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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음역(音域) 표현하는 것 소리 내는 높낮이 내는 것 이런 데 대하여서 지금 스물네자 가지고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는 거다 이런 말씀이지.
스물여덟 자를 다 써야지만은
억센트 발음, 억양, 발음 그 높낮이나 빠름이나 느림 같은 것을 해가지고서 발음 나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다
표현해 주게된다 이런 말씀이지. 글자를 써서 놧더라도 훈민정음 글자를 써놨더라도 스물여덟 자를 쓰면 다 그렇게 알아보게 된다 이런 말씀이에요.
그 한 예로 경상도 방언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인가 이런 것을 말할 적에
가가가가 이렇게 말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가짜 네 자를 그냥 써 놓으면은 전혀 그것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지.
가 자(字) 넉 자가 가가가가 이런 식으로 써놓은 것이 그렇지만 그 억센트 발음 표현을 말하자면 스물여덟 자에 의거해서
해놓게 된다. 한다 할 것 같으면 그 발음 성향 나오는 것이 다 거기 표현됨으로써 그 사람이 그 사람이냐 이런 뜻을 다 알아보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이냐 이렇게 말하는 걸 갖다 가가 가가 이렇게
억센트 억양을 넣어서 발음하게 되는데 그냥 가 자(字) 넉자 써놓게 되면 가가가가 이렇게 돼 있어서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이렇게
에
학자들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 틀림없는 거지. 그러니까 28자를 다 써야 한다.
그런데 중도에 와서 왜 어떻게 됐는지 24 자를 쓰게 됐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강사가 예전에 그렇게 저술한 책
자음(子音) 해설 그러니까 초성(初聲)이지 초성 중성 종성 이렇게 해서 한글 글자가 꾸며지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 초성 발음 나오는 거 또는 종성 이렇게 갖다 붙이는 거 그런 거에 대하여 상형(象形)에 대하여서 강론을 펼친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감안해서 훈민정음에 바탕을 둬서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이렇게 밝혀두면서
어
오래된 글을 이렇게 다시 리바이벌 하듯이 텍스트화 해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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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音의 說明
앞에 세우(立)는 子音形을 설명한다면 여러 가지 이론이 있겠지만 그중 그 成形과 五行論과 결부시켜설명한다면 앞서의 母音形 설명에서「아」聲은 입안 전체를 울리는 원만한 音으로써 소리 근원이 咽喉에서 올라와 右(※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니 舌의 되새김을 어느쪽으로 하느냐에 따라 左볼이나 右볼이 된다 할 것이다)볼을 울려내는 聲이나「ㅏ」形을 斜側(기울게) 하게 놓아 앞니의 위 아래에 혀(舌)를 부딪혀 내는 소리「ㅅ」(시옷)음을 삼아 子音 成形하였다。그 子音의 性質이 母音따라 金音이고ㆍ 母音「우」聲은 입술을 내미는 逆三角形 形이나 입술모양이 양 옆을 들어오고 上下는 벌어져 네모진 形을 이룸이라。聲을 낼 때는 입술과 입술을 부닷겨 냄으로 그 소리내는 입술모양을 따라「口」形을 지음이다。그 性質은母音性質을 따라 물(水)에 속한다.
母音「어」聲形은 어금니볼에서 아래로 휘어내는 발음이다. 입을 적당히 벌려 볼쪽에서 발음을 내니 아래로 흰 형태의 「ㄱ」기억形을 成形한다。(※ 하늘 물구나무하여 저쪽에서 볼때는 위로 흰형태가 (
기억이 된다。) 기억발음 또한 어금니볼을 쳐울려서 내는 된발음(무거운)이다。그 性質 또한 母音性質을따라 木性에 속하고、母音「오」聲形은 입을 順三角形으로 모아내는 발음으로 舌이 口中에 뜬 상태의 발음이다。子音「ㄴ」形은 母音 (ㅗ物을 中央에 놓고 양편에 對應해 보면 양쪽을 다 취한 것이 된다。지금 나의 해설이 어떻게 궁색한 변명같은 해설을 하는 것 같다。이는 머리에 들은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自責하면서 계속 궁한 연구라도 해보기로 한다) 그 발음은 舌을 위로 휘게 하여 입앞 天井에 부딪겨 내는聲이다。그 性質은 母音性質 따라 불(火)에 속한다.
