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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관한 시
차례
냉장고 / 정영선
냉장고 / 문성해
냉장고 / 강연호
냉장고 / 이재무
냉장고 / 조동범
냉장고 / 안명옥
냉장고 / 이정록
밤의 푸른 냉장고 / 손순미
노인들의 냉장고 / 정호승
냉장고의 어법 / 서안나
냉장고만 돈다 / 황규관
냉장고 / 정영선
모두 잠든 밤이면 유난히 네 심장 소리 크게 들린다
뜨거운 펌프질로 심장 박동 돌려
스스로 갇힌 감옥에서 새파랗게 질리는
차가운 냉가슴 홀로 앓으면서도
도통 내색하지 않고 무던한
늘 우두커니 벽에 기대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이따금 가슴을 열어젖혀
허기진 욕망 채워주는 속이 꽉 찬
미덥고 아직 쓸만한 여자
- 정영선,『만월滿月의 여자』(황금알, 2016)
냉장고 / 문성해
며칠 전의 냄새가 난다
이미 사라진 것들 냄새가
유령처럼 층층이 떠다니는 곳
내일이면 또다시
사라질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곳
머리에 가슴에 바코드를 달고
날이 갈수록
절박해지는 유통기한들
칸칸마다
납골당처럼 남은 흔적들
몇 달 전의 생일 케이크 냄새와
어제의 생선 비린내가
검은 벨벳처럼 걸려 있는
내
유일한
추억의
되새김질 장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희고 싸늘한 관뚜껑을 연다
옛집의 파란 대문을 열듯
- 문성해,『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문학동네, 2016)
냉장고 / 강연호
누군가 들판 농수로에 내다버린 냉장고
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
지난 봄과 달라진 건 이제 문을 활짝 열어
제 속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제법 선정적이다
다들 지나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다만 그뿐
치우라고 누가 신고 좀 하지 다만 그뿐
민원 접수가 없으니 일 만들기 싫은 관청에서도
다만 그뿐, 계절만 또 바뀌나 보다
저렇게 문 열어놓으면 음식들 다 상할텐데
무엇보다 전기세 만만찮을 텐데
사람들이 혀 빼무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장고는 웅웅웅 밤낮으로 돌아간다
들판을 건너가는 바람이 모터 소리를
이쪽 아파트 단지까지 실어 나른다
바람은 빨래 빨래는 집게 집게는 입 입은 침묵
말잇기 놀이에도 심심한 냉장고
하늘에 풀칠하다 시들해진 냉장고
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
그의 골똘한 생각은 사실이 이렇다
전기 코드라도 누가 빼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 『창작과비평』158호(2012년 겨울호)
냉장고 / 이재무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녀 몸 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들이
진설되어 있다 그녀의 몸엔 아주 익숙한
내음이 배어 있다 그녀가 하루 24시간
노동을 쉰 적은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끓는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처럼 흔한 것도 없으니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울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살진 소파에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
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 몸 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넣는다
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러댄다
- 이재무,『푸른 고집』(천년의시작, 2004)
냉장고 / 안명옥
그녀는 문을 꼭꼭 닫아걸고 있다
아래위로 문이 있는 여자
문을 열면
불이 켜지는 여자
문 밖이 뜨거울수록
더욱 단단하게 문을 닫고 사는 여자
몸속에 있는 것들이
혹여 녹거나 상할까 두려워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어둠을 키우고 사는 여자
많은 유효기간들을 담아 두고서
유효기간을 과신하는 여자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윙하는 소리를 내며 경계하는 여자
24시간 풀가동되면서
차가워져 냉장고가 된 여자
식구들의 먹을 것을 대주느라
독한 여름을 견디는 여자
그녀가 잠그고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모두 썩어 없어질 것들
코드를 뽑아버리면
없는 여자
- 안명옥,『칼』(천년의시작, 2008)
냉장고 / 조동범
고물상 입구의 버려진 냉장고.
텅 빈 내장을 펼친 채 한낮의 폭염을 지나치고 있다.
서늘한 과거를 되새기며, 앙상한 내장을 말리고 있다. 싱싱하게 죽음을 붙잡던 냉장고. 냉장고는 빙점을 잃고서야 비로소 누추한 죽음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냉장고는 내장 가득 느리게 부패하던 식욕의 흔적을 더듬는다. 이제는 말라, 죽음마저 멈추어버린 고물상 입구의 냉장고. 폐허의 입구에서 냉장고는, 사라진 빙점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고 있다. 냉장고의 날숨과 들숨, 폐허가 되어 고물상의 귀퉁이에 쌓인다.
고물상 입구의 버려진 냉장고. 폐허가 되어
극점의 푸른 빙원을, 까마득히
떠올리고 있다.
