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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옥련암 원문보기 글쓴이: 산빛노을(원광)
빨리 경전 속에 나타나는 보시
릴리 드 실바
빨리 경전의 가르침은 보시행을 훌륭한 덕행으로 기리고 있다. 실로 해탈을
향한 수행 길은 보시를 시발점으로 한다. 부처님께서는 초심자들을 가르치
실 때면 으례 보시의 미덕(daanakathaa, Vin. 1, 15, 18)을 설명하시면서 당
신의 점진적인 설법을 시작하시곤 하셨다. 세 가지 복짓는 일 가운데서도
보시가 첫번째이며 다음으로 계율을 수지하는 것, 마음을 닦는 일로 순서가
되어 있다. 이는 또한 부처가 완전하게 성취하는 십바라밀의 첫 번째이기
도 하다. 이런 까닭에 아라한이나 부처와 같은 해탈의 경지를 목표로 삼는
수행은 보시의 실천이 그 첫 걸음인 것이다.
보시의 기능
보시행은 삼독심(akusalamuula, 三毒心, 不善根)의 첫번째인 탐욕(lobha)을
무찌르는 데 있어 최상의 무기인 까닭에 불자들의 마음 닦는 수행 과정에
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다. 중생들은 자기의 개성을 '나'라고 여기고
자신의 소유물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탐심은 이기심에 싸여
있다. 베푸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이기심을 녹여 내는 데 도움이 되며 또한
이기심과 탐욕이라는 독성을 치유하는 해독제인 것이다.
데와따상유따(Devatasamyutta)[S.I,18]에서는 "탐욕의 때를 벗겨내고 보시
를 행하라"고, 법구경[Dhp. 223]에서는 "보시로 인색함을 이기라"고 권
고한다.
탐욕과 이기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 보시의 미덕을 베풀기는 어렵게 된다.
데와따상유따[l. 20]에서 보시행을 하나의 투쟁과 같다고 한 것은 그런 이
유에서이다(daana~n ca yuddha~n ca samaanam aahu S.I, 20).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쓸모 있는 것을 남에게 베풀기로 마음먹기 이전
에 먼저 탐욕이라는 마장과 싸워야 한다. 메추리 비유경[M.I, 449:La.tukiko-
pama Sutta]은 정진력이 모자란 사람이 이미 몸에 붙인 습을 버리기가 얼마
나 어려운지를 설명하고 있다. 조그만 메추리는 하찮은 썩은 덩굴에 걸리기
만 해도 죽는 수가 있다. 비록 힘없는 썩은 덩굴이라도 그 조그만 새에게는
엄청난 속박이 된다. 그러나 힘센 코끼리에게는 쇠사슬도 그다지 큰 힘을
못 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불행한데다 마음마저 나약한 사람은 비
록 낡아빠져 보잘것 없어진 소유물도 버리지 못하는 데 비해, 왕이라 해도
마음이 굳센 사람은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확신하면 왕국마저도
내놓을 수 있다.
탐욕만이 보시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과법이나 사후 세계에 관해
관심조차 없으며 또 아는 것이 없을 때도 베풀고 싶은 마음은 생겨나기 어
렵다. 보시행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위대한 덕행을 실천할 기회를 잡기 위해 잠시도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부
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보시의 가치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다면 단 한
끼의 밥도 남들과 나누지 않고는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Itivuttaka, p.18).
보시하는 사람의 품성
경전(D.I.137:Kutadanta-Sutta)은 보시하는 사람들이 지니는 품성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신심이 확고한 사람으로서 계를 지켜 건전하게
살아가는 생활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믿고 업의 인과 법칙에 예외가
없다는 것과 내생이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도덕적으
로 영적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물질주의자가 아
니며 불겧?승 삼보에 확신을 가지고 귀의한 사람이다. 그는 한낱 뭔가를
주는 자(daayako)에서 그치지 않고 주인답게 베푸는 자(daanapati)이다. 주
석서는 '주인답게 베푸는 자[施主, 檀越]'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다. "스스로는 맛난 것을 즐기면서 남에게는 맛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자
신이 베푸는 선물의 종이다. 자신이 즐겨하는 것과 같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는 선물의 친구쯤 된다. 자신은 아무것이나 되는 대로 만족하며 남에게
는 좋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가 곧 주인답게 베푸는 자이며 자신이 베푸는
선물의 어른이요 주인이다"라고.
