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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신칭의 바로알자 – 에무나(신실함)와 피스티스(믿음)
1) 들어가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마틴루터의 주장은 종교개혁의 기본골격이다. 중세의 종교인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루터의 이 신학은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행위의 어쩔 수 없는 부족함을 강조한 교리이다. 그러나 이 교리 때문에 현대의 많은 성도들이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없어졌다. 어차피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모든 책임을 져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저 예수님을 입술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짜로 그럴까? 루터가 생각했던 이신칭의가 과연 이것일까? 아니면 루터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런 교리를 생각하였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왜곡되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단어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성경에서 그 뜻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2) 구약의 에무나
구약에서는 ‘믿는다’라는 동사는 138번 나오지만 ‘믿음’이란 명사는 찾기가 힘들다. 동사가 나오는 예는 다음과 같다.
`hq")d"c. ALß h'b,îv.x.Y:w: hw"+hyB;¥ !mIßa/h,w> WTT Genesis 15:6
(직역) 그가 여호와를 믿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것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쓰인 ‘믿는다’란 동사는 ‘아만’의 히필 형태인 ‘헤에민(!mIßa/h,)’이다. ‘아만’이란 동사가 히필 형태를 취할 때 ‘믿는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아만(믿는다)’이란 동사의 명사형은 ‘에무나(hn"Wma,)’이고 구약성경에 49번 나온다. 당연히 이 명사는 믿음(faith)이란 단어로 번역되어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딱 한번 하밬쿸 2장 4절인 경우만 빼고는 모두다 신실함(faithfulness)이란 단어로 번역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 단어가 모두다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이란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는가? 믿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함’이라 해야 말이 된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을 드러낼 때는 믿음이 아니라 ‘신실함’이란 뜻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구약전체에서 ‘에무나’가 주로 이런 용도로 쓰인다. 따라서 믿음이란 단어로 번역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단 한군데 믿음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하밬쿸 2장 4절이다.
`hy<)x.yI Atðn"Wma/B, qyDIÞc;w> AB= Avßp.n: hr"îv.y"-al{ hl'êP.[u hNEåhi WTT Habakkuk 2:4
(개역)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직역) 하밬쿸 2:4 보라 마음이 부풀어 그의 영혼이 바르지 않은 자를. 그러나 의인은 그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 하밬쿸 2장 4절은 신약의 로마서 1장 17절이나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서 인용하였다. 하밬쿸2장 4절의 문맥상으로 볼 때 믿음으로 번역하건 신실함으로 번역하건 별문제가 없다. 오히려 구약 안에서 보면 전체적 일관성으로 볼 때 신실함이 더 합당하다. 49군데 중에서 별다른 이유없이 딱 한번만 다른 단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힘들다. 왜 영어성경이나 우리 한글개역은 갑자기 이곳에서 믿음(faith)이란 단어를 썼을까? 그것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의 번역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가 오히려 역으로 구약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을 먼저 번역하고 그 다음에 구약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면 신약의 상황은 어떠한가 살펴보자.
3) 신약의 피스티스
구약의 ‘에무나’에 대응되는 신약의 헬라어는 ‘피스티스(pi,stij)’이다. ‘피스티스’란 헬라어는 신약성경에서 243번 나온다. 거의 모두 ‘믿음’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3절에서는 개역성경이 ‘미쁘심’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미쁘심’이란 단어는 바로 하나님의 ‘에무나’로서 구약과의 연결을 생각한다면 ‘신실하심’으로 번역해야 한다.
(개역) 로마서 3: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직역) 로마서 3:3 참으로 만일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고 그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경우가 신약에 제법 나온다. 이 피스티스란 단어가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관련될 때 어떻게 번역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러 군데서 '믿음'대신에 '신실함'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 같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살펴보자.
