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귀먹어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이튿날 새벽 나는 장릉과 청량포를 향해 걷는다. 내가 여행기간 내내 새벽부터 서두르는 것은 하루 일정을 여유롭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장릉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웠다. 영월의 사적지는 대부분 단종과 연관된 것들이다. 단종의 무덤 장릉과 유배지 청량포(淸凉浦), 죽임을 당한 관풍헌(觀楓軒)과 자규루(子規樓)는 직접적인 단종의 유적지다. 또한 단종이 죽자 그를 모시던 시녀 여섯 명이 뛰어내려 자결한 낙화암과 이들의 위패를 모신 민충사(愍忠祠)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 등 단종을 따르던 충신들을 모신 창절사(彰節祠)와 장릉 안에 있는 엄흥도 사당 정려각(旌閭閣)도 단종과 관련된 중요 유적지이다. 이곳 장릉(莊陵)은 경기도 김포의 장릉(章陵)과 구별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영월 장릉'으로 불린다. 김포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아버지로 뒷날 왕으로 추증된 원종(元宗)과 부인 인헌왕후 능이다. 시골 읍내 새벽길 공기는 매우 싱그럽다. 나는 새벽길을 걸으며 비운의 소년 국왕인 조선 제 6대 임금 단종의 생애를 짚어본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년) 7월 23일 왕세자이던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권 씨는 단종을 낳고 이튿날 죽었다. 단종은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고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죽으면서 12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의 비극을 이해하려면 할아버지 세종대왕 가계부터 살펴야 한다.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은 소현왕후 심 씨와 다섯 명 후궁에게서 무려 22명의 자녀(18남 4녀)를 두었다. 정실 소현왕후는 8남 2녀를 낳았다. 정실 아들은 대군(大君), 후궁 아들은 군(君), 정실 딸은 공주, 후궁 딸은 옹주로 불린다. 문종이 장남이고 수양대군이 차남, 뒤로는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 순이다. 어린 단종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숙부 대군이 일곱명이나 되는 것이다. 특히 수양은 학문을 좋아했던 문종이나 서예에 심취한 안평과 달리 무(武)를 숭상하는 35세 혈기왕성한 나이로 능력도 뛰어나고 야심도 많았다. 신하들은 세종 때부터 임금을 보필한 인재들이었다. 세종대왕은 병약한 문종을 걱정해 황보인, 김종서, 남지 삼정승에게 문종과 세손을 돌보라는 고명을 내렸다. 삼정승 아래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뒷바침하고 있었다. 왕위 찬탈의 야심을 품은 수양은 단종이 즉위한지 1년 반만에 한명회 등과 짜고 황보인, 김종서 무리가 안평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역모를 꾀했다는구실을 내세워 전격적으로 거사해 그들을 숙청하고 실권을 거머쥐었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다. 수양대군은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로 유배했다가 일주일만에 처형했다. 수양은 또다른 위협인물로 넷째 아우 금성대군도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시켰다. 자신의 모든 위협세력을 제거한 수양은 1455년 6월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으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는데 1456년 사육신 사건을 빌미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량포로 유배되었다. 청량포의 지형은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쪽에는 절벽과 험준한 산악이 가로막혀 있다. 단종의 목숨은 시한부였다.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조카의 억을함을 풀어주고자 귀양지 순흥부사와 지방군을 이용한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관노의 밀고로 적발된 것이다. 세조의 신하들은 계속되는 역모의 근본적 원인인 노산군에 대한 원천적 해결을 주장했다. 세조는 금부도사 왕방연을 파견해 사약을 보냈다. 당시 단종은 홍수로 청량포에서 읍내 관풍헌으로 거치를 옮겨 있었다. 실록에는 10월 24일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이 목을 매 자진했다고 되어 있다. 다른 기록에는 단종이 사약을 마시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금부나졸이 목을 매어 문밖에서 잡아당겨 숨을 끊었다고 한다.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임금의 추상같은 명령에 단종의 시신은 동강변에 방치되었다. 이때 영월 하급관리인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돌보지 않는 단종의 시신을 밤중에 몰래 수습해 관까지 마련하여 현재 장릉인 자신의 선산에 정중히 안장했다. 엄흥도는 후환을 피해 곧바로 관직을 내놓고 자식과 숨어 살았다. 단종이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백 년이 넘게 걸렸다. 1681년 숙종은 그를 노산대군으로 추봉한 뒤 1698년 정식으로 왕위에 복위시켰다. 단종이란 묘호도 이때 추증된 것이다.
