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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충주 8만조선군 학살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수회에 세례받은 독실한 예수회 신자다.
예수회가 세계를 배후에서 지배하고 교황청 조차 지배하는 최고의 군대조직이라는건
예수회 요원 알베르토 리베라가 폭로했다.
조총도 예수회 신부가 일본에 와서 준 것이고, 조총병들을 능수능란하게 양성한 오다 노부나가도 예수회가 주는 조총을 받으며 그리 한 것이다.
예수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지구본을 보여주며 야망을 품게해줬다는거 모두 팩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임진왜란을 일으키라 부추겼음은
[간양록]이란 기록이 증거하고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때 조선침공군의 제1군 선봉장이었고
제2차 침공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수많은 조선군과 조선인들을 학살하며 전쟁에서 주도적으로 승리를
이끌어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돌아온 내 아들"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의 주군은 어디까지나 로마교황이었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에는 최고위급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가 있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여러번 만날 정도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는 예수회 총장의 명령으로 일본과 임진왜란에 대해 보고서를
썼는데. 이 보고서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日本史'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에도 진주박물관이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국립진주박물관)
그 보고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밀(비밀)로 주고받은 편지들까지
모조리 수록해놓고 히데요시가 잠자는 침실의 색깔과 방 구조까지 상세하게 적고
조선 기록들,일본 기록들도 적지않거나 적지못한 상세한 임진왜란 당시 전투 내용과
전투,행군 일정. 당시의 조선 사회와 일본 사회의 모습 등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
보고되고있고 조선군의 투구,갑옷까지 상세히 묘사되고 조선군이 지키는 성 안의
병기창고에 대포가 몇개이고 포알은 몇개이고 무기들은 무슨 종류로 얼마나 보관되어있는지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다.
그가 과연 단순한 신부였다면 어떻게 이게 가능하겠는가.
그는 스파이 신부였다. 예수회가 세계를 배후에서 지배하고 조종하고 권력자들을 조종하거나
암살하며 전쟁을 일으키고다닌다는건 예수회 요원 알베르토 리베라가 이미 폭로했고
역사가 에드몽 파리의 [예수회의 비밀역사] 책이 모두 상세히 적고있다.
일본측에도 예수회가 일본을 지배하기위해 오다 노부나가를 암살한 것이라는 것이 이미 폭로되어 많이 알려져있다.
[빌리배트]란 일본 만화에도 임진왜란 당시 예수회 신부가 닌자를 예수회에 세례받고
믿게했다는 역사가 나온다. 닌자 조차 예수회의 고용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최고위급 예수회 신부이며 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해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을 이교도라고 보고서에 적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성모마리아를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나님이 쓰시는 칼. 임진왜란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적었다.
이제부터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를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예수회가 충주 탄금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아보자.
"(충주 탄금대에)최후의 운명을 걸고서 서울로부터 온 8만 명의 군대가 그들을 목표로 출진(出陣)해 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마병으로서 일본군과의 야전을 치르기 위해 선발된 왕궁의 신분 있는 병사들이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변란이 있을 처음에 신립(申砬)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에서 적을 방어하였는데, 신립이 험조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원 광야(平原廣野)로 영입(迎入 :적군을 유인)함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10만의 정병(精兵:정예병)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경성(京城)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이 파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變初, 以申砬爲都巡察使, 領大軍, 禦賊于鳥嶺。 砬不爲據險把截之計, 迎入於平原廣野, 左右彌滿, 曾未交鋒, 而十萬精兵, 一敗塗地。 遂使京城不守, 乘輿播越, 痛哉! -선조실록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24일(신묘) 3번째기사
서울 정예병 1만명. 전원 말 태움.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천 명) (선조수정실록,정만록)
유성룡 장사 8천. 전원 말 태움. (선조수정실록,징비록)
서울 인근 고을 군사 8천 (선조수정실록)
충주 고을들 징집 8천 (징비록)
상번 경군(기병,보병) - 기병 23700명 , 보병 16200명 (서애집)
이일의 상주군(경상도이거나 충청도군이거나 북방군일것으로 추측됨.) - 보병 2만명 (프로이스 일본사)
= 상주군을 제외하면 도합 73900명 . 상주군을 포함시키면 93900명.
"4월28일 맑음, 오각(정오)에 충주 도착. "- 일본 서정일기 4월27일자
"적이 고개를 넘어 들어오니 들에는 번득이는 칼들로 가득 찼다. "- 송시열(宋時烈)의 우암집(尤庵集)
기동력이 완전 죽어버렸다. 궁기병의 히트 앤 런 사격전법이 불가능했고 진격 속도도 심히 더뎠다. 완전 거북이가 따로 없었따.