母音「이」와「으」聲形은 입속에서 내는 모든 음성의 經緯形으로 맞물리는 곳 중점을 중심하여 원만한음성形을 짓는 역할을 한다.그러니까 모든 음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이으音의 연속은 (ㅇ=이응)을 成形한다。「이」는 아래위 치아를 닿게 한 상태에서 볼을 울려내는 소리이고「으」는咽喉를 울려서 내는 소리이다。「이으」의 연속음은 소리를 굴리는 것이 되므로 원(圓)을 成形하게 된다는 것이다.
IIIII
이렇게 형성된 원음(ㅇ=이응)은 모든 音界의 母胎이면서도 그 自體로 子音형태 性格도 갖고 있다는 뜻이다。그 性質은 흙이라 한다。이밖에 子音 「ㄲ ㅋ」은 「ㄱ」의 화합과 造化에서 나왔고 「ㄷㄹㅌㅁ」은ㄴ의 화합과 조화에서 나왔고 「ㅂㅍ」은 「ㅁ」에서 화합 파생되었고 「ㅎ」은 「o」에서 나왔다 할 것이다.「ㅃ ㅆ ㅉ이 또한 같은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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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時空形에 맞는 萬有音과 그에 의한 말씀과 그 理治合當한 글(文字)이 成立되었다 할 것이다(※ 모든 글자(文字)는 立體空(ㅇ)을 音 表現과 적당하게 分割한 立體的인 形을 單面的으로 表示한 것에 不過한 것이다)
以上의 音 形成에 관한 것과 文形是非論理는 한글 學者에게 맡기고 以上의 논리에 準據하여 아무런의答인「아무러크소니」의 뜻을 설명하기로 한다。그럼 아무러크소니란? 대체로 무엇을 뜻하는 건가? 아무러크소니란 아무렴은 어떠냐는 식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의 放言으로 그 말씀 어휘와 뜻이 自他의內心에 同情이나 共感을 求하거나 마음의 여유를 갖게 認知시키는 뜻인 것이다。그저 원만하고 둥글게 아무 탈없고 큰 사고없이 흐름을 따라 처세하고 行하라는 뜻일 뿐이다.모든 事物이 自然變理나 時空의 和樂한 다스림대로 되라는 뜻이다。勿論 眞理속에 있는 事物이 아무렇게나 되어선 안될게 더 많다 할 것이다.
즉 眞理의 秩序나 圍界를 어지럽히는 그런 아무렇게나는 되어선 안된다。필자가 말하는 要指는 窮極的으로 結果나 解答을 所望하다가 슬기와 그에 의한 노력하는 힘이 한계에 부닷칠 때 모름에 내맡기는 답으로 아무러크소니에 의해 되라는 뜻이며 이것과 저것과 제삼의 것 등등과 모순일 때 그 풀음을 모름(ㅇ)으로 모름에 내맡긴다는 뜻에서 아무러크소니란 뜻이다.
앎의 지혜가 다할 때 모름의 권능(이것이 권능이라 해서 뒤에 나오는 말뜻과 모순된 점이 없지 않았으나 문맥상 그런 단어를 취하여 본다)에 答을 時空的으로 찾는다는 것이니 시공적으로 찾는다는 것은 뭣을얻는다는 것이 아니요. 즉 진리에 의한 진리속에 뭣에 의한 답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이 얻으면 무진리가 아니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얻더라도 진리가 아니고 무진리일 수도 있으니 이는 무엇을 얻고자 찾거나 바라거나 하는 것에 집착치 않고 내버려둔 상태에서 일 것이다.또한 반드시 그렇치 않을 수도 있으며 또한 없다를 뜻하는 것일수도 있다.
