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국치(國恥) 전반을 일컫는 말. 경술국치 · 국권피탈 · 일제강점 · 일제병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원군집정 이후 쇄국정책을 고수하여오던 조선은 1876년(고종 13)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려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항을 맞이하였고,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 · 경제 · 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에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세력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 승리함으로써 청나라의 세력을 배제하고 조선에서 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제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 때부터 등장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이 이와같이 배일친러정책을 표방하게 되자, 일제로서는 러시아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일전을 벌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1903년 12월, 일제는 영국 · 미국의 지지하에 한국의 식민지화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일제는 먼저 러일전쟁도발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체결한 것이 〈한일의정서 韓日議定書〉이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의 제공을 강요당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나아가 한국민의 항일투쟁을 탄압할 목적에서 ‘치안담당’을 구실로 1904년 7월부터는 군사경찰제도를 일방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국민은 경향을 막론하고 일본군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어 같은해 8월 일제는 제1차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도록 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한국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 · 태프트밀약(桂太郎―Taft密約)’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Portsmouth)강화조약의 결과 일제는 한국 안에서의 러시아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한국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받아놓은 상황에서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일부 대신들을 매수하여 을사오조약(제2차한일협약)을 늑결(勒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은 국권이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을사오조약의 늑결로 말미암아 한국의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되었으며, 영국 · 청 · 미국 · 독일 등 주한외국공관들도 철수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형세 아래서 고종은 을사오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헤이그특사 의거를 구실로 삼아 7월 20일,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대신 무능한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4일에는 고종폐위의 여세를 몰아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권도 장악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달 27일에는 언론탄압을 목적으로 한 광무보안법을 공포하여 한국민의 항일활동을 한층 탄압하였다. 그리고는 한국식민지화에 최대의 장애요소가 되는 한국군대의 강제해산을 8월 1일부터 약 한달에 걸쳐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상당수의 한국군인은 군대해산에 반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로써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된 의병항전은 대일전면전의 성격으로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처럼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항전은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이 펼쳐진 이후에야 그 기세가 누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됨에 따라서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의 항일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 망명하게 되었다. 한편, 안중근(安重根)은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대한침략의 원흉 이토를 총살하여 한민족의 울분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그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3대통감으로 임명, 한국식민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그는 막바지 준비작업으로 헌병경찰제의 강화와 일반경찰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경찰제의 정비는 1907년 10월 한국경찰을 일제경찰에 통합시켰는데,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 종래의 사법 · 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탈취하여 완전히 그들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일제는 이로써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할 시기만을 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감은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독촉하였으며, 같은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시대 36년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일제는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일주일 동안이나 발표를 유보하였다.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게 양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한국통치의 총본산으로 삼았고, 데라우치가 초대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동안에도 일제자본가는 통감부의 보호와 원조를 배경으로 하여 한국에서의 경제적 지배를 확립하였으며, 금융 · 광업 · 임업 · 어업 · 운수 · 통신 등 산업의 모든 분야를 완전히 독점하고 말았다. 문화 · 교육면에 있어서도 한국고유의 전통은 하나하나 파괴되어갔으며, 한국민이 주체가 된 교육기관의 존치는 〈사립학교령 私立學校令〉이 내려져 거의 불가능해졌고, 언론 · 출판의 취체는 더욱 극심해졌다. 또한, 일어사용이 강요되고 일체 집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문화 및 예술의 발전은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제24권 p282)/한국정신문화연구원/웅진출판/1996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요약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8 ·15광복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强占)하의 식민통치 시기.
본문
일제 36년은 한국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正統性)과 역사의 단절의 시기였다는 점에 치욕적인 특성이 있다.