"충주 근처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아고스띠뇨(고니시)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 마을에 도착하자, 역관(경응순)이 약속대로 와서 기다리기는커녕 조선 국왕의 회답 대신 최후의 운명을 걸고서 서울로부터 온 8만 명의 군대가 그들을 목표로 출진(出陣)해 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마병으로서 일본군과의 야전을 치르기 위해 선발된 왕궁의 신분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병력 수에서도 훨씬 우세하였고, 아고스띠뇨의 군대가 도중에 피로를 무릅쓰면서 무리해서 진격해 오기 떄문에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일본인들도 피아의 병력 차가 너무 크고 불균형한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하고 주저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그런 것도 모르고 .. 신립 8만군은 일본군의 좌군,우군,배후 공격 부대,충주성 점령 기동부대의 존재를 까마득히 모르고 일본군의 중앙군만 보고 승리를 확신하고 학익진을 펼쳐 중앙군을 포위해 그들이 단월역(충주 건국대 캠퍼스)에서 절대 빠져나가지못하게하려고 용맹하게 진군해오고있는 중...,
신립 8만군이 기나긴 학익진을 펴고 거북이 걸음으로 단월역 앞의 일본군을 향해 오는 사이 벌써 일본군의 좌군,우군이
조선군의 학익진의 동쪽과 서쪽이 올 자리에 각각 배치되어 목책도 깔고 매복을 끝내고 대기를 탔다.
"그러나 아고스띠뇨(고니시)는 용감한 지휘관으로서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어 병사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후퇴는 비겁하다. 적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것으로 이는 명백한 패배의 표시이다.
이미 우리는 커다란 명예와 위신을 걸고 조선인으로부터 많은 땅을 탈취하였고,
국왕의 도시인 서울을 얼마 후에 함락시키려고 하는 지금에 이으러 이때까지 승리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행운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가 이 같은 도리를 간결하게 말하자 병사 일동은 그의 설득으로 용기가 북돋았다.
그곳에서 아고스띠뇨는 병사들에게 전투 대열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고니시 유키나가의 명연설에 감동한 일본군이 전원 사기 100%가 되어버려 함성을 지르곤 전원~~ 전투 대열~!을 갖춘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곳에서 아고스띠뇨는 병사들에게 전투 대열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게다가 "막상 부딪쳐서는 조선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아무 깃발도 올리지 말고 의기(意氣)를 잃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진격시켜라. 추후에 깃발을 일제히 펄럭이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명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혹시나 조선인들이 눈치를 깔까봐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앙군에게 깃발을 전부 내리고 기운을 잃은듯이 천천히 진군하라고했다.
중앙군의 진군 지점은 딱 좌군과 우군이 매복되어있는 지점까지였다.
조선 8만의 시선이 모조리 중앙군으로 향하게하여 좌군과 우군의 존재를 절대로 깨닫지못하게하기위해서였다.
그렇게하여.. 잠시후.. 조선군 8만과 일본 중앙군이 마주 치자 갑자기 중앙군의 깃발이 일제히 무수히 펄럭여서
엄청나게 많은 군대인것같은 착각을 들게한다! 조선군 8만은 갑자기 숫자가 많아진것같이 보이는 중앙군을 보고 시각의 혼란을
일으키는 사이
그 때 일본군의 좌군과 우군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조총을 우레와 같이 퍼붓고 장궁을 쏴대며
중앙군 역시 조총과 장궁을 우레,비오듯 퍼부었다. 조선 8만군의 동쪽과 서쪽이 강력한 조총 포화 사격 난타를 파바바바바바박
받아버린것이다. 땅땅땅땅 타타타타탕 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히히히히히힝!!!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逡巡之際,賊遶出我軍之左,東西挾擊,我師大亂.被賊亂砍,積尸如山,軍資軍器,一時俱盡,砬單騎至江岸,賊縱兵追之- 상촌집
늪지가 되버린 논밭과 일본군이 깔은 목책 때문에 제대로 접근도 못해보고 조총알들을 무수히 얻어맞아 사상자가 늘어만가는 조선군 8만은 견디지못하고 일단 뒤로 물러난다.
조선 8만군은 다시 무려 3차례나 돌격하지만 말발굽이 푹푹 빠지는 늪지인 논밭 때문에 기동력이 죽은 것 땜에 조총 포화 사격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양쪽 군대가 이미 접근하였을 때 조선군의 예상은 어긋났다. 깃발들이 펄럭이고 다수의 일본인 병사들이 모습을 나타내고서 조선군의 양쪽 끝을 노리고서 맹렬한 포화를 퍼부었다. 조선군은 그러한 공격에 견딜 수 없게 되어 조금 후퇴하였다가 이내 태세를 가다듬어 한두 번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매우 계획적으로 진격하면서 총포에 더하여 대도大刀의 위력으로써 맹렬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에,"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그 사이 충주성이 일본군의 기동 부대에 점령을 당했다. 연이어 탄금대 지휘소도 일본군의 배후 기동 공격 부대에 공격당했다.