時空 원만行을 德이라 하니 그저 둥그런 굴름을 뜻한다。아무러크소니란 語句의 말씀은 앞의 한글 正音
論理에 準據한다면 그 뜻은 결實된 열매는 잘 모였다가 그대로 덕이 될건 덕노릇을 하고(그대로 가치를 발휘할건 발휘하고) 그 아닌건 새움나고 자라서 또다시 무르익어라! 땅에서 심고 걷우라는 뜻이다。아무렴의 뜻에 그 字行列의 順序가 어디 있겠나만은 우리(ㅇ)나라 말씀으로 아무렇게나를 쓸대 그 말씀이 아무렇게나」로 定한 순서대로 進行되니 읽는 이는 句節의 錯誤나 뜻에 오해 없으시기를 바란다。이렇게 認知(인식해 알게 함)하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말씀으로 아무러크소니라 하였으니 이는 필자가 의도적으로 語句를 뜯어 맞추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절로일 뿐이다.
그 글 짜임새를 본다면 母音의 行列이 五行性上 쇠물 나무 흙 불 흙으로 되어 있어 生하고 生하는 理治에 가깝다 할 것이요 (불이 흙 가운데 배치됨은 生生하는 이치의 生氣(싱그러운 신선한 맑은 공기와 같은 기운이라 할까?)를 불이 마르게 함이라.그래서 환란의 불을 땅에 묻어 흙을 온화하게 하여 萬類의 生氣를 얻게 함에 있음이로다) 子音과 母音의 合成된 字의 行列 짜임새를 본다 하더라도 生生의 이치와 멀지 않으니 土金水水火木木土金火 火 土로 되어 있어 흙이 쇠를 낳고 쇠가 물은 生하고 물이 불과는 상극이나 그 뒤에 오는 木을 生하고 또 러字의 子音 「ㄹ」이 무字의 받침이 되는 발음 行이니 물(水)의 뜻을 강조하여 강열한 불의 뜻이 희박해지고 나무위에 영화로운 꽃핀 정도가 된다 할 것이요(왜냐? 동양철학 서적류를 뒤지다보면 불이(丁丙) 꽃이란 의미가 나온다) 나무와 흙이 상극이라 하나 나무가 흙이 아니면 어데다 되고 뿌리를 박아 生存할 것인가? 萬類를 의지하게 하는 土德이 위대하다 할 것이다.
또 土에 의한 生한 金이 火氣가 아니면 어찌 그릇을 이룰까? 이다。生克論理가 다| 이 부질없는 논리이나 時空이 그 活動하는 힘과 形容에 의해 생겼으니 부질없이 논할 뿐이나 상생이 상극을 俠하고 상극
이 상생을 俠하였음은 世人은 삶을 겪으면서(모든 것은 尺度에 따라 다양성을 띈다) 다 알 것이다(※「아」는 右「무」는 後「러」는 左「크」는 가른(橫)緯 또는 左右「소」는 前「니」는 세운(立) 經 또는上下) 이와같은 五行上이 뜻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완만함을 이뤄 모든 얽힘에서 벗어나라는 뜻이「아무러크소니」이다.
