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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지사랑모임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김사부
우리의 전통-지역과 시대에 따른 한옥의 모습
1) 집의 형성과 발전
과거의 한옥이라 함은 기와집 뿐 아니라 초가집, 굴피집, 너와집, 까치구멍집을 모두 포함하는 명제이지만 여기서는 기와집에 한정 지어 쓰고자한다.
현대주거의 새로운 대안을 찾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을 살리자고 초가집에 살자고 말한다면 수긍할 이가 없는 현실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초가집 | 굴피집 |
너와집 | 까치구멍집 |
구석기시대 비바람과 동물들의 침입을 막고자 동굴생활과 움집생활을 겸했던 우리민족은 신석기시대에는 농기구의 발달과 잉여농산물의 생산으로 인해 움집생활을 시작한다.
암사동 선사시대 유적에 나타난 우리의 주거형태는 동그란 움집 고깔형과 벽이 없는 맞배지붕형식에 갈대나 풀잎을 엮어 지붕을 만들고, 그 안 가운데에 돌덩이를 놓고 불을 지펴, 온도를 유지 한 것으로 보인다.
파주 교하리의 흔적에서 나타나 듯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담이 없는 초기 우진각지붕, 또는 팔작지붕 형식이 나타난다. 초가지붕에 기둥만 없는 형식인데 전통한옥에서 볼 수 있는 기둥위의 보와 도리 서까래를 세우고 그 위에 짚단이나, 억새풀을 덮은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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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49호로 지정된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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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까지 올려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
오늘날의 기와지붕 형식의 주거 건축이 나타난 것은 삼한시대 부터이다.
안학궁 유적에서 드러난 와편들과 암막새, 수막새 등이 이를 뒷받침하며,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는 그들의 주거생활이 입식을 주요 생활방식으로 삼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앞 뒤의 지붕 2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이다. 수덕사 대웅전, 조사당, 봉정사 극락전, 성불사 웅진전 등이 그 예인데 사찰이 아닌 일반 주택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2) 조선시대의 주거형태
안동하회마을 전경 |
조선시대의 주거건축은 을사사화 이후 유림들의 낙향으로 인해 활성화 되었다. 현존하는 하회마을, 양동마을, 성암마을 등 유명한 전통 한옥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
현존하는 전통한옥은 조선 중엽에 건립된 팔작지붕의 형식을 대부분 취하고 있다. 맞배지붕 아래 우진각지붕을 합쳐놓은 듯한 형식인데, 그 모양이 화려하고 위엄이 있어 보여 권위와 체통을 중시하는 당시 양반들의 취향과 흡사하다.
그러나 지붕형식의 단아함과, 내부 구조의 우아함을 지닌 맞배지붕이 팔작지붕의 아름다움에 견주어 쳐진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건축구조의 안정감과 은근히 배어나오는 소박함은 팔작지붕에서 만날 수 없는 또 다른 한국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이런 맞배지붕은 하인들이 머무는 대문채의 부속건물이나 행랑채에 많이 나타나고, 양반들의 주거공간인 안채와 사랑채에는 팔작지붕의 화려한 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옥은 을사사화 이후 유림세력이 낙향하여 지방에 은둔 정착하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순천 낙안읍성에서도 나타나듯이 조선시대의 군과 현 등 도시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내에는 지방의 관청과 그 곳에서 일하는 향리, 노비들이 주요 거주 대상이었다.
왕명을 받고 내려온 관리들이 머무는 객사와, 관아 및 부속건물 몇 채, 그리고 배움과 제례의 장소인 향교 등이 기와집이고 대부분은 초가집의 형식을 띠고 있다.
지방의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세력을 형성한 사림들이 관아의 눈치를 보며 살 수 없을 터, 그 당시 서원이 위치한 곳만 봐도, 군 현에서 10리 20리 이상을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을사사화 이후 지어진 17세기 주거건축(기와집)의 대부분이 군 현에서 멀리 떨어져 자리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낙안읍성 | 병산서원 |
조선시대 지방행정을 맏아하던 낙안읍성. 객사, 관아 등 주요건물을 제외하고 대부분 초가집으로 구성되어있다.
| 을사사화 이후 낙향한 사림세력들은 지방관아와 떨어진 곳에 마을을 형성하여 부를 축적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
또한 조선시대의 한옥은 뒤편에 산을 두고 앞으로 광활한 농지와 하천을 두고 있다. 소위 배산임수, 남향을 좋은 택지로 꼽는데, 이것은 겨울철 차가운 북풍을 막으려는 의도이다. 또한 관아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한 측면과 함께 넓은 농토를 소유한 양반, 사림세력들이 그들의 노비들과 소작농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도이기도 하다.