보시하는 사람은 또한 필요한 이들을 위해 늘 문을 열어놓고 있는 사람(anaa
vatadvaaro)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출가 수행자, 브라흐민, 의지할 데
없는 사람, 길 떠난 이, 유랑인과 걸인들을 위해 샘터(opaanabhuuto)가 되어
준다. 이와 같은 품성으로 온갖 공덕을 짓는 사람, 그가 곧 보시인인 것이
다. 그는 아낌없이 베푸는 자(muttacaago)이며 자기에게 돌아오는 복을 기꺼
이 나누어 주는 자(daanasamvibhaagarato)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는 자애로운 사람(vada~n~nuu)이며, 그는 언제라도 남들의 요구
에 응할 채비로 손을 닦은 사람(payataapa.ni)註1)이다. 그는 마음 놓고 부탁
할 수 있는 사람(yaacayogo)이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즐거
움으로 삼는 사람(vossaggarato)이며, 베푸는 일에 마음 쓰는 사람(caagaparibhaavitacitto)이다.
경전은 너그러운 보시인들의 품성을 이상과 같은 말들로 기리고 있다.
고매한 마음으로 베푸는 사람은 주기 전에도, 주면서도 그리고 주고 나서도
기쁜 사람이다(A.III, 336). 베풀어 볼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보시하기
이전에 이미 즐거우며, 다른 이의 아쉬움을 충족시켜 기쁘게 해준다는 점에
서 주는 동안에도 즐겁고, 주고 나서는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여 만족한다
. 경전들은 소위 덕인(德人)이 되는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로 너그러움을
꼽는다(A.IV, 220). 부처님께서는 바르게 모은 재산을 어려운 사람에게 베
푸는 이를 두 눈을 갖춘 사람으로, 모으기만 할 뿐 베풀지 않는 사람을 한
쪽 눈 밖에 없는 사람으로 비유하신다(A.I, 129-30). 숫따니빠따(102)에서
는 '베풀 줄 모르고 혼자만 부(富)를 즐기는 사람은 자기 무덤을 파는 사
람'이라고 말한다.
베풀어지는 것[施物]
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이면 다 시물이 될 수 있다. 닛데사(Niddesa,2,523)는
보시하기에 적당한 열네 가지 품목들을 열거하고 있다. 즉 승복, 식사공양
, 머물 곳, 환자를 위한 약품과 기타 필수품, 먹을 것, 마실 것, 옷가지,
탈 것, 꽃줄, 향수, 침구, 집 그리고 등불이다.
처한 형편에 따라 베풀 수 있는 것이므로 보시를 실천하는 데 반드시 많은
것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원하는 이 있거든 작은 것에서라도 떼어 줄
것이니'(Dhp.224), 또는 '작은 데서 내준 것이 천 배의 값이 있다'(S.I
,18)는 경전 말씀에서 보듯이 빈곤한 살림 속에서 베풀어진 보시가 더욱 값
진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보잘것 없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면
서도 바르게 살며, 분수에 맞게 가족을 부양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남
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낼 때 그의 보시는 천 번의 제사를 올리는 것보
다 더한 가치를 지닌다(S.I,19-20).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수단으로 모은 재
물로 베풀어진 공양을 크게 칭찬하신다(A.III,354:It.p.66:A.III,45-46).
이렇게 보시하는 재가 불자는 금생에나 오는 생에나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숫따니빠따 가운데 마가경(Maagha Sutta)에서 부처님께서는 '바른
수단으로 벌어 궁핍한 사람에게 후하게 베푸는' 마가를 매우 칭찬하신다.
비록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깊은 신심으로 베풀 때 보시는 복된 미래를 맞
게 한다. 위마나왓투(Khuddaka-Nikaaya 제6경)는 이와 같은 사례들을 많이
보여 준다. 아짜마다이까 위마나왓투(AAcaamaadayikaa vimaanavatthu)에 의하면 아짜마다이까 부인이 성스러운 아라한 가섭 존자(Maha-kassapa)에게 정성으로 베푼 한 줌의 쌀겨 공양 공덕으로 부인은 다음 생에서 아름다운 천상에 나게 되었다.