일본은 1860년대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해서 급격히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래 조선정부의 대일외교정책에 순응하여 수동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던 대(對)조선의 외교방향을 능동화하여,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권피탈에 이르기까지 긴 침략의 장정(長征)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일본은 대원군의 하야로 개국으로 급전(急轉)한 조선 정계의 기류를 타고, 조선의 문호 개방에 첫 수호국(修好國)으로서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개화파와 수구파의 쟁패(爭覇),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격변 속의 조선정계에 교묘히 대처 ·편승하면서 꾸준히 세력을 부식하여 나갔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종래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국과 일전을 겨루어 청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부터는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개국 이래의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데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명성황후 시해(弑害)에 가담한 이후에는 한때 러시아 세력에 밀려나기도 하였으나, 러 ·일전쟁에 승리하여 한반도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위(優位)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중이던 1904년 2월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성립시켜 내정간섭의 발판을 만들고, 같은 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인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게 하여 고문정치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식민지화 공작에 들어갔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이에 따라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른바 보호정치를 펴 외교권을 대행하는 등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갔다.
이어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하여 통감이 입법 ·사법 ·행정 전반에 걸친 통치권을 전단(專斷)하도록 하였으며, 한국인 대신(大臣) 밑에 실권을 장악하게 하는 일본인 차관을 두는 차관정치를 실현하였다. 또한 ‘한국 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를 통해 한국의 사법권을 탈취하였으며, 이어 한국군대를 해산하였고 한일경찰관을 통합하여 한국 경찰관을 일본 관헌의 지휘감독하에 두었다.
마지막 단계로 1910년 8월 22일 합병조약의 체결을 강행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식민화 침략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이완용(李完用)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 이용구(李容九) ·송병준(宋秉畯)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하였고, 미국 ·영국 등 열강국들의 묵인도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은 한국병합을 달성한 뒤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같은 해 10월 1일부터 구체적인 한반도의 경영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시작되는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는 시대에 따라 다소 정책의 변동이 있었으나, 일관된 정책은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고유성(固有性) 말살 및 우민화(愚民化),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이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① 제1기:무단통치시기(1910∼1919), ② 제2기:문화정치시기(1919∼1931), ③ 제3기: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시기(1931∼1945)의 3시기로 구분된다.
1. 제1기
한국을 병합한 직후부터 1919년 3 ·1운동까지의 이 시기는 식민적 지배체제를 굳히기 위한 기초작업을 한 시기로서, 행정 ·군사 ·입법 ·사법 등 모든 정무에 독재권을 가지고 있던 조선총독이 강력한 헌병 ·경찰력을 배경으로 폭력적인 군사통치를 자행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출범 당시 한국에는 일본의 2개 보병사단과 약 4만의 헌병 및 경찰, 2만여의 헌병보조원이 전국 요소에 배치되어 있어 육군대장으로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이를 발판으로 한국인의 항거를 억누르면서 효과적인 헌병경찰정치를 펴나갔다.
병합 이전의 통감부시대부터 경찰업무에 관여하여온 일본군대는 총독부 직제에서도 주한일본헌병대사령관이 총독부 경무총장(警務總長)을 겸하고 전국 각 도의 헌병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을 겸하여, 이들은 한국인의 정치적 결사 및 독립운동을 적발, 처단하고 애국지사들을 예비 검거하여 고문을 가하는 등 민족부흥운동에 1차적으로 탄압을 집중하였다.
일제는 또한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한글로 된 신문도 폐간하였으며, 관리는 물론 교원에게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여 위압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일제는 이와 같은 헌병경찰체제를 배경으로 한국산업경제를 그들에게 예속화하기 위한 기반조성을 병행하여 회사령을 실시해서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광산물 산지와 어장을 약탈하는 한편 무역을 통한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으며 교통 ·운수 ·철도 ·도로 ·항만 ·통신 ·금융 ·재정 ·화폐 등 모든 부문을 식민지적 예속체제로 개편함으로써 정치 ·군사에 이어 경제적 지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제는 특히 토지조사사업에 역점을 두어 1910∼1918년 2456만 원을 투자해서 전국적으로 실시, 신고절차가 복잡하거나 기타의 사유로 신고기간 내에 신고하지 못한 경우나, 사유(私有)와 점유의 한계가 불명확한 경우, 또는 일본관헌의 위압 등으로 많은 한국농민의 점유토지와 소유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동리와 종가(宗家)의 공유지, 구조선정부의 공전(公田) ·역토(驛土) ·둔토(屯土) 등 전국토지의 약 40%를 약탈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결국 일제의 막대한 토지약탈과 한국인의 토지소유의 영세화를 촉진하였다. 이 약탈한 토지는 그들의 국책대행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東拓)에 넘겨져 일본인 지주의 한국진출을 적극 도와 대규모 한국인 소작농을 상대로 한 일본지주의 농장이 개설되었다.