- 조동범,『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문학동네, 2006)
냉장고 / 이정록
문이 열려도 숨을 내쉬지 않고, 에어커튼을 치는 신형 냉장고가 있다 숨을 오래 참는 놈이 장수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지만 기계까지 최대한 숨통을 조이다니 기술공학의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체온이 올라갈 때에만 겨우 심장을 가동시키다가 숨통이 열리자마자 외부의 공기를 차단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氣絶이 主食이란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손이며 팔뚝까지 에어커튼 안에 들기만 하면 순간 기가 질려 모든 숨구멍이 막혀버리니 그 어떤 물건이든 신선도가 오래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때로 기어코 빨리 썩어서 생각보다 일찍 출옥을 하는 독종들도 있지만 그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은 할복을 당하거나 박살이 나는 보복성의 막숨 한 번일 뿐 보글보글 맛깔 낼 때까지 뜨건 숨을 내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금 냉장고 안으로 들어오는 같은 이름의 독종들은 안창 빙벽에 살을 에며 가장 긴 숨을 견뎌내야 한다
때로 에어커튼이 고장이 날지라도 놈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식히고 얼릴 줄 안다 식탁이 있는 거실 냉장고 앞에 식솔들을 앉혀놓고 냉정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일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냉정함을 되찾으려 쉴새없이 들숨 날숨을 반복하지만 열받친 몸과 심장은 눈금 한 칸 내려서질 않는다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와 다시 독한 술을 꺼낼 때에도 놈은 아랑곳없이 에어커튼을 내리고 듬직함을 잃지 않는다 드넓은 바다부터 자잘한 텃밭까지 거느리고 계신, 위대한 家長이여
- 이정록,『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지성사, 1999)
밤의 푸른 냉장고 / 손순미
한밤에 얼음사내 웅웅, 흐느낀다. 최대한의 추위가 보관된 저, 얼음몸을 하고서 웅웅, 덩치가 아까운 울음이, 덩치가 아까운 슬픔이, 식구들이 잠든 틈 몰래 흐느낀다. 줄곧 새나오는 울음을 애써 집어넣으려 하지만 서랍 칸칸 저장되어 있던 울음은 본격적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김치 냄새, 고등어 냄새, 가족의 냄새가 뒤섞인 무거운 울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답답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병신, 반푼이 같은 울음이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무능한 울음은 심야 TV도 보고 라디오도 듣는다. 어쩔 수 없었어. 최선을 다했어. 지치고 주름진 울음이 웅웅, 잠을 쏟아낸다. 밤은 가야 할 길처럼 아득히 멀고 깊다. 푸른 밤의 품에 안겨 얼음사내, 모처럼 응석 한번 부려 본다.
여보, 나 사실 그 동안……
- 손순미,『칸나의 저녁』(서정시학, 2010)
노인들의 냉장고 / 정호승
노인들은 가끔 부엌에 세워둔
오래된 냉장고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다
오랜만에 쇠고기를 사들고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
어머니가 안 계셔서
이리저리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어머니가 슬며시 겸연쩍게 웃으시면서
냉장고 문을 주름 깊게 열고 나오시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도 나처럼 한덩이 찬밥이 되신 것일까
나는 어머니가 처녀시절에 캔 냉이나
옷고름 풀던 첫날밤의 달빛을
냉장고 속에 깊숙이 넣어두셨나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나중에 영안실에 있는 냉동실에 들어가면 너무 추울까봐
너무 추워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릴까봐
미리 연습을 하고 계신다고
천천히 입술 없는 입으로 말없이 말씀하셨다
노인들의 냉장고를 보면 꼭 실패한 인생 같다
인생이 물건은 아니나
낡고 텅 빈 노인들의 냉장고를 보면
인생의 모습이 꼭 저와 같다 싶어
나도 가끔 어머니를 따라 냉장고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다
더이상 데울 수 없는 나의 찬밥을
스스로 다시 데울 수 있는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어머니가 담그신 시어빠진 김장김치와
몇점 시금치무침 곁에
말없이 앉아 있다가 나온다
- 정호승,『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냉장고의 어법 / 서안나
사과가 반쯤 썩었다
아픈 쪽에서 단내가 난다
썩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는 법을 배웠다
죽음의 향기로 내일은 선명하다
어둠 속에서는 사랑이 크게 들린다
문을 열어도 캄캄하다
닫힌 어깨로
자신의 어둠 쪽으로 돌아눕는 것이다
신이 내 편이었으면 했다
사과가 썩지 않은
몸 한쪽을 들여다보듯
이별은
이빨을 세게 물고
권투 선수처럼
허공에 헛주먹을 날리는 것
열어도 닫아도 속을 비리다
이별도 그러하다
- 서안나,『립스틱 발달사』(천년의시작, 2013)
냉장고만 돈다 / 황규관
아무도 없는 시간에 냉장고만 돈다
안에 넣어 둔
술이나 물의 차가움을 위해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해 냉장고만 돈다
친구도 가족도 다 멀리 두고
나 혼자 여기 앉아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세상은 지금 온갖 소음을 내며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데
나는 고요가 좋아 여기에 앉아서
냉장고 도는 소리만 들어도 되는 걸까
내 언어가 세상을 잃어버릴 때
나부터 부패하는 법
마른 잎에게 말 거는 바람 소리 들을 귀는 없이
고작 냉장고 도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린다
조금씩 영혼의 불이 꺼져가는 세상에서
이제 어떤 소리를 내어야 하나
냉장고 소리가,
나를 웅웅웅 울린다
- 황규관,『물은 제 길을 간다』(갈무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