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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4 바빌론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온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땅에서 파멸을 탄식하는 통곡이 들려 온다.
51:55 참으로 주님께서 바빌론을 파괴하시고, 그들의 떠드는 소리를 사라지게 하신다. 그 대적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공격한다.
51:56 바빌론을 파괴하는 자가 바빌론으로 쳐들어오니, 바빌론의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인다. 주님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복하실 것이다.
51:57 "내가 바빌로니아의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총독과 지방장관들과, 용사들까지 술에 취하게 하여, 그들을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지게 하겠다. 나의 이름은 '만군의 주'다. 나는 왕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다.
51:58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바빌론 도성의 두꺼운 성벽도 완전히 허물어지고, 그 높은 성문들도 불에 타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뭇 민족의 수고가 헛된 일이 되고, 뭇 나라의 노고가 잿더미가 되어 모두 지칠 것이다."
51:59 이것은 마세야의 손자요 네리야의 아들인 스라야가 유다 왕 시드기야 제 사년에 왕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갈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명령한 말이다. 스라야는 왕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51:60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 내릴 모든 재앙 곧 바빌로니아를 두고 선포한 이 모든 말씀을,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하였다.
51:61 그리고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말하였다. "수석 보좌관께서 바빌론 도성으로 가거든, 이 말씀을 반드시 다 읽고
51:62 '주님, 주님께서 친히 이 곳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이 곳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도록 멸망시켜서, 사람도 짐승도 살 수 없는, 영원한 폐허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기도하십시오.
51:63 수석 보좌관께서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책에 돌을 하나 매달아서, 유프라테스 강 물에 던지십시오.
51:64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이 곳에 내리는 재앙 때문에 바빌로니아도 이렇게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고 쇠퇴할 것이다' 하고 말하십시오."여기까지가 예레미야의 말이다.
◈ 주해
1. 바벨론은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함으로 성전을 파괴했고,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했다.
1) 바벨론은 많은 재물을 자랑하였고, 나라들을 정복하고 한껏 높아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였다.
2) 이스라엘은 악과 교만으로 심판을 받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싸우시며, 그들의 송사를 듣고 보복해 주신다.
3) 그러나 원수 바벨론의 멸망을 “슬프다”라고 하시며 애가를 부르신다(렘 51:41).
2. 바벨론의 성벽을 무너뜨리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도망하라고 명하신다.
1) 바벨론이 멸망할 때, 칼을 피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가라고 명하신다.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고 계속 걸어가라고 하신다.
2)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은 쉽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언약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과 여호와와 연합하는 여정을 결코 멈추어서는 않된다.
3) 그러면 하나님은 맹인, 다리 저는 자, 임신한 자, 해산한 여인까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도우신다(렘 31:8-10).
4) 바벨론에 의해서 수치를 당할 때에도, 포로로 잡혀갈 때에도, 바벨론이 멸망할 때에도 언약 백성은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3. “만군의 여호와”는 파괴자를 통해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신다.
1) 많은 재물과 강력한 힘으로 정복하던 바벨론에서 울부짖는 소리, 통곡이 들려온다(54절).
렘 51:56 바빌론을 파괴하는 자가 바빌론으로 쳐들어오니, 바빌론의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인다. 주님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복하실 것이다.
2) 유다와 열방들을 멸망시키던 바벨론은 또 다른 멸망시키는 자로 인해 정복당한다.
4. 하나님은 보복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보복하는 이유는 2가지다.
1) 먼저 교만한 자에게 보복하신다. 교만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사단을 따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다. 바벨론의 이 교만은 성전파괴로 나타났다.
2) 하나님과 언약 백성은 연합되었다(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의 적은 곧 하나님의 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약백성을 학대한 바벨론에게 보복하신다.
- 영화에서 자녀를 학대한 악한 자에게 부모가 보복하는 것은 당연하다.
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과 사망을 멸하신 이유”는 “보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학대한 사단에게 보복하셨고 반드시 보응하신다.
5. 하나님의 보복에 대하여 바벨론과 그에 속한 민족들은 멸망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수고는 헛될 것이다.
“바빌론 도성의 두꺼운 성벽도 완전히 허물어지고, 그 높은 성문들도 불에 타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뭇 민족의 수고가 헛된 일이 되고, 뭇 나라의 노고가 잿더미가 되어 모두 지칠 것이다”(58절).