닥키나 위방카 경(Dakkhi.na vibhanga Sutta:중아함 180 구담미경)에서는
"보시하는 사람이 덕스러울 때 보시물은 베푸는 사람에 의하여 청정해진다
. 받는 사람이 덕이 있으면 받는 이에 의해서, 양쪽이 모두 덕스러울 때는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 의해 청정한 시물이 되며 만일 양쪽 모두 순수하
지 못하다면 부정한 보시가 된다"고 가르친다. 또한 법보시, 즉 불법을 널
리 보급시키는 일은 모든 보시를 능가하는 것이다(sabbadaanam dhammadaanam jinaati, Dhp.354).
앙구따라 니까야(A.IV,246)는 옛부터 성인들이 훌륭한 보시물이라고 존중해
온 다섯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보시의 가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결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려깊은 출가 수행자들이나 브
라흐민들은 바로 이러한 보시를 가장 존중했다.
오계(五戒)를 철저히 지키는 것도 이 다섯 가지 위대한 보시 가운데 하나이
다. 오계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계행을 통해 모든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
애주며 자비와 은덕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행동을 바로 하여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고 겁내지 않도록 지켜 준다면 이는 세상에서 가장 고
결한 보시행일지니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유정들에게까지 그 덕이 미
칠 것이다.
보시받을 사람들
경전들은 또한 누구에게 보시물이 베풀어져야 마땅한지에 대해서도 설명하
고 있다(A.III,41). 집에 찾아 온 손님이나 여행자, 병든 이들을 친절하고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기근이 들면 마땅히 곤궁한 사람들에게 후덕하게 베
풀어야 한다. 새로 추수한 햇곡식은 제일 먼저 덕스러운 분들께 올려져야
한다.
경전에는 일반인들의 보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출가 수행자(sama.na), 브라흐민(braahma.na), 의지할 곳 없는 사람(kapa.na), 길손(addhika), 유랑인(va.nibbaka), 걸인(yaacaka)들이 나온다. 출가 수행자나 브라흐민들은 생업을 가지지 않는 종교인으로서 재가자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해 주고, 재가자들은 그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게 되어 있다. 없는 사람은 생존을 위해 넉넉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풍족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부유해진다. 교통 수단이나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던 시대에는 일반인들이 자진해서 길손들을 돕는 일에 나서야만 했었다. 이와 같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는 것이 바로 불교의 입장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앙구따라 니까야에서, 브라흐민들이 제사에서 쓰는 불(aggi)
을 비유로 들어 정성과 존경심으로 돌보아야 할 세 부류의 사람들을 설명하
신다.
첫째는 공경해야 할 불(ahuneyya-aggi)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잘 보살펴
드려야 할 부모님들을 가리킨다.
두 번째는 가장의 불(gahapati-aggi)로, 아내와 자녀들, 고용인 그 밖에
가장으로서 부양해야 될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공양해야 될 불(dakkhi.neyya-aggi)은 성위(聖位)註1)를
이룬 아라한이나, 마음 속의 해로운 요소들을 닦아내기 위해 수행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마치 브라흐민 사제가 제사 의식에 쓸 불을 간수하듯이
정성스럽게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숫따니빠따의 마하 망갈라 경(Mahaa-mangala Sutta:Sn.262-63)에 따르면 재가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상서로운 일 가운데 하나는 친지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일이다.
한 번은 코살라 왕이 부처님께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
여쭌 적이 있다. 부처님께서 "베풀고 나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베풀
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다시 큰 공덕을 얻기 위해서 누구에게 베풀어야 되
는지를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질문을 두 가지로 구별하여 각각 대답해 주
셨다. 먼저 덕스러운 이에게 베푼 공양이 큰 결실을 맺는다고 답하시고, 이
어서 다섯 가지 장애(niivara.na)를 제거하고 지계(siila,持戒), 선정(samaadhi,
禪定), 지혜(pa~n~naa,智慧), 해탈(vimutti,解脫) 그리고 해탈지견(vimutti-~naa.na-dassana, 解脫知見)을 성취한 덕스러운 출가 수행자에게 베푼 공양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된다고 명백히 밝히셨다.