이것이 또한 진리가 아닐진데 아무렴은 상관 있을까? 그 語句짬을 뒤죽박죽해서 아무크러소니라던지 무아소니크러라던지 그냥 여러 여러말 어구라한들 무슨 상관 있을 것인가? 그 德을 갖췄다면 構體的인의미나 形에 들어가선 세모 네모진 것이 비틀어진 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宇宙時空萬物 行事가 모두가 다 아무러크소니의 갖가지 細分化된 構體的인 뜻과 말씀과 그 이다…。이 말씀은 어떤 主義나 理想이나 信念의 思想이나 信仰의 佛과 神처럼 權能이 있는게 아니고 조잡스럽게꾸민 궤변이고 삿된 쓰잘데 없는 말놀림에 불과하다 한다면 그 말씀이 지극히 당연하다. 이 말씀은 그러한 眞理가 아니고 무진리이기 때문이다(이 글을 立案하고 훗날 釋氏經 일부를 보았는데 이와 비슷한 內容흐름을 보았다. 그렇담 이미 벌써부터 석씨 추종 神이 내 精神을 지배한다 말인가? 이렇담 이것이 장단을 맞춰주느라고 뒷북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무슨 상관 있으랴? 그러니까 아무러크소니이지…。
昨年 여름에 짬(시간)을 내어 공주 계룡산을 다녀왔다. 동학사와 갑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山북편 마을길로 들어가 절은 없어진지 오래인 당간지주 세워놨던 주추 몇개 있는 자리만 보고 왔다。신도안,을 들어가 볼려 했었는데 시간이 모자라 아쉬운 마음에 그냥 돌아왔다.그랬더니 그 이튿날 신원사 소개하는 팜플렛 책 한권을 절로 줏어보게 되다.이것이 무슨 뜻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 이 글 정리때 생각나서, 무슨 연관이 있나 하고 적어본다)
위대한 석씨에게 비유할 것도 없고 비유할 것도 아니지만 佛인 석씨도 그러함을 부정한 것 같은데
고(罟)脫破야 말할나위 있으랴? 그렇다고 고(罟)脫破가 석씨論보다 윗되다 함도 아니요 더군다나 아랫되다 함이 아니다。다만 그 깨침의 覺과 차원을 달리하는 面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러한 권능이 없는데 뭣하랴? ᆢㅡ답은 아무러크소니이다。그저 원만하게 둥그런 시공이다。또 그의 벗어남이다。즉 동그라미 우릿(ㅇ)을 뜻하는 것이니 그 뜻은 모름(ㅇ)이란 뜻도 있으니 뭣이 있는지 없는지는 결단코 장담할 수 없는 無眞理일 뿐인 것이다。이 모름의 얽음을 깨쳐 벗어남이 고(罟)탈파 無數人門 槪念을 초월함인 것이다.
※ 우주의 운행등 잡다한行 形容象은 무슨 권능을 말하는 것일까? 아무리크소니 그것은 아무런 권능이 없다。
아무런 권능을 말하지 않는다。여럿의 願을 다 들어주겠다는건 십중팔구의 여럿에게 빈축을 사거나 밉상을 받기가 일수다。줏대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하고선 호감을 얻고자 하나 그 잃음이 더 많은 것이다。보감에 있길 양고기국이 비록 맛있으나 여럿의 입은 맞추기 어렵다 하는 것처럼 말이다。진실로 어진자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또한 남들에게 밉상을 받는 것이 진실로 어진 자인가? 뒤통 맞고 할망한 멍청이 같은 양반이 앞에 나서 설쳐되고 궂은 일이란 궂은 일은 모두 도맡다 싶이 하고 뭘잘 한다는게 잘못 하는 것이 되어 남에게 害를 입히고 욕됨은 홀로 뒤집어 쓰고 설 곳을 몰라 부끄러워하고 나는 왜 그런가 하고 쥐구멍이라도 있음 숨었으면 한다던가 자기의 치부를 가릴려고 아예 부끄럼도 멋적음도 모르는 척 괴팍한 성깔을 부린다던가 좌불안석 이상한 행동을 하며 또는 울화통을 터트려 중인의 조소거리가 되는 얼간이 취급받는자가 되던가 동정거리가 되던가 한다.
그렇게 농간이 들게 하는 자가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물론이다。아무러크소니 속에 그 누군가가 세상사를 갖고 농간부리길 좋아하는 자가 그렇게 하는 자일 것이다(次元이 다름이 관여하는 것인지…) 다- 이- 모두 서글픈 일이다。이 모두가 슬기롭지 못함에서 일 것이다。
草案을 作成치 않으면 무슨 작품이 나올 것인가? 앞에 선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 슬기로운 체 하는자들은 뒤에 서서 시시비비 비평만 늘어놓길 즐긴다。以上의 말씀이 한때의 생각 진리라 할 것까진 없지만 현실적으로 사실의 일편이라 열한(十一) 얼굴을 가져 어질고자 노력함도 여럿의 사랑을 받지 못할진데그 한생각 진리야 말할나위 있으랴? 진리라는 것은 그것만인 제주장만 내세워 돌출시키려 하므로 양보할줄 모르는 것이 되고 또 알아도 저를 살찌우기 위한 도구로 利用하고자 드니 衆人의 사랑을 받아 돋보이고자 하나 성에 안차 늘 외로울 뿐이다.