씨족단위로 형성된 종가와 사당이 마을의 제일 높은 곳, 산 아래 평지에 위치한 것도, 그들 스스로의 위엄을 내세우는 한 측면과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한 지형적 요인에서 기인한 것이다.
종가 사랑채 대청이나 누마루에 올라서면 담장 너머 드넓은 평야를 조망할 수 있다. 소위 전망 좋은 집이 그곳이다.
건물의 구성을 보면, 외부담, 고샅, 대문채, 사랑마당, 사랑채, 내부담, 중문, 안마당, 안채 뒤뜰, 사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을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누각은 집에 따라 사랑채에 딸리기도 하고 별도로 만들기도 했다.
외부담
대구 옻골마을 외부담 | 경북 봉화 닭실마을 외부담 |
경북 안동 하회마을 외부담 | 전남 화순 이양면 학포당 외부담 |
외부담은 집의 전체적인 경계에 해당하는데, 흙과 돌로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올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담의 높이는 대개 사람의 눈높이 보다 살짝 높게 지어 집안의 대청에서는 밖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고, 바깥에서는 내부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안길과 고샅
전남 보성 예동마을 이용우가옥고샅 | 경북 성주 한개마을의 고샅 |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안길 | 전남 보성 예동마을의 안길 |
대문채는 마을의 중심 통로인 안길에 면하지 않고 ‘고샅길’ 이라는 골목길을 통해야만 드러난다.
그리 길지 않는 고샅길에는 바닥에 박석(박힌 돌)을 깔아놓아 나막신이나 말발굽 소리가 크게 들릴 수 있게 만들었다. 집안에 드는 손님이 있음을 알리는 신호로 요즘 말하는 초인종의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또한 고샅길은 안길을 통해 불어오는 센바람을 피해주는 역할도 하는데, 집안에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아내려는 비보풍수의 의미도 있다. 이 고샅을 들어서며 남의 집을 방문하는 손님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집주인을 만날 마음가짐을 추스렸으리라.
대문채
성주 한개마을의 대문채 | 안동 하회마을 유성룡 생가 대문체 |
나주 도래마을 홍기헌 가옥 대문채 | 보성 강골마을 이용욱 가옥대문채 |
고샅길을 지나 드러나는 대문채는 외부담의 높이보다 훨씬 높고 위엄이 있는 솟을팔작지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흔히 솟을대문이라 말하는 것인데, 대문 옆에 마구간이나 하인들이 사는 방을 만들어,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솟을대문의 높이는 대개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있는 높이인데 앞마당에 노둣돌이 있는 경우이고, 대문 밖에 하마석을 두고 대문의 높이를 다소 낮게 만들어진 집도 있다.
사랑마당과 사랑채
보성 이용욱가옥 사랑마당과 사랑채
| 전주 한옥마을 사랑마당과 사랑채 |
봉화 닭실마을 사랑마당과 사랑채
| 화순 서재필외가 사랑마당과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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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사랑채의 마당이 나타난다.
마당의 넓이는 사랑채 기둥높이의 2.5 - 3배 크기인데 이 크기가 사람을 가장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는 넓이라 한다.
우리의 전통한옥의 마당엔 잔디나 나무가 없이 깔끔하게 백토를 깔았다. 선비의 맑고 청렴함을 상징하는 의미에, 농경사회에서 필요한 각종 작업공간의 필요성 때문이다.
또한 뒤뜰에 접한 산과 나무들로 인해 여름철 앞마당과 뒤뜰의 온도차를 이용해 바람을 만들어 선선하게하고, 어두운 한옥의 실내에 마당에서 반사되는 햇볕을 간접조명으로 밝게 하기 위함이다.
사랑채에는 대청마루 누마루와 방에 함실이 붙어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방, 일종의 공적 공간이다. 남녀 간의 구별이 명확한 유교사회에서 기인한 것인데, 현대의 집이 사적인 공간으로만 치우쳐 미리 전화하거나 약속하지 않고는 접근조차 하기 힘든 점을 감안한다면, 남녀구별이라는 유교적 폐쇄성으로 치부하지 말고, 사랑채를 공적공간이라는 새로운 형태로의 해석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남부지방을 비롯한 일부에는 사랑채의 구석에 모방을 둔 경우도 있다.
사랑채의 이 모방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데, 점잖게 해석해 시어머니의 힘든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며느리를 위해, 이를 안쓰럽게 생각한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든 방이라는 해석에 믿음이 간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사랑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내외담과 중문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는 내외담과 중문 |
경주 양동마을의 향단은 대문채에 중문을 둔특이한 구조이다. |
사랑채를 지나면 외부담 보다 작은 내부담(내외담)이 나오고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이 서있다.
