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93
12월3일[대림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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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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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IhHi-RzliU
[서울대교구 전경표 아브라함 신부(구로2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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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이 대림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유달리 힘겹고 답답했던 한 해가 저물고 우리는 또 다시 대림시기의 출발점에 서있습니다. 저녁식탁에서 한 형제가 이제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데, 공동체 차원에서 뭔가 절제하고 보속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하지 않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갑자기 다들 알쏭달쏭해졌습니다. “뭐지? 대림시기에도 그랬었나? 아닌 것 같은데, 맞나?”
물론 교회 역사 안에 그런 흔적이 있었습니다. 중세기 교회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대림절 동안 사순절 못지 않게 속죄와 단식, 금육과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단죄와 심판을 위한 날이 될 것이라 믿었기에, 대림절 동안 참회와 속죄가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쁨의 시기입니다.
어찌 보면 대림시기는 한 달간 지속되는 단기 영성학교입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신자들에게 희망에 찬 기다림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물론 대림절 동안 육화강생의 신비와 구세주 하느님의 지극한 겸손에 깊이 감사하며, 걸맞는 성찰과 준비도 필요합니다.
대림시기 동안의 성경 말씀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될 회개와 보속에로의 초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림 시기에 더 강조되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강생하신 놀라운 사건 앞에 경탄하고 기뻐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라는 은혜로운 대축제를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시기가 곧 대림시기인 것입니다.
또한 대림시기는 말 마디 그대로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관건은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입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가장 간절하게, 또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
잠깐 동안 유학생활을 할 때의 기억도 끔찍합니다.
외국어, 그까짓것, 일단 나가면 적당히 되겠지,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학연수 시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저게 KAL기인가, 저거 타고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던지, 빨리 논문 끝내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꽤 오래 전, 갑작스런 발병으로 한밤중에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혼미한 가운데서도 뭔가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제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듯한 새파란 ‘왕초보’ 의사들만 번갈아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점점 증폭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빨리 아침이 와라.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의사 선생님, 제발 빨리 출근 좀 하세요!”
또 다시 도래한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가 지닌 ‘기다림’의 질은 어떻습니까? 강도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대림시기, 우리는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보다 열렬히, 보다 순도 높게 주님을 기다릴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겠지요. 기다린다는 것,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중지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삶을 탈피한다는 것, 내 지난 삶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쇄신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대림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지침으로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13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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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근심 대신 찬양을, 걱정 대신 감사를!>
오늘 우리는 적당적당히, 두리뭉실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삶을 살기 위한,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족집게 강의를 해주고 계십니다. 말씀을 묵상해보니 연봉 수십억의 일타 강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3가지 장애물에 대해서 주의를 주십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방탕입니다. 무언가에 과도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정돈되어 있지 않고 심하게 흐트러진 상태입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만취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주(主)님이 자리잡고 있어야 마땅한데, 주님 대신에 또 다른 주님인 주(酒)님이 떡하니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니 삶이 늘 비틀거리기 마련입니다. 꼭 술에 취한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혹 거리나 우상에 푹 빠져 취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장애물은 일상의 근심입니다.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 일상 한가운데 현존하시며, 매사를 돌보시고 섭리하심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근심 걱정이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종합해보니 과도한 근심 걱정의 결론은 만취입니다. 만취의 반복은 우리를 방탕한 삶으로 몰고 갑니다. 그로 인한 무질서한 삶의 원인은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기도의 결핍입니다. 영적인 삶은 뒷전이고, 오로지 육에 함몰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은 즉시 무질서해지고 방탕한 삶으로 연결됩니다.
교회 전례력에 따르면, 오늘로서 한해가 마무리됩니다. 내일부터는 또 다른 한해의 첫 출발점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저무는 한해와 새롭게 시작되는 한해가 교차하는 참으로 의미 있는 하루입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나큰 은총과 축복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이런저런 근심 걱정 모두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리고 새롭게 맞이할 한해도 주님 섭리에 손길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며, 순간순간 주님 은총 안에 머물기를 희망하며, 근심 대신 찬양을, 걱정 대신 감사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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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OwZXf2lR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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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공짜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오늘부터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이때마다 나오는 복음의 주제가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깨어있음은 각자가 주인이 맡긴 일을 하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마르 13,34-35)
누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왜 어떤 이들은 그 일을 하지 않을까요? 그 해답은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들이 ‘공짜’라고 믿게 만드는 자아의 계략에 속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렸습니다.
영화 ‘치킨 런’(2000)은 1950년대 요크셔 양계장을 배경으로 한 무리의 닭들이 농장주인 트위디 부부에게서 탈출하려는 과정을 다룬 애니메이션입니다.