신립이 황급하여 어찌할줄을 모르고 아무리 탄금대 지휘소를 탈출하려해도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신립은 일본 기동부대에게
포위당해 소드마스터가 되어 거침없는 칼싸움을 하고있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조선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지고 숨어버렸다... ." -선조수정실록
그 소식에 놀란 8만 조선군들은 당황하여 일본군은 60만이나 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갔고 ㅇㅂ를 받아버려
확고한 믿음이 되어버렸다.
그 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생 20살 사무라이 고니시 루이스의 일본군 기동부대에게 포위당해 외로운 사투를 하던 신립의 목이 결국 달아나버리자 조선 8만군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시작..!
"모가지가 똑 떨어졌다는겨. 신립이 모가지가…" - 1984년에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동에서 조사된 것. <<한국구비문학대계>> 7-17, 518-523면
탈출자는 겨우 4명.
"뒤는 달천강이고. 사방은 포위당해.., 4면으로 포위당해 빠져나갈 길이 도저히 없었다."
"대부분 강물에 빠져죽었다."
"장수,병졸 할것없이 모든 군사가 ... 전군全軍이 강물에 빠져죽었다."
"탈출자는 4명에 불과"
"강가에 작은 배가 있어서 너도 나도 타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는데 강가에 얕은 여운이 없고 수량이 많고
무지 깊어서 꼬르륵 다 뒤졌다."
"신립이 포위를 뚫으려고 2~3번 연달아 진격했으나 도저히 포위를 뚫을수없었다."
이런 기록만 있음.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조정에서 순변사 신립을 보내 방어하게 했으나, 충주에서 패전하고 모든 군사가 월락탄에서 모조리 (물에) 빠졌다" (朝廷遣巡邊使申砬禦之, 砬到忠州敗軍, 全軍更沒於月落灘) -선조실록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선조수정실록
전투 종결 후 일본군은 조선군 시체들 중 급이 높아보이는 자 3000구만 목을 베고 조선군 항복자 수백명을 받아들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풍동에서 고니시군의 싸우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존경과 감탄을 표했다.
문경새재에서 8만으로 뻐겼으면 버텼을거를 그놈의 빨리 빨리 근성 때문에 단기전으로 빨랑 속전속결 끝내려하다가
참혹한 멸망을 당해버린 조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4월28일 맑음 - 대주(종의지)와 섭주(소서행장) 병력이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0급, 포로 수백명. 적 대장 신입석 전사."
- 일본 서정일기 4월27일자 기록
"변란이 있을 처음에 신립(申砬)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에서 적을 방어하였는데, 신립이 험조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원 광야(平原廣野)로 영입(迎入 :적군을 유인)함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10만의 정병(精兵:정예병)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경성(京城)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이 파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變初, 以申砬爲都巡察使, 領大軍, 禦賊于鳥嶺。 砬不爲據險把截之計, 迎入於平原廣野, 左右彌滿, 曾未交鋒, 而十萬精兵, 一敗塗地。 遂使京城不守, 乘輿播越, 痛哉! -선조실록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24일(신묘) 3번째기사
1592년 4월 28일 일본군의 충주 민간인 대학살
충주의 사민과 관속들은 신립군이 6만 대군大軍이나 되어서 신립을 믿고 피난하지 않아 전투 종결 후 일본군에 학살당한 것으로 난중잡록이 적고있다.
당시 일본군은 4월 28일에 충주에서 조선 대신 정탁, 이덕형 , 역관 경응순을 만나 조선 왕의 항복을 받기로했고 조선 조정도 그리
약속했는데 조선의 6만~10만 대군이 미리 충주 평야에 진을 쳐 기다리고있다가 일본군을 쳤기에 일본군은 이에 앙심을 품고
"정탁과 이덕형을 내보내라!!!"하며 닥치는대로 충주 민간인 대학살을 저지르고 온갖 재물을 약탈했다고 적고있다.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 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 -난중잡록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한성 방화가 선조의 짓이라 적었지만 조선 사관들은 의리로 충만한지라 백성들이 지른거라 뻥쳤다.
조선 전기의 청와로 꽤 덮이고 궁궐 규모도 지금보단 더 컸던 경복궁은 그렇게 활활 재로 사라져버렸다.
참혹한 패전에 할 말을 잃은 조선국왕 썬조는 궁궐에 모조리 불지르고 튀었다.
"충주 근처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아고스띠뇨(고니시)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 마을에 도착하자, 역관(경응순)이 약속대로 와서 기다리기는커녕 조선 국왕의 회답 대신 최후의 운명을 걸고서 서울로부터 온 8만 명의 군대가 그들을 목표로 출진(出陣)해 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마병으로서 일본군과의 야전을 치르기 위해 선발된 왕궁의 신분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병력 수에서도 훨씬 우세하였고, 아고스띠뇨의 군대가 도중에 피로를 무릅쓰면서 무리해서 진격해 오기 떄문에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일본인들도 피아의 병력 차가 너무 크고 불균형한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하고 주저하였다.