(※ 진리의 욕심이 限界가 없다) 이 ㅡ외로움이 때로는 횡포로 변해 알아달라고 사랑을 구걸하는 포악한 자로 변질되기도 한다.모두가 다 이 가련함이다(※ 次元을 달리하면 事가 物일수도 있고 物이 事일수도 있다。저- 석벽은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버티는 일(事)을 하고 있는 中이고 저 나무가지를 체질시키는 저 바람은 흐르는 時間行事가 物이라 표현하는 것을 저 흠집으로 하였다。즉 일하여 논功果로 표시하였다)
남의 理想과 그에 따른 傳統을 갈아엎음을 이 항마라 하고 克己 克邪하였다 하고 제 주장을 내세워 누리를 오염시키고자 하는 것을 이 무슨 신사상 주의 신흥 신앙이니 하는 것 따위다。如他(諸者百家思想의 爭名=主義 信念 信仰 集團 團體 理想 思想 그에 따른 諸般行爲 儀式 日上生活 등등)가 있음으로 比較할수 있는 것이며 眞理라는게 혼자이면 注知시킬려고 그렇게 발버둥치는 것처럼 되지 않아도 될 것이다。그러므로 이런걸 봐서라도 그것만이 아니라는게 들어나고 있질 않는가?
또한 그럴듯한 名分이나 추구하는 目的(相利相存 相扶相助 共利共存) 등을 내세우는데 이는 경쟁을 생성시켜 발전을 가져온다 하지만 餓鬼의 온 누리가 되게 할 뿐이다。몇만 몇천 魔群이는 各其 다른 理想이 저마다 뭉친 또는 相合하기도 한 힘쓰는 덩어리(塊)로써 모든게 理 의 集合인데 누구를 魔라 하고 누구를 邪라 하고 누구를 正이라 할 것인가? 모두가 다 아무러크소니(깨침)속에 들려하는 집단일 뿐이다.
이를 알면 一家見의 삿된 진리를 형성한다 할진데 그러므로써 아무러크소니가 되질 않는다 할 것이나 또한 이를 알아도 몰라도 그 그러함이 무진리일진데 - 아무러크소니에 든다 할 것이다(※ 언제쩍 일월십이일인지。일월십이일로 초안작성된 걸로 적혀있다)
많은 아무러크소니가 아무러크소니로써 아무러크소니일 뿐일진데 그 힘을 엉기게 하고 크게 확대시켜 발휘케 하고 善意의 名分 合理化시킨 目的 등을 앞세워 횡포적인 권능이라 하는 것과 異積을 내세움을 자랑으로 여기는 그 主性體는 무엇인가? 이 삿된 진리 얽음의 主長으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그 유혹에 들면 그 힘을 점점 확대시켜 누리를 물들이고자 해서 저마다 그 허물을 벗고 나온 또다시 깨치고자 고뇌하는 고뇌하지 않던가…) 많은 아무러크소니들을 그에 빠지게 하여 먹이를 삼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리가 큰바되로(크게 보이게 됨 그렇게 됨 전시효과 시위효과를 가져와 서로가 그 집단을 선전하고 여타를 포용할려고 열을 올리게 된다) 서로 의지하여 힘의 서림이 커지면 개중엔 아무러크소니의 넋과 혼이 靈庫로 있는 것도 있을 것이며 그엔 별아별 재주꾼이 다 있을 것이다.그러한 무리의 힘 을 얻는다면
무슨 일이던 行치 못할 것인가? 흡사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모여 구름덩이를 이뤄 大地를 적시는 것 같을 것이다.
※ 物事와 어떤 作品에 있어서 겉으로 표현하는 뜻과 실제의 담긴 내용이 여러 가지로 乘異되는 수가 있고 변질되는 수가 많다.