대문채가 팔작지붕의 화려한 형식이라면 중문은 소박한 맞배지붕에 그 크기도 크지 않다. 남녀구별, 내외의 구별을 위한 형식의 문이다. 안방마님이 머무는 곳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안채는 주로 여자들의 공간이다. 사랑채가 공적인 업무의 공간이라고 하면 안채는 순전히 사적인 공간이다. 집안의 가장 은밀한 공간이기도 하다. 궁궐의 구중심처에 있는 여인네들처럼 양반의 안채 역시 깊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은 사랑채의 마당보다 조금 작은 것이 보편적이다. 경북지방과 같이 ㄴ자 형식의 사랑채에 안채 ㄱ자 형식을 합한 튼ㅁ자 형식의 안채 마당처럼 대부분의 안채 마당은 작고 아담하다.
안채와 안마당
구례 쌍산재의 안채 |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의 안채 |
대구 옻골마을 한옥의 안채 |
보성 강골마을 이용욱가옥의 안채 |
마당에 들어서면 안채가 나타난다.
남녀구별, 남존여비의 유교사회라지만 안채의 틀과 규모에 있어서는 적용되지 않는 듯싶다. 반가의 크고 작은 대소사를 관장하고, 집안의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지휘본부답게 사랑채의 격식과 규모에 뒤지지 않는다.
튼ㄱ자, 一자, ㄷ자 형식의 평면을 가진 안방은,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 툇마루를 거느리고 팔작지붕을 쓰고 있다. 부엌에 면한 안방엔 구들이 놓여있고, 건넌방에는 따로 함실을 두어 난방을 한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에는 툇마루를 두어 신발을 벗지 않고 이동이 가능하게 효율을 높였다.
앞서 사랑채도 그렇지만 고려시대 입식이던 주거형식이 조선시대에는 좌식으로 바뀌어 청결성을 확보했다. 요즈음 모든 것이 서구화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신발을 벗고 실내에서 생활하고, 침대보다는 온돌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좌식생활이 훨씬 뛰어난 주거문화가 아닌가 싶다. 물론 욕실과, 주방 등은 제외하고 말이다.
뒤뜰과 사당
뒤뜰 추가 | 뒤뜰 추가 |
사당 추가 | 사당 추가 |
부엌과 면한 뒤뜰에 들어서면 다소 높은 기단에 장독대가 햇볕에 노출되어 있고, 아담한 화단이 있으며 감, 대추, 석류나무 등의 유실수가 선선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곳은 여름철 대청마루에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주는 바람공장이라 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안채의 동쪽에는 사당이 있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 공간이다. 이 제사공간은 남향의 경우 안채의 동쪽에, 북향의 경우 안채의 서쪽에 위치한다. 이것은 향이 동쪽이든 서쪽이든 남동쪽이든 북동쪽이든 상관없이 안채에서 마당을 직면하고 왼쪽을 동으로 보는 전통 가례의 법도에 따르기 때문이다.
3) 지역별 특성.
경주 양동마을 향단 전경 |
북촌 한옥마을 전경 |
조선시대의 한옥구조는 대부분 상기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지역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은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먼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의 경우, 一자형 사랑채에 ㄷ자형 안채를 두어 튼 ㅁ자 형식의 평면 구성을 갖는다. 겨울철 유난히 매서운 북풍한설을 막아내기에 충분한 구조 형식이다.
더구나 함경도를 비롯한 북쪽지방은 부엌 옆으로 마구를 두어 겨울에 소나 말이 얼어 죽지 않게 하고, 녹지 않는 눈을 피해 먹이를 주기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서울의 북촌을 중심으로 근대이후의 한옥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이러한 건축 형식의 축소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영남지방의 경우 험난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아래쪽에 ㄱ자 형식의 사랑채를 두고, 사랑채 옆 계단을 올라 중문을 지나면 다시 ㄴ자 형식의 안채를 만나게 된다. 겨울 북서풍을 막아주고 여름철 서쪽의 강한 햇볕을 막기 위한 구조이다. 안동의 하회마을과 경북 성주의 전통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특히 사랑채의 대청과 접하여 만들어진 누마루에 올라서면 일대의 조망이 훤히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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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ㅁ자 형식의 북촌마을 모습. (북촌) | ㄱ자와 ㄴ자가 결합된 열린 ㅁ자모양의 성주 한개마을 한옥. |
반면 평야지대에 자리한 호남의 주거 형식을 보면 사랑채 一 자에, 안채 一 자형의 평면을 볼 수 있다.