1) 멸망하지 않으려는 노력, 심판받지 않으려는 노력, 죽지 않으려는 노력, 보란 듯 하고자 하는 노력은 헛된 일이 된다. 그 모든 노력은 잿더미가 되고 모두 지치고 만다(쇠잔하리라).
6. 사실, 하나님 없이 행하는 그 모든 것은 아무리 성과가 좋고 행복하게 해도 헛되다.
전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1) 범용 인공지능의 도래를 기다리는 인류다. 생명을 창조해 낼듯한 놀라운 과학 기술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수고는 헛되고, 결국 쇠잔하게 되고 만다.
2)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기술과 문명에도 불구하고 해 아래에 새것은 없다. 인간의 존재는 동일하고, 인생의 과정과 결국도 변한 것은 없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7.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말씀은 총 110절이나 된다(50-51장).
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말씀을 주시고,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말씀을 명령한다.
51:59 이것은 마세야의 손자요 네리야의 아들인 스라야가 유다 왕 시드기야 제 사년에 왕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갈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명령한 말이다. 스라야는 왕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2) 스라야는 왕의 수석 보좌관 즉 최측근으로 왕의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자다.
3) 시드기야 4년에 스라야는 시드기야 왕과 함께 함께 바벨론에 가게 되는데, 예레미야는 그 때 바벨론에 닥칠 심판의 말씀을 기록하여 그에게 바벨론에 가서 심판의 말씀을 읽으라고 한다.
8. 시드기야 제 4년(B.C.593년경)은 예레미야 29장의 배경과 비슷하다.
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침공해 여호야긴 왕과 유력한 지도자들을 바벨론 포로로 끌고 간다(왕하 24:10-17). 그리고 시드기야를 봉신으로 삼는다.
2) 시드기야는 에돔, 모압, 암몬, 두로와 함께 바벨론에 대한 반란을 계획하다가 실패한다.
3) 시드기야는 이 일을 해명하기 위해 바벨론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수석보좌관인 스라야가 동행한다.
9. 예레미야는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대한 멸망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신다.
1)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회복은 거짓선자들의 회복과 시기와 방법이 다르다.
2) 거짓 선지자들은 유다가 멸망하지 않고, 속히 바벨론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미혹하였다.
3) 하나님은 바벨론은 심판의 도구로 열방과 유다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의 날이 이르면 바벨론을 멸망시킴으로 언약 백성을 회복할 것이다.
10.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바벨론의 심판과 그 심판을 통하여 유다 백성이 회복된다는 말씀을 바벨론에 가서 유다 백성에게 읽어 주라고 명한다.
렘 51:61 그리고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말하였다. "수석 보좌관께서 바빌론 도성으로 가거든, 이 말씀을 반드시 다 읽고
11. 바벨론에 잡혀온 유다 백성은 2가지 마음이 있었다.
1)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이 2년 만에 회복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미혹을 믿었다.
- 그러나 이 기대는 철저히 무너진다.
2) 그들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은 “바벨론이 멸망하고 이스라엘은 회복된다”는 말씀이다.
- 그런데 그 기간은 70년이다. 그들은 포로지 바벨론에 정착하여 결혼하며 살아간 후에, 하나님의 주권으로 회복된다.
12.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는 “심판의 복음”이 어떻게 들렸을까? 기쁜 소식일까? 절망일까?
1) 심판에 주목했다면 “복음”의 소식이 그다지 위로와 소망과 힘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연약한 인생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을 보내, 심판 받아 마땅한 나를 인정하고 “복음”의 말씀을 쉐마하라고 하신다.
2) 만약 “복음”에 주목했다면 비록 “심판”의 과정이 있지만 위로와 소망으로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먼 곳에서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51:50 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13 비록 심판의 과정이 있지만 그 심판보다 크신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함, 학대하는 바벨론보다 크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언약 백성들은 “먼 곳에서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고” 바벨론에서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갔을 것이다.
1) 그리고 바벨론이 멸망하는 그 날, 바벨론에서 나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2) 그들은 울면서 돌아와 여호와와 연합하는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렘 50: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50:5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 하리라
14. 하나님이 심판받아 마땅한 언약 백성들에게 끝까지 선지자를 곁에 두고, 끝까지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1) 심판으로 끝나야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반드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2) 죄인임을 온전히 인정하고, 회복을 믿는다면 “심판”은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복음”에 주목함으로 감사하며 바벨론 포로지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3) 먼 곳에서 하늘의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고, 곁에 둔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15.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심판의 복음을 어떻게 들었을까?