일제는 또한 한국산 쌀을 싸게 사들여 본국으로 수출하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싸게 수입한 만주속(滿洲粟)으로써 식량부족을 보충하게 하였다. 1919년 당시 쌀총생산량 1270만 3000섬 중 대일수출량은 22%인 280만 섬에 이르렀고 한국인의 1년간 1인당 쌀 소비량은 0.68섬으로 저하한 데 반해 일본인의 경우는 l.14섬에 이르러 한국인보다 약 2배의 쌀 소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의 일본측 기록에도 한국 농민의 50%는 춘궁기(春窮期:3∼5월)에 초근목피로써 연명을 한다 하였는데, 농토를 빼앗기고 굶주린 한국인은 유민(流民)이 되어 간도, 연해주(沿海州) 등지로 떠났다.
데라우치와 제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 의해 통치된 1910년대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으로는 민족지도자의 집결체이던 신민회를 말살하려고 조작하였던 105인사건이 있다. 1911년 안명근(安明根)의 데라우치 암살기도 사건을 계기로 일측에 의해 조작된 이 사건으로 유동렬(柳東悅) ·양기탁(梁起鐸) 등 105인의 지도자가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한국의 민중은 이와 같은 탄압에 3 ·1운동이라는 거족적 웅변으로써 죽은 민족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2. 제2기
일제강점기 제2기는 한민족의 3 ·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종래의 무단정치 대신 표면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서둘러 관제를 고치고 한국말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등 타협적 형태의 정치를 펴는 듯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상층부를 회유하고 민족분열 통치를 강화하였으며, 한국을 만주침략의 전초기지로 다지는 등 고도(高度)의 기만적 정치기술을 연출한 시기였다.
1919년 8월 3 ·1운동 뒤의 정국수습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안고 제3대 조선총독에 부임한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선융화(日鮮融和)’,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① 군인[武官]에 한정되었던 총독의 문관에의 개방, ②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차별대우 철폐, ③ 지방분임(分任)주의, ④ 재래문화 및 습관의 존중, ⑤ 언어 ·집회 및 출판의 자유, ⑥ 경찰기관의 정비, ⑦ 인재등용의 문호개방 등의 시정방침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로 전환하여 경찰을 증강하였고 지방경찰의 업무를 도지사에게 넘겨 지방분임주의를 표방하였다. 또한 관리와 교원의 제복 ·착검(着劍)을 폐지하여 위압분위기를 없앴고, 태형(笞刑)을 폐지하여 벌금형으로 대치하였으며, 한국인 관리등용 범위를 넓혀 약간의 한국인을 총독부관리에 임용하고, 일본인에게만 한정하였던 보통학교교장에 한국인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문화정치의 소산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한국말 신문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전환의 표방이 목적의 포기가 아니라 단지 수단의 변경에 있었던 만큼 허식과 기만적인 것임은 필연적이었다. 무엇보다 사이토 이후에 조선총독이 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로부터 마지막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에 이르기까지 문관의 총독은 하나도 없고 모두 육 ·해군 대장이었다.