BGT Galatians 2:16 eivdo,tej Îde.Ð o[ti ouv dikaiou/tai a;nqrwpoj evx e;rgwn no,mou eva.n mh. dia. pi,stewj VIhsou/ Cristou/( kai. h`mei/j eivj Cristo.n VIhsou/n evpisteu,samen( i[na dikaiwqw/men evk pi,stewj Cristou/ kai. ouvk evx e;rgwn no,mou( o[ti evx e;rgwn no,mou ouv dikaiwqh,setai pa/sa sa,rxÅ
(개역)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직역) 2:16사람은 토라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슈아 마쉬아흐의 신실함을 통하여 의롭게 되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예슈아 마쉬아흐를 믿는 것은 토라의 행위가 아니고 마쉬아흐의 신실함으로 의롭게 되기 위함입니다. 이는 토라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과 직역성경의 다툼은 ‘의 신실함’과 ‘을 믿음’의 다툼이다. 즉 소유격 조사로 번역해야 할 것인가 목적격조사로 번역해야 할 것인가의 싸움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 pi,stewj Cristou 는 소유격이다. 왜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할 것을 굳이 목적격으로 바꿔 놓았을까? 라틴어 역인 불가타나 시리아역인 페쉬타나 옛날 스페인 번역이나 종교개혁이전의 영어번역인 위클맆이나 제네바성경은 소유격으로 번역하였다. 이 구절을 목적격으로 번역한 처음 인물은 마틴루터였다. 독일어번역을 할 때 이 구절을 그는 항상 Glauben an Christum으로 번역하였다. 왜 그는 이런 번역을 선택하였을까? 아마도 그의 이신칭의의 신학이 이런 번역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번역 이후로 모든 영어성경은 이 번역을 따르게 되었고 중국어 성경 한국어 성경도 예외가 없었던 것이다. 문법적으로 무리가 있었던 번역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이 이런 번역을 하게 하였고 그 이후의 모든 성경은 그의 신학을 따라 원문자체를 왜곡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행 17:31, 24:24, 26:18, 롬 1:17, 3:3, 3:22, 3:25ff, 3:30f, 16:26, 갈2:16, 갈3:2, 3:5, 3:7ff, 3:11f, 3:14, 3:22ff, 5:5f, 5:22; 엡 3:12, 6:23, 필 3:9, 콜 2:12, 테후 2;13, 3:2, 팀전 1:14, 팀후 1:13, 3:15, 히 10:38f, 야 2:1, 계시 2:13, 14:12 )
4) 나가면서
이상 살펴 본대로 ‘에무나’란 단어는 본래 ‘믿음’이란 뜻의 단어가 아니었고 ‘신실함’이란 뜻의 단어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 단어가 믿음(피스티스)이란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피스티스가 ‘믿음’이란 단어로도 쓰이고 ‘신실함’이란 단어로도 쓰인다. 그러므로 믿음(피스티스)의 본래의 뜻은 ‘에무나’이며 ‘에무나’는 영어의 뜻이 가리키는 것처럼 신실함(faithfulness)이다. 신실함(faithfulness)이란 믿음(faith)이 적당한 상태가 아니고 믿음이 충만한(fullness)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보통 믿음이라 쓰는 그 믿음은 믿음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은 항상 충만함을 가져야 하며 나아가서 더 나은 충만함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 충만함의 끝은 예슈아 마쉬아흐의 신실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신칭의의 신학은 루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안했든 믿음을 행위와 분리시킨 우를 범하였다. 믿음이란 단어와 신실함이란 단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신실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이 신실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은 결국 그 사람의 신실한 행위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이 행위로 드러난 증거가 하나님 앞에서 자료로 제출되어야 할 것이다.