주인공 진저는 자유를 꿈꾸며 거듭 탈출을 시도하는 암탉 무리의 리더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이가 공짜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냥 편하게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으며 알이나 낳으며 살자고 말하는 닭들도 있지만, 진저는 자유를 갈망합니다. 수없는 시도와 실패 끝에 비행기를 만들어 닭장에서 탈출한다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닭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만큼은 공짜라고 여깁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에게 주어지는 것이 공짜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예전에 박한상이라는 청년은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고 불을 질러 방화로 위장하려다 잡혔습니다. 그는 부모가 워낙 부자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 그렇게 고맙지 않았습니다. 극히 일부분을 주면서 생색낸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돈과 쾌락과 자존심의 노예가 되어 사람이 망가집니다. 부모의 뜻을 따라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부모에게 받는 것이 공짜라 ‘감사’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 생명이 공짜로 주어졌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생명은 부모가 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다시 생명을 줄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주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주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에게 받은 생명이 공짜가 아님을 안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 마음밖에 바라지 않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부모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해 놓은 장치가 하나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받은 에덴동산과 자신들의 생명 전체에 대해 공짜로 여기나, 받은 것으로 여기나를 시험하는 버튼과 같았습니다.
하느님은 땅에서 나는 소출의 십분의 일은 당신의 것이라며 당신께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사를 몰라 불만 속에서 더 가지려고 세상 것에 집착하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악해집니다.
닉 부이치치는 손과 발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살 시도도 몇 번이나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자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손과 발을 안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만 빼놓고 다 주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셨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왜 생명을 주셨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결론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같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가 되라고 세상에 보내신 것이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살아 결혼하고 자녀들까지 낳고 수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은 하나 같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처지에 감사하며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께 보답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만에 싸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해도 자기들 부족한 것들만 청합니다. 닉 부이치치의 경우면 팔과 다리를 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있음이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공짜는 없음을 깨달아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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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3년에는 ‘성지순례’를 6번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2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지를 보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도 하고, 사진에 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성지순례를 다닐 때는 주로 보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오병이어 성당, 진복팔단 성당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의 무덤성전을 보았습니다. 나자렛에서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보았습니다. 로마에서는 베드로 대성당을 보았습니다. 루르드에서는 성모님의 발현 동굴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목적이 되면 눈은 즐겁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일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선조들이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순례를 통해서 나도 신앙의 선조들처럼 치열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지순례의 목적은 ‘멈춤, 만남, 변화’가 됩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성지에서 신앙의 선조들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면 더 나은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했던 것처럼,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처럼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지순례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 주일’입니다. 세상의 달력은 아직 24일이 남았지만 교회의 전례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음에도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아침 4시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잠에서 깨어났기에 지금 이렇게 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깨어난 모든 생명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존과 종족의 보존입니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먹히는 ‘양육강식’의 세계입니다. 환경에 적응한 것이 살아남은 ‘적자생존’의 세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깨어남입니다. 우리는 이런 깨어남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구도의 길을 갈 때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영적인 ‘깨달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에도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선물처럼 주어지는 깨달음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 벅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치열한 성찰과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7년간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을 이웃에게 전하였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완고해진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의 기적은 이방인이었던 시렙다의 과부에게서 일어났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치유의 기적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서 일어났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알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찾아라.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들의 꽃들을 보아라. 저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다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 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았을 때는 낙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2024년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겸손과 온유로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선물처럼 받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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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3,33-37: 조심해서 항상 깨어있어라.
대림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모든 기다림의 시간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를 대림 시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대림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에, 그분의 초대에, 그분의 부르심에 그리고 매 순간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림은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다. 오늘 전례에서 대림의 의미가 잘 표현되고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구원의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즉 하느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구원될 수 없으며, 더구나 그 스스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63,16-17; 64,1 참조) 여기서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불충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임재는 변화를 일으키신다. 하느님의 오심은 구원을 위한 것이다. 구원적 도래라고 할 수 있다. 성탄을 잘 준비하는 의미가 이것이다. 우리가 성탄에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는 표지가 되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하시고, 깨어있도록 초대하신다. 깨어있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깨어있어야 할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의 개념은 세 번(33.35.37절)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34절) 데서 한 번 더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마태 25,14-30의 달란트의 비유와 루카 19,12-27의 미나의 비유에서 더 발전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예리하게 기다림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집주인의 돌아옴은 불확정적이어서 갑작스레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네 번에 걸쳐 깨어 기다림을 상기시킨다. 그때가 저녁, 한밤중, 닭이 울 때, 이른 아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오심의 이러한 불확실성에 근거한 깨어 기다림은 모든 신자에게 정신을 차려 깨어있어야 할 책임성 있는 태도를 가르쳐 터득게 한다. 책임 있게 깨어 기다리는 것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미래를 꿈꾸는 묵시적 열광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무감각이나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진정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깨어있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어야 함을 말해 준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도래에 대한 주제를 다시 취하여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주님께서 실제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주님의 심판 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은총의 빛 안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된 왕국에서 결합해줄 그 친교는(1코린 1,9 참조)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매일 매일 계속해서 작은 도래, 임재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 위대한 마지막 도래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어느 때고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만남을 잘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죽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그 순간마다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 만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항상 깨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결정적인 만남, 우리의 죽음 혹은 주님의 재림도 기쁘게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계속 살 수 있도록 깨어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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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기를 기도드립니다. 교회의 전례주년은 언제나 대림 시기로 시작됩니다. ‘대림’(待臨)은 말 그대로 ‘임하심 곧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대림 시기를 보내며 성자께서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또한 지상에서 임무를 마치시고 하늘로 오르신 그분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종말의 때를 기다립니다.