다음, 헌병경찰제를 폐지하였다고 하나 경부보(警部補) 이하 형사 ·순사에 이르는 하급경찰관이 대폭 증원되어 경찰주재소 ·파출소 등이 증설되었다. 또한 특별고등계형사[特高刑事]라는 사상담당 경찰관이 수만 명으로 증원되어 애국지사와 사상범에 대한 사찰 ·체포 ·혹형(酷刑)을 자행하였으며, 탄압기관으로서의 헌병도 대폭 증원되고 헌병견출소(憲兵遣出所) 등 최일선의 한국인 감시기구도 증설되어 기본적 인권은 1910년대보다 더욱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신문 ·도서에 대한 검열을 철저히 하여 압수 ·정간 ·폐간은 다반사처럼 악순환을 거듭하였고, 이 과정에서 언론인들은 직장추방 ·투옥 등을 겪어야 하였는데 언론은 그들 문화정치의 분식요건(粉飾要件)으로 두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융합을 표방한 사이토는 한국인을 친일파 ·배일파(排日派)로 구분하고 탄압정책과 매수정책을 병행하여 회유와 매수로써 친일분자를 육성하여 유력한 친일분자는 우대하고 보호하면서 철저하게 이용하였다.
또한 민족동화교육(民族同化敎育)의 방침에 따라 한국어교육을 감소하여 일본어를 강제하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을 국어(일본어) 상용자(常用者), 국어 비상용자로 구분하여 불이익을 강제하였으며, 일본역사 ·지리의 교육시간을 증가하는 한편 학자를 동원해서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정립시켜나갔다.
이와 같은 정신탄압 또는 우민화 정책에 병행하여 한반도를 그들의 공업원료와 식료공급지 및 상품판매시장으로서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적 경제구조로의 체질개선을 강행하였다. 특히 1918년 일본에서 일어난 식량폭동을 계기로 중대현안이 되어온 일본 본토의 식량결핍 문제를 한반도에서 해결하기 위해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畵)을 최중점적으로 실시하여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종래보다 훨씬 많은 쌀을 일본에 이출(移出), 1930년의 경우 1351만 섬 생산에 일본이출은 542만 섬에 이르러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4말 5되로 감소되고 일본인의 소비량은 1섬 1말을 확보하여 놓았다. 따라서 한국인은 자작한 양곡을 공출(供出)로 수탈당하고 심각한 식량문제에 직면하였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으로 일본인 지주에 의한 토지집중화가 가속되어 한국인의 자작농 ·자작소작농은 감퇴일로의 길을 걷고 소작농 ·화전민으로 떨어진 농민들은 다시 피용자(被傭者) ·노동자로 전락하였으며, 여기에도 끼지 못한 많은 농민들은 유망(流亡)의 길을 떠나, 남한의 주민은 주로 일본에, 북한의 주민은 주로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당시의 통계숫자는 1926~31년의 5년간에 걸쳐 걸식자가 1만∼16만 3000명, 춘궁기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궁민(窮民)이 29만 6000∼104만 8000명, 또한 궁민을 면한 극빈 영세민이 186만∼420만 명에 이르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황 속에서도 노동쟁의 ·소작쟁의 ·학생운동 ·사상운동 등 일련의 항일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어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됨으로써 민족진영의 정신적 구심체가 되어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국내에서는 3 ·1운동 이래 최대의 6 ·10만세사건(1926)과 광주학생운동(1929)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해외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되어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고, 만주지방에서는 유망민중이 교민회를 조직하여 자활을 모색하였으며,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국내외에서 일본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특히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는 국권피탈의 원한을 달래주는 장거였다.
3. 제3기
일제강점기 제3기는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중국 대륙에의 침략을 개시한 일본이 한국을 그들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강제하고, 1937년의 중 ·일전쟁(中日戰爭:支那事變), 19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한국의 인력과 물자를 강제동원하여 전력화(戰力化)한 전시동원기(戰時動員期)이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931년 6월 총독에 부임한 육군대장 우가키 가즈시게는 1920년대 이후 더욱 황폐화된 한국의 농촌을 구제 또는 부흥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농촌진흥운동과 자력갱생(自力更生)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하면서 통치체제를 전체주의적 동원체제로 재편성하고 ‘일선융합(日鮮融合)’, ‘내선(內鮮)일체’ 또는 ‘지방진흥’ 등을 추진하는 동시에 한국의 인력을 식량증산과 대륙침략전쟁에 총동원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36년 총독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내선융화’, ‘선만일여(鮮滿一如)’, ‘일시동인’ 등의 통치 방침을 표방하고 보다 철저한 민족말살과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이를 위해 1면(面) 1신사(神社)의 설치를 추진하고 1937년부터 신사참배(神社參拜)와 모든 행사에 앞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의 제창을 강요하였으며, 1938년에는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강령에 의하여 한국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의 명칭, 교육내용 등을 일본학교와 동일하게 하였다.