그러나 아고스띠뇨(고니시)는 용감한 지휘관으로서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어 병사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후퇴는 비겁하다. 적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것으로 이는 명백한 패배의 표시이다.
이미 우리는 커다란 명예와 위신을 걸고 조선인으로부터 많은 땅을 탈취하였고,
국왕의 도시인 서울을 얼마 후에 함락시키려고 하는 지금에 이으러 이때까지 승리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행운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가 이 같은 도리를 간결하게 말하자 병사 일동은 그의 설득으로 용기가 북돋았다.
그곳에서 아고스띠뇨는 병사들에게 전투 대열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게다가 "막상 부딪쳐서는 조선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아무 깃발도 올리지 말고 의기(意氣)를 잃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진격시켜라. 추후에 깃발을 일제히 펄럭이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명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변란이 있을 처음에 신립(申砬)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에서 적을 방어하였는데, 신립이 험조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원 광야(平原廣野)로 영입(迎入 :적군을 유인)함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10만의 정병(精兵:정예병)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경성(京城)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이 파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變初, 以申砬爲都巡察使, 領大軍, 禦賊于鳥嶺。 砬不爲據險把截之計, 迎入於平原廣野, 左右彌滿, 曾未交鋒, 而十萬精兵, 一敗塗地。 遂使京城不守, 乘輿播越, 痛哉! -선조실록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24일(신묘) 3번째기사
"이튿날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조선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지고 숨어버렸다...
충주성 안의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선조수정실록
"왜군이 28일에 길을 나누어 크게 밀려 닥쳤다...."왜적의 군사는 60만이라 하였는데 그 형세가 미친 물결처럼 한꺼번에 솟구쳐 진격해 왔다." -연려실기술
"적이 우리 군사의 좌우를 포위해 나오는데 세력이 풍우(風雨)와 같았다. 한 길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오고 한 길은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포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탄환이 빗발 같고 먼지는 하늘을 덮었고 고함치는 소리는 산을 흔들었다. 왜적의 형세가 더욱 급하여 점점 둘러싸니 사방에 길이 없었다. 신립이 황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에 충돌하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나아갈 수 없어" -재조번방지
"조금 후에 적군이 단월역(丹月驛)으로부터 길을 나누어 쳐들어 오는데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한 길로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나오고, 또 한 길은 강을 따라 내려 오니 총 소리는 땅을 진동시키고 먼지는 하늘에 가득하였다 " -징비록
"적이 고개를 넘어 들어오니 들에는 번득이는 칼들로 가득 찼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여 나가 싸웠다. 몸소 적진을 두 번이나 돌파하려했으나 적이 너무 강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적이 우리 군대의 오른쪽을 돌아 압도적인 기세로 동서에서 협공하여 왔다."- 송시열(宋時烈)의 우암집(尤庵集)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 상촌집
"왜적이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선조실록
"포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탄환이 빗발 같고 먼지는 하늘을 덮었고 고함치는 소리는 산을 흔들었다." -재조번방지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선조수정실록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조정에서 순변사 신립을 보내 방어하게 했으나, 충주에서 패전하고 모든 군사가 월락탄에서 모조리 (물에) 빠졌다" (朝廷遣巡邊使申砬禦之, 砬到忠州敗軍, 全軍更沒於月落灘) -선조실록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선조수정실록
"일본세의 이런 형세를 보고 심신이 떨리어 병졸들은 도망하든지 뒤의 책망이나 부끄러움에 강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회본태합기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여러 군사들이 모조리 강물에 뛰어들어 시체가 강물을 덮고 떠내려갔다. 김여물도 혼란한 군사 속에서 죽었다." -유성룡의 징비록
"아군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장수와 졸병이 겁결에 모두 달래강물에 뛰어들었다. 적이 칼로 마구 찍어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다." -연려실기술
이상 살펴보았듯 예수회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독실한 예수회 회원
고니시 유키나가로 하여금 충주 8만 조선군을 학살하고 조선팔도를 피바다로
만들어 성모마리아를 위해 이교도 조선을 종교재판한 악마들이다.
예수회는 위험한 마귀들이며 교황청은 가증한 사탄의 처소이다.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사탄의 종교다.
예수회는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에게 세례를 주어 조선으로 침투하려했으나
인조가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져 소현세자를 죽여주는 덕분에
다행히도 예수회는 들어오지못했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신자들을 떼거리로 목을 잘라버린건 정말로 잘한 일이다.
천주교는 우리 조선민족의 철천지 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