사까 상유타(Sakka-samyutta)에서 사까(Sakka,帝釋天) 역시 누구에게 베푼
보시가 제일 공덕이 큰가를 부처님께 여쭙는다. 부처님께서는 승가(sangha
, 僧伽)에 베푸는 것이 가장 큰 결실을 맺는다고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말
씀하시는 승가란 '성위를 향하는 길(magga)에 들어섰거나, 사성위(四聖位)
가운데 한 과(phala, 果)를 이미 성취하고 계겵쨦혜를 갖춘 바르고 고매한
성자들의 집단'이라고 밝히셨다. 율장(Vinaya)에서 말하는 승가란 특정한
의식, 의결 같은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승단을 대표하여 정족수 이상의 승
려들이 모여 이룬 집단을 뜻하지만 경전에서의 승가란 네 쌍의 성스러운 인
격체(cattaari purisayugaani), 즉 예류과를 향하게 된 수다원, 일래과를 향
하게 된 사다함, 불환과를 향하게 된 아나함, 불사의 경지를 향하게 된 아
라한의 길에 들어서거나 그 길에서 과를 성취한, 여덟 부류의 사람(a.t.tha
purisapuggalaa)들을 의미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가 경(Maagha Sutta. Sn.P.86)은 공덕짓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에게 공양
을 올려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아라한의 덕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브라흐마나 상유따(Braahmana-samyutta)에서는 가장 큰 결실을 맞게 해줄
보시로 '전생을 아는 사람들, 천상과 지옥을 본 사람들, 더 이상 태어남을
받지 않을 사람들 그리고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한 이에게 베풀었을 때'라
고 설명한다.
경전 속에 묘사되는 바와 같이 승가가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공양 받을 자격
을 갖춘 훌륭한 인격체들로 구성될 때 복을 거둘 수 있는 복전(福田)이 되
는 것이다. 마치 급수가 잘 되고 비옥한 땅에 뿌려진 씨앗이 많은 수확을
내듯이 성스러운 팔정도에 확고하게 들어선, 계행 청정한 이들에게 베푼 공
양은 훌륭한 결과를 낳는다(A.IV,238;I,162).
법구경(Dhp.356-59)에 의하면 "잡초에 덮여 못 쓰게 된 밭처럼 사람은 탐
욕(raaga)과 성냄(dosa), 어리석음(moha), 바람(iccha), 갈애(ta.nhaa)로 어
지럽혀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점들을 없앤 이들에게 베푼 보시는 큰 공덕
(mahaa-phala)을 낸다." 보시가 어떤 결실을 맺는가는 베풀어진 시물의 양
이나 질보다도 받는 사람이 어떤 자질을 갖춘 복전인가에 더 좌우된다.
부처님께서 웰라마(Velaama)라는 브라흐민으로 태어났을 때 행한 엄청난 보
시 이야기가 '앙구따라 니까야(A.IV, 392-95)'에 나온다. 보살은 누구든
지 원하는 사람에게는 음식, 음료, 의복은 말할 것도 없고 금, 은, 코끼리,
소, 수레 따위까지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훌륭한 수혜자
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아낌없는 선심도 공덕을 쌓는 면에서는 별로 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베푼 웰라마의 엄청난 보시보다 정견(
正見)에 비추어 수다원(sotaapanna, 入流) 한 사람을 공양하는 공덕이 크고,
백 명의 수다원보다 한 사람의 사다함(sakadaagaamin, 往來)을 공양함이 더
낳은 것이다. 아나함(anaagaamin, 不來), 아라한(arahant, 應供), 벽지불(pa
ccekabuddha, 獨覺) 그리고 정등각불(sammaasambuddha, 正等覺佛)에게 하는
보시 공덕의 크기가 마찬가지로 비교될 수 있다. 부처님과 승가를 함께 공
양하는 것이 부처님 한 분만을 공양하는 공덕보다 크며 언제 어디서나 승가
가 사용할 절을 세우는 일은 큰 선행이 된다. 그러나 불겧?승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 훌륭하다. 오계를 지키는 삶은 더욱 더 값진 일이다
.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자비관을 닦아 자애심을 계발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가장 수승한 것은 우리를 열반으로 이끌어 줄 '무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계발하는 일이다.
보시의 동기
경전들은 보시를 실천하는 동기를 여러 가지로 기록해 놓았다. 앙구따라 니
까야(A.IV, 236)는 보시행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
1. 불편한 기분으로, 혹은 상대방의 비위를 거슬리려는, 혹은 모욕하려는
마음으로 준다(AAsajja daanam deti)註1).
2. 두려운 나머지 준다(Bhayaa danam deti).
3. 전에 받았던 것의 보답으로 준다(Adaasi me ti daanam deti).