대림 시기의 첫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오늘 복음에는 다섯 구절에 지나지 않는 짧은 단락 안에 이 표현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당신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들이 언제나 깨어 있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문맥 안에서 이 단락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의 여정에 들어가시기 바로 전에 하신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곧 그분께서 남기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실제로 밤에 잠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잠들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영적인 수면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릴 필요를 더이상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살이에 만족하며 현재의 삶을 더 오래 누리고 싶은 욕망이 커질수록,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의 행복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기 마련입니다. 흥미진진한 볼거리로 육의 눈은 말똥말똥 뜨고 있지만, 영의 눈은 무거운 눈꺼풀로 감겨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시대의 코린토 교우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늘 깨어 있도록 합시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이 탄원이 영광스럽게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탄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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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
<영적 갈등은 축복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수많은 백성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 어 특별한 은총으로 돌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오직 하느님만을 공경하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모범적인 공동체를 이루어서 다른 민족들이 그들의 삶을 보고 당신을 찾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고 자주 우상숭배에 빠져 서로 다투고 해치기를 거듭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언자가 등장하여 심판을 예고했지만, 말을 듣지 않아 곤경을 당하고는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곤경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제국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이 점령되어 성전은 파괴되었고, 왕족과 지도층은 대거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페르시아로 지배권이 넘어갔고, 기원전 538년 키루스 임금은 유다인 들의 귀향을 허락합니다. 그들은 부푼 꿈을 안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예루살렘은 폐허로 변해 있었고 이민족의 위협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유다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습니다.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제1독서) 하늘을 찢고서라도 빨리 오시라는 간절한 외침에 하느님은 자비롭게 응답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찾는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인 영적 갈증은 축복입니다. 목마름이 있어야 물의 소중함을 알고, 허기가 져야 음식의 고마움을 알게 되듯이, 영적 갈증이 있어야 하느님과 그분이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제2독서)가 얼마나 좋은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갈증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와도 같습니다. 그 역할은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계속됩니다. 내 세에서 하느님을 마주 뵙고 충만한 복락을 누리게 되면 더는 영적 갈증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하느님을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이승에서는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만날 것입니다.(1코린 13,12) 이 복된 만남을 고대하는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먼 길을 떠난 집주인이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깨어 기다리고 있는 문지기처럼 말입니다.(복음)
대림은 이미 오신 주님을 기억하는 동시에 세상 종말에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도록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신앙인은 유한한 세상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시편의 저자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시편 42,2-3) 영적 갈증을 간직한 채 하느님을 마주 뵙고 한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그 복된 날을 희망하면서 매일의 삶을 사랑으로 채워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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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이건 가브리엘 신부님(곡성성당)]
<깨어 기다림>
교회는 대림시기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교회가 한 해를 양력처럼 1월1일에 시작하지 않고 대림시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대림 시기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끝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대림 첫 주일-12월 16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가운데에 탄생하셨음을 기념하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12월 17일~24일)입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대림 시기 동안의 독서와 복음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대림 1주인 오늘 복음은 세상 끝날을 기다리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깨어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성탄 준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탄이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하나요? 그렇습니다. 성탄은 모든 이가 기뻐하고 기대하는 잔칫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탄 준비'에는 세속적인 준비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과 이웃사랑의 영적인 준비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와 보 속과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찾으며 주님을 위한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탄은 모든 이에게 행복한 날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도움이 필요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성탄은 자비의 축제입니다. 곧, 인간의 자비와 종교적 자비의 잔칫날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게 하십시오. '너희 집은 성탄 구유를 마련했니?" (1966년 12월 4일 삼종기도에서)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은 제각각이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탄은 대림시기를 통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찾고, 실천하며 생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깨어있어라.” 생각할수록 우리에게 경종이 되는 말씀이며, 삶에 힘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주님의 길을 생각하지 않거나, 외면하는 우리에게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깨어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겸손하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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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이석우 비오 신부님(관리국장)]
<기다림>
교회는 전례력으로 새 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달 대림 시기를 보냅니다.