누마루는 별도 정자 형식을 빌어 집안 중 가장 조망이 좋은 곳에 지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안채 주변에 별도의 곳간채를 두는 경우가 많다.
또한 뒤뜰 주변에 인위적으로 수림을 조성, 후원을 만들어 평야지대에 위치한 지형적 약점을 막아 겨울철에는 북서풍을 막아주고, 여름철에는 시원한 바람을 불러들이는 일종의 비보풍수를 취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4) 조선 후기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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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후기로 접어들어 왕권이 약화되고 신흥부호세력이 나타나며 크고 웅장한 주거건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보성 강골마을의 이용욱 가옥 |
이러한 전통형식의 주거건축에도 단청을 못하게 하고, 이익공 이상을 제제하였으며 99칸 이상을 짓지 못하며, 기단과 초석에도 장대석 사용을 못하게 하는 등 왕권과 관련한 민가주택의 규제를 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왕권이 약해지고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오면서 신흥부호세력이 커짐에 따라 조금씩 이런 규제를 피하기 시작한다.
20세기초 구한말에 접어들면 각주보다 원주기둥이 많아지고, 기단과 주초에 장대석 사용이 많아지며, 사당 등 일부공간에 단청을 입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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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초 지어진 전주학인당의 사랑채 기둥은 백두산에서 가져온 소나무로 모두 두리기둥으로 만들었다. | 홑집구조에서 겹집구조로 지은 이용욱가옥의 사랑채는 내부 평면이 팽창한 대표적 사례이다. |
집의 구조 역시 홑집구조에서 겹집구조로 규모가 커지고 서구(특히 일본)의 영향으로 앞마당에 정원이 들어서고, 큼지막한 소나무가 앞마당을 자리잡기도 한다.
전통 한옥의 외부구조에 일본의 중앙 다다미 형식의 내부구조도 나타나며 심지어 화장실이 실내에 들어오기까지 한다.
특히 원기둥의 경우 17세기 왕명에 의해서만 허락되던 것이 후기에 이르러 우후죽순으로 사랑채 정면에 원기둥이 등장하고, 익공의 모습도 주거건축에서 보기 드물게 화려해 지기 시작한다.
5) 해방 후 한옥의 변화
빼곡이 들어찬 북촌 한옥사진 |
좁은 터에 안채와 사랑채를 지은 서울의 한옥은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인구의 수도권 집중과 맞물려 좁고 조밀한 평면구조를 만들어 냈다. |
해방 후 자본주의시대로 접어들면서 대표적인 변화는 이농과 함께 벌어지는 도시형한옥의 등장이라 할 것이다.
서구건축양식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전, 새마을운동 이전을 말하는데 과거 조선의 양반들이 넒은 대지를 소유하고 넒은 터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대의 변화와 사본의 논리에 못 이겨 하나둘 터를 팔기 시작한다.
처음 행랑채를 팔기기도 하고, 사랑채를 팔기도 하며 조금씩, 조금씩 터가 좁아지는데 새로 산 땅의 주인인 그 틈새에 다시 안채를 짓던가 사랑채를 지어 격식을 갖추고자 한다.
이러한 변화는 후에 양식화되어 좁은 터에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까지 포함하는 닫힌 ㅁ자 건물을 탄생시킨다. 과거 기와집을 지으면 정5품의 벼슬까지 했던 대목(도편수)들이 열과 혼을 다해 짓던 때와는 다르게 소위 말하는 ‘날림공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터가 좁기에 고샅은 사라지고 대문은 안길에 직면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사라지고, 마르지 않은 목재로 지어진 집은 곳곳이 뒤틀리고 서까레가 썩으며 비가 샌다. 또한 인방과 벽선엔 홈을 파지 않은 채 흙마감을 하여 겨울엔 찬바람이 살까지 후벼판다. 바야흐로 한옥의 종말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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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샅이 없이 안길에 면해 집을 지은 북촌의 안길과 대문채 | 좁은 땅에 다투어 지은 한옥의 모습은 공간의 분할이 없다 |
한쪽에선 시멘트벽에 깔끔한 외장을 한 양옥집이 2층, 3층 멋들어지게 올라서고, 구식은 무조건 나쁜 것임을 보여주기라도 한 것처럼 좁아진 마당에는 바람 한 점 들지 않고,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우며 비좁은 한옥의 초상이 펼쳐진 것이다.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에 가면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 놓여있다. 서울시의 지원으로 많은 한옥들을 개조하고 신축한 것은 다행이라 위안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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