4.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내게 주겠지' 생각하며 준다(Dassati me ti daanam deti).
5. 주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아서 준다(Saadhu daanan ti daanam deti).
6. "나는 밥을 지었는데 이 사람들은 밥을 하지 않았구나. 밥을 해 놓은
사람이 밥 없는 사람에게 주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 생각하며 준다.
그만큼 애타적인 동기로 베푸는 사람들이다(Aham pacaami, ime ne pacanti,
na arahaami pacanto apacantaanam adaatun ti daanam deti).
7. "이 공양을 올리면 덕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이 자자해지겠지" 생각해
서 준다(Imam me daanam dadato Kalyaa.no kittisaddo abbhuggacchatii ti daanam deti).
8. 자신의 마음을 가꾸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보시를 한다(Cittaalankaara- cittaparikkhaarattham daanam deti).
때로는 편애하는 마음(chanda)이나 악의(dosa) 또는 망상(moha)에 빠진 나
머지 보시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집안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공양이
베풀어질 수도 있다. 또 사후에 천상에 태어나고자 하는 바람 역시 보시의
동기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베
푸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므로 좋은 기분을 맛보자는 생각으로 베풀기도 한
다(A.IV,236).
그러나 경전(A.IV,62)에서는 그 무엇도 바라는 마음 없이 공양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구나 받는 사람에게 집착을 가지고 베풀어서는 안 된다
. 만일 나중에 쓸 것을 염두에 두고 공덕을 쌓아 두자는 생각이나 사후에
보시의 과보를 누리기를 바라며 베푼다면 이는 졸렬한 보시이다. 오직 보시
의 동기로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욕심과 이기심의 추한 때를 벗겨내고 마음
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겠다는 뜻이어야 한다.
보시하는 태도
경전(A.III,172,등)에서는 베푸는 태도를 아주 중요시 한다. 보시할 때는
시물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선의(善意)를 지닌
자세로 보시했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따라서, 공손히 베풀어야 한다(Sakkaccam daanam deti): 받는 사람이 굴욕
감을 느끼거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베풀
어야 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남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으례 거북한 기분
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를 더욱 낭패스럽게 만들거나 이미 짖눌린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하지 않는 것이 주는 사람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또 신중하고 정중하게 베풀어야 한다(Cittikatvaa daanam deti): 주는 사람
이 기꺼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 자신이 느끼도록 해주
어야 한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보시할 때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는 서
로 간격이 없고 넉넉한 정이 솟아나게 되리라.
자기 손으로 직접 베풀어야 한다(Sahatthaa deti): 보시행을 할 때 스스로
직접 참여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이것은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 마
음의 다리를 놓아주며 그것이 곧 보시의 사회적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들
이 몸소 나서서 따뜻한 인정으로 덕을 베풀 때 이 사회는 서로 걱정해 주고
돌봐주는 하나의 유기체로 융합될 것이다.
버리기에나 알맞을 것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Na apaviddham deti): 받는
사람에게 유용하고 합당한 것만을 베풀도록 주의해야 한다.
받는 사람이 다시 오고 싶지 않을 만큼 쌀쌀맞게 베풀어서도 안 된다(Na
anaagamanadi.t.thiko deti).
지극한 신심을 가지고 베푸는 행동(saddhaaya deti)은 경전 안에서 거듭 칭
송을 받고 있다. 특히 성직자에게 공양을 올릴 때는 그런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하며 겸손하게 공경하는 자세로 대접해야 하고 요긴하게 쓰일 수
있도록 적절한 시기에 베풀어야 한다(Kaalena deti). 때에 맞추어 베푼 보
시는 궁지에 처한 사람의 근심을 덜어주고 긴장감을 해소시켜 주므로 그 가
치는 아주 크다.
그리고 남들이 어려울 때 그저 돕는다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베풀며(Anuggahacitto daanam deti), 본인이나 받는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베푼다(Attaana~n ca para~n ca anupahacca daanam deti).
부처님께서는 사려깊게 베푸는 일을 권장하셨다(Viceyyadaanam sugatappasattham). 만약 그 시물이 받는 사람을 복되게 해준다면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만, 받는 이의 안녕을 저해하게 된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보시는 고매한 보시(sappurisadaana) 행위로 크게 권장할 만한 것이다. 무엇을 베푸는가보다는 어떻게 베푸는가가 보시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크게 베풀만큼 넉넉지 못한 처지라 해도 베푸는 이의 태도에 따라 받는 사람이 세심한 배려를 받고 있다고 항상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시의 가치
경전을 보면 보시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공덕이 나온다.
