방고기정식 전문점 박달재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청풍문화재단지>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던 날씨가 청풍문화재단지에 도착하자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우의를 입고, 우산을 쓰고 탐방을 계속 이어갑니다.
1983년 청풍호가 생기면서 24개 마을이 물에 잠기게되자 충청북도에서 이 지역 안에 있는 한벽루를 비롯한 5동의 관아 건물과 청풍향교, 석조여래입상 그리고 전통적 양식을 갖춘 민가 4동과 비석 등 36건의 유형문화재들을 이전하였습니다.
청풍부(淸風府)로 들어가는 관문인 팔영루(八詠樓)는 고종 때 부사 민치상이 청풍명월의 8경을 읊은 팔영시(八詠詩)가 있어 이름 붙였습니다.
청풍부(淸風府)의 정문(正門)인 금남루(錦南樓, 충북 유형문화재 제20호)의 앞쪽에는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 현판(懸板)이 걸려있고,
안쪽에서 보면 금남루(錦南樓)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금남루를 들어서면 청풍부의 동헌(東軒)으로 부사의 집무장소 및 집회장소로 쓰였던 금병헌(錦屛軒, 충북 유형문화재 제34호)이 자리합니다.
정면 6칸의 금병헌의 좌측 3칸은 방이고 오른쪽 3칸은 부사의 대청으로 된 업무공간입니다.
금병헌은 유일하게 단청을 하지않은 건물로 당시 행정관의 검소한 생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사(府使)가 동헌 대청마루에 높게 앉아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대청마루 안에는 청풍관(淸風館)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금병헌 동쪽에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한 기념으로 연회장소로 사용된 세운 한벽루(寒碧樓)가 자리합니다.
한벽루는 앞면 4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 옆면 1칸의 계단식 익랑(翼廊)으로 이어진 독특한 건물입니다.
1972년 수해로 건물 일부가 유실되어 1976년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보물 제528호 한벽루 표시석
누각을 올라갈 때 계단 역할을 하는 '익랑(翼廊)은 조선시대 3대 익랑누각(建築物) 중 하나로 현존하는 건축물로써 유일한 양식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헌인 금병헌과 한벽루 사이에는 관아의 부속건물로써 용무차 내려온 중앙관속들의 객사(客舍)로 이용된 응청각(凝淸閣, 충북 유형문화재 제90호)이 자리합니다.
응청각과 금병헌
청풍문화재단지 안에는 청풍호가 생기면서 수몰된 민가(民家) 4동이 이건(移建)되었습니다.
제천 도화리 고가( 桃花里 古家, 충북 유형문화재 제83호)에서 설명을 하는 제천시 문화해설사님
도화리 고가는 'ㄷ'자형의 집으로 왼쪽에는 방, 부엌, 광이 배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세칸 크기의 대청이, 오른쪽에는 방2칸의 부엌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은 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담벼락은 막돌로 쌓은 토석담(土石壁)에 짚으로 이엉을 얹었습니다.
제천 후산리 고가(後山里 古家, 충북 유형문화재 제85호)는 'ㄱ'자형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동남을 향해 이루어진 민가입니다.
대청마루 안쪽에는 제사를 모시는 제실(祭室)방을 꾸렸습니다.
오른쪽 방 2칸의 건넌방은 마루를 높여 함실 아궁이를 설치하고 지붕을 덧대어서 베란다처럼 활용하였습니다.
부엌에는 보통의 민가에서는 설치하지 않는 홍살을 설치하여 액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제천 지곡리 고가(池谷里 古家, 충북 유형문화재 제89호)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고 대문은 한번 꺾여서 들어가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행랑채와 사랑채는 'ㅡ'자형의 초가로 되어있고, 안채는 'ㄱ'자형의 팔작기와 집으로 사랑채와의 사이를 담장으로 경계를 이루고 사랑채로 연결하는 관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습니다.
석물군(石物群)
문화재단지 조성 당시 고대사회의 장례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선사시대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조선시대 군수나 부사의 공덕비, 송덕비, 선정비 등 비지정문화재 32점을 옮겨 놓았으며 1997년 제천향교에서 비석 10점을 추가로 옮겨 이곳에 배치함으로써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한강변의 비석문화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고인돌과 성혈(星穴)
본 고인돌(支石墓)은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황석리 지역에서 옮겨 온 남방식 고인돌로
특히, 중앙에 배치된 고인돌은 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성혈(星穴)이 새겨져 있어서 특이하다.
약 2,500여년의 긴 세월을 거치면서 풍화작용에 의해 다른 별자리는 마모되어 알 수 없지만 북두칠성(큰곰자리)과 북극성(작은곰자리) 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동헌인 금병헌(錦屛헌) 뒷쪽으로는 망월성(望月城)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망월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변함없는 사랑을 나누는 연리지(連理枝)가 있습니다.
망월산성(望月山城, 충북 기념물 제93호)으로 올라 가는 길
멋진 몸매를 자랑하는 'S라인 벚나무'
망월산성에서 바라본 망월루와 청풍호, 청풍대교, 청풍문화재단지의 모습
망월산(해발 373m)의 정상에 있는 전망대인 망월루(望月樓) 아래에는 청풍 성열현인 악성우륵 탄강유지비(淸風省熱縣人樂聖于勒誕降遺址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악성 우륵은 청풍 성열현에서 탄강하였다.
서기 550년 신라 진흥왕이 청풍강 유역의 백제 금현성(金峴城)과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취하였다.
551년 진흥왕은 점령지역을 순수(巡狩)하면서 우륵을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 탄주(彈奏) 한 하림조(河臨調)는 우리나라 악조(樂調)의 시초이다.
망월루에서 바라본 청풍호 주변
망월루에서 바라본 청풍대교와 청풍문화재단지의 모습
어느새 나뭇잎이 초록으로 물들어 갑니다.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勿台里 石造如來立像)
청풍면 읍리 대광사 입구에 있던 높이 3m 41Cm의 거대한 석불로 신라말 고려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당초에는 불상각(佛像閣)이 없었으나 이전시 불상각을 새로 지었다.
불상의 머리는 소발 위에 육계가 있고 미간에 백호의 흔적이 완연하며 약간의 살이 오른 얼굴은 뚜렷한 인중과 어깨에 닿은 긴 귀 및 목의 삼도와 어울려 자비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보물 제546호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표시석
청풍문화재단지 내에는 연리지 이외에도 다양한 모습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심장(하트)를 품은 소나무
청풍명월(淸風明月)
양반고장의 온화한 심성과 청풍명월의 고장을 상징하는 높이 8m, 돌레 85Cm의 제천 수산면 화강석에 새긴 [청풍명월] 비석
동헌인 금병헌 아래쪽에 청풍향교(淸風鄕校)가 있는데 현재 보수공사 중이어서 관람불가 구역입니다.
청풍향교에서 정문으로 나오는 길목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 안양시 문화원 문화가족이 되어 함께한 첫 역사탐방의 추억을 남겨봅니다.
아울러 안양문화원장님과 문화원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탐방이 기다려집니다.
첫댓글 강호인선생님~~
생생하고 격조높은 문화원 답사길 정리 잘봤습니다. 덕분에 와유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셨다니 감사합니다.
제천에서 근무할 당시 의림지와 청풍호를 몇 번 방문하였었는데 오랫만에 찾아서 좋았습니다.
부회장님의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우아~ 이렇게 역사탐방을 잘 보고 즐기고 오셨군요. 세세히 남기신 글보고 제가 직접 답사 다녀 온 느낌을 받았습니다. 후기 잘봤습니다^^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답사를 다녀와서 이렇게나마 정리를 하면서 한번 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