대림(待臨)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을 준비하며, 진정한 왕으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 대림 시기를 통하여 우리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확신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정성된 마음으로 잘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주님만이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유대를 인들의 임금께 경배하기 위하여 그분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합니다.(마태 2,1-12 참조) 이 사실을 들은 헤로데 왕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통하여 베들레헴이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임을 알게 되지만, 동방박사들만 먼저 보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도 경배하겠다고 했지만 가지는 않습니다. 헤로데 왕은 새로운 왕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생각했고, 심지어 훗날 아기 예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두 살 이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처음부터 아기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헤로데 왕처럼 이해득실을 따지며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이 아닌 온전히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기에,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불확실하다고 이 깨어있음이 경직되거나, 두려운 나머지 공포에 휩싸이 생활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친교 안에서 당당히 지내면서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성당의 제대 앞에 있는 대림환은 앞으로 4주에 걸쳐 하나씩 하나씩 촛불을 밝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대림환은 하나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촛불이 많아질수록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음을 알려줍니다.
대림절은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또한 만남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고 주님 만날 채비를 하면서 그분을 기다립시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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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손원모 요한 크리스토모 신부님(로사리오의집 관장]
<대림-기다림과 희망>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 전의 4주간을 대림 시기로 정하고 있으며, 이 시기의 특별한 의미를 밝혀주면서 우리의 태도 변화를 요청합니다.
대림 시기의 의미를 살펴보면 기다림, 그리고 그 기다림 안에 있는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두 부분, 즉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로 준비하는 부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대림 1주부터 12월 16일까지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듯이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깨어 기다리는' 데 중점을 둡니다. 이에 비해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의 전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림 시기는 하느님 자비의 가장 완전한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감사하며 기다리는 시간이며, 동시에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기쁨으로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참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진정으로 기뻐하면서 자신의 삶을 모두 드릴 결심은 되어있을까요? 아니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탄생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탄생하신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그 자비를 입기 위한 어떤 태도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교회가 가르치고 제시하는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자비이지만, 이 자비를 입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태도를 갖춰야 합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길을 따라 자신의 삶을 바꾸고를 준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면서 교회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선하심에 무한히 의탁하고 이웃에게 언제나 자비로운 태도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복음에서 요구하는 태도, 즉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있어라."(마르 13.27)에 부합하는 태도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오실 때 우리 중 누구도 졸거나 잠들어 있지 않도록 기도하고 보속하면서 대림 시기를 잘 보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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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조태현 스테파노 신부님(문경 성 요셉 치유마을 원장)]
<새로운 하루를 주시는 하느님>
2023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이 시기에, 우리 교회는 조금 일찍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 첫 시작을 우리는 '대림 시기'와 함께 보내는데요, '대림(待臨)'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고대하며 더 '깨끗하고, 맑고, 자신 있는 내가 되기 위해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또한, 잠시 멀어졌던 하느님께로 돌아오면서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요. 그래서 제단 앞에 장식된 대림초처럼 우리의 영혼과 삶 또한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하얗고 깨끗하게 '정화'되어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대림 시기 동안, 전례적으로는 미사 중에 '대영광송'을 바치지 않게 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때까지 잠시 그 기쁨을 기다렸다가, 가장 '기쁜 성탄' 때 장엄한 '대 영광송'으로 기쁨과 찬미를 바쳐드리기 위함이지요.
이렇게 새롭게 시작된 올해의 첫날, 대림 제1주일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있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깨어 기다림'이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1년 365일 24시간 내내 잔뜩 긴장한 채로 촉각을 바짝 세운 채 기다리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 반드시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무엇을, 왜, 깨어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해주실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돌아오실지 모를 주님을 기다리는 문지기입니다. 때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매년 새로운 한 해를 주시고, 새로운 대림을 맞이하게 해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매일의 시간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끝없는 자비와 사랑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늘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모든 순간, 우리에게 '깨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선물 해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대림 시기를 맞이하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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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신동철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정상동성당 주임)]
