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군 죽굴도
글, 사진 김건수
1987년 당시 전남 완도군 죽굴도를 방문할 때
내 손에는 한권의 책이 쥐어져 있었다.
그곳을 찾을 때도 바다는 뱃길을 순순히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종일 여인숙에서 뒹글며,
미국 작가 '헨리데이비드 소로우'의 자연주의 작품집 'Walden'을 읽었다.
그 책의 대목 중,
'물은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끊임없이 공중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물은 그 본질상 땅과 하늘의 중간이다.
땅에서는 풀과 나무만이 나부끼지만, 물은 바람이 불면 몸소 잔 물결을 일으킨다.
나는 미풍이 물 위를 스쳐 가는 곳을 빛줄기나 빛의 파편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안다.
이처럼 우리가 수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소로우는 기술하고 있다.
나는 파도가 그 흉포함으로 가로 막은 뱃길의 장벽을
이 문장을 읽으며 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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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도착한 죽굴도는 음습한 바다 내음이 안개비에 뒤엉켜 섬으로 파고 들었다.
별반 놀이터가 없는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옷 젖는줄도 모르고 뛰어 노닐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도심내기들과 달리 근솔하였다.
언젠가는 어부로 또는 어부의 아내로 살아가기 위해 놀이도 투망질이나,
해변으로 몰려오는 성스러운 신의 선물을 채집을 한다.
마치 본래부터 삶은 비곤하고,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을 채득한 채
바닷가에 꼭 붙어 물놀이를 한다.
도심에서는 눈씻고 찾을 수 없는 스잔하고 가슴이 버거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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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나자 바다는 쪽빛으로 변했다.
어부들도 새날을 받았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어부들은 이 새날을 노동으로 연다.
당시 섬주위에서 생산되는 톳은 60kg에 20만원 선이다.
이들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는 자연산 톳을 공동 채취 공동 분배라는
산법을 기반으로 협업을 한다.
그들의 삶은 낮에 한정 된 것만은 아니다.
멸치 철에는 밤에 불 밝히고 어둠을 뚫고
은비늘 출렁이는 어장으로 달려가 밤샘 노동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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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람들은 바닷길이 막혀도 그들의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
파도가 높아 배가 뒤치는날이면, 아버지는 훈장이 된다.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조상을 더 알아서
김동철씨는 아들 호수군에게 집안의 내력을 가르친다.
배가 겨우 닿으면
주민들은 생필품을 뭍에서 사들여 섬 비탈길을 재주부리듯이 오르며
운반해야하는 노고는 늘 등에 붙은 혹과 같은 멍에를 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섬 아이들은 400년 된 후박나무에서
날 마다 자연과의 대화를 하며 노닌다.
그들이 하는 얘기는
모두 상상 속에서 얻어지는 창조물이다.
그래서 그들의 상상력은
이미 바다를 건너 도회지의 그것들에 가 닿아 있었다.
기사원문
"...?"
"느그, 죽굴도 아냐?",
"죽굴도가 어디여. 죽 끓여 먹는 섬인가.
근데 죽굴돈가 족굴돈가 뭤땀시 가신다요?
보길도나 가실 일이지."
죽굴도라는 명칭이 귀설어하는 노화도 주민을 뒤로하고
객선 마산호에 몸을 싣는다.
짙 푸른 바다와 콧 속을 간지럽히는 소금 내음이 이틀간의 여독을 풀어준다.
넙도, 마안도, 후장구도, 서넙도를 거쳐
두시간 만에 뱃머리가 기암절벽에 조심스레 가 닿는다.
깍아지는 듯한 절벽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오르면
시누대 밭이 눈길이 가 닿는 곳마다 가득하다.
"고생 많으셨지라우. 읍에서 연락 받아 기다리고 있었구먼 이라우" 하며
이장 김광석(41)가 덥석 손을 잡는다.
반장 댁에 도착하니 조촐항 술상이 인사를 대신하고
차례로 모여든 마을 주민들은 잔을 권하며 마을 사정을 털어 놓는다.
농작물이라고 해봐야 마늘과 보리 뿐,
9가구 49명의 주민은 바다에 목줄을 매달고 살아간다.
'양식톳과 자연톳 때문에 그 동안 진 빚은 그럭저럭 갚았지라우.
마을 소득도 300만원은 되고요.
헌디 마파람에 집뎅이 겉은 파도가 밀려오면 한해 벌이는 끝장이랑께요.
이번 셀마 태풍 때는 천신만고 끝에 4백15만원 주고 산
FRP 배가 20일도 못쓰고 깨져 버렸지라우" 박상복씨(40)은 더이상 말을 잊지 못한다.
20여년 전에 시작한 멸치 어장으로 풀칠을 할 수 있었지만
정작 생활이 펴게 된 것은 재작년 부터 해톳이 일본에 수출되면서
60kg에 4만원 하던 것이 20만원까지 호가하게 된 덕분이다.
섬마을 사람들이라면 모두 겪는 고통이겠지만
이 곳은 태풍이나 폭풍으로 인한 고충이 특히 심하다.
이유는 제대로 된 방파제가 없기 때문.
선대 때 만든 30여m이 방파제도 이번 태풍 때문에 5m나 잘려 나갔다.
"얘기야 왜 안 했겠스라우.
군수님. 서장님, 읍장님 뵐 수 있는 분들에게 모두
방파제 하나 만들어 달랬지만 무소식이지라우"
토박이 김동신 할아버지(78) 얼굴은 절망의 빛이 역력하다.
항해 안내서에는 분명 방파제 길이가 60m로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현실과 행정간의 벌어진 틈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반장 김씨는 다음날이면 노화도로 방을 구하러 나가야 한다.
학생수 6명인 죽굴도 무교 분실에서는 소외감과 열패감에 견딜 수 없어
아들 호수(9)군을 본교인 노화도 중앙국민학교로 유학시키기로 작정 했기 때문이다.
현재 전해 내려 오는 섬의 내력은 겨우 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지 400여년 이상 된 후박나무 '할미당'이 묵묵히 마을 역사 깊음을 대변하고 있다.
이 곳 주민들은 '당할미'의 권능을 하늘 같이 믿고 살아간다.
마을의 길흉화복 때마다 제주에 현몽하여 주민들을 돌 본다고 믿기 때문이다.
섬 주변은 퉁바리, 뽈낙, 문어. 전복 등 어패류가 풍부하고
특히 도미어장은 국내 최고로 밝혀졌지만 완도, 목포 등지에서
배들이 몰려들어 도미를 쓸어갈 때마다 서러움에 젖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명을 앞둔 새벽 3시
"'멸'(멸치의 현지명)이나 봐야지"하며
자리를 일어서 바다로 향하는 죽굴도 주민들의 발걸음에는
그래도 '잘사는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서려 있는 듯했다.
첫댓글 노화에 죽굴도란 섬 이름조차 첨 듣네요 ...이런 섬이 있었나 ??? 죽굴도 건너 말잔등처럼 생긴섬은 본것 같네요 ...
농식품부 머하노 빨리 어항 안만들어주고 어항협회에서 만드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