에무나가 49번 나오는 구약의 용례 Exod. 17:12; Deut. 32:4; 1 Sam. 26:23; 2 Ki. 12:16; 22:7; 1 Chr. 9:22, 26, 31; 2 Chr. 19:9; 31:12, 15, 18; 34:12; Ps. 33:4; 36:6; 37:3; 40:11; 88:12; 89:2f, 6, 9, 25, 34, 50; 92:3; 96:13; 98:3; 100:5; 119:30, 75, 86, 90, 138; 143:1; Prov. 12:17, 22; 28:20; Isa. 11:5; 25:1; 33:6; 59:4; Jer. 5:1, 3; 7:28; 9:2; Lam. 3:23; Hos. 2:22; Hab. 2:4
피스티스가 243번 나오는 신약의 용례 Matt. 8:10; 9:2, 22, 29; 15:28; 17:20; 21:21; 23:23; Mk. 2:5; 4:40; 5:34; 10:52; 11:22; Lk. 5:20; 7:9, 50; 8:25, 48; 17:5f, 19; 18:8, 42; 22:32; Acts 3:16; 6:5, 7; 11:24; 13:8; 14:9, 22, 27; 15:9; 16:5; 17:31; 20:21; 24:24; 26:18; Rom. 1:5, 8, 12, 17; 3:3, 22, 25ff, 30f; 4:5, 9, 11ff, 16, 19f; 5:1f; 9:30, 32; 10:6, 8, 17; 11:20; 12:3, 6; 14:1, 22f; 16:26; 1 Co. 2:5; 12:9; 13:2, 13; 15:14, 17; 16:13; 2 Co. 1:24; 4:13; 5:7; 8:7; 10:15; 13:5; Gal. 1:23; 2:16, 20; 3:2, 5, 7ff, 11f, 14, 22ff; 5:5f, 22; 6:10; Eph. 1:15; 2:8; 3:12, 17; 4:5, 13; 6:16, 23; Phil. 1:25, 27; 2:17; 3:9; Col. 1:4, 23; 2:5, 7, 12; 1 Thess. 1:3, 8; 3:2, 5ff, 10; 5:8; 2 Thess. 1:3f, 11; 2:13; 3:2; 1 Tim. 1:2, 4f, 14, 19; 2:7, 15; 3:9, 13; 4:1, 6, 12; 5:8, 12; 6:10ff, 21; 2 Tim. 1:5, 13; 2:18, 22; 3:8, 10, 15; 4:7; Tit. 1:1, 4, 13; 2:2, 10; 3:15; Phlm. 1:5f; Heb. 4:2; 6:1, 12; 10:22, 38f; 11:1, 3ff, 11, 13, 17, 20ff, 27ff, 33, 39; 12:2; 13:7; Jas. 1:3, 6; 2:1, 5, 14, 17f, 20, 22, 24, 26; 5:15; 1 Pet. 1:5, 7, 9, 21; 5:9; 2 Pet. 1:1, 5; 1 Jn. 5:4; Jude 1:3, 20; Rev. 2:13, 19; 13:10; 14:12
첫댓글 거루기님..성경을 들애 예수에 대한 믿음을 여호와께대한 신실함으로 비유를 하신것은 잘한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께 다가가는 신실함을 성경에서 말합니다.
아담이나 천사는 예수이름으로 여호와께 다가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율법시대에도 예수이름을 빙자한 여호와께 다가가는 믿음인 신실함이 예표됬습니다.
그것은 동물희생이 그러했지요.. 하지만 그예표된것을 보지못하고 동물희생자체만 거룩하게 여긴사람들은 예수께 대한 믿음을 표현못한것이고 그씨에 대한 믿음을 표현사람들이 예수의 조상이 됬고 하느님의 선택이 된것입니다.
그점을 사도바울은 신실함인 믿음으로 강조한것입니다.
그 씨인 예수에 대한 믿음과 신실함이 없이는 우리는 여호와께 신실함인 믿음을 표현할수가 없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예수가 여호와는 아닙니다.
구원에서 중요하고 필수이지만 그마련은 여호와께서 직접먼져 제정하고 예수는 충성을 한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아브라함이 이삵을 바칠때 미리 여호와께서 숫양을 준비하여주신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일인가요? 여호와가 아닌 자신의 맏아들을 준비하신것이지 자신을 준비한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도 우리인류에게도, 또 유익한 그마련에 정상정인 인식을 나타내지못하고 삼위일체나 예수는 여호와라는 거짓을 믿는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을 바로 잡는 시간되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