또한 학교의 조선어과를 폐지하고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또한 육군지원병제도를 채택하여 한국청년을 전쟁터에 보냈다. 1939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제도를 실시해서 한국인의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하였으며, 많은 한국인을 강제징용해서 탄광 등으로 끌어갔다. 또한 1940년 이후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말 신문을 폐간하고, 탄압으로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을 해산시킴으로써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하였다.
한편 일제는 중국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 ·군수공업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총동원체제의 편성을 강행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1938년 조선연맹,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만들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만주와 한반도와의 유대를 강조한 미나미 지로는 만주의 관동군사령관과 치안 ·산업 ·교통 ·문화 등의 부문에 걸쳐 협정을 맺고 소만(蘇滿) 국경 경비,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한 공동작전, 압록강 ·두만강의 교량가설, 수력발전소 건설, 개척농민의 입식(入植), 식량문제의 협력 등 ‘선만(鮮滿) 일체화’의 추진에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몇 개월 앞둔 1941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한국 지도급인사를 언제라도 일제히 감금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1942년 5월 총독에 부임한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대동아전쟁의 장기태세에 대비해서 국방력의 근간이 되는 생산력의 확충강화를 위해 근로자 ·기업최고간부 ·관리 등 전한국인을 동원하는 국민총력 운동을 전개하였다. 고이소는 이 운동의 일환으로 식량 ·광공업 ·전력을 포함하는 전략물자의 증산, 근로자의 대량 징용, 중국 ·만주 ·한반도의 군사수송력강화, 이공계(理工系) 전문학교의 정리, 학도동원 체제, 국민근무 체제 등 결전비상조치를 취하였다.
이어 1942년부터는 국민동원계획을 세워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한국인을 일본 각지의 탄광 ·광산 ·군수공장 ·비행장 등의 군사기지 공사에 강제로 연행하였다. 1943년 8월에는 의무병역으로서 징병제를 실시하여 적령기에 이른 한국청년들을 모두 전선으로 보냈고 1944년 l월에는 학병제를 실시하여 대학생들도 강제소집하였다.
같은 해 7월,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한 아베 노부유키는 전쟁지속을 위해 인력과 물자의 징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국민의용대를 편성해서 패전위기하의 경비태세를 강화하고 비협조적인 한국인에 대한 대규모의 가혹한 탄압과 검거를 단행하였다. 특히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대근로령(女子挺身隊勤勞令)을 공포하여 수십만에 이르는 12∼40세의 한국 미혼여성을 동원하여 일본과 국내의 군수공장에서 취로케 하거나, 가족에게는 행방도 알리지 않은 채 남방이나 중국전선에 군 위안부로서 연행하였다. 일본은 1945년의 전쟁 막바지까지 애국반 ·경방단(警防團) 등의 조직체에 한국인을 묶어두고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 등 주요물자를 철저히 통제하여 배급제로서 생활을 압박하였고, 놋그릇, 소나무뿌리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징발해서 군국주의의 마지막 제물로 삼았다.
이 시기에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물론 계몽운동 ·사회운동 ·학술활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유례 없는 탄압을 가해 신간회 등 일시 양성화하였던 단체들도 모두 해산되어 국내의 민족운동은 지하에 숨어들어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중국과 미주의 지사들은 더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것은 임시정부 및 미주를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과 독립군의 항쟁,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로 나타났다. 1945년 8월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의 참전 등으로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한국은 36년에 걸친 식민지생활의 질곡에서 해방되었으나 그 동안에 이루어진 식민지적 경제의 파행성(跛行性)과 왜곡된 근대화 과정 등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일제가 물러간 한반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확정된 38도선은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이라는 커다란 비극을 안겨 주었다.