이는 아집과 독선으로 자기만을 확대시키고자 않고 相互 時空을 할애하여 서로가 모든걸 포용하고 이해하며 和解하여 같이하고자 하는데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하필 승패에서 강압적으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그러므로 흙땅이라 가르켰어도 흙땅이 아닌게 있고 나무라 지칭했어도 나무가 아닌게 있으며 또 흙땅에서 심고 거둔다는 것이 실제에 있어선 흙땅에서만 심고 걷움만을 말하는게 아닌 것이다。이는 그 성격을 취하기도 하고 그 형태를 취하기도 해서 그 物事가 內在하고 있는 여러 가지 뜻이나 名分을 잠시 잠깐 끌어들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부피 線積을 面積上 중점에다(※ 아무데나) 세우고(합성시켜) 無方으로 헤집은 것(空의 活動象과 그 힘의 作用)을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일진데 어찌 곧이 곧대로 흙땅에서만 심고 걷움만 뜻할 것인가? 이다。진리를 주장하는 삿된 무리들에 의해 이 착오를 일으킬까 해서 附言하였다。
※ 祖上에 얼 우릿(ㅇ)에 얼을 우리에 모든걸 뜻하니 즉 그 결(부드러운 닿음 때로는 용맹한 가르침)손결 숨결 땀결 삶결이 깃든 것 등등이다. 우리는 이에서 숨쉬고 삶의 터를 이룬다.또 우리는 그길따라 왕래한다。얼은 길이다.우리는 空과 空들이다。비약적인 것 같은 뜻의 말씀이 저 ㅡ뒤에 나오지만 空과 空들은 그길 以前에 있었다。내가 존재함으로 내가 만든길 존재性을 내보이기 위해 내가 닦은 길 내게 언
제나 영향을 면면히 미치는 길 어찌 공경치 않을까?이다.
그 祖上을 숭상하고 그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당연지事를 갖고 이에 너무 얽메이고 강조하는 것이다。질서는 세멸토록 존재할 것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사람을 묶는 착고같은 허울, 허울에 너무 얽메인다면 진취성은 없다。오히려 그 얼들이 못살게 굴어 내| 쫓을 것이다。古家의 쇠락한 뜰담엔 잡초만 무성한 것처럼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쇠락의 굴레 속에 방황 헤어나질 못하는것 같다 할 것이다.떨쳐버리고 당당(堂堂)하라! 나는 저 쪽에 있을 때에 푸른 창공과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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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과 알 어미와 아들에서 어미(指空)가 먼저일 뿐이니 따지고 보면 하나의 돌덩이 같은 物事이지만…。이것은 앞서의 미래가 과거를 창조했다는 시간감 거리감을 一物事로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크소니는 그 진리라 하는 허울이 없어도 아무러크소니 임으로서다. 여건조성 탈을 제공함도 아무리크소니요(진리는 願에 의해 생긴다。그 원도 따지고 보면 아무리크소니의 일부분에서 나왔다 할 것이다. 뒤를 받쳐줌도 아무리크소니요 그 연속성을 띄게 함도 아무러크소니에 의함이니 어둠으로 인한 밝음이나니라.
이는 敗者의
변명이 아니라 그렇게 배경을 조성시켜 주는 것이다. 어두움이 사악해서 밝음에 쫓겨 물러남이 아니요 그 진리 발음을 밝게 하기 위해서 물러서 보일 뿐인 것이다. 밝음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소화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무러크소니는 슬픔과 寃의 집일진데 그를 참칭 빙자하여 그 무엇을 하고자 나서는 자 그 논리나 그 뜻한바 物事의 관점이 지극히 삿되어 그 삿됨으로 유혹에 빠져 孚(포로=믿어움에사로잡힌)로 있게된다 할 것이다.그를 추종하는 자는 그것이 진리와 진리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또 아무러크소니는 이러한 것을 自和自贊하듯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삿됨이 지극하면 능히 그 함정을 만들어 허울 쓰고 고뇌하는 아무러크소니들을 고이고 모여들게 하나라 웅덩이에 물 고임과 춥고 흐린 겨울날에 눈이 오면 눈쌓임을 보라°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 같은 말씀이라도 오래 번복해 들으면 정신이 쇠뇌되고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절로 웅얼거려져 그렇게 여겨진다。여겨짐이 지남 그것이 되는 단계에 다다르고 되는 단계를 지남 옮마들게 하는 단계(포섭단계)에 접어들어 구관조나 괴뢰처럼 움직여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한다.