부인 정순왕후 송 씨(1440-1521) 운명도 기구했다. 남편보다 한살 위인 그녀는 단종보다 64년을 더 살았다. 단종이 죽은 후 노비신분으로 전락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에서 시녀들과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그녀를 동정한 아낙네들이 몰래 먹을 것을 전달해 주기 위해 가짜 시장까지 조직했다. 여기서 기막힌 역사의 한토막을 본다. 성삼문 등과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던 신숙주의 작태다. 그가 수양대군에 가담해 계유정난 공신이 된 것까지는 그의 정치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정순왕후가 노비로 격하되자 세조에게 그녀를 종으로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왕조시대 얼마 전까지 왕비였던 여자를 종으로 삼겠다는 발상이 과연 비겁한 지식인답다. 세조는 자신이 만든 업보지만 차마 조카며느리를 공신의 천첩(賤妾)으로 내어 줄 수 없었던지 '신분은 노비지만 누구도 부리지 못한다' 는 명을 내리고 아무도 범할 수 없게 그녀를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왕이 죽은 다음 후궁들이 궁에서 나와 여생을 보내는 곳으로 숭인동에 있었다. 역사를 헤집어보면 기막힌 일들이 많다. 사육신 등 많은 사대부 여인들이 노비가 되어 전국에 흩어졌다. 이들 가운데 자결하거나 범접할 수 없는 품위를 가지고 살아간 사람도 있지만 많은 여인들은 새로 상전이 된 사람에게 아양을 떨면서 본처의 하대와 괄시를 받는 천첩으로 목숨을 이어갔다. 여인들의 새 주인들은 남편 생존시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하급관리들이었다. 그들은 지체 높았던 대감 부인을 자신의 노비첩으로 소유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꿈같은 일이었을까. 신숙주 역시 이런 만족을 위해 왕비였던 여인을 종으로 달라고 간청한 것이 아닐까. 당시 사람들은 빨리 상하는 녹두나물을 신숙주처럼 쉽게 변한다해서 숙주나물이라 불러 지금까지 내려온다. 신숙주는 이렇게라도 후세에 이름을 남겼으니 가문의 영광일까.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자 매일 조석으로 낙산 큰바위에 올라 영월을 향해 곡을 했다. 그녀가 곡을 하면 마을 아낙네들도 함께 곡했다. 후일 영조가 이를 기려 동망봉(東望峰)이라는 친필을 내려 바위에 새기게 했다. 그녀는 1698년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다. 남양주 사릉(思陵)이 그녀 무덤으로 남편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사릉 나무들이 장릉 쪽으로 고개숙여 자란다는 전설도 있다. 나는 단종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절대권력의 비정함을 본다. 수양은 왕위를 위해 어린 조카와 형제들을 죽였다. 이조 건국 초기에는 왕자들이 서로 죽이고 싸우는 난을 벌였다. 이조시대 수 많은 사화(士禍)의 본질도 권력다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양대군이 비록 천륜을 짓밟고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기간 치적은 비교적 뛰어난 편이었다. 단종이 왕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조선 형편이 더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권력과 관계없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다행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왕위 찬탈이 결코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절대권력에는 부자(父子) 사이도 소용없다. 태양이 둘일 수 없는 이치다. 왕권시대 뿐 아니라 현대사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절대권력을 위해 29살 독재자가 자신을 키운 고모부를 잔인무도하게 살해한 것도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대한민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박정희도 권력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을 죽이려 했고 자기 편인 조카사위 김종필까지도 끊임없이 견재했다. 전두환도 대권쟁탈을 위해 상관들을 체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민주화 시대라지만 권력의 본질은 마찬가지다. 권력이 한사람에게 집중될 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개선책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제도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장릉으로 향했다. 장릉 앞 작은 호수변에 '노루조각공원'이 있다. 단종에 얽힌 노루의 전설을 상징한 것이다. 귀여운 암수 한 쌍과 새끼 등 노루가족 조형물이 장릉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공원에는 다양한 노루들과 어린이와 방망이를 손에 든 아기 도깨비 조형물도 있다. 호수에는 연꽃이 심어져 꽃피는 계절에는 무척 경관이 아름다울 것 같다. 전설에는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자신의 선산인 이곳으로 옮겨 묻을 곳을 찾던 엄홍도가 노루가 앉아있다 달아난 자리에서 잠시 쉬었는데 관을 얹은 지게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이를 하늘이 점지해 준 자리로 믿고 안장한 곳이 장릉이라고 한다. 