<‘그때’를 모르니, 깨어있어라>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빛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GOP 자대 배치를 받아 갔습니다. '따블백'을 매고 내무반을 막 들어서니, 제대 말년 고참이 침상에 누워서 "야! 신병" 하고 불렀습니다. 관등성명을 내무반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대며, 쏜살같이 달려가서 누워있는 왕고참님 앞에 섰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날아들었습니다. 고향, 나이, '사회에서 뭐 하다 왔느냐'는 물음, 가족관계, 가족 중에서도 특히, 여동생에 대한 질문과 관심, 애인의 존재 여부 등등 상세한 저의 신원 파악 후에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 있었습니다. "너, 제대 얼마 남았는지 알아?” “예, 압니다.” “얼마?" "예, 26개월 남았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던 터라, 왕고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바로 위의 고참이 조용히 화장실 뒤로 저를 불러내었습니다. '신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뛰어라'고 교육을 받은 터라, 또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이게 빠져서 제대 날짜를 헤아리고 있어!" 하고 소위 군에서 말하는 '한따까리'(?) 를 하였습니다. 이유인즉, 금방 들어온 신병이 어떻게 제대를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신병은 절대로 '제대의 때', '그때(?')를, '그 시간'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 지 너희는 모르기 때문이다."(마르13, 33)
아이러니하게도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인 오늘 복음 말씀이 '종말'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 때', '종말의 때'를 무척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다가오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너희는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의 시간은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만 온전히 속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니 그것을 완성하시는 분 또한, 그분이심은 지당합니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깨어 있어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로 시작합니다. 기다림은 깨어있는 기다림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깨어있음'이, 대림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올바른 자세임을 오늘 복음은 알려줍니다. 그럼 '깨어있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마치 하느님이 없는 듯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1독서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말입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불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이사야 64, 6)
형제자매 여러분,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 안에서, 현실의 일상 삶 안에서, 늘 깨어있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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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심유섭 요한사도 신부님(배론성당)]
<졸아도 됩니다, 잠들지는 맙시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 시기의 첫 주일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대림.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 기다림을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며 이 시기를 보내야 할 것인가. 그 준비를 위한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바로 "깨어있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문득 학창 시절 선생님께 들 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점심 식사 후 듣는 너무나 어려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 시간에는 늘 밀려오는 졸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졸다가 걸려서 벌을 서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어느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는 건 이해가 되고 봐줄 수도 있지만, 아예 자는 건 봐줄 수가 없다." 조는 건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의지가 있지만, 자 는 건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깨어 있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졸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잠들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누구나 졸음이 올 때는, 피로함에 지칠 때는 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잠시 졸더라도, 잠든 것이 아니라면 언제든 다시 깨는 건 그래도 쉽습니다. 누군가가 살짝만 건드려줘도, 혹은 깨어나야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든 눈을 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예 자겠다고 결심했다면, 다시 눈을 뜨는 건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이 시기,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깨어있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올지 모르는 주님이시기에, 졸다가도 문득 눈을 떴을 때 그 앞에 와 계실지도 모르기에, 잠깐 눈을 뜬 순간에 그분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에, 적어도 눈을 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눈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들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떠나시게 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졸다가도,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면서, 우리 곁에 오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조는 것이 무조건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졸더라도, 그 졸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졸기 시작하면 깨워달라고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미리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허벅지를 찔러가며 공부했다' 처럼, 내 마음을 콕콕 찔러줄 말씀 하나를 간직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듯, 내 마음을 환기시켜 줄 기도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날 시간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마침내 모두 함께 아기 예수님을 만나보게 될 그 순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깨어있으면서 우리 앞에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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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이원근 미카엘 신부님(산곡3동성당 보좌)]
<기다리고 바라는 시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무도 모르는 그날에 당신께서 오실 것이니 언제나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맑은 정신으로 깨어서 열성 안에서 기도하고 살아갔으면 좋겠지만, 사실 우리 마음은 너무나도 빠르게 메마르기도 합니다. 특히나 내 마옵이 정말로 지치면 묵주를 드는 것도 당신께 다가가는 것도 다 싫고 홀로 아무렇게나 있고 싶어집니다. 언제나 깨어있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라 여기고 싶은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언제나 깨어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실제로 언제나 끊임없이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대의 바람이(원의가) 곧 그대의 기도이다. 지속하여 바라는 것은 지속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언도 유익하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테살 5.17) 혹시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권고를 따르고자 무릎을 꿇거나 바닥에 엎디어, 또는 두 손을 모으고 꾸준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 행위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끊임없는 기도는 우리에게 불가능할 것이다. 쉼을 모르는 내적 기도는 따로 있다. 곧 바라는 것이다. 기도를 끊임없이 하고자 한다면 절대로 바라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속하는 바람은 그대의 지속하는 기도가 될 것이다. 사랑하기를 멈춘다면 입을 다물라."(성 아우구스티노, 시민 강독, 37,14. 통권 25권, 862-863쪽. 파비오 차르다, 안진 원과 이영문 옮김, 『영혼의 호흡, 벽난로, 2022, 43쪽)
