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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제 내가 친히 나서겠다. 내가 직접 목자가 되어 주겠다!
한순간의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지금 온 백성이 큰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가 저지르고 있는 각종 기행으로 인해 국격은 급격히 실추되고, 그로 인한 천문학적인 경제 손실로 나라의 근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소상공인들, 자영업자들이나 서민들이 겪는 피해, 그리고 이 큰 부끄러움은 오로지 우리 국민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쉼없이 흔들리는 이 지상 여정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마지막 희망이 되어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백성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시어, 조속히 상식과 기본이 통용되는 정상적 나라로 회복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격 미달의 지도자들, 그래서 백성들의 기쁨이요 위로가 되기는 커녕, 고통의 근원이던 목자들이 많았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신랄한 지적을 통해 당시 사이비 목자들의 악행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에제 34, 2-4)
당신 보시기에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거짓 목자, 사이비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군중은 영적 양식을 조금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한 영적 빈곤의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언자의 경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이런 부적격 목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질 부족한 목자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양들의 현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꽤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친히 나서겠다. 내가 직접 목자가 되어 내 양 떼를 찾아 보살펴주겠다.
나와 함께 일할 협력자들, 참된 목자들을 직접 선택하겠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있고 예의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목자의 역할은 양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왜 뽑으셨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파견하셨는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수 온 마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군중에게 당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었다.”라는 동사는 “흐립토”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지쳐 넘어짐을 의미합니다.
삶에 지쳐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 다시 힘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참 많은 목자가 존재합니다. 부모님도 자녀에게 목자고 학교 선생님도 목자이며 물론 사제들도 목자입니다.
이들의 역할이 기를 세워주는 것인데, 가끔은 이들이 양들의 기를 꺾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체가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운은 바로 ‘성령’을 의미하는데 그들도 그것을 받지 못하니 남에게도 줄 수 없습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3천 원짜리 김치찌개 파는 이문수 신부’의 에세이
『누구도 벼랑 끝에 서지 않도록』의 내용입니다.
이문수 신부는 낙담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청년들이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청년 밥상 ‘문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식주의’라는 곳에서 인용합니다.
“김치찌개 3천 원, 무한리필 공깃밥은 공짜. 개업 이후 거의 매달 적자를 내는 이 식당의 주인은 바로 저입니다.
저의 원래 직업은 ‘가톨릭 신부’인데요, 어쩌다 보니 4년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김치찌갯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식당 사장이 되기로 한 건 고시원에서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저 역시 한때 ‘배고픈 청년’이었습니다.
한 달간 세 끼를 모두 라면만 먹거나 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습니다.
입시도 취직도 더 힘들어진 지금의 청년들은
그때의 저보다 두세 배는 더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테지요.
저는 누구나 언제든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길 1년여.
후원금 3천만 원으로 밥집을 열 공간을 찾다가 지금의 이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북한산 전경이 보이는 옥상을 보자마자 청년들이 이곳에서 잠시나마 숨을 쉬고, 위로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로 정하고, 가격은 대학교 학식의 평균 가격인 3천 원으로 정했습니다.
학당을 하다 보니 신부로서 일만 할 때와 다르게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오픈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당을 찾았습니다. 얼른 팔팔 끓는 찌개를 대접해 몸을 녹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저를 수줍게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더군요.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제가 식당에 관해 설명했더니 아이가 1년 넘게 모은 저금통을 기부하고 싶다고 해서요.’
엉겁결에 받아 들었는데 세상에, 나중에 세어보니 10만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열 살짜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요. 누군가를 위한 돼지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그 정성과 선량함이 저를 더 열심히 일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50대 여성이 어둑해진 저녁에 식당에 들어와서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러고는 계산을 하겠다면 카운터 앞에 섰습니다. 돈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이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여기 계신 손님들 것까지 다 계산해 주세요, 신부님.’
손님은 그렇게 모두의 밥값을 계산하고 가셨습니다.
각자 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청년들은 비로소 누군가 밥값을 대신 내주고 갔다는 이야길 듣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다니 너무나 놀랍다고들 했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였죠.
‘저도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을 꼭 도울께요.’
아마 그 손님께서 가장 듣고 싶으셨던 말이 아닐까요.
최근에는 김치찌개 식당을 운영하는 식당 지기로 사는 삶을 크게 변화시킨 계기도 있었습니다.
식당을 이대로 유지할 것인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버겁더라도 점포를 늘릴 것인가 고민하던 시점에 ‘유퀴즈’ 섭외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방송에는 게스트 몇 명 중 하나로 짧게 나갈 테지만, 식당이 분점을 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렵게 녹화를 마치고 4월 21일에 본방송이 나갔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 날부터 일어났습니다.
후원 문의로 전화가 불이 났고, 가게에는 손님들이 줄을 섰지요.
모두 파김치가 되어 뻗어 있는데 한 직원이 저를 다급히 부르더군요. ‘신부님…. 이것 좀 보셔야겠는데요.’
제 눈앞에 놓은 것은 유재석 씨가 아무 말도 없이 5천만 원의 후원금을 입금하신 통장 내역이었습니다.
‘아무리 유재석 씨라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주시죠?’
유재석 씨의 기부가 기뻤던 이유는 액수 때문이 아닙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자부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을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신 것이죠.
저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우리 식당이 유지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돈보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말이지요.”
유재석 씨나 이문수 신부님이나 모두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기를 살려줄 수 있을까?’입니다.