불쌍코 가련타 진리여! 그렇게 하여 무얼하려 하느뇨´관심두지 말면 간섭치 않으면 곧 그대로가 아무러크소니 이며 아무러크소니를 깨쳐(破) 뛰어넘는 것이 되나니라。초월한 곳 또한 아무러크소니이다.
이제 아무러크소니란 말에 쇠뇌될 것이다。점선의 차원으로만 있을 수 없고 面次元으로만 있을 수 없고 六方의 次元으로 있나니 이게 진리이며 六方의 次元을 넘나들어 아무러크소니 이나니라。六方의 次元으로만 있을 수 없으니 그 次次로의 次元은 아무러크소니에 맡긴다 할 것이다.
문맥의 단편적인 흐름이나 전체적인 글 뜻의 흐름을 보아 어떤 사이비 신앙이나 종교적인 논조의 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심신이 심신이라 하는 그 노릇…진리의 生成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에서 일 것이다。精神에서의 思考는 어떤 획기적인 충격이 있으면 몰라도 前轍을 벗어나지 못한다。즉、진리라 하는 정신과 육신으로 있기 때문이다。어떤 획기적인 충격이라 하는 것이 멍청이나 사고력 기억상실이 됨과 육신의 장애가 오는 걸 뜻하는건 아니다。물론 그렇게도 관점을 둘 수 있지만 破覺의 次元을 달리 하는 들여받침(觸)을 뜻한다.물론 이것도 아닐 수 있으니 그냥 아무리크소니라 할수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니 아무러크소니는 그 능력이 하도나 커서 아무리크소니가 느끼질 못해 없는 것 같고 하도나 작아서 느끼질 못해 없는 것 같다 로…。또는 능력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고 능력이라는 게 뭘 뜻하는 것인지도 몰라 한다로…。그래서 권능 등 願하는게 있다 하는 모든이에게 빌기도 한다。빌기를 神이면 「전지전능한 신이시여! 굽어 살피소서」한다거나 또는「하나님이여! 하늘에 영광 땅에서 이뤄지게 하소서! 기도 드리나이다 저에 소원을 들어주소서」한다거나 부처님이면「부처님이시여」자비로움을 베푸사 가련한 중생을 긍휼히 여기사 고해에서 해탈케 하시고 하염없는 윤회에서 구해주소서」한다거나 다른 권능이 있는 이에게는 그에게 기도드리는 方法을 배워 갖고 기도드린다로…。주문이 있으면 주문을 외우고 경문이 있으면 경문을 외우고 그 뜻을 깨닫고자 하고 그 의식을 行코자 한다.
모든 권능이 內在된 진리여! 아니 무진리이시여! 이 아무러크소니를 제창하는 어리석은 자를 그대의 능력의 테에 들게 하소서! 하고 억수가 다하도록 빌고 빈다。그렇게 빌었더니(빌고자 했더니) 文句마다字句마다 눈과 눈이 되고 입과 입이 되어 한다는 말씀이「聖哲들을 희롱함만 아니라 줏대없고 일관성 없으니 모든 이에게 호감을 사기는커녕 나만 (그 어떤 것의 택일)을 찾지 않음으로 인해서, 미움을 받아서 그 作害가 無限이라서 시험대에 오르고 시련속에 허우적 거리로다。그래도 아무러크소니를 웅얼거릴 것인가? 나만을 찾으라 그러면 너를 도우리라、모든 이가 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 같다.