우리가 지닌 마음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열망하고 바랍니다. 구체적인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결심했기에 생겨난 것이라기보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마음에서 자라나 제멋대로 무언가를 바라고 어딘가로 흘러가고는 하는 것입니다. 성인께서는 그런 우리 마음을 주님 안에서 펼쳐 나가는 것이 끊임없이 기도하는 비법이라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진정 제멋대로 기울어져 하느님 뜻과는 먼 것을 바라고는 합니다. 더구나 내 마음이 복잡할 때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조차 모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그대로 맡기고 바라기보다 나의 바람을 숙고하고 식별해서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어차피 내 마음을 감출 수도 없고 주님보다 뾰족한 수가 나에게 있지도 못합니다.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스러지게 하시고, 당신을 바라고 기다리며 희망하는 마음은 더욱 명료하도록 이끄셔서 당신 사랑으로 깊이 다가설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은 우리의 연약한 그 한 가운데에 태어나실 우리 주 아기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기이자 동시에 마침내 저 너머의 그날, 당신의 권능을 온전히 드러내시며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을 바라는 시기입니다. 주님을 기다리고 바라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흐릿하게 주님을 기다리기도 하고, 또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바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낙담하지 않고 그저 당신 안에서 바라고 또 바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바람을 주님께서 당신의 온전 한사랑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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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이정현 루카 신부님(미룡동성당)]
<대림, 희망과 성찰의 시간>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시기입니다. 대림(待)은 사람이 되어 오시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희망의 시간이며, 세상 마지막 날 다시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마음의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빨리빨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성격이 급하거나 기다리기 싫어하는 분들에게 이 말은 아주 익숙한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카페나 식당에서 주문한 음료나 음식이 빨리 나오기를 바랍니다. 운전할 때 앞차가 천천히 가면 답답해하다가 경적을 울리며 추월하지요. 모두가 바쁘다고 외쳐대지만 천천히 인내하고 기다려야 완성되는 것들이 훨씬 많습니다.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뜸을 들여야 하고,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에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비신자들이 세례를 통해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1년 동안 기도문을 외우고 교리를 배우며 신앙생활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반드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맞이하는 마음도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놓고 각자 해야 할 일을 맡겼는 데, 특별히 문지기에게는 집으로 돌아올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잠들지 말고 깨어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지 말고 배고픈 주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긴 여행에 지친 주인을 위해 편안한 잠자리를 봐주는 등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라는 것이지요. 만일 집주인이 늦게 오려니 생각하며 아무런 준비 없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자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 길에서 돌아온 주인은 종에게 화를 내고 당장 쫓아낼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으면 마지막 날이 들이닥쳤을 때 되돌릴 수 없는 아픔과 후회를 겪게 되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둡고, 혼란스럽고, 아프고, 찌든 삶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메시 아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시편 80,2-3)라며 주님의 자비와 구원을 청하며 끊임없이 기도했지요. 여러분들은 이 세상과 내 마음에 밝은 빛을 비추어 주실 구세주 예수님께서 어서 빨리 오시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는 신앙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두운 밤 밝은 등불을 들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구원의 빛을 희망하도록 고개를 들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회개와 보속,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영혼의 맑고 깨끗함을 간직한다면 그분께서는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어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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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정난주성당)]
<깨어있어라>
어느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가 세상에서 제일 비싼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연주회는 오래전부터 티켓이 동났고, 암표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갈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청중은 물론이고 비평가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직후 그 연주자는 흥미로운 실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같은 악기로 같은 곡을 지하철 입구에서 연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본 연주회와 다른 것은 노숙자 차림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단 두 사람만이 그것도 2분 정도만 멈춰서 연주를 들었을 뿐 대부분 힐끔 쳐다보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라도 우리 곁을 무의미하게 지나가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 볼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도 무심히 흘려버리게 됩니다.
절간에 가면 종과 북 옆에 나무로 된 물고기가 있습니다. 물고기는 밤에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어서 늘 깨어있음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에서 수행자들은 늘 깨어있음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혹시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과 같은 뜻은 아닐까요? 어린이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모두가 경이롭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무덤덤하고 그저 그런 일이며 너무도 익숙한 일들입니다. "맨날 뜨는 해, 뭐 하러 보러 가냐?" 경주 토함산 일출을 보려 하는 나에게 한 친구가 한 말입니다. 아침 해가 뜨는 것은 지겨운 일상의 하나일 뿐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하느님께서 해와 별과 꽃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보내주셨지만, 이런 일도 놀라울 것 없는 그저 그런 일입니다. 이런 나를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도 십자가의 피로 나의 죄를 씻어주신다는 것도 너무도 익숙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우리는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라는 사실에도 무덤덤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양식과 음료로 내어주시는 것도, 감실 안에 현존하시며 나를 기다리시는 것도 좀 감사하구나." 정도일 뿐입니다.
외계인이 존재할까요? 과학자들은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는 것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거대한 우주에 비해 너무도 낭비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그 지나치게 낭비적일 만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그렇게 넘치도록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신비에는 경탄하면서도 그 우주를 창조하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는 무덤덤합니다.