영월군은 단종과 얽힌 노루 전설을 관광자원의 하나로 삼아 이곳에 노루공원을 조성하고 시내 여러 거리에도 노루 조형물을 세웠다. 문득 조각공원 언덕위를 쳐다보는데 숲속에 수백 마리는 족히 될 듯한 백로인지 두루미인지 알 수 없는 새때들이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무슨 새인지 알고 싶어 아침 산책나온 사람 몇사람에게 물어보았으나 예전부터 있었다는 대답 외 이름을 정확이 아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항상 대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는 모양이다. 장릉에 도착하니 이른시간이라 문이 굳게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그곳에서 4킬로 쯤 떨어진 청량포부터 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청량포로 가는 하천부지에는 체육공원 시설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옛날 나룻배로 건넜을 창령포는 요즘은 관광객 전용선으로 건넌다. 이곳도 이른시간이라 배를 뜨려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창령포는 강건너에서도 빤히 보여 굳이 복원된 건물들을 보러 강을 건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강변에 앉아 청량포를 바라보며 단종의 유배생활을 그려본다.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른 12살 어린 소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수아비처럼 왕위에 앉았다 삼촌에게 자리를 뺏기고 이곳에 온 소년은 하루하루 눈물과 한숨이었을 것이다. 단종은 외부와 단절된 채 시녀들과 생활했다. 그는 어린시절 뛰어놀던 궁궐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다. 고송이 숲을 이룬 이곳에는 관음송이라는 수령 6백 년이 넘는 소나무가 있다. 단종이 걸터앉아 한양쪽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는 관음송이다. 소년왕의 유배생활을 지켜보았으니 관(觀)이요,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으니 음(音)이라 관음송이라고 한다. 관음보살에서 따온 이름이 분명하건만 후세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해석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지만 단종과는 관계없이 수령이 오래된 이유이다. 단종이 죽은 1457년 그해 큰 물난리가 있었다. 따라서 영월부사는 그의 거처를 임시로 읍내 관풍헌으로 옮겼다. 이때 세조는 모든 역모의 근원인 단종을 제거하라는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들려 보냈다. 문신이며 시인인 왕방연은 단종이 이곳으로 유배 올 때도 호송책임을 맡은 악연이 있다. 이곳 청량포 나루에는 왕방연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그의 시를 옮긴 것이다.
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희옵고 / 내마음 둘듸 업서 냇가에 안쟈시니 / 뎌물도 내안갓도다. 우러 밤길 예놋다. /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이별하고 /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아 있으니 / 저 물도 내 속 같아서 울며 밤길 가는구나)
왕방연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들고 단종 앞에 나가려 했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장이 늦는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없이 마당에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까닭을 묻자 차마 대답을 못했다. 이때 단종을 모시던 통인이 대신 단종께 아뢰었다. 나는 이제까지 단종이 청량포에서 사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에 영월에 와서 그 현장이 관풍헌이라는 것을 새로 알았다. 관풍헌은 또한 김삿갓 김병연이 자기 할아버지를 욕보이는 글로 장원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행인들에게 관풍헌의 위치를 물어 우선 그곳부터 본 다음 장릉에 가기로 했다. 그래야 유배처와 죽음장소, 매장지로 순서가 맞을 것 같았다. 관풍헌은 읍내에 있다. 도착해보니 엉뚱하게 보덕사 포교당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행인에게 확인하니 이곳이 맞다고 한다. 보덕사는 단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영릉 동쪽에 지은 절인데 그곳 포교소인 것이다. 무슨 연유로 이곳이 절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안에는 관풍헌과 자규루가 그대로 있다. 세종 1년에 세운 관풍헌과 자규루는 1605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숙종 때인 1791년 복원한 것이다. 자규루는 원래 매죽루(梅竹樓)인데 단종이 이곳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자규시를 지은 다음부터 자규루라고 불리운다. 현재 자규루에는 앞에는매죽루, 뒷에는 자규루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나는 이곳에서 단종의 자규시를 읽으며 어린 소년왕이 겪었을 원한과 외로움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었다.