이런 분들이 오히려 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참 목자들입니다.
저에게 참 목자는 유학할 때의 논문지도 교수님이었습니다.
제가 로마라는 곳에 다시 가게 되었을 때 저는 한 목자만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죠르지오 마짠티’라는 교수입니다.
제가 석사 때 성경을 공부할 때는 기가 많이 꺾여 있었습니다.
그때 지도교수님은 기를 많이 꺾으시는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논문을 열심히 써가면 그냥 쓰레기라고 하시며 몇 장을 다 읽어보지도 않고 커다랗게 빨간 볼펜으로 엑스를 그리고 툭 집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다시 돌아가기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보면 옆집 할아버지 같은 저희 교수님이 희랍어 성경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 말을 찾아내 증명해 보이니 성서 교수는 오히려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제관에 가난한 사람들을 들여 함께 살고 학교에 와서는 주류 세력들에 주눅 들지 않고 그렇게 싸우시고 학생들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며 당신이 밤을 새우시며 우리 논문을 고쳐주셨습니다.
학생들은 그분의 편이었고 학교의 높으신 분들은 이분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그 신부님을 매우 좋아했는데 언어가 딸리는 우리 마음을 아시고 손수 다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엑스를 하고 화를 내던 성서 교수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러니 저도 사제가 되어 다시 유학을 나갈 때는 성서를 포기하고 교의 신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학교로도 갈 수 있었지만 저는 그 교수님께 배우고 싶었습니다.
로마라는 두려운 곳에서 저에게 기운을 불어넣을 참 목자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덕분에 저는 기죽지 않고 5년 동안 그분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처럼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목자는 기가 살았고, 어떤 목자는 기가 꺾여 있을까요?
삼구 때문입니다.
죄는 성령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따라서 육체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기가 꺾여 있어서 남에게 기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꾸 양들의 기를 살리려고 하면 나에게 나가는 것이 나를 채우게 되어있습니다.
양들에 대한 사랑이 목자의 기까지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주 주어라.”
그러나 오히려 거저 주기 때문에 거저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흩어진 양들의 기를 살리는 참 목자로 파견받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9,35-10,1.6-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에 잡힌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을 성령의 보호 아래로 데려갈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성령의 선물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일꾼이 적다는 것은 교사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바로 일꾼들,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네 명은 어부고, 두 명은 세리이며, 한 명은 배반자였다.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열두 번째 사도에게까지 주어졌다. 그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복음이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을 부르러 돌아섰다. 유대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 더 큰 은총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도 회개한 이가 있었고, 다른 민족도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한다.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과 닮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중심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의 삶이 되었다. 하늘 중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저 사용한다. 우리는?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모든 부분에서 넉넉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7~80년대를 석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현재 엄청난 발전을 일구었습니다. 하지만 행복도는 어떨까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2018년부터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보며 우리의 행복을 반추하게 됩니다.
부유한 나라의 국민은 삶의 만족도가 높았지만, 삶의 의미를 적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삶의 의미를 아주 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만족도는 성공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제대로 산다는 감각입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미를 찾는 데 종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절대자를 통한 굳은 믿음 안에서 의미를 찾고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의 사람은 종교가 그들에게 큰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행동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려고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삶의 만족도만을 위했다면 부귀영화에만 집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말 대신 ‘사랑’만을 말씀하셨고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삶의 의미만을 향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 모두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이 일꾼들은 받는 자가 아닌 ‘거저 주는 자’였습니다. 그 일꾼은 특별한 사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모두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모든 이가 물질적인 삶의 만족도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의 명언: “주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소서.”(라이홀트 니버, 평온을 비는 기도 중)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사제의 길
예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야하고
오라고 하시면 와야 하며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서 내 말을 전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힘을 쓰면 됩니다.
부유하고 부족할 것이 없는 이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고 외로워하는
길 잃은 어린양에게 가야 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 내가 받은 만큼
주고 오면 됩니다.
또 때로는 머물면 됩니다.
그들이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 곁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으로 향해 가듯
저는 지금 그곳을 향해 발길을 돌려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제의 길을 걷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가엾은
마음을 통해
우리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연민의 마음은
언제나
다른 시각으로
사람과 세상을
껴안게합니다.
우리를 향한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다시
깨우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아픔에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번도 뜨겁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불쌍하고 가엾은
우리들 실체입니다.
사랑의 본분은
진실된 마음입니다.
사랑의 진실된
사명에 충실한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연민에서
사랑의 본분을
다시 발견하는
소중한 생명의
대림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ㄷ)
'가엾은 마음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9,27-31)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꺽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7ㄴ-38)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같은 일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지금 여기에 있는 '또 다른 사도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엾은 마음(측은지심)이 되어, 받은 은총을 너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거져 받은 것이 많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되돌아 올 것을 바라지 않고 기쁘게 잘 나눕니다. 반면 하느님께서 거져 주신 은총이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얻은 은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칠죄종(七罪種)의 하나인 '인색함'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끝까지 놓지 않다가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의 모습은 보기에도 안 좋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암브로시오 성인'은 마니교 이단에 빠져 있었던 아우구스티노를 회개로 이끄신 분으로서,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대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학자요 성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분이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되어봅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는 '또 다른 사도들'이 되어봅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네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자비를 베푸시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30,19-21.23-26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20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21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23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24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대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
25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26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5─10,1.6-8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