사제서품 4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제 곧 사목자로서의 삶을 마무리할 즈음입니다. 윤동주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지만 아쉬움이 가득하고 후회가 넘쳐납니다. 여전히 사제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주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저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이제는 어린이가 모든 것에 경탄하듯, 매순간 저를 어루만져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에 감격하고 경탄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 사랑에 깨어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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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이영주 타대오 신부님(스무숲성당 주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립절을 맞이합니다. 작년에도, 몇 년 전에도 대립절은 있었고, 내년에도 우리가 살아 있다면 대림절은 어김없이 올 것입니다. 늘 세월 속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대림절을 맞이하며 그저 '한 해가 가는구나' 하고 탄식하는 모습을 발견하며 부끄러움이 몰려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1독서의 말씀이 더욱 크게 들립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 (...)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작품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죄를 지었고 하느님께서 변하시지만, 여전히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느님의 손에 달렸음을 고백하며, 되돌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두 지금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귀한 작품입니다. 꽃병은 꽃병대로, 질그릇은 질그릇대로, 청자는 청자대로 사용할 목적이 있어서 빚어낸 것이기에 그 고유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도자기가 청자와 같이 값진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각기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되면 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작품, 곧 하느님을 잘 섬기도록 빚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도 하느님께서 나를 내신 목적을 잘 알고 그 목적에 맞게 살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께이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를 만나든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문다는 것은 나를 내신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알아듣고 그 뜻을 실행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움으로 시작하는 대림절, 후회 가득한 탄식보다 나를 빚으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여정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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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깨어 있어라.>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3-37)
‘대림 시기’ 라는 말은,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시기라는 뜻인데, 주님을 기다린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버려서 신앙생활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가?> 신앙생활의 관점에서는, ‘대림 시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에게로 우리가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리고 늘 깨어서 우리를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자꾸만 주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잠들지 마라.”가 아니라, “취해 있지 마라.”입니다. 36절의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취해서 자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4,48-51; 루카 12,45-46)
여기서 ‘술에 취하다.’는 “세속의 즐거움에 취하다.”, 또는 “세속 일에 집착하다.”라는 뜻입니다. (‘세속 일’만 생각하면서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다.’라는 말은, 구원받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테살 5,7-8) 이 말에서, ‘밤’은 믿는 것도 거부하고 회개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상징하고, ‘낮’은 충실하게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날이 빨리 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모르니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이루어지니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는 ‘재림과 심판의 때’를 뜻하는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각 개인이 인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설 때”도 포함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라는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과 관련해서, ‘겟세마니’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마르 14,34-40)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세속 일에 취해서’ 자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는’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행동으로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향’은 올바른데, 실천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루카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루카 22,45)
슬픔에 지쳐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 대한 압박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아직 ‘부활’을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은, ‘깨어 있음’은 곧 ‘기도하고 있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 시간’만이라도 당신과 함께 깨어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신 ‘한 시간’은 ‘최소한의 시간’입니다.
신앙생활은 무슨 거창한 수련이나 수행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성덕을 쌓는 일도 아니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또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각자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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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 줄 주님을 기다리지만, 실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이 시간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대림절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대림절은 우리의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탄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이 되어 기다리고, 신약의 백성으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 사이에서 설렘과 감사함으로, 긴장으로 기다립니다.
대림초가 4개 꽂혀 있습니다. 4개는 4주간을 뜻하지만 본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 메시아가 오심을 기다린 세월이 약 4,000년이 됩니다.
그 4,000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해서 네 개의 초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네 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를 장식하기 위해서 둥글게 만들기도 하는데, 바로 온 우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대림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탕을 녹색으로 꾸미는 것은 생명의 푸르름을 나타냅니다. 또한, 색깔을 보면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해서 점점 밝은색으로 불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맑고 밝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벗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초의 색깔과 제의 색깔이 자색인데 자색은 바로 회개와 보속의 의미를 담은 색깔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화려한 트리를 장식하고 구유를 준비하는 것보다도 몸과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목욕재계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초대입니다. 회개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기다림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한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 64,7)
하느님의 작품으로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성탄을 준비하는 기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침에는‘저희가 회개할 테니 저희에게 오십시오. 저희가 당신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맑은 마음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에 어떤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준비할 것입니다. 기다림이 간절하면 그 기다림의 여정에 따르는 모든 수고는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기다림이 간절한 만큼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손님을 모시려 할 때,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부산을 떠는데 예수님을 모시길 원하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깨어 있어라.”(마르13,33.37)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깨어있음을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찾아 나서시던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탈출 3장 참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탈출 13,22)으로 함께하심을 드러내시고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며(탈출 15,22-27)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먹게 하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깨어있을 때 우리를 위한 주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우리의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바뀝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국 주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있으십시오. 