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8: 20-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은 경건한 백성을 세우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경건한 백성들의 계대에서 마침내 메시야가 나오시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그분께서 택하신 만민을 구원하실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일하셨고 아담 이후 아브라함의 지금까지도 그러하셨으며 지금 행하시려 하시는 소돔과 고모라의 일도 그 일환으로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광대하고 복잡한 일이지만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1. 본문 20절은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여기서 다섯 도시들의 멸망에 대하여 그분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지금 그분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 두 도시는 그 나머지 도시들보다 훨씬 더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들의 형벌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들을 노출시켜서 그들이야말로 마땅히 멸망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한다면 그 이야기가 교훈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죄로 인하여 유발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시 한번 감화를 받게 됩니다.
‘부르짖음이 크고’ 라는 말로 그분은 그들의 범죄들의 극악성(極惡性)을 시사(示唆)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도시들 안에 억울함을 당한 자들의 일반적이고도 상호적인 호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죄악을 감춤으로서 형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게 된 것이라고 자신들에게 다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드러나 있고 보응이 준비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죄악들이 사람들에게는 조용하게 그리고 말없이 지나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죄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귀에 쟁쟁하게 그리고 큰 소리로 돌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죄악 그 자체의 외침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기억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도저히 회상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재판 앞에 다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도 고발하거나 비난할 사람도 없지만 그것들 자체가 보복을 요구하게 됩니다.
2. 본문 21절 앞부분에
“내가 이제 내려가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서 사람의 모양으로 말씀하시는 체휼에 속하는 표현법입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그 도시들의 죄악상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시겠다고 하신 것은 그분께서 아브라함과 접촉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양으로 말씀하시는 바 의인주의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경우에 아브라함과 같은 택하신 자들의 경우에는 긍휼로 임재하시지만 유기자들, 곧 죄악으로 굳어진 자들에게는 엄위로우신 진노의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가 되는 본보기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를 통하여 이 본보기가 기념이 되게 하시며 그 사실을 성경에서 빈번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지는 이 일들을 부지런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온건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을 즉시 호통치시거나 그들에게 즉시 그분의 보복을 퍼부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철저하게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드디어 그들에게 대하여 오랫동안 보류해 왔던 형벌을 가차없이 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 형벌을 집행하시는 면에서 적절하게 그리고 올바로 순서가 조절된 가운데서 진행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실제로 받을 벌보다 더 심하게 내리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잘 조절된 순서를 따라서 진행하십니다. 무척 참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불경건의 최고의 극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우리의 사악함이 너무도 옹고집이라서 더 이상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는 상태까지 참고 우리를 기다려 주실 때도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이 너무 성급하게 활동하신다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사진에서처럼 우리는 참아 주시는 가운데 공평을 보여주고 계시며 그렇게 하심으로 죄악에서 성숙한 사람들 외에는 절대로 그분의 형벌을 터뜨려 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다른 한편으로 만약 우리가 소돔을 바라보게 되면 거기에 무서운 마비상태가 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소돔사람들이 하나님의 조치를 받지 않았다면 계속 그 상태를 버리지 않고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으며 모든 더러움이 가득찬 시궁창에서 데굴데굴 딩구는 돼지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계속하여 자기들의 행위들에 대하여 회상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면 그들의 죄악을 만끽하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질병은 전 시대에 걸쳐서 너무도 지배적으로 난무하고 있으며 현 시대에는 너무도 당연한 일반적인 것으로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을 우리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다 버리고 있는 이 소돔 사람들이 자기들 자신에게만 탐닉되어 죄를 얼마나 짓든지 상관없이 자기들은 형벌을 받지 않고 지낼 것이라고 장담하는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하시려는 계획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의 부르짖음에 감동되어 이 지상에 내려오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이 어느 때라도 그분의 심판을 연기하실 때는 우리가 더 좋은 상태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죄악성의 외침이 그분의 귀에 들리기 전에 그분의 위협적인 소리를 듣고 깨우쳐서 재빨리 미루지 말고 그분에게 호소하게 하려고 그렇게 심판을 연기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런 참으심은 우리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을 인간들의 방법대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본문 21절 나머지 부분은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입니다.
히브리어 명사 (카라)라는 말은 한 일의 완전성 또는 끝을 의미하는 말로 모세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의 파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제롬은 그 말을 ‘만약 그들이 그것을 행동으로 다 마쳤다면’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의 죄가 과연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를 조사하시려고 내려오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모리 족속들의 죄악이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의 전체의 뜻은 여호와께서 과연 그의 자신들이 죄악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빠져 있는 전적으로 구제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태인가를 확인하시려던 참이었다는 말입니다 또는 그들이 그렇지 않고 아직도 하나의 과정이 있으며 그래도 다시 깨우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시려는 참이었다는 의미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을 철저하게 싫어하셨으니 만큼 만약 그들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치료될 수가 있다면 그렇게 하시려고 확인하시려던 참이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이렇게 번역하기도 합니다. 즉 ‘만약 그들이 이 일을 하였다면 그들의 마지막 멸망은 곧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어느 정도의 형벌을 받아야 될지 알아봐야 되겠다’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의미가 본문의 문맥과 가장 잘 일치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체휼하셔서 자기 자신을 인간처럼 나타내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격성을 보여주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그분을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면서도 보다 확실하게 대면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에 대하여 사람과 교제 하듯이 교통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서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생명이 없으신 이론의 법칙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살아 계셔서 항상 자기 택하신 백성을 대하시고 도우시는 인격적인 신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