一自寃禽 出帝宮 孤身隻影 碧山中 /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 聲斷曉岑殘月白 血淚春谷洛花紅 / 天聾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聽 / 한마리 원한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 외로운 몸, 없는 그림자가 푸른 속을 헤매네 /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이루고 /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산에 달빛만 희고 / 피를 뿌린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 하늘은 귀먹어 애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 어쩌다 수심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
우리나라에는 낙화암(落花岩)이 두곳 있다. 하나는 부여 낙화암이고 또하나는 영월 낙화암이다. 단종이 죽자 그를 모시던 시녀 여섯 명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통곡하면서 동강물에 뛰어내려 자결했다. 영월 KBS 부근 동강변 절벽에 금강정(錦江亭) 정자 뒤에 민충사(愍忠祠)가 있다. 단종의 명예회복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영조는 시녀들의 충절을 기려 사당을 세울 것을 지시하고 현판을 사액했다. 또한 엄흥도를 기리기 위한 장려각을 장릉에 세우도록 한 것도 영조다. 이제는 단종 무덤인 장릉으로 갈 차례인데 시장기가 돈다. 내가 영월에 있음을 확인한 제주도 차제가 그곳에서는 꼭 영월역 앞 올갱이국을 맛보라고 권했다. 관풍헌을 나와 동강다리를 건너 영월역을 찾았다. 역 앞에는 올갱이국 파는 곳은 없고 온통 다슬기 식당들 뿐이다. 나중에야 올갱이와 다슬기가 같은 것임을 알았다. 지방마다 이름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식당들의 경쟁이 재미있다. 한쪽에서 '원조 다슬기 해장국'이라고 하면 다른 집은 '동강 다슬기 원조집'이다. 또한 TV에 소개된 식당이 그리 많은지 한집걸러 각기 다른 방송국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다며 당시 화면을 크게 붙여 놓았다. 제법 깨끗하게 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안에 부착된 안내문이 자극적이다. 자기네는 100% 국산 다슬기만 사용하는데 사실이 아닐 경우 음식값의 3천 배를 변상하겠단다. 나는 7천원짜리 해장국을 주문하면서 제발 이집 다슬기가 수입품이기를 바랬다. 그래야 횡재할 것 아닌가. 그러나 嗚呼痛哉라! 먹고난 다음 증명할 길이 없구나. 가끔 신문에 다슬기를 잡다 익사했다는 보도를 보면 우리나라 산천에 그 흔하던 다슬기도 사라질 날이 머지 않을 것 같다.
걸어걸어 물어물어 장릉에 도착했다. 잡초속에 버려졌던 단종의 묘는 240년이 지난 숙종 때 비로소 장릉이란 능호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뒤늦게 왕릉이 된 이곳은 다른 능과 다른 점이 많다. 조선의 왕릉은 도성 밖 10리부터 백리 사이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인데 장릉만 멀리 떨어져 있다. 특히 왕릉에 신하의 사당을 둔 곳은 장릉 뿐이다. 입구에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 홍살문과 함께 제일 먼저 눈에 띄인다. 오른편으로는 단종역사관이 세워져 단종과 정순왕후에 대한 자료와 해설,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엄흥도가 선산에 몰래 매장한 터라 좌청룡우백호를 따질 겨를도 없었거니와 왕릉으로 복원되고도 워낙 공간이 협소해 격식을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따라서 장릉에는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다. 나는 비운의 소년왕 단종을 애도하며 무덤에 재배했다. 그로부터 열흘 후 나는 남양주의 정순왕후 사릉(思陵)을 찾았다. 사릉역시 다른 능과 달리 소박했다. 노비 신분으로 죽은 그녀를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시댁에서 선영에 모신 탓으로 위치도 민간 묘역에 있을 뿐아니라 석물도 별로 없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광해군 묘소가 있는데 그보다는 규모가 크다. 왕비와 군(君)의 차이다. 단종은 왕자로 태어난 것이 죽을 죄였다. 서민으로 태어났다면 처자식과 천명을 누리고 살았을지 모른다. 그렇게보면 '나물먹고 물마시는' 서민들이 상팔자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는 핍박이 두려워 평생 숨어 살았지만 사후에는 영조에 의해 공조판서로 추증되고 고종 때에는 충의공 시호를 받았다. 자손들은 우선적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하급 지방관리로 생을 마감하였을 엄흥도는 조선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영구히 기억되고 있다. 한편 세조에게 정순왕후를 종으로 달라고 졸라댔던 정승 신숙주도 변하기 쉬운 녹두나물의 대명사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2014.8.12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