깨어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작품으로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하는 마음을 늘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철저히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마음으로 거들먹거리거나 자만자족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 하느님의 눈으로 이웃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만큼 사랑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후회할 일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들은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난 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그렇다고 현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약속된 천상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보고 전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현재를 모른 체 하면서 미래 속에서만 산다면 비현실적인 세상에 산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지금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활용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동경 없이 현재에만 집착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런 발전도 없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평범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도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선물로 주어진 오늘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경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고해소 안에서 큰 자비와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게 해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으로, 깨어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 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49,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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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86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모리 대학의 교수 율릭 나이서는 다음 날 자신의 강의를 듣는 100여 명의 학생에게 ‘위 사고 소식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자세히 적게 한 다음, 그 답지를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2년 반 후에 같은 학생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두 답지를 비교합니다. 그 차이는 어떠했을까요? 학생 중에서 25%가 완전히 다른 대답을 했고, 65%는 세부 사항에서 큰 차이를 보였으며, 단 10%만 동일하게 답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 현재의 기억이 아주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이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대략적이고 나머지는 추론으로 채워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 감정, 환경 등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 기억하는 것, 생각하는 것 등이 정확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억이 무조건 맞는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이의 기억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틀림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을 강조하신 이유는 이렇듯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주인이 집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맡긴 종들처럼 우리 모두가 부지런하고 충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주인은 언제라도, 또 아무 때라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종이 언제 올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요? 종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 생각만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전혀 모르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기 생각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긴 언젠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초대 교회 때부터 신앙인의 참된 자세를 ‘깨어 있음’으로 묘사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어서 주님께서 오실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깨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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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마르코 13,33-37 (깨어 있어라)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마르코 13,34)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당신의 나 있기에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당신께서 계신 듯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당신의 뜻 따라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당신의 사람 기쁘게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당신의 일 아름답게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당신의 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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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성실하신 주님을>
대림절의 시작입니다. 대림이란 주님께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뜻이고, 전례적으로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 없이 기다려서는 안 되기에 주님의 성탄을 거룩하게 맞이하기 위해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에는 2천 년 전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이 있고,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도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이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나 이미 세례를 받은 여러분에게 올해 주님의 오심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입니까, 다시 오심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처음 오심은 아닐 것이고, 다시 오심이며 또 오심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주님이 어찌 우리에게 다시 오시고 또 오십니까? 한 번 오신 주님이 떠나시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왜 다시 오시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지 않습니까?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주님과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엄마의 마음은 늘 자식과 함께 있지만 자식의 마음은 언제나 엄마와 함께 있지 않고 애인에게 마음이 빼앗길 때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 수천 번 다시 오시고 또 기다리고, 햇수로 따지면 제 나이만큼 대림절을 보내고 있으며, 그래서 작년에도 대림절을 지냈지만 올해 다시 대림절을 지냅니다.
그러니 저의 대림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제가 다시 주님께 돌아서는 것이라고 함이 맞을 것이고, 굳이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게서 내쫓았던 주님을 이제 다시 돌아와달라고 애원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는 ‘내쫓을 땐 언제고 다시 돌아와달라고 하느냐?’며 거절하지도 않으시고 타박하지도 않으시는 분입니다.
늘 성실하게 함께 계시고, 늘 성실하게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주님은 언제나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디모 2, 13)
우리는 성실하게 함께 있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도
주님은 성실하게 함께 계시고 다시 오시는 분이시니
뻔뻔하지만 이것을 믿고 다시 오십사! 청하고 기다리는 올해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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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깨어 있어라."(마르13,35)
<다시 시작하자!>
오늘 복음(마르13,33-37)은 '깨어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달력인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나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대림(待臨)시기는 '기다림의 시기,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두 개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림시기의 전반부(12.1-16)인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재림)'이고, 또 하나는 대림시기의 후반부(12.17-25)인 '주님의 성탄'입니다.
이 두 기다림의 화두는 '회개와 속죄'입니다. 그래서 대림시기는 '회개와 속죄의 시기'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미사 때에 그 의미와 상징을 드러내는 '보라색(자색) 제의'를 입습니다.
회개와 속죄의 시기인 대림시기 시작의 첫 외침은 "깨어 있어라.'는 외침입니다. 이 외침은 '본질적인 것으로의 회두'를 의미합니다.
많은 이들이 "바쁘다, 바뻐!"를 외치고 있습니다. 성당엘 나갈 수조차 없이 바쁘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위한 바쁨이고, 무엇 때문에 바쁜가?
분명한 것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들에 대한 바쁨이고, 때가 되면 반드시 다 내려놓고 가야 할 것들에 대한 바쁨이 아닌가?
삶의 본질, 더 나아가 믿음의 본질은 육체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 본질은 숨어 있습니다.
그 본질은 '내적인 기쁨과 평화와 행복'입니다.
그 본질은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높은 자리에 있어도, 내적으로 기쁘지 않고, 평화롭지 않고, 행복하지 않으면, 잠시 지나가는 삶이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는 외침은 '회개하라.'는 외침입니다.
'본질로 돌아오라.'는 외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73권 전체가 전하는 외침'입니다.
회개(돌아옴)는 '나의 기쁨이자,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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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hDqmrXtV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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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깨어 있어라."(마르 13, 37)
한해의
마지막은
결코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깨어 있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한해의 탄생이며
한해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사랑은
깨어 있는
일상의 참된
행복입니다.
특별한
새날의
아침이 기쁘게
오늘
깨어납니다.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며
한 해의
첫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깨어 있음의
방식으로
사랑과 기쁨
기다림과 행복을
차려주십니다.
사랑은
깨어 있음의
방향으로
서로를 향합니다.
서로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가장 환하고
가장 뜨거운
사랑이
우리 삶에서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감출 수
없습니다.
깨어남의
찬미입니다.
깨어 있음은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우리
생활을
깨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활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깨어 있음의
신비가
새해 첫날에
선물로 주어진
주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시간은
하느님을 만나는
깨어 있음의
시간입니다.
깨어 있음의
마음이
모든 것을 담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선물을
선물이게 하고
은총을 은총이게
하는 것은
깨어 있음
그 특별한
사랑입니다.
가장 행복한
첫날
첫 시작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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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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