1) 심판의 복음을 들은 다수는 시큰둥했을 것이고, 자신이 심판으로 끝나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소수는 심판을 지나 반드시 회복하신다는 말씀이 복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2) 회복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에게 “심판의 복음”은 “심판”일 뿐이다.
3) 그러나 멸망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에게 “심판의 복음”은 “복음”일 뿐이다.
◈ 나의 묵상: 심판의 복음은 심판인가? 복음인가?
심판의 복음은 나에게 심판일까? 복음일까? 무 자르듯이 하나를 선택하기는 힘들다. 심판의 복음이 복음이면 좋겠는데, 오랫동안 심판의 복음을 믿음으로 연합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통하여 교만한 나의 마음은 심판으로 여기고 있음을 본다. 교만한 나의 마음은 멸망을 끝나 마땅한 나로 여기지 않고, 심판을 받으나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판의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회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은 멸망으로 끝나야 마땅하다고만 여겼다. 회복은 하나님 편에서 주신 말씀이며 은혜였다.
내가 멸망으로 끝나야할 죄인임을 모르는 것은 교만을 통해 확인된다. 곧 로잔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어서 로잔대회가 무엇인지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역시 알고리즘을 통해서 로잔대회에 대한 비난하는 영상이 떴다. 어떤 비난들이 있는지 알아야 해서 들어보니, 예상대로다. 일부 맞는 말이 있지만 교만함과 편견으로 자기 관점으로 비난을 자랑스럽게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런 비난에 동조한다. 문제는 그런 교만을 듣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CS루이스는 교만한 자를 대하기 싫은 만큼 교만하다고 했는데, 교만함으로 판단하는 자들에 대한 긍휼보다는 화가 나서 듣기가 힘들다. 그들의 교만이 내 안에 그대로 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가 어찌 멸망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겠는가? 지식으로는 적극적으로 심판을 동의하나, 마음은 멀다.
소망이라면 말씀을 통하여 교만한 나를 계속 보는 것, 그리고 그런 나에게도 끝까지 생명을 주는 말씀을 곁에 두셨다는 것, 그리고 심판의 복음을 복음으로 들릴 때까지 하나님은 끝까지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나에게 영원하신 분이 끝까지 함께하신다. 그리고 영원이 “잠깐”을 이길 것이고, 거룩이 죄를 이기고, 사랑이 완악함을 이기고, 창세전부터 나를 아시는 분이 나를 이기실 것이다. 나로서는 약도 처방도 없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낫게 하신다고 하셨다. 다리저는 자와 맹인도 반드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결국 생명을 주는 말씀이 내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말씀을 먹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비록 먼 곳에 있어도 계속해서 말씀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그 사랑은 그 때마다 두 팔 벌리고 나를 환영한다. 정죄하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시면서 잠잠히 안아 주신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마음으로 품어 주신다. 영원히 나를 거절하지 않기에, 그 품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을 때, 사랑과 기쁨으로 용납하시기에 십자가로 달려간다. 나의 교만이 높을수록 주님의 겸손은 깊고, 나의 죄가 클수록, 죄인을 사랑한 그 사랑은 한이 없다. 시인의 고백처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 기록하는 날을 고대한다.
◈ 묵상 기도
하나님 아버지, 먼 곳에서도 주를 품으라 하셨고, 그 발걸음을 멈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의 복음은 주님의 큰 구원과 사랑인데, 나의 죄와 교만을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멸망을 끝남이 마땅한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어리석고 무지한 자였습니다. 나의 존재와 성장과정과 지금의 나를 아시는 주님, 그 전지하심과 나를 구원하시는 전능하심에 나의 영혼을 맡깁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나를 알고, 주님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이 심판하신 백성인데도, 끝까지 선지자를 보내 말씀을 곁에 두시고, 약도 처방도 없는 자를 반드시 낫게 하십니다. 아직 제 옆에 말씀이 있고, 주님의 인자와 신실함이 있음으로 감사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마음 눈을 열어 주사, 심판의 복음을 영과 마음으로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 복음과 장사복음과 부활복음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사,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헛된 수고와 쇠잔함에서 돌이켜,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아랍기도회가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이들, 절망하는 이들, 수고가 헛된 이들, 쇠잔한 이들을 주님이 구원하여 주옵소서. 신정아 전도사님과 교사, 셀장, 팀장들을 붙드시고, 유누라 선교사와 TNF를 선한 손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랍기도회 가운데 함께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