보시는 사회 구성원들을 응집시키고 단결시키는 힘이 있다. 보시는 가진 자
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놓인 물질적 경제적 격차를 메꿔 준다기보다
는 심리적 단절을 이어 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보시가 자리잡을 때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Sn.187:Maagha Sutta). 마음이 너그
러운 이는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친한 사람이 많다(A.III,40). 베푸는
일은 또한 정을 돈독하게 해 준다(Sn.187).
어떤 사람이 보시한 후에 어느 특정한 곳에 나고자 발원하더라도 그의 소원
은 오직 계행이 청정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A.IV,239). 만일 어떤 사람
이 극히 얼마 안 되는 보시행과 계행을 실천했을 뿐, 선 수행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면, 다음 생에서 그는 인간계에 불행하게 태어난다. 또 상당한 정
도의 보시나 지계 등의 선행을 하지만 선 수행에 관한 이해가 없으면 인간
계의 복락을 누리는 데 그친다. 그리고 참선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어도
한없이 많은 보시행을 하고 계를 철저히 지킨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게 되며
, 그들은 수명과 미모, 복락과 명성 그리고 오관의 감각적 즐거움에서 다른
신들을 능가한다(A.IV,241-43).
앙구따라 니까야에서는 보시를 베푼 결과 누리게 되는 세간적인 복덕으로
"인색하지 않고 후덕한 사람은 남들의 호감을 얻는다. 아라한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공양을 받고 그에게 제일 먼저 법을 가르쳐 준다.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이 퍼진다. 그는 어떠한 모임에도 자신감과 위엄을 가지고 참석할
수 있다. 사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A.IV,79)는 점을 꼽는다. 다른 곳
에서는, 관대한 사람은 인망을 얻고 고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그와 어
울리며, 재가자의 도리를 다 한 것(gihidhammaa anapeto hoti)에 스스로
만족한다고 덧붙이고 있다(A.III,41).
음식물을 베푸는 것은 실상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과 활
력과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들 한다. 남에게 그와 같은 것을 베풀면 실은 자
기에게 베푸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A.III,42), '심은 대로 거둔다'(Yaadisam vapate biijam taadisam harate phalam.S.I,227)는 말이 간결하게 그 뜻을 잘 드러낸다.
신심으로 베푼 보시는 언제 그 결실을 맺게 되든지 재물과 아름다움을 성취
하게 하며, 그 위에 더 나아가 마땅히 공경할 사람에게 성의껏 공양을 올리
면, 공손하고 충실하며 사려깊은 자손과 아내, 부하와 아랫사람들을 얻게
된다.
때맞춰 베푼 공양으로는 커다란 부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온갖 필요한 것
들이 제때에 충족될 것이다.
오직 남을 돕겠다는 순수한 바람으로 베푼 보시는 막대한 부와 오관의 쾌락
을 맛볼 수 있는 건강한 체질을 가져다 준다.
자기와 남을 상하지 않고 행한 보시는 화재, 홍수, 도둑을 막아 주고 통치
자의 횡포나 원치 않는 사람이 상속자가 되어 일으키는 화근으로부터 안전
하게 보호해 준다(A.III,72).
성스러운 팔정도를 따르는 수행자들에게 베푼 공양은 마치 비옥하고 잘 손
질되었으며 물이 충분한 땅에 뿌려진 씨앗이 많은 수확을 내듯이 놀라운 과
보를 받게 한다(A.IV,238).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베풀어진 공양은 보시한 사람을 범천(brahma-loka)
에 나게 하고 그는 거기서 아나함 과를 성취하게 된다(A.IV,62).
닥키나 위방카에는 보시를 베풀 대상과 그로 인한 공덕이 순서대로 나열되
어 있다. 동물에게 베푼 것은 백 배의 보답을 가져온다. 행실이 변변치 못
한 보통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천 배의 보답을, 계행이 훌륭한 사람에게 베
푼 보시는 십만 배의 보답을 낸다. 불교에 귀의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감각
적 욕망을 떨쳐 버린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10억 배나 되는 과보를 내며 수
다원의 도(道)에 들어선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a
sankheyya, appameyya) 과보를 낸다. 하물며 수다원 과를 이미 성취한 사
람이나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벽지불 그리고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신 부
처님께 올린 보시야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M.III,255).
