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 가이치 - 고아원 운영, 아내 우에노 다키와 더불어 단 둘뿐인 양화진의 일본인 안장자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 1867-1962)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네무라(曾根村)에서 출생했다. 오카야마(岡山)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893년 노르웨이 선박 선원으로 홍콩에 체재하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독일인 경영의 공장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다. 그 후 방랑 생활을 계속하다가 1899년에는 술에 취해 길에 쓸어져 빈사(瀕死) 상태에 있을 때 한국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 한국에 은혜를 갚고자 1905년 6월 내한하였다. 서울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이상재 선생의 감화로 1906년 기독교인이 되어 ‘백만명 구령운동’에 가담하였고, 경성(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3·1 운동과 105인 사건 때에는 한국인 청년지도자들의 석방에 앞장섰다. 특히 가마쿠라 보육원장으로 수천의 한국 고아들을 양육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다 이집 저집 안고 다니며 젓 동냥을 하기도 했고, 밤새워 우는 아이들을 안고 꼬박 날을 밝히는 일이 많기도 했다. 1943년 가을 부인 우에노에게 고아원을 맡기고 원산(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8‧15 광복 후 1947년 10월 13일 서울로 돌아와 부인을 잠깐 만난 뒤 부산으로 걸어가 1947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자료:전택부,이 땅에 묻히리라,1986) 귀국 후에도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사정을 안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5월 15일 다시 내한하였다. 서울의 옛집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국민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하여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기도와 성경 봉독, 그리고 재건운동본부장(柳達永), 보사부장관(鄭熙燮), 서울시장(尹泰日)의 조사가 있었다. 유족으로 조카딸 마스다(增田須美子)가 참석하였으며, 박정희 의장과 일본외상(小坂)은 조화를 보냈다. 유달영은 조사에서 “소다 옹의 생애는 어느 사회사업가보다 우리들에게 감격과 충격을 준다. 소다의 생애처럼 깨끗한 인류애와 사랑만이 한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 한국일보, 1962. 4. 2 기사)
우에노 다끼(上野, )
우에노 다끼(上野, Takiko, 1878-1950)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나가사키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내한하여 소학교(日新) 교사로 봉직했다. 1908년 30세 때 41세의 소다 가이치와 결혼했다.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여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남편을 도와 보모가 되었다. 1943년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에는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가 1950년 1월 14일 74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소다(曾田)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줄 걸로 믿습니다.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전택부는 기록했다. 묘비에는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 이어늘”이라는 주요한 시가 쓰여 있다.
'전쟁 범죄 참회' 촉구한 '일본의 양심' 소다 가이치
연합뉴스 기사 송고시간 : 2020-11-09 07:00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소다 가이치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867년 10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출생했다. 1913년 서울에서 가마쿠라(鎌倉)보육원을 창설하매,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가 수천이리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속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국민적 참회를 할 것을 순회 역설했다. 95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가마쿠라보육원 자리에 있는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長逝)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 연합으로 비를 세우노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이곳에 안장된 유해는 모두 417명이다. 묘비의 주인공은 대부분 서양인이지만 유일하게 일본인 이름이 눈에 띈다. 비석 전면에는 십자가와 함께 '孤兒(고아)의 慈父(자부) 曾田嘉伊智先生之墓(소다 가이치 선생 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고아들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부인 우에노 다키코(上野瀧子)와 함께 잠든 곳이다.
소다는 젊은 시절 초등학교 교사와 탄광 광부, 노르웨이 상선 선원, 독일 회사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 등지에서도 일하며 쑨원(孫文)의 중국 혁명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나 타고난 방랑벽 탓에 정착하지 못했다.
1899년 어느 날 대만에서 술에 취해 길을 가다 넘어져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긴 한 한국인이 여관으로 업고 데려가 치료해주고 밥값까지 내줬다. 소다는 남의 도움으로 얻게 된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은인의 나라에서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1905년 6월 한국에 건너왔다. 소다는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전신)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YMCA 종교부 총무를 맡고 있던 월남 이상재를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화돼 개신교에 귀의했다. 4년 뒤에는 숙명여고와 이화여고 영어 교사 우에노를 만나 결혼했다. 그때부터 소다는 서울 중구 회현동의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돼 복음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1911년 9월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조선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민족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윤치호·이상재 등 YMCA 인사도 끌려가 고초를 겪자 소다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무고한 사람을 당장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지금의 덕수교회인 경성기독교회 장로 와타나베 도루(渡邊暢) 대법원장에게도 찾아가 "죄 없는 사람에게 왜 벌을 주려 하느냐"고 따졌다. 1919년 3·1운동 때도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법정에서 이상재 재판을 맡은 판사를 꾸짖기도 했다. 이로 인해 소다는 동족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그를 보육의 길로 이끈 사람은 일본 아동복지사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다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郞)였다. 사다케는 1896년 가마쿠라에 보육원을 만든 뒤 1913년 중국 뤼순(旅順)에 이어 1921년 서울에도 지부를 냈다. 우리나라 근대식 보육원의 효시였다.
사다케는 "지금 조선에 건너오는 일본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간뿐인데,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순수한 박애주의 정신으로 한국을 생각하고 헌신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란 말을 듣고 지부 설립을 결심한 뒤 소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소다 부부는 용산구 후암동의 가마쿠라보육원에서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돌봤다. 그때는 버려진 아이가 거리에 넘쳐났는데, 세계 대공황까지 겹쳐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겨웠다. 소다는 가마쿠라보육원 출신이 나중에 독립운동가가 됐다는 이유로 일제 헌병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3년 소다는 76세의 나이로 함경남도 원산의 일본인교회에 초빙됐다. 서울 일신초등학교 교사이던 부인에게 보육원을 맡기고 혼자 부임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원산의 일본인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일본인교회로 대피했다. 소다의 인품이 지역 주민에게도 알려져 누구도 이들을 해코지하지 않았다. 소다는 1947년 10월 원산의 일본인들을 인솔해 서울로 내려온 뒤 귀국을 주선했다. 자신도 전쟁에서 진 일본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인은 고아들을 돌보느라 한국에 남았다.
그는 신일본(新日本)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평화'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든 채 전국을 다니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이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다. 또 가는 곳마다 일본인이 인류에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소다가 귀국한 뒤 가마쿠라보육원은 북한 신의주에 보린원을 세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이어받아 지금의 영락보린원이 됐다. 부인은 1950년 1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먼저 묻혔다. 한일 간 국교가 없던 상태여서 소다는 아내의 장례를 지켜보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본의 한 기자가 1960년 아사히(朝日)신문에 소다의 방한 허용을 촉구하는 칼럼을 싣고, 한경직 목사가 적극 나서 1961년 5월 특별기편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소다는 영락보린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이듬해 3월 28일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4월 2일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다. 한경직 목사가 장례 예배를 인도하고 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 윤태일 서울시장 등이 조사에 나섰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일본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郞) 외무상은 조화를 보냈으며 유족 대표로 조카 마스다 스미코(增田須美子)가 참석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두고 일본 정부와 지자체 등은 독일 당국에 집요하게 철거 압력과 로비를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J)는 지난 4일 "일본 정부는 과거의 범죄를 부정하는 행보를 당장 멈추라"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독일에 거주하는 일본인 130명도 철거 명령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소녀상 관할 구청장에게 보냈다. 소다 가이치의 뜻을 잇는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