※ 因果 즉 건드리지 않으면 (스치지 않으면) 요동치 않는다(※ 이것이 말이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즉 요동치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다가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이는 정리때의 생각이다) 아무러크소니가 수레에 짐을 싣고 번화한 길을 가다가 수레가 요동하는 바람에 짐이 길가는 여인의 얼굴을 할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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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하고 비명소릴 지르길래 수레를 멈추고 여인을 보니 아릿다운 얼굴 할퀸자국에 피 방울이 맺친다。「아저씨 어떻게 할래요!」「글세 어떻게…。」말끝을 흐리며 이제 나는 야단났구나 근심섞인 얼굴로 잠깐 멍해 있었더니 내 꼴이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던지「잘 하고 다녀」하고 쌩 하고 돌아서서 간다。아이고! 부처님 맙소사 보살의 가호이시여! 살아났구나 생각하곤 다시 수레체를 든다。잠깐의 시련과 용서로 둘 사이를 좋게 하였구나(※ 이건 순전히 이쪽의 마음이지 저쪽엔 오늘 일수가 더럽게 재수없는 날이다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이는 정리때의 생각이다)
부처님은 웃는 듯 하고 아무러크소니는 감사히 여기며 간다 내가 너를 시련에 들어 곤욕을 치르게 한 것은 그 그것만이 아닌 무진의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였나니라 하심에 그 理由를 물으니 그 어느것 하나만이 아니나니라 하신다。그 어느것 하나만을 設定하여 說明하면 삿된 진리가 되어 어찌 그럴건가가 따라 붙나니라 하신다。그러므로 그 설명을 아니한다 하신다。無眞은 限이 없어 설정치 못하니 그것이 限界이다。무진은 알아도 몰라도 무진리이다。하염이 없기 때문이다。울림테가 또 있고 또 있어 無爲하고 울림테가 또없고 또없어 無爲하다.
이같은 말씀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회피의 말씀이 아니요、스스로가 부족만해서라던가 누구에게 답풀이를 전가함이 아니다。삿되다 하는 것은 그ㅡ의 주장을 고집함을 가르킴이다。위의 말씀과 연결하여 한例로 길가는 시간을 잠깐 지체케 하여 메어두었다(이미 이것부터 삿됨으로 들어간다) 메어둔 理由는 쉽없이 계속 가다보면 만나지 않아야 할 어떤 일이 닥칠 것이다. 닥칠런지 모른다(더욱 삿되다) (※ 정리때의 생각_이미 그렇게 짜여져 결정되어 있는 것에 아무러크소니가 자기의 맡은바 역할을 시기적절하게 담당하였을 뿐이다. 마치 빈틈없는 符節처럼 말이다.
世上에 빈틈이 있으면 눈을 닦고 보는 헛것이 보일 것 아닌가? 어긋나는건 어긋나는대로 빈틈이 없으니 時差가 맞지 않아 접촉사고가 이는 것처럼 말이다。의외의 卞手 또한 그렇다。제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빈틈없이 꽉 차 있는 것이니、그 어떤 강한 것이 時空間을 할애하라 하면 힘이 약한 것은 밀려나서 시공간을 비워주게 돼 있는 것이다。이것이 源泉的인 빈틈은 아닌 것이다.
혹、次元界가 다른 天眼神眼 등은 필자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므로 여기서 제외된다 할 것이다。이런걸 갖고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골치아픈 말 장난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얘기가 딴 곳으로 흐른 것 같다) 메어둔 과정과 결과론과 그로인한 미래의 예지론에서 시련과 용서 운운…이는 어떻게 될 것이다(이는 더더욱 삿되다)
이미 둘을 좋게하였다는 말씀은 많은 함축성 있는 말씀으로 그 내용상에 無眞의 豫智가 포함되어 있어 진리만은 아니다(※ 무엇을 그럴까? 그렇치 않을까?에서 그렇다로 결정지을 때는 생각이 이미 그렇게 편파적으로 기울기 때문에 그에 정당성을 부여케 되는 것이다。이 이야기가 번잡한 理論이고 잡다한 妄想
이다) 모름의 변덕과 으시대는 그 꼴은 차마 꼴불견이다。자비로운 듯하다 내치는 듯하다。제 내키는대로이다。내가 그렇게 함에 제가 그렇게 대해주는 것은 돌에는 돌 떡에는 떡으로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를바 있으랴? 용서와 아량 뒤따라 오는 흐름(내가 앞으로 갈곳)도 멀리 함이 없는 것은 계속 쫓아온다는 것인가? 아님 언제나 붙어있다는 것인가?…) 이 모름의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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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의 설명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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