닥키나 위방카 경은 또한 승가에게 베풀어진 보시가 한 스님의 역량을 보고
그 분 개인에게 주어진 보시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전은 또한 "먼 훗날, 계를 지킬 줄 모르고 사악한 성질을 하고도 정직의
표시로 노랑 가사를 입은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설령 그와 같은 승려들에
게일지라도 승가에 대해 베푸는 것이 한 승려 개인(patipuggalika)의 역량
에 대해 베푸는 것보다 훨씬 공덕이 크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은 계행이 청정한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크게 유익하지만 부도덕한 사람
에게 베푼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다른 경전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것은 후대에 첨가된 말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심지어 자기가 먹고 난 밥 그릇을 씻은 물이라도 "이 개숫물
속에 있는 음식 찌꺼기가 땅에 사는 미물들의 먹을 거리가 되어지이다"
하고 후덕한 마음으로 버리면 그 또한 선행이 된다고 설하셨다. 그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에게 음식을 베푸는 일이야 얼마나 큰 공덕이겠는가? 그러나
이 경전은 계를 지키는 덕스러운 이에게 베푸는 공양이 더 유익한 것임을
잊지 않고 강조하고 있다(A.I,161).
또 다른 경전(A.III,336)은 여섯 가지 자질을 모두 구족한 보시는 복되기
이를 데 없어 그 공덕의 크기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가르친다. 이 가운데
세 가지는 보시자의 자질에, 나머지 세 가지는 받는 사람의 자질에 속한다
.
주는 사람의 자질로 말하자면 보시를 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야 하며
, 주는 동안에도 즐겁고, 주고 난 다음에도 만족스러워야 한다. 베풀기 전
이나 베푸는 동안이나 그 후까지 욕심의 흔적이 조금도 없이 무언가를 베풀
때 그 고결한 마음에 의해 행해진 보시물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것이 된다.
수혜자 또한 탐겵?치 삼독심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어야 하고 또는 이미
이와 같은 마음의 때를 닦아내기 위하여 수행 길에 들어선 사람이어야 한다
. 이와 같이 훌륭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 간에 주고 받는 보시는 그 공덕이
망망한 바다의 바닷물과 같아서 측량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율장 대품(律臧 大品; Mahaavagga:Vin. I,293-94)에 한 번은 부처님께서
위사카 부인에게 큰 보시행을 함으로써 어떤 이로움을 얻었는가를 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때 위사카 부인은 자신은 다음과 같은 바람으로 아낌없이 보시한다고 지
혜롭게 대답했다.
"어떤 비구 스님, 비구니 스님이 출가 수행자의 성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성취했다는 소문을 듣게 될 때 저는 그 분께서 사왓티에 머문 적이 있다면
제가 항상 올렸던 공양을 분명히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공양
이 그 스님께서 성위를 성취하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
각될 때 마음 속에 큰 기쁨(paamujja)이 일고 기쁜 마음에서 다시 환희심(piiti)이 솟아납니다. 마음이 환희심으로 가득 찰 때 몸이 편안해지며(kaayo passambhissati), 몸이 편안하면 행복(sukha)한 느낌이 생기고 이 행복감은 선정에 들도록 도와줍니다(cittam samaadhiyissati). 이것은 다시 오근(indriyabhaavanaa, 五根)註1), 오력(balabhaavanaa, 五力)註2), 칠각지(bojjhangabhaavanaa, 七覺支)註1)를 계발케 합니다. 제가 아낌없이 보시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로움(aanisamsa)은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위사카 부인의 훌륭한 대답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그녀가 승가에 올리고자 하는 여덟 가지 보시를 쾌히 허락하셨다(Saadha saadhu, Visaakhe saadhu kho tvam Visaakhe!… Anujaanaami te, Visaakhe attha varanii ti).
그러나 보시행 한 가지만으로는 생사고를 끝내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부처님께서 으뜸가는 보시자라고 하셨던 아나타삔디까는
수다원 과를 얻었을 뿐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철저한 계행이 수반될 때 보
시행은 좋은 과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비록 아나타삔디까가 나무랄 데
없는 덕을 실천했지만 그가 정신적인 수행(bhaavanaa)을 했다는 이야기는 어
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엄청난 보시행을 했건만 수다원 과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띠까라 경(Gha.tiikaara Sutta, M.II 52)은 보시자가 자리에 없었으면서도
이루어졌던 특이한 보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옹기장이 가띠까라는 까싸빠(Kassapa) 부처님의 으뜸가는 후원자였다. 그는
늙고 앞 못 보는 부모님을 봉양하느라 출가는 하지 않았으나 이미 아나함
이 되어 있었으며 고결한 행실과 장한 신심으로 까싸빠 부처님의 신망을 받
고 있었다. 어느 날 까싸빠 부처님께서 그의 집에 탁발을 가셨으나 마침 그
는 출타 중이었다. 아들이 어디 갔는지를 묻는 부처님께 일이 있어 나갔음
을 알리고 그 부모님들은 그릇 속에 있는 음식들을 얼마든지 드시라고 말씀
드렸다. 밖에서 돌아와 부모님들로부터 그날 일어난 일을 듣고 난 가띠까라
는 부처님께서 자기가 있었다면 당연히 보시했을 것이라고 믿으실 정도로
자신을 신뢰하고 계신 것을 알고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의 기쁨과 행복
감은 보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의 부모님들의 기쁨과 행복감 또한 이레
동안이나 줄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카사빠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사원의 지붕이 새기 시작했다. 새
기 시작하는 지붕에 덮을 짚을 구하려고 까싸빠 부처님이 몇몇 비구들을 가
띠까라에게 보냈는데 그날도 그는 집에 있지 않았다. 비구들은 빈손으로 돌
아와 지붕에 얹은 짚단 밖에는 덮을 것이 없었다고 말하자 부처님은 그것이
라도 가져오라고 이르셨다. 지붕을 벗겨내는 비구들에게 가띠까라의 노부모
님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사정을 알고 난 그 부모님들은 '모두 가져 가십
시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가띠까라는 부처님께서 그토록 자신을 신뢰하고 계신 것
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난 그 기쁨과 행복감은 보름 동안
이나 지속되었고 부모님들의 기쁨과 행복 또한 이레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
았다. 석 달 동안이나 가띠까라의 집은 지붕도 없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
지만 빗물이 그 집을 적시지 않았다고 한다. 가띠까라의 장한 신심과 너그
러움은 이와 같았다.
이 글의 초두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보시는 모든 선행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다.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을 자애롭게 대하는 네 가지 길(cattaari sangaha-
vatthuuni, A.IV,219, 四攝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탈을 위
한 깨달음의 설흔일곱 가지 요건(bodhipakkhiyaa dhammaa : 三十七 助道品)
가운데 보시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어떤 경(M.III.99 등)에
서는 훌륭한 사람의 특성으로 신심(saddha), 지계(siila), 박학(suta), 관대
함(caaga), 지혜(pa~n~na)의 다섯 가지를 드는데 이런 경우 '다나(daana)'라
는 말 대신 '짜-가(caaga)'가 쓰인다. 준다는 뜻의 보시(daana,√daa)와 소
유물을 놓아버림(caga,√tyaj)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보시
가 실제로 주는 행위라면 놓아버림은 거듭되는 보시행으로 마음 속에 깊이
배어든 이기심 없이 베푸는 자세를 의미한다. 짜-가(caaga:Sk, tyaga)의
원 뜻은 버림, 포기이며 자기 소유물을 인색하게 꽉 움켜쥐었던 손이 놓아
버림으로 해서 풀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보시행은 때로 편애, 악의,
두려움, 미혹, 명예욕 따위의 불순한 동기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짜-가(caaga)는 이기심 없이 놓아버리려는 순수한 덕성이다.
불교는 점진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비워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
선 물질적인 소유물을 내주는 것으로 첫 걸음을 삼는다. 점차 마음 속에 베
푸는 성품이 자리잡고 또한 그러한 성품이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깊은
이해로 인해 힘을 얻게 될 때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미망으로부터 깨어
나게 된다(nibbindati).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어떤 사람은 재가자의 생활
을 청산하고 출가의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다음은 감관을 잘 제어함으로써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유혹들을 비워낸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깊이 들어
앉은 번뇌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고결한 자질들로 채운다. 그러나 부정적
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이 모든 과정은 보시의